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시인 박인환 그는 가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해다.
그의 시 '목마와 숙녀"는 누구나가 다 아는 애송시이다.
木馬와 淑女
.
.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
.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중략...
박인환 시인 타계 50주년을 맞아 그간 미공개 시가 수록된 전집이 단행본으로 나왔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을 맞아
이 책을 구입해서 상큼하게 머리속을 채워야 겠다. - 한국의산천 -
▲ 동해안 7번 국도(양양부근) ⓒ2006 한국의산천
작품들을 모아 엮은 문승욱씨는 문학 연구자가 아니라 개인수집 가다. 그는 근현대사 자료 수집을 하다가 박인환이 쓴 영화 비평 들을 발견하게 됐다. 이후 제대로 된 전집을 꾸려보겠다는 생각으로 작품 수집에 매진한 결과 새로운 시, 산문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이번 책에는 박인환의 시 80편, 산문 70편이 수록됐다. 이 가운 데 ‘언덕’, ‘1950년의 만가’, ‘봄은 왔노라’, ‘봄 이야기 ’, ‘주말’, ‘3·1절의 노래’, ‘인제’ 등 시 7편과 영화비 평, 기행문 등 산문 44편은 처음으로 선보인다.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주간한국 2006-09-02]
시인 박인환 문학 전집 출간 - 타계 50주년 맞아 미공개 작품 등 재조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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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 로맨티시즘을 남긴 요절시인 - 박인환 전집 / 문승욱 엮음 / 예옥 발행 / 3만5,000원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 1926년에 나서 56년에 졌으니 올해는 그의 탄생 80주년이자 50주기를 맞는 해다.
때마침 고서 수집가 문승욱 씨가 새로 찾아낸 시 7편과 산문 44편을 더해 명실상부한 ‘박인환 전집’을 펴냈다. 여러 모로 뜻깊은 일이지만 사실 박인환의 지명도에 비춰볼 때 늦디 늦은 전집인 것이 분명하다. 그와 더불어 당대 문학 기수로 흔히 거론되는 김수영의 경우는 사후 13년 만인 1981년에 번듯한 전집이 출간됐으니 말이다.
박인환은 생전에 두 권의 시집을 남겼다. 김수영·김경린을 비롯한 ‘신시론’ 동인들과 함께 쓴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년)과 작고하기 한 해 전 펴낸 개인시집 <선시집>에 통틀어 61편의 시를 담았다.
이후 유고집, 선집을 통해 소개된 12편에 편집자 문승욱 씨가 찾아낸 7편을 더해 전집에는 총 80편의 시가 실렸다. “몇 개월 동안 생업을 뒷전으로 하고” 1950년대 신문·문예지·여성잡지를 샅샅이 훑은 편집자의 집념은 특히 산문 부문에서 눈부시다. 전집 속 산문이 모두 70편이니 문 씨는 50년에 걸쳐 소개된 것보다 더 많은 작품들을 ‘몇 개월’ 만에 발굴해낸 것이다.
사실 박인환은 ‘진정’보다는 ‘제스처’로 기억되곤 하는 문학가다. 곰삭지 않은 듯한, 때론 치기까지 느껴지는 이국 취향이나 센티멘털리즘은 그의 작품을 애독하는 이들마저 가끔 민망하게 한다.
평단의 푸대접은 말할 것도 없고 한때 친우였던 김수영마저 저주에 가까운
비평-“(일본말은 물론이고) 조선말도 제대로 아는 편이 못 되었다” “신문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 등-을 가한 탓에 박인환은
늘상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작가로 인식됐다.
하지만 그가 생애 마지막 열 해 동안 생산한 작품 150편을 대하면 ‘목마와 숙녀’의
아우라로 그를 규정하려는 통념이 온당치 못한 것임을 느끼게 한다.
