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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두물머리, 양평 가는 길

by 한국의산천 2006. 6. 24.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양평 "두물머리에서 사랑과 화합을 꿈꾼다" [월간산]

용문산 머리 삼아 남한강과 북한강을 품은 고을 양평(楊平) 가는 길  

 

※ 이해를 돕기위해 제가 찍은 사진을 첨부했습니다.-한국의산천-

 

 

▲ 양수리 입구 이정표 ⓒ2006. 한국의산천 

한강을 옆구리에 끼고 거슬러 오른다. 양평 나들이 길에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언제나 한강 줄기다. 한강을 이루는 두 개의 큰 물줄기, 곧 남한강과 북한강을 모두 끌어안고 있는 양평은 한강을 빼놓고는 결코 한 마디도 이야기할 수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 ‘왼쪽은 용문을 의지하고 오른쪽으로는 호수를 베고 누워있다(左據龍文右枕湖)’는 기록으로 양평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사족을 붙이자면 호수란 바로 남한강과 북한강을 일컫는다. 거기에 용문산은 백두대간의 오대산에서 뻗어 내려오며 두 강을 가르는 한강기맥의 맹주니, 양평은 한강기맥을 중심으로 양쪽 날개에 남한강과 북한강을 거느린 형국이 된다. 그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 바로 두물머리다.

우리 땅이름에서 물줄기가 합수하는 곳을 일컫는 명칭은 다양하다. 정선 아라리로 잘 알려진 아우라지는 송천과 골지천이 하나로 모이는 곳이다. 또 3·1만세운동의 기개가 살아있는 천안 아오내(아우내)는 광기천·서원천·병천천이 하나가 되는 곳인데, 병천(竝川)은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임진강이 흘러드는 한강 하류의 교하(交河)는 옛 이름이 어을매(於乙買)로서 ‘물(매)이 서로 어울리는 고을’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지도를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물줄기가 하나로 만나는 곳임을 알려주는 땅이름을 적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 두물머리  ⓒ2006. 한국의산천 

두 강물이 만나는 양평의 두물머리(兩水里).

두물거리·두머리·두거리·양수두·양수 등으로 불렸던 양평의 두물머리는 적어도 남한에선 규모가 가장 큰 합수점이다. 한반도의 중심을 적시고 흐르는 큰 물줄기인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평 두물머리는 좀 특별한 감이 있다.

 

 

 ▲ 북한강 춘천댐 ⓒ2006. 한국의산천 

한 물길은 강원도 북녘 땅 금강산(1,638m) 기슭에서 시작해 휴전선 넘어 북한강으로, 다른 물길은 태백 금대봉(1,418m) 자락의 검룡소에서 발원해 남한강으로 흐르다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비로소 한강이란 이름으로 하나가 된다. 두 강물은 “언제 산을 떠나와 그 먼 길을 얼마나 어렵게 흘러왔을까” 위로하며 서로 몸을 섞는다.

 

▲ 남한강 신륵사앞 조포나루 ⓒ2006. 한국의산천 

물은 어우러짐의 상징이다. 자연에서 가장 자연스런 어우러짐은 암수의 만남이 아닐까. 우리 조상은 물에 생명력을 부여해 암수로 나누기도 했는데, 영월 주민들은 동강을 수캉, 서강을 암캉이라 나눠서 불렀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양평 주민들은 깊은 산속을 거칠게 휘감고 흘러온 차가운 북한강을 숫물(雄水), 비교적 부드럽고 따뜻한 남한강을 암물(雌水)이라 했다.

두물머리는 특별히 눈을 자극하는 볼거리는 없지만 화해와 융화를 배울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아이 손을 잡은 부모는 가정의 행복을 빌고, 연인들은 순탄한 사랑의 완성에 이르기를 기원한다. 시인은 서로 질시하는 인간들을 꾸짖으며 거스르지 않는 물에서 화합을 배우라고 일갈한다. 또 장자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물을 보면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觀水洗心 觀花美心)’고. 두물머리 앞에 있는 세미원(洗美苑)은 이런 의미를 담아 만든 정원이다.

여기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삼월삼짇날에 두물머리의 강심수(江心水)를 길어다 장독대에 올려놓고 나라의 안녕과 가족의 행복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길손은 비록 강심수를 길어 올릴 수는 없으나 북한강과 남한강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두물머리에서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빌어본다. 두 강이 하나로 자연스럽게 만나 한강을 이루듯, 남한과 북한도 통일이라는 큰 강에 연착륙하기를…. 

