중원 돌아보기
답사 2007년 5월 5~6일.[한국의산천 ]
강물 따라 떠나는 충주
역사를 품고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
우리 국토의 한가운데라고 말하는 중원(中原) , 중원문화권의 중심을 돌아보겠습니다
답사코스
목계나루터 - 봉황리 마애석불 - 장미산성 - 고구려비 - 중앙탑 - 누암리 고분군 - 창동 5층석탑 - 창동마애불 - 탄금대.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와 장미산성
남한에는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는 고구려 유적은 서울의 아차산성과 충주의 중원고구려비 등 몇 되지 않는다.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가 충주 지역을 점령하고 이를 기념해 세운 비로서, 고구려의 전성기 때 영토의 범위가 충북 지역까지 확장됐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충주는 남한강을 중심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또 교통의 요충지였고 중요한 철의 생산지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치열하게 격돌했던 지역이었다. 삼국 가운데는 백제가 4세기에 가장 먼저 충주 지역을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5세기에 고구려 장수왕이 적극적으로 남하정책을 펼치면서 서울의 한강 유역을 점령해 백제를 웅진으로 밀어내고 충주를 비롯한 중원 지역을 석권하게 된다.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된 마을은 마을 어귀에 큰 돌이 서 있어 선돌마을이라고 불렸는데, 이 돌은 마을에서 방치된 채로 있다가 1979년 중원고구려비로 알려지게 됐고, 국보 제205호로 등록됐다.
중원고구려비 바로 뒤편에 있는 장미산성의 성벽은 돌 하나를 중심으로 상하좌우로 6개의 돌을 쌓은 구조로 돼 있는데, 이는 고구려가 성을 견고하게 쌓기 위해 쓰던 방법과 같다. 그러나 최근 조사로 백제의 성 흔적도 발견됨으로써 원래 백제성이었으나 고구려가 점령하고 새로 성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정책에 대해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 세력을 한강 유역에서 물리치게 된다. 신라는 진흥왕 때 충주 인근의 단양 지역을 점령하고 단양적성비를 세웠다. 그 뒤 신라 진흥왕은 553년에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 지방을 빼앗은 다음 백제를 한강하류에서 몰아내고 지금의 서울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신라는 정복한 땅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5개 지역에 소경(작은 수도라는 뜻)을 설치하고 경주의 지배층을 강제 이주시켜 권력을 분산시키고 점령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 때 충주에는 중원소경을 설치하고 북방지역을 다스리는 군사적·문화적 교두보로 삼았으며, 대가야 유민들을 이주시켰다. 이로 인해 충주 지역에 가야금과 가야춤 등 가야문화가 자리잡게 되었다.
삼국통일 뒤에는 새로 편입된 백제인, 고구려인을 동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불사를 일으키며 중앙탑(국보 6호)을 세웠다.
이처럼 중원 지역은 삼국이 번갈아 차지함으로써 삼국의 문화가 융합되는 특성을 지니게 돼 독특한 중원문화로 나타났다. 중원고구려비와 근처에 있는 국립충주박물관은 충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곳에서 충주의 지형을 통해 오랜 옛날부터 역사가 시작된 까닭과 삼국시대의 격전지가 된 이유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국립충주박물관 바로 앞에는 통일신라 때 세운 중앙탑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가야에서 이주해 온 신라 귀족들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누암리 고분군이 있어 충주가 중원문화권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중원고구려비
소재지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280-11번지
수 량 1기
규 모 높이 144㎝, 폭 55∼59㎝
자 료 석조(화강암)
시 대 고구려
지 정 국보 제205호(1981년 3월 18일 지정)
▲ 중원 고구려비 ⓒ 2007. 한국의산천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 입구에 있는 이 비는 1979년 2월 예성동호회원들에 의해 발견되어 학계에 알려지고, 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고구려비임이 고증된 국내 유일의 고구려비이다.
이 비는 남한의 현존 고구려 유적으로서 그 존재만으로도 그 역사적 가치가 대단하며, 국내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서 규모는 작지만(높이 2.03m), 만주 집안현의 광개토대왕비(높이 6.39m)와 매우 닮아있다.
