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 길 광명을 지나 오리동 구름산(옛지명)앞을 지나며 잠시 오리 이원익의 관감당앞을 지났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 선생과 오리 이원익 선생의 당호(堂號)와 生을 다시 기려보았다.
답사,촬영 2006. 11. 28일. [ 한국의산천 ]
▲ 관감당 출입문 ⓒ 2006 한국의산천
사의재(四宜齋)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며,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하며,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며 동작은 마땅히 후중하게 해야 하니 이런 때문에 그 발의 이름을 ‘ 네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 ’이라고 하였다
정약용
다산은 영조 38년(1762)에 출생하여 헌종 2년(1836)에 사망하기까지 영.정조대의 문운부흥기에 활동하였다. 그는 남인 정재원의 아들이며 이승훈의 처남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다산은 순조 원년(1801) 신유사옥으로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일단은 정약용은 그의 인생을 3기로 볼 수 있는데 다산의 모습은 유배 즉 귀양살이 인데 제1기는 그가 관직에 재직하고 있을 때 제2기는 귀향을 갔을 때 제 3기는 그가 향리로 돌아 갔을 때로 나누어 생각 할 수 있다.
그는 신유사옥 사건으로 유배를 가지만 바로 여기 강진으로 간 것이 아니고 경상도에서 유배를 하다 강진으로 유배되어 4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1801년 강진의 동문 밖 주막집에서 4년 간 머물렀는데, 그곳을 사의재(四宜齋)라 하였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며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하며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며 동작은 마땅히 후중하게 해야 하니 이런 때문에 그 발의 이름을 ‘네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이라고 하였다.
그 후 강진만을 한눈으로 굽어보는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그곳을 다산초당이라 하였다.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이곳은 정약용의 아름다운 자취가 남아있다. 다산은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별명으로, 정약용의 호 다산은 여기서 유래한다.
▲ 관감당 ⓒ 2006 한국의산천
관감당 (觀感堂)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신민이 보고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니, 경은 굳이 사양하지 말고 거기에 살라 -인조-
관감당(觀感堂)의 뜻은 오리 이원익이 살아온 일생이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된다 하여 백성에게 보고 느껴야할 것이라는 뜻으로 받은 사액이다.
ⓒ 2006 한국의산천
조선 시대 3대 임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과 그 후손의 삶의 자취를 그대로 보존해놓은 곳이다.
이원익은 황희 맹사성과 함께 조선의 3대 청백리로 꼽혔을 만큼 청렴결백한 관리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청렴함이 드러난 일화는 '조선실록'에도 기록돼 있다.
인조 9년(1623년) 정월 10일, 임금이 승지 강홍중을 보내어 이원익을 문안한 뒤 "그가 사는 집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강홍중은 "두 칸 초가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었다.
ⓒ 2006 한국의산천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재상이 된 지 40년인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청렴하고 결백하며 가난에 만족하는 것은 고금에 없는 것이다. 내가 평생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 이공(李公)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삼아 본받을 바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5칸짜리 집 한 채를 이원익에게 하사했다. 하지만 이원익은 "신을 위해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한 가지"라며 수차례에 걸쳐 받기를 사양했다고 '조선실록'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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