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의 아름다운 건축물 돌아보기
[답사,촬영. 2006. 8. 15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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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시청 외벽의 태극기 모자이크
ⓒ2006 한국의산천 우관동61회 광복절을 맞아 시청은 태극기 모자이크로 장식되었고,시청앞 광장은 한산하다.(오전10:00)
덕수궁 덕수궁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형님인 월산대군의 사저였는데 1593년 10월 의주의 피난길에서 환도한 선조를 임진왜란으로 불탄 왕궁대신 이곳에 들게하고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광해군이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하였으며,7년동안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 중건이 완공 되어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긴 뒤에는 인목대비의 거처가 되었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하여 창덕궁으로 옮긴 이후 270년 동안은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1897년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있다가 환궁하면서 이곳을 다시 왕궁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다시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규모도 다시 넓혔다. 그리고 고종황제는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후,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옮겨진 후에도 이곳에 거처하였는데 이때부터 고종황제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이곳 함녕전에서 돌아가셨다.
▲ 가자 ! 덕수궁으로 ⓒ2006 한국의산천 광복절이라 모든 고궁이 무료 입장이었다. 돌담길을 바삐 걸어가는 관람객들...
현재 덕수궁에는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과 정광헌 등이 남아 있으며 다른 궁궐과는 독특하게 전통 목재 건물과 서양식 건축물을 함께 볼 수 있어 이채롭다. 현재 석조전 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이 들어서 있는데 동관도 미술관으로 활용할 방침이라 한다.
▲ 대한문(大漢門)
ⓒ2006 한국의산천 현 덕수궁의 정문으로 본래는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1906년 대한문으로 고쳤다. 현판은 한성판윤(서울시장)이었던 남정철의 글씨.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光化門)이고, 창덕궁은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은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은 흥화문(興化門)이다. 모두 화(化)자 돌림인데 유독 덕수궁의 정문만 대한문(大漢門)인 이유가 뭘까.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잿더미가 된 한양에 돌아온 선조는 정릉동에 있는 월산대군 사저를 행궁 삼아 16년을 살다 승하했다. 뒤를 이은 광해군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이라 이름 짓고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췄지만 광해군 7년(1615)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경운궁이 활기를 되찾은 것은 을미사변으로 왕후를 잃은 고종이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다. 이때 궁 남쪽에 정문인 인화문(仁化門)을 세웠으나 사용하기 불편해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이 정문 역할을 했다.
현재의 대한문
고종 43년(1906) 대안문의 이름을 대한문으로 고쳤다. 매천야록에는 류시민이 류운룡(류성룡의 형)의 무덤에서 나온 비결이라며 고종에게 바친 서찰에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고 도읍을 안동 신양면으로 옮기면 나라 운수가 번영하리라”는 내용이 있어 개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으로는 대안문의 안(安)자가 여인(女)이 갓을 쓴 모양인데, 실제 모자를 쓴 여인들이 경운궁을 드나들면서 나라를 망쳐먹고 있어 바꿨다는 속설이 널리 퍼졌다. 러시아 베베르 공사 부인과 그 언니인 손탁 부인이 서양 모자를 쓰고 드나들며 고종과 엄비의 환심을 샀고, 이토 히로부미의 첩인 배정자 또한 양장에 서양 모자를 쓰고 드나들며 밀정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1968년 태평로를 확장하며 덕수궁 담장을 뒤로 물릴 때 대한문만 길에 따로 남아 있다가 70년 비로소 뒤로 옮겨졌다. 지금에 와선 문 앞의 월대는 흔적조차 없고 계단 소맷돌인 돌짐승 한 쌍만 남아 문을 지키고 있다. -김영택의 펜화기행 중에서-
광복절 기념 무료 입장이기에 대문은 열리고 매표소는 닫혀있다.
▲ 대한문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금천교(禁川橋)
궁궐을 드나드는 모두가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이을 살피라는 뜻으로 건너게,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놓은 돌다리. 두개의 나란한 무지개 다릿발이 있다.
▲ 대한문을 들어서서 금천교를 지나면 세종대왕상이 나타난다.
ⓒ2006 한국의산천 일본인 관광객이 많았으며 가족단위의 답사팀도 많았다. 밀린 방학숙제를 하느라 서울의 전 고궁을 하루에 답사하려는 무서운(?) 학생들도 있었다.