 

 

▲ 두물머리 느티나무 (나무이름 : 도당 할아버지) ⓒ2006. 한국의산천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려와 남한강과 북한강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한강기맥의 끝자락이기도 한 두물머리엔 늙은 느티나무가 전설처럼 서있다. 400년쯤 전부터 이곳에 뿌리박고서 남한강이나 북한강 물길을 따라 한양으로 오가던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고 쉼터 역할을 하던 나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를 ‘도당 할아버지’라 부르며, 지금도 매년 가을 젯상을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당제를 지낸다. 하지만 ‘도당 할아버지’는 자신의 배필이었던 ‘도당 할머니’가 1974년 팔당호가 생기며 물에 잠겨버린 바람에 아직까지 울적하다.

두물머리의 지금 풍경은 한가한 수채화지만, 팔당호라는 인공호수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한강에서 제법 번잡한 편에 속하는 나루터였을 것이다. 그 옛날 삼남대로의 갈림길인 천안삼거리가 유명했다면, 물길에선 양평의 두물머리도 제법 큰 삼거리였다. 서울과 강원·충청지방 간의 수송물자 나르는 배가 휴식하던 곳이며, 예전엔 술을 파는 객주집도 넘칠 정도였다. 양평엔 남한강의 양근나루·앙덕나루, 북한강의 내미연나루·수입나루 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상징성에 있어서 두물머리나루에 떨어진다.  

 


 

▲ 돌 던지며 물수제비 뜨는 아이들. ⓒ2006. 한국의산천  


두물머리에선 물길뿐 아니라 찻길도 둘로 나뉜다. 하나는 북한강변으로 해서 청평으로 이어지는 363번 지방도요, 다른 하나는 남한강변으로 해서 여주로 연결된 6번 국도다. 수도권 주민들이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는 이곳엔 별장과 펜션, 전원주택, 카페 같은 시설이 즐비하다.
 

 

▲ 양평에서 여주로 가는 6번 국도변 남한강 ⓒ2006. 한국의산천  


363번 지방도와 6번 국도의 사잇길. 양수리 세미원 입구 삼거리에서 두 개의 찻길 사이로 뚫린 군도를 따르면 용문산과 한강의 정기를 듬뿍 받고 태어난 조선시대 위인들을 만날 수 있다.

양수리를 벗어나면 좌우로 제법 널따란 논밭을 거느린 마을들이 펼쳐진다. 산 깊은 곳마다 비집고 들어선 펜션과 전원주택이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시골 정취가 제법 풍기는 이 길은 소박해서 정감이 간다. 

 

여기서 제일 먼저 길손을 불러 세운 분은 조선 중종부터 선조까지 4대의 왕을 섬긴 명재상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1499-1572)이다. 양서면 부용산(365.9m) 서북쪽 기슭에 자리한 동고의 묘소는 남향으로 아늑했다. 폭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좀 가파른 산등성이에 있다는 사실만 빼면 제법 터도 좋았다. 동고는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루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유배생활을 하다 2년만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그 후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도 영의정까지 올랐다.

동고는 홍문관 관리 후보자 명단에 아들의 이름을 제외하거나 외모로 딸려 ‘키 작은 재상’으로 불리던 오리 이원익을 추천하는 등 인재를 차별하지 않고 관리로 등용하는 등 국정을 위해 힘쓴 인물로 알려졌다. 또한 명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선조가 즉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민간에는 ‘임진왜란을 예언한 이준경’ 등 그의 예지력에 관한 전설이 많이 전하는 것으로 봐서 당대의 위상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도술에 관심 있는 이들은 보은 속리산(1,058m)을 지키는 산신이 바로 이준경의 혼령이라고도 한다.

이런 동고가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기 전에 붕당의 출현을 예언한 일화는 유명하다. 1571년(선조 4) 당시 영의정이던 동고는 선조에게 유차(遺箚·죽음에 임해 올리는 약식 상소문)를 올려 ‘지금 벼슬아치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붕당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큰 문제로서 나중에 반드시 나라의 고치기 어려운 환란이 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사대부들의 중심이었던 율곡 이이를 지목한 말로 받아 들여졌던가 보다. 율곡도 선조에게 글을 올렸다. ‘조정이 맑고 밝은데 어찌 붕당이 있겠습니까? 이는 임금과 신하를 갈라놓으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에 임해서는 그 말이 착한 법인데, 이준경은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악합니다.’