영화를 비롯해 문학·연극·사진·여성을 아우르는 전방위 비평은 광복과
한국전쟁이라는 문화적 불모지대에서도 박인환의 문화적 촉수가 놀랄 만큼 예민했음을 방증한다. 특히 미국과 유럽 영화 비평에서 보여주는 해박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작품의 주요 경향을 짚는 것은 물론이고 감독·촬영감독·주연배우의 경력까지 줄줄이 꿰고 있다. 선후배 시인을
막론하고 단출하고 직선적인 문장으로 작품을 논하는 시평(詩評)도 인상적이다. 박인환의 방대한 독서량은 물론이고, 호불호를 과감히 밝히는 자세에서
시단의 ‘앙팡 테리블’을 자임하는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을 통해 현실 직시를 주저하지 않은 박인환의 면모도
재발견할 수 있다. ‘댄디즘’의 코드로만 그를 읽으려 드는 선입견에 대한 호쾌한 반란인 셈이다. 그의 20대를 관통했고 모든 실존을 극한 상황에
몰고 간 한국전쟁을 응시하는 눈매는 무엇보다 매섭다.
전쟁을 한 달여 앞두고 ‘(…)불안한 언덕에서/나는 음영처럼 쓰러져간다(…)’라고
예언하듯 읊은 시 ‘1950년의 만가’, 언론사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전선의 긴박한 상황을 타전한 기사 등은 그가 불안한 현실에 기꺼이 맞서는
강단을 갖췄음을 보여준다.
전집의 말미에 박인환 시론을 게재한 박현수 교수(경북대)는 전쟁을 구현한 동시대 시들과 견줄 때 그의 작품이 질적 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
전집 속 서간의 주요 수신자였던 소설가 이봉구는 수필 <명동백작>에서 1956년 이른 봄의 박인환을 추억한다.
명동 한복판 빈대떡 집에서 박인환은 작곡가 이진섭, 테너 임만섭과 즉석에서 신곡 발표회를 한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그 유명한 ‘세월이 가면’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눈물난다. 어쩔라고 그런 노래를 지었노”라며 타박 아닌 타박하는 마담에게 또 외상술을 얻어먹고 그는 늘 그랬듯 장 콕토의 영화와 이상(李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요절하기 사흘 전 모습이었다.
이렇듯 그는 낭만·지성·열정으로 내면을 빼곡이 채우고 시대를 앞서 반응한
로맨티스트였다. 그가 펼친 문학의 지평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이제 시작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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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인환 문학 전집 출간 [SBS TV 200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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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 50주년 맞아 미공개 작품 등 재조명 -
낭만적인 로맨티시즘의 시인 박인환.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요절한 비운의 예술가였지만 사람과 인생에 대한 그의 짙은 고독은 아직도 팬들의 가슴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수려한 외모만큼이나
도회적이고 풍부한 감수성 역시 박인환 만의 매력이었습니다.
[박세형/姑 박인환 시인의 장남 : 어머니와 아버지가 노래를 하시는데 지금도 곡조를 기억한다. '라모나'라는 노래였다.]
올해로 타계 50주년.
박인환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뜻이 모여 마침내
한 권의 전집으로 출간됐습니다.
새로 발굴된 미분류 시 7편과 산문 41편을 포함한 모두 150편의 작품이 그의 삶과 예술을
재조명합니다.
'불안한 언덕 위에로 나는 바람에 날려간다. 헤아릴 수 없는 참혹한 기억
속으로 나는 죽어간다'.
특히 이번에 공개된 작품들은 박인환 문학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승묵 /박인환 전집 편자 : '암흑과 더불어 3개월'이란 글을 보면 군인이 죽어가는 모습, 친했던 지인들이 변절하는 과정이 있는데 전쟁 후 작품세계도 변화가 있었다.]
지나치게 염세적인 낭만주의자로 평가됐던 그간의 인식과는 달리 식민지와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작품 곳곳에 배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본가여 새삼스럽게 문명을 말하지 말라. 정신과 함께 태양이
도시를 떠난 오늘 허물어진 인간의 광장에는 비둘기 떼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또 6.25 종군기자로서 작성한 전쟁기사와 여행기,
편지글들은 시인의 생애와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짐작하게 합니다.