이 비는 오랜 세월의 풍화로 비문이 심하게 마멸되어 분명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서 5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4면비로서 전면 10행 23자씩으로 된 230자의 명문이며 향 좌측면에 155자가 새겨졌는데 뒷면과 우측면은 9행과 6행의 명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와 신라 백제 삼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처음 입비 당시부터 대석과 개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의 모양이 만주 즙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축소된 형상이다.
▲ 중원 고구려비 ⓒ 2007. 한국의산천
방치된채 있었던 선돌 '중원 고구려비'
충북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에는 선돌(立石)마을이 있다. 이 마을 입구에는 이름 그대로 ‘선돌’이 있었다. 이 돌은 길이 203㎝, 너비 55㎝의 크기이다.
1979년 초여름 단국대학교의 학술조사단(단장 정영호)이 선돌마을을 찾아 선돌을 조사했다. 선돌에는 이끼가 다닥다닥 끼여 있었으나 비석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서 본격적인 조사작업을 벌였다. 앞면과 한쪽 옆면에는 글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뒷면과 한쪽 옆면에는 희미하게 글자가 보였다. 이것은 사면비(四面碑)였다. 두 면의 글자가 보이지 않는 것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는 탓일 것이다. 쪼개서 건축 석재로 쓰지 않은 것만이라도 천만다행일 것이다. 성의 돌들과 건물의 주춧돌도 대개 이런 방식으로 훼손되어 왔었다. 판독을 거듭한 결과 빗면 머리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와 고구려 관직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이 선돌이 바로 고구려 비임이 증명됐다 [경향: 2004년 07월 29]
▲ 중원 고구려비 ⓒ 2007. 한국의산천
▲ 고구려 비와 똑 같이 만들어 누각 옆에 세워 놓았다. ⓒ 2007. 한국의산천
▲ 비문을 해독한 안내문 ⓒ 2007. 한국의산천
글자의 모양은 예서체와 비슷하고 판독이 가능한 부분은 '오월에 고려대왕의 상왕공은 신라매금을 □하고, 대대로 형제처럼 위와 아래를 서로 알고, 하늘을 지킬 것을 원하여 동래하였다.' ' 매금□와 태자공·전부태사자 다혜환노·주부--은 □□□를 떠나 영에 이르러 꿇어앉았다.' '태자공이 □하여(태왕에게)□를 원하였고(태왕은)나란히 바라보며 (신라매금에게) □적추를 내렸다.' '(태왕이)교하여 마당에서 연회를 차렸는데 (그 때 태왕이)매금의 의복을 하사하고 (궤영을)건립하는데 수고가 많았던 사람들에게도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하사(허락)하였으며, 따라서(함께) --하면 --노객들에게--하고, 여러 고구려관인들에게 교하여 (노객인의) 상하(직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의복을 내리게 하였다.' '(태왕이)교하여 동이매금을 불러 되돌아오게 하고, 그 때 교하여 매금 토내의 여러 □인□, 또 함께 태왕국토의 대위제의의 상하(의 직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의복을 하사하였고, 그들은 교를 받아 영에 꿇어앉았다. 십이월이십삼일 갑인에 동이매금의 신하들은 우벌성에 이르렀다.' '(태왕이)교하여 전부태사자와우환노·주부귀□□□ 경□ 등을 오게하고, 사람 삼백명을 모으게 하였다.' '신라토내 당주인 하위발위사자보노·□□노·□□□개노 등이 함께 □하여 사람을 모았고 신라토내중인은--를 기록하였다.' '가공군이 우--에 이르러--모(우)성 고모루성수사인 하부대형야□를--했다.' 등이다.
▲ 마모가 심한 중원 고구려비 ⓒ 2007. 한국의산천
비석에 새긴 글씨는 오랜 세월 동안의 비바람에 마모되어 일부 내용만이 판독되고 있는데,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문제로 다투다가 화해기념으로 세운 듯하다. 한때는 신라의 중앙에 까지 고구려의 영토였다는것을 엿볼 수있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에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을 하면서 고구려가 형님이 되고 신라가 아우국가가 된다는 기록과 고구려의 영토가 소백산맥을 경계로 조령과 죽령에 이르게 된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 장수왕 때의 업적을 적은 것으로 판단되며 당시 영토 확장에 대한 정계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에도 고구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계속해서 탄금호로 이동합니다.
▲ 철새들이 많이 모이는 탄금호 ⓒ 2007. 한국의산천
▲ 탄금호의 고요한 수면 ⓒ 2007.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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