▲ 중화문에서 바라 본 중화전
ⓒ2006 한국의산천
▲ 덕수궁의 정전(正殿) 중화전
ⓒ2006 한국의산천 중화전은 즉위식과 조회를 비롯한 주 행사를 치르는 곳이다.본래는 2층이었으나 불타고 1906년 다시 1층으로 지었다. 내부에는 일월오악그림 병풍앞에 어좌가 놓여있다.
▲ 중화전 앞마당에 세워진 품계석
ⓒ2006 한국의산천 돌이 깔린 앞 마당에는 행사나 조회시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있다.
▲ 중화전 어좌 천저에는 쌍룡 그림이 황금색으로 살아있는 듯 수놓고 있다.
ⓒ2006 한국의산천 (門에서 관람하는 사람이 많아 삼각대를 사용못하고 장시간 노출로 찍었더니 흔들렸습니다)
▲ 중화전 안에있는 어좌와 일월오악 그림 병풍
ⓒ2006 한국의산천
일월오악도
일월오악도는 하늘에 걸려 있는 붉은 해와 흰 달, 청록색의 다섯 봉우리의 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폭포, 붉은 수간(樹幹)에 녹색의 무성한 잎을 가진 소나무, 그리고 파도와 포말이 출렁이는 물을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을 말한다.
일월오악도는 현재 경복궁 근정전을 비롯하여, 창경궁 명정전, 덕수궁 중화전, 창덕궁 인정전 등 각 궁의 정전(正殿)의 어좌(御座) 뒤쪽 뿐만 아니라, 창덕궁의 대조전 대청, 그리고 신선원전 감실(龕室) 등 정전이 아닌 침전이나 선왕을 모시는 영전(靈殿) 내에 설치되어 있다.
일월오악도는 실내에서 뿐만 아니라 왕이 거동하여 임시로 머무는 장소, 예컨대 전시(殿試)를 치르는 과거 시험장 등 야외에도 왕의 주변을 장엄하게 나타내는 그림으로 사용되었다.
▲ 임금의 어가(가마)만이 다닐 수 있는 계단 중앙에 있는 임금을 상징하는 문양.
ⓒ2006 한국의산천
▲ 높이 솟은 처마와 향로 그리고 드므.
ⓒ2006 한국의산천
▲ 드므는 중화전 네귀퉁이마다 설치 되어있다.
ⓒ2006 한국의산천
▲ 드므
ⓒ2006 한국의산천
드므 드므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드므'는 순우리말로 국어사전에는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라고 나온다.이 드므는 궁궐의 화재를 막기 위해 상징적으로 비치한 물건이다.
궁궐이 목재로 만들어져서 당연히 화재에는 취약하기 마련이다. '드므'는 그곳에 실제로 물을 담아 놓았기에 작은 불에는 방화용수로 사용할 수 도 있지만 '드므'에 물을 담아 놓음으로써 불의 귀신인 화마(火魔)가 왔다가 '드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도망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도 비슷한 물건을 비치했다고 전하는데, 이것을 '문해(門海)'라고 불렀다고 한다. 즉 문 앞에 있는 큰 바다라는 뜻으로 화재를 예방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드므'와 비슷한 것으로 '부간주'라는것도 있다.
▲ 중화전 추녀위에 자리한 잡상(雜狀)
ⓒ2006 한국의산천
잡상(雜狀)광화문, 덕수궁, 숭례문의 추녀마루를 바라보면 자그마한 장식물 몇개가 눈에 뜨인다. 한줄로 죽 늘어선, 사람 같기도 하고, 엎드려 절하는 형상이기도 하고, 무슨 동물의 형상 같기도 하다. 바로 그것은 진흙으로 빚어 만든 여러 가지의 형상의 토우(土偶·흙인형). 잡상(雜像)이라고 말한다.
잡상의 설치는 궁전건물과 궁궐과 관련이 있는 건물에 설치되며 목조 건물의 화재예방 주술적인 효과를 바라는 것이며 조선시대에 성행 했던 잡상은 3마리 에서부터 11마리 까지 대게 3, 5, 7, 11의 홀수로 앉혀진다.
잡상의 임무는 하늘에 떠도는 잡귀를 물리쳐 건물을 지키는 일. 궁궐이나 관아의 건물, 도성의 성문이야말로 왕조의 기강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잡귀를 막고자 했으며 민간신앙의 하나인 셈이다.