[박세형/姑 박인환 시인의 장남 : 아버지는 모더니스트 시인이었다. 그 분은 파란 많은 시대를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노래를 앞서 부르신 분이었다.]
이번 전집 출간이 낭만주의의 벽을 넘어 박인환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재평가의 계기가 될 지 주목됩니다.[SBS]
[시인공화국 풍경들] <31>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한국일보 2005-10-04 12:19]
이국에 대한 선망으로 궁핍한 시대를 살아가려한 문학청년의 내면적 풍경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대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1926~1956)의 20주기였던 1976년 3월 고인의 유족이 엮어 펴낸 시집에 ‘목마와 숙녀’라는 표제가 붙은 것은 자연스러웠다.
‘목마와 숙녀’는 박인환에게 호의적이었던 문학 동료들로부터 그의 대표작으로 꼽혀왔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몇 해 앞서 전파를 타기 시작한 가수 박인희의 토크송을 통해 라디오 방송 청취자들에게 매우 친숙해진 터였기 때문이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하는 이 작품의 감상적 시행들은 이 시를 알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종이 위의 활자로서보다는, 그
시행들만큼이나 감상적인 배경음악과 거기 실린 박인희의 목소리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말하자면, ‘목마와 숙녀’(근역서재 간행)는 시인이 작고하기 한 해 전(1955년) 출간된 ‘박인환 선시집’(산호장 간행)의 개정판 격이라 할 수 있다.
‘박인환 선시집’의 수록 작품을 거의 고스란히 옮기고 거기 빠져 있던 작품 일곱 편을 보탠 것이 ‘목마와 숙녀’이기 때문이다. ‘박인환 선시집’이 시인 생전에 나온 유일한 시집이므로, ‘목마와 숙녀’는 박인환의 시를 얼추 망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초기 작품인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1948)를 비롯해 몇몇 시가 빠져 이 시집이 박인환 시 전집이 되지 못한 것은 당시의 엄혹한 정치 상황에 대한 고려 탓이었을 것이다.
“전인민은 일치단결하여 스콜처럼 부서져라/ 국가방위와 인민전선을 위해 피를 뿌려라” 같은 선동이, 비록 시대와 대상을 달리해 발설됐다 하더라도, 유신 체제 아래서 버젓이 활자화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박인환이 누린 생애는 서른 해에도 채 이르지 못했고, 그의 작품 활동은 생애 마지막 열 해 동안 이뤄졌다. 물론 20대의 10년은 큰 시인이 되기에 짧은 기간이 아니다. 소월이 그것을 증명한 바 있다.
소월처럼 요절하지는 않았지만, 서정주나 이용악도 이미 20대에 커다란 시인이었다. 더 나아가, 아르튀르 랭보는 10대 후반 다섯 해의 작업만으로 큰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다.
누구나 소월이나 랭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시인에게는 이드거니 재능을 벼릴 시간이 필요하다. 박인환은 뒤쪽에 속했다.
연극이나 영화 쪽에까지 관심을 돌린 것을 보면 그는 장 콕토나 자크 프레베르처럼 대중적으로 영향력 있는 전방위 예술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그의 시에 이진섭이 곡을 붙인 ‘세월이 가면’은 프레베르의 시에 코스마가 곡을 붙인 ‘고엽’ 만큼이나 시큼들큼하다), 한 산문에서는 위스턴 오든과 스티븐 스펜더를 향한 선망과 연대감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이들에게 견줄만한 재능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이들처럼 고종명하지도 못했다. 재능의 모자람에다 요절까지 겹친 시인들도, 특별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의 도움을 받으면, (부당한) 문학사적 위세를 누리기도 한다. 이상(李箱)이나 윤동주가 그런 경우다. 그러나 박인환에게는 그런 요행도 없었다.
