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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The Sound of Silence

by 한국의산천 2006. 10. 9.

 

 ▲ 오이도의 저녁 노을

 

 

 

 

  ▲ 영화 졸업의 마지막 한장면   

 

26017


Simon & Garfunkel (사이먼과 가펑클) 

 

 

1960년대 가장 성공한 포크/록 듀오인 폴 사이먼(Paul Frederick Simon)과 아더 가펑클(Arthur Garfunkel)의 그룹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 이하 S&G)은 골드를 기록한 히트 앨범 시리즈와 싱글 앨범으로 당대 팝 필드를 구가했다.
이들의 음악은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하모니,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기타의 조화, 섬세하면서 동시에 현악 편곡의 세련된 멜로디와 영문학 교재로 사용될 정도로 예리하면서도 정제된 사이먼의 가사로 특징지을 수 있다.
폴 사이먼이 70년대에 솔로로 크게 성공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은 싱어송라이터로서의 그의 실력을 간과했지만, 사실상 S&G 최고의 작품들은 다 그의 창작력의 산물이다.

뉴욕에서 함께 자란 그들은 에벌리 브라더즈(Everly Brothers) 스타일로 노래와 기타 연주를 했고, 57년 후반기에 톰과 제리(Tom & Jerry)라는 이름으로 첫 싱글 'Hey Schoolgirls'를 발표, 탑 50위에 오른다.
그러나 이후의 싱글곡들은 모두 실패하고, 둘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로 떨어지게 된다.

62년 포크 듀오로 다시 결합한 이들은 콜롬비아 레코드사와 계약하고 64년 S&G라는 이름하에 첫 앨범 [Wednesday Morning 3 A.M.]을 발표한다.
불행히도 이 앨범에서 아무런 히트곡도 내놓지 못한 이들 듀오는 다시 헤어지게 된다. 이에 폴은 영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면서 솔로 앨범인 [Paul Simon Song Book]을 녹음하고, 아더 또한 대학원에 진학하여 자신의 삶을 모색하게 된다.

만약 탐 윌슨(Tom Wilson)이라는 프로듀서가 없었다면 S&G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을 지도 모른다.
65년 포크/록의 열풍이 식어가고 있을 즈음, 밥 딜런(Bob Dylan)의 전자음악 작업을 돕고 있던 탐은 S&G의 데뷔 앨범 중 'Sound of Silence'를 전자기타, 베이스, 드럼으로 장식해 록 버전으로 편곡하여 발표하게 된다.
이 곡은 66년 초 넘버원을 기록했고, 뜻밖의 성공에 폴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아더와 재결합하게 된다.

이때부터 S&G의 실질적인 레코딩 작업이 시작되었다. 66년과 67년 사이 이들은 'Homeward Bound', 'I Am a Rock', 'A Hazy Shade of Winder' 등의 싱글로 팝 차트를 넘나들었고, 67년 영화 [졸업(The Graduate)]의 사운드트랙 앨범 중 'Mr. Robinson', 'Sounds of Silence' 등의 대히트로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사실 S&G의 초기 앨범은 미숙한 감이 있었지만, 폴의 작곡이 완성도를 더해가고 스튜디오 녹음 기술의 발달로 점차 향상되어 갔다. 또한 그들의 음악은 매우 깔끔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팝과 록의 청중 모두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그러나 60년대 말 'Save the Life of the Child' 'The Boxer'의 히트 이후 S&G의 파트너쉽은 점차 약해졌고, 하이 테너의 목소리로 크게 어필했지만 상대적으로 작곡 능력이 떨어지는 아더와 작업을 함께 하는데 있어 폴은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이들은 70년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인 [Bridge Over Troubled Waters]로 10주 동안 차트 1위를 차지하고, 타이틀곡을 비롯한 'Cecilia', 'El Condor Pass' 등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을 끝으로 해체를 선언한다.

75년 폴의 [Still Crazy After All These Years]에 듀엣으로 부른 'My Little Town'으로 톱 텐에 오른 이들은 81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콘서트에서 재결합하여 50만 팬들을 열광시켰고, 82년 라이브 앨범 [The Concert in Central Park]를 발매한다.
80년대 초 함께 투어를 하면서도 이들은 음악적인 견해 차이로 더 이상 스튜디오 앨범은 제작하지 못했고, 각자 솔로 활동을 활발히 하며 현재까지 팝 필드에서 그들의 역량을 끊임없이 발휘하고 있다.

비록 사이몬 앤 가펑클은 더 이상 그룹으로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60년대 중반 그들이 남긴 주옥같은 명곡들은 올드 팝 팬들의 귓전에 여전히 맴돌고 있다.


Paul Simon
`사이먼 앤 가펑클`. 이름 열거의 불편부당한 표준인 알파벳 순서로 따진다면 폴 사이먼(64ㆍPaul Simon)은 이름으로도 성으로도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을 앞설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사이먼이 먼저일까.

폴 사이먼은 위대한 팝 듀오 `사이먼 앤 가펑클`의 심장이었다. `미세스 로빈슨` `복서` `사운드오브사일러스` `엘콘도르파사` 등 이들의 명곡을 작사ㆍ작곡한 이가 바로 그다. 1941년 생인 사이먼은 고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인 1955년부터 이미 자신의 곡을 발표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그의 음악적 배경에 콘트라베이시스트 아버지와 음악교사 어머니라는 가정 환경이 있었다면 섬세하고 심오한 가사 뒤에 자리한 문학적 배경에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이력이 자리하고 있다.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내며 세계적 명성을 얻은 `사이먼 앤 가펑클` 해체 이후 사이먼은 72년부터 본격적으로 솔로 아티스트의 길을 걷는다. 성공은 계속됐다.

72년작 `Paul Simon` 앨범을 필두로 쏟아진 그의 음반들은 대부분 평단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어왔다. 81년에는 아트 가펑클과의 역사적인 재결합이 이뤄졌다. 50여만 명의 관객 앞에서 완벽한 하모니를 보여주었던 공연. 하지만 사이먼 개인에게는 죽마고우인 가펑클과의 좁힐 수 없는 관계를 확인시켜준 계기가 됐을 뿐이었다. 85년에 톱스타들과 함께한 자선 프로젝트 `USA for Africa`는 그에게 월드 뮤직에 대한 관심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남아프리카로 날아가 아프리카 사운드를 연구하며 팝과의 접목을 시도한 그는 86년 앨범 `Graceland`라는 결과물을 내놓는다. 이 앨범으로 그는 당시 음악계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며 그래미상을 수상한다. 그의 실험은 브라질 음악에 대한 연구에까지 이어져 다음 앨범인 `Rhythm Of The Saints`를 탄생시켰다. 90년대에 들어서도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거듭하며 왕성한 창작욕을 보여주던 그는 99년에 거장 밥 딜런과 함께 투어에 오르는가 하면 2001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2000년 앨범을 마지막으로 휴지기를 갖던 그가 환갑을 넘긴 나이로 새 음반을 들고 나왔다. 지난달 발표한 신보의 제목은 `Surprise`. 뮤지션과 프로듀서 양면에서 진보적 행보를 보여온 브라이언 이노뿐 아니라 허비 행콕, 빌 프리셀, 스티브 갯 등 재즈계의 아이콘들까지 참여했다. 현대적 편곡 위로 들리는 친숙한 멜로디들. 60년대 향수와 21세기적 울림 사이에서 방황하다 보면 눈길을 끄는 음반 표지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오이도의 저녁 노을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두운 밤을 지내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먼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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