잡상의 모습은 주로 원숭이 사자 용 봉황 기린 해마(海馬) 물고기 해치 등의 동물이 특별한 원칙 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꼭 하나 지켰던 것은 맨앞엔 언제나 도인(道人) 선인(仙仁)과 같은 인물상이 자리잡아 뒷자리 동물들을 이끄는 선두가 되고 있다. 그래서 이를 삼장법사로 보기도 한다.
잡상이 있으므로 해서 높이 솟은 추녀의 멋을 한층 더 멋지게 해주는것이 아닐까?
▲ 여름 방학을 맞아 학생들이 많이 나와서 문화재 답사를 한고있다.
ⓒ2006 한국의산천
▲ 중화전의 아름다운 단청과 하늘 높이 솟은 추녀.
ⓒ2006 한국의산천
▲ 함녕전 (보물 820호).
ⓒ2006 한국의산천 고종의 생활처이자 침전이며 승하처(1919.1.21) 이기도 하다.
▲ 함녕전 내부
ⓒ2006 한국의산천
▲ 덕홍전
ⓒ2006 한국의산천 귀빈 접견처로 덕수궁에서 제일 나중에 지어진 건물(1911년)로 카펫과 전등이 놓이고 대한 제국 문장인 황금 이화문(李花文 : 오얏꽃 무늬) 이 새겨져 있다.
▲ 덕홍전에서 석어당으로 나가는 문
ⓒ2006 한국의산천
▲ 석어당
ⓒ2006 한국의산천
▲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석어당 ⓒ2006 한국의산천
임금들이 임진왜란의 상황을 상기하는 선조임금의 추모처이자 인목대비 유폐처로서 단청을 칠하지 않아 고색 창연한 나무색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 즉조당
ⓒ2006 한국의산천 광해군과 인조의 즉위처이자 임금의 집무처이다.
▲ 즉조당에서 정관헌으로 들어가는 문
ⓒ2006 한국의산천
▲ 즉조당 담장
ⓒ2006 한국의산천
▲ 정관헌 내부 모습
ⓒ2006 한국의산천
▲ 정관헌
ⓒ2006 한국의산천 함녕전 뒤뜰에 자리한 서양식 휴식처로 고종이 다과를 들며 쉬거나 외교관 연회처로 사용되었다. 벽이 트이고 지붕이 구리판으로 되어있는것이 특징이다.
▲ 준명당 다락집 복도
ⓒ2006 한국의산천 준명당은 신하와 사신 접견처로서 다락집 복도를 통하여 즉조당과 연결 된다.후에는 고종, 순종 어진 봉안처 및 덕혜옹주 유치원으로 사용되었다.
▲ 즉조당 뒤켠에 있는 굴뚝.
ⓒ2006 한국의산천
▲ 석조전
ⓒ2006 한국의산천 영국인이 설계하였으면 1900년(광무 4)에 착공하여 1910년(융희 3)에 완공되었다. 3층 석조건물로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등으로 사용되었다. 앞면과 옆면에 현관을 만들었다. 기둥 윗부분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한 서양식 건축기법이 특이하다.
이 건물은 앞에 있는 정원과 함께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의 궁전건축양식을 본뜬 것이며, 당시에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다. 이곳에서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 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동관에는 궁중유물전시관이 있었으나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건립되면서 이전했고, 2007년부터 국립근대미술관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서관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이 1998년 12월에 개관되어 덕수궁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오늘 현재 롭스 뭉크전이 열리고 있다
▲ 롭스 뭉크 전시회 2006. 8. 11~ 10. 22 까지.
ⓒ2006 한국의산천 석조전 기둥을 보노라면 그리스 아테네 신전의 기둥을 접하는 우아하고 경쾌한 느낌이다.
▲ 석조전 앞에 위치한 해시계 앙부일귀.
ⓒ2006 한국의산천
▲ 자격루 (국보 229호)
ⓒ2006 한국의산천 광명문 안에 설치된 자동 물시계로서 조선의 국가 표준시계. 시간에 따라 쥐,소,범등 12띠가 나타난다. 세종때 장영실이 만든 뒤 중종 때 다시 만든 세계 최고의 시계
▲ 준명당 지붕
ⓒ2006 한국의산천 오래 세월을 지나며 준명당의 지붕에는 이름모를 풀이 피어나 하늘거리고 있다. 옛기왓장과 풀을 보노라니 소설가 정비석님의 '산정 무한'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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