한국 시인으로서 박인환의 가장 큰 불행은, 그 세대 시인들에겐 흔한 일이었지만, 한국어가 서툴렀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세대에 속하는 한국인들은 학교를 비롯한 공적 공간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가정을 포함한 사적 공간에서는 조선어를 사용하는 비대칭적 이중언어 상태(다이글로시아)에서 지적 성장기를 보냈다.
말하자면, 문화적 언어적 양서류가 되기를 강요받았다. 이런 생태 환경에 잘 적응한 종(種)은 물에서도 뭍에서도 편안하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종은 뭍에서도 물에서도 불편하거나, 적어도 한쪽에서는 불편하다.
박인환은 이런 생태 환경에 충분히 적응한 양서류가 아니었다. 일본어에 대한 그의 감각은 확인할 길 없지만, 적어도 그의 한국어 감각은 문필가로 행세하기에 넉넉지 않았다.
‘박인환 전집’(1986, 문학세계사 간행)에 묶인 그의 조악한 산문들을 살피면, 그의 시가 드러내는 한국어의 생경함이 단지 시적 허용의 과감한 실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박인환)는 일본말이 무척 서툴렀고 조선말도 제대로 아는 편은 못되었다”는 김수영의 비아냥은, 김수영 자신의 한국어가 썩 탐스럽지 않았다는 점에서 개운치는 않지만, 박인환의 조선말에 관한 한 중상모략이 시집 ‘목마와 숙녀’에 자주 나오는 외래어(나 추상적인 관념어를 포함한 이른바 ‘문명 어휘’)와 이국적 이미지들은 그의 서툰 한국어를 치장하면서(말하자면 이 박래어들은 그것들이 명사의 꼴을 취하고 있을 때도 사실은 ‘형용사’다) 그 한국어의 서?을 도드라지게 한다. 그런 설익은 관념 취향이, 한편으로는, 박인환의 시가 잠시동안이나마 누린 대중적 인기의 비결이기도 했을 것이다.
“신문지의 경사(傾斜)에 얽혀진/ 그러한 불안의 격투// 함부로 개최되는 주장(酒場)의 사육제/ 흑인의 트럼펫/ 구라파 신부(新婦)의 비명/ 정신의 황제!”(‘최후의 회화’)라거나, “대륙의 시민이 푸롬나아드하던 지난해 겨울”(‘불행한 샹송’), “실신한 듯이 목욕하는 청년/ 꿈에 본 <죠셉 베르네>의 바다/ 연체동물의 울음이 들린다/ 사나토리움에 모여든 숙녀들/ 사랑하는 여자는 층계에서 내려온다”(‘서정가’) 같은 시행에서는 유럽인으로 살고 싶었던 제3세계 청년의 허위의식이 씁쓸하게 감지된다.
이 한국 청년이 “나신과 같은 흰구름이 흐르는 밤/ 실험실 창 밖/ 과실의 생명은/ 화폐모양 권태(倦怠)하고 있다/ 밤은 깊어가고/ 나의 찢어진 애욕은/ 수목이 방탕(放蕩)하는 포도(鋪道)에 질주한다”(‘장미의 온도’)고 노래할 때, 청자(聽者)는 대뜸 그의 한국어 교사가 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한국어 명사 ‘권태’에는 접미사 ‘하다’가 붙을 수 없음을, ‘방탕하다’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임을 이 청년이 모르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가 “생(生)과 사(死)의 눈부신 외접선(外接線)을 그으며/ 하늘에 구멍을 뚫은 신호탄”(‘신호탄’)이라고 쓸 때, 독자는 ‘외접선’이라는 비유가 그 겉 멋에도 불구하고 흐리터분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어진다.
‘목마와 숙녀’의 적잖은 시들은 고물 텔레비전 같다. 전류는 흐르는데 화면은 가로띠 무늬로 뒤덮여 있고, 지지거리는 소리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한두 세대 전의 고장난 텔레비전 말이다.
그 시대엔 텔레비전이 문명의 상징이었듯, 이 시집은 문명의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 이미지들은 자주 단절적이어서, ‘목마와 숙녀’의 언어를 ‘구조물’이 아니라 ‘분위기’로 보이게 한다. 이런 문명의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박인환이 모더니스트가 되지 못한 것은, 거의 체질적으로 보이는 그의 감상주의 때문이다.
사실 감상주의는 ‘목마와 숙녀’ 전체를 휘몰아 가는 동력이다. ‘목마와 숙녀’를 분위기의 시집이라고 할 때, 그 분위기는 센티멘털리즘인 것이다. 시인은 동인지 ‘신시론(新詩論)’과 동인 그룹 ‘후반기(後半紀)’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모더니스트를 자임했으나, 그의 ‘모더니즘’은 1980년대의 민중문학 못지않게 감상주의에 감염돼 있었다.
이런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목마와 숙녀’는 한 번 읽어볼 만한 시집이다. 이 시집은 1920년대에 태어나 태평양전쟁의 실감 속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해방과 더불어 성년을 맞은 뒤 곧바로 참혹한 내전을 겪은 조선 문학청년의 평균적 내면풍경을 보여준다. 그의 제스처가 과장된 만큼이나 그의 황폐한 내면은 더욱 또렷하다.
분단과 전쟁으로 찢겨진 옛 식민지 출신 청년이 이국에 대한 선망과 감상주의로 제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 궁핍한 시대를 버텨내려고 했을 때, 그 안간힘이 안쓰러울 망정 그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감상주의에 버무려진 대로 이 시집에 그리도 자주 나오는 죽음의 이미지는 이 청년 시인이 살아낸 연대가 그대로 죽음의 연대였음을 증언한다.
게다가 이 시집은 시인 박인환이 ‘목마와 숙녀’나 ‘세월이 가면’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세 사람의 가족’이나 ‘어린 딸에게’ 같은 작품에서, 시인은 얼치기 댄디의 옷을 벗어던지고 한 가족의 책임있는 가장으로서 시대와 결합한다.
전시(戰時) 피난열차에서 그가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처럼 피폐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검은 강’)고 썼을 때, 짤막한 미국 방문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마음만의 신사(紳士)”(‘에베레트의 일요일’)였음을 깨달았을 때, 그의 시와 세계관은 새로운 지평을 겨냥하고 있었다. 한국문학을 위해서, 박인환은 더 살았어야 했다.
▲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 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박인환(朴寅煥, 1926.8.15-1956.3.20)
1926년 8월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부친 박광선과 모친 함숙형 사이에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박인환의 일생은 너무 짧은 생애였다. 31세면 한창 때인데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1956년이니 젊은 시절 그와 어울렸던 일들이 모두
어제 일같이 생생한데 세월은 어느새 이렇게 흘러간 것이다 그는 한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가장 겁내는 한 시인이었다. 새로운것 그 새롭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연히 규정 지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새로와 기지를 염원하는 존재였기에 좀 더 살았더라면 누구보다도 그다운 재능과
면모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그는 노력하는 시인이었다 노력이란 생존 자체를 위해 그 누구나가 다 하는 것이겠지만 그의 노력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시인으로서의 자각, 다시 말해 시를 '왜 쓰느냐'의 근본적인 문제를 위한 것이었다. '왜 시를 쓰느냐의 물음에 대해 민감하지
않곤 못 배긴다'는 것이기도 하나 이러한 고통을 스스로 떠맡기를 즐겨 한 이면에는 남다른 노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술을 즐겨
마신 것도 결코 공연한 짓은 아니었다. 괴로울 때 혹은 견딜 수 없을 때 그는 술을 마셨다. 우리는 그 시절 아주 건장한 몸들이 아니었으므로
공복에 깡소주
퍼 마시는 일이 피차 건강을 엉망으로 만든다는 것쯤 잘 알면서도 술이 아니면 지탱이 안 된다는 심정으로 술을 마셨다. 시가
마치 쓰고 독한 술이 주는 유혹과 회한 속에 있다는 것처럼 서로를 위로하면서 말이다.
박인환은 처음에는 의학 공부를 하였다.
서울에 발을 들여놓고부터는 신문기자 생활을 하였다. 당시에는 문학하는 사람들이 신문사 일을 많이 했다. 글 쓰는 사람들이 모이는 일터가 흔히
신문사 아니면 출판사, 잡지사 같은 곳이었다. 어느 누구보다도 조숙한 편이었던 인환은 결혼도 일찍 한 샘이고 순진하면서도 무척 어른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는 마치 시위라도 하듯이 영국 신사처럼 잔뜩 모양을 내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꾀죄죄하게 하고 다니는 벗들을 보면 "야, 거
좀 벗어 버려라" 혹은 "무슨 모양이 그러냐" 따위의 핀잔을 주곤 했었다. 맑은 정신에 친구들로부터 '미친 자식'이란 놀림이나 욕을 먹어도 그는
태연히 빙긋빙긋 웃기만 했다. 그는 학교 다닐 때 권투를 배웠다고 했다. 그래서 어지간한 깡패들쯤은 겁나지 않다고도 했고 한창시절에는 애인을
데리고 서울의 뒷골목을 태연히 걸을 수 있었다고 입술에 힘을 주며 자랑스레 설명하였다.
이것이 다 심심해서 하는 인환의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빙그레 웃으며 들어주면 혼자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순진한 데를 그는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넌 할 수 없는 놈이다","정말
미쳤다"고 타박을 줘도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채 유유히 사라지던 껑충한 키의 인환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1951년 초에
'후반기' 그룹이란 조직을 만들었다. 모더니즘에 깊이 빠진 면면들의 일종 동인회인 것이다. 김경린, 조향, 김차영, 이봉래, 박인환, 김규동
이렇게 6인이 한패가 되어 당시 기성 문단과 문화계에 반기를 드는 문학 운동을 폈는데 주된 공격은 낡은 전통문학, 이른바 구태 의연한 서정주의
시 내지는 감상주의에 대한 것이었고, 문단 및 문화계의 왜소한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해방 후의 문학이 일제 식민지 시대의 무기력한
퇴영성이나 센티 멘탈리즘으로 복귀하는 것이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웠다 30년대나 40년대와 달라야 한다면 50년대 문학이 무엇이어야 할 것인지를
나름대로 추구 해야만 했다. 한국의 모더니즘(김기림,정지용,김광균,오장환 등의 작업)의 체계를 세워 발전시킴으로써 문학의 유효성과 가치를 높여
간다는 이념과 의욕으로 나타났다.
쉬르레알리슴이라든지 사상파 운동은 우리에게 끊을 수 없는 혈연 관계로 인식되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박인환으 오든이나 스펜더에 매료된 감이 있었고 조향과 김규동은 브르통의 창조 작업에 한없는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은 언제나 생생한 감격을 안겨줬고, 엘뤼아르나 아라공이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서는 것이었다.
박인환은 프랑스 시인
가운데서는 쉬르보다는 콕도를 더 많이 읽은 것 같다 그에게는 콕토의 지혜, 말하자면 고안해 내는 특별한 시인으로서의 능력이나 괴벽을 좋아하는
취미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영시에서는 오든과 스펜더 이외에 파운드를 쳤고 엘리어트는 별로 흥미가 없은 듯하다. 박인환은 해방 후 오장환 등과
직접 어울릴 기회도 있었으므로 어떤 점에서는 영향을 받은 바도 있다고 느껴진다.
인환의 시 세계는 한마디로 모맨티시즘에 전적으로 몸을 내맡기면서도
감각은 극히 현대적이요 인생파적인 관념에 더 접근되어 있다. 그는 삶의 고뇌와 모순을 이미지로 제시하기보다는 감성과 암유를 통해 나타내는
경향이며 그러한 자세는 많은 경우에 웅변조라기보다는 비장한 노래의 형식으로 자리를 굳히는 것이다.
생각하는 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노래하는
감정을 배제하지 않는다. 사고와 노래가 주체와 객관처럼 서로 분리되는 일 없이 서로 연관하는 모양을 짓는 것이다. 그는 극단적인 주관주의와
소박한 영탄주의나 자연 유로적 감상주의를 경멸했고, 시는 역시 일정 수준의 지성을 기본으로 해야 할 것이라는 교만한 태도를 취한
듯하다.
난해성의 문제는 그의 시에서도 문제로 남지만 그만한 난해성은 현대시의 한 성격이라 보는 시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편의 시의
상이나 내용을 포착하고 나면 예상된 작품을 거꾸로 쓰는 연습도 했다. 말하자면 시를 끝 행부터 쓰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의식의 단절과 행간의
의미를 중시하려는 의욕의 발단이 아닐까 싶다.
31세의 생애에 그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시와 산문을
썼다. 평소에 흔히 주머니에 시고(詩稿)를 넣고 다니던 그였다. 언제나 시를 생각했고 또 썼다. 부산 피난 시절에 모두 객지에서의 물질적 궁핍에
견디기 어려워했으나 인환은 그런 것을 비교적 잘 견디는 성격이었다. 당장 저녁쌀이 없어도 다방에 진을 치고 앉아서 문화와 문학을 이야기하고
새로운 시와 음악에 대해 다투어 장광설과 흥분을 털어 놓을 만큼 열중했다.
6.25는 한마디로 처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처참한 싸움이 감행되는 가운데 잔인한 세월은 암흑 속으로 덧없이 흘렀다. 1953년 여름 인환이나 차영, 경린, 봉래 등도 서울에
돌아왔다 부산에는 조향만 남고 이 무렵 '후반기'는 자연 해체되었다. 그러나 인환과 조향은 '후반기'를 계속하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김수영 이라든지 박태진, 조병화, 이한직, 장만영 같은 시인들까지 합쳐서 더 열을 내보자고 인환은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번 해산을
한 그룹 운동은 다시 이루어 지지 못하고 말았다.
환도 이후에 인환은 이봉래, 유두연, 이진섭, 허백련 등과 영화를 열심히 보았고, 비평을
쓴다든지 그러한 문화 활동에 많은 시간을 바쳤다. 김규동 시인이 한국일보에 근무할 때 인환은 하루에도 두어 차례씩 들르곤 했는데 그때의 인환은
희고 여윈 모습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책을 무척 좋아해서 무슨 책이든지 신문사 문화부에 책이 들어오면 닥치는대로 와서 가지고 가곤 했다고
한다.
그가 쓴 '목마와 숙녀'를 읽으면 고심 참담하게 생활의 둑을 헤쳐 가느라고 방황하던 그의 모습이 연상되며, 허무하게 바라보는
시대의 지평이 보이는 것만 같다. 1956년 3월 20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울 망우리에 쓸쓸히 묻혔으며 같은해 9월
19일 추석 문우들이 묘소에 박인환 시비(詩碑)를 세웠다. 술을 좋아했던 그는 역시 폭음을 하고 심장이 잘못 됐던 것이다.
그는 우리
주변의 누구보다도 시의 사회성이나 역사성 문제를 자각하는 시인이었다. 김수영 못지 않게 사회와 역사의 모순과 갈등을 의식했으나 다만 개인의
고뇌와 운명으로 그것이 표출되는 과정에서 서민성 내지 민중성을 획득하지 못했을 뿐 부조리와 인간 모순에 대한 회의와 감성은 대단히 날카로왔다.
그가 좀더 살면서 시를 썼다면 그 특유의 소시민적 비애와 고독을 벗어나 새로운 민족시와 광야에 나서게 되었을
것이다.
내용출처 : [기타] 도서:박인환 시집(범우사,1986)(김규동 시인 서문참조), 목마와 숙녀(박세형,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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