그러나 4년 후인 1575년에 을해당론(乙亥黨論)으로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자 사람들은 이준경의 혜안에 탄복했다. 율곡은 이를 부끄러워하면서 당론의 균형을 잡는 것을 평생 과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동고를 뵙고 나면 이번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 선생이 손짓한다. 동고의 묘소 입구에서 도로를 따라 1km 정도 더 올라가면 이덕형 신도비가 서 있는 삼거리다. 길가엔 600년 가까운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있으니 이곳도 제법 유서 깊은 마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묘소는 신도비 앞에서 도로를 따라 300m 정도 더 올라간 지점에서 지장교를 건넌 다음, 영정각 왼편으로 이어진 넓은 산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야 한다.

청계산(658.4m) 서쪽 기슭의 산등성이에 서향으로 앉은 이덕형 묘소에선 부용리의 널따란 전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는 우뚝 솟은 남양주 운길산(610.2m)이 눈길을 끈다. 운길산은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왠지 상대를 압도했다는 그의 기개를 닮은 것 같다. 절친한 사이인 오성 이항복과 어울려 다니며 장난을 잘해 ‘오성과 한음’에 얽힌 일화를 남긴 그의 성격처럼 조망이 시원하다.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동자상과 문인석이 1쌍씩 있는데 전체적으로 소박한 편이다.

한음은 1580년(선조 13)에 과거에 급제하면서 탄탄대로의 벼슬길을 걸었다. 1592년(선조 25)에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는데, 이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소 위풍당당하고 언변이 뛰어났던 한음은 북상중인 왜군을 맞아 단신으로 왜장 고니시(小西行長)를 만나 그들의 부당함을 공박하였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위하였고, 오성 이항복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어 지원군 요청에 성공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한음은 명나라 제독 유정과 함께 순천으로 내려가 통제사 이순신과 더불어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전후엔 우의정·좌의정이 되어 민심을 수습하고 군대를 정비하고 대마도 정벌을 건의하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정치적으로 보면 남인 계열이었던 그는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처음엔 남인과 북인 사이의 중간노선을 지켰으나 나중엔 남인에 가담하게 된다. 1613년(광해군 5)에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거세게 반대하다가 정적들에 의해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서도 국사의 잘못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끊임없이 나라를 걱정하다가 53세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음의 묘소에서 물러 나와 벗고개를 넘으면 양평 서북단의 서종면이다. 여기서 강변도로를 타고 북한강을 만나 거슬러 오르면 수입천을 만난다. 이는 용문산 북사면에서 발원해 가평의 설악면을 지난 뒤 양평으로 흘러 들어와 서종면을 적시다가 수입나루 부근에서 북한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 벽계구곡 입구 ⓒ2006. 한국의산천 

86번 국지도를 따라 양평의 여느 지류와 같이 맑고 깨끗한 수입천을 거슬러 오르면, 이번엔 대나무처럼 곧고 아주 꼬장꼬장한 한 명의 선비를 만나 뵙게 된다. 바로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서 위정척사운동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재야지식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 선생이다.

전형적인 사대부의 주택 구조를 따르고 있는 선생의 생가는 노문리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생가가 자리하고 있는 마을은 그리 넓지 않고, 마을 앞 적당히 떨어진 곳으로는 맑은 수입천이 휘감아 흐르고, 한강기맥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들이 첩첩으로 펼쳐진다. 화서는 이곳을 무척 사랑하여 벽계구곡을 이름 짓고 즐겼다. 

 

 

 ▲ 벽계구곡 ⓒ2006. 한국의산천 

생가 오른쪽 언덕의 노산사(蘆山祠)는 화서가 살던 당시 그가 숭모하던 주자와 송시열의 위패와 영정을 모셔놓았던 사당이다. 사당 위쪽 언덕 전망 좋은 자리엔 화서의 묘소가 있다. 생가 왼쪽의 화서기념관에선 선생의 다양한 저서와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족적을 되짚어볼 수 있다.

화서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학문의 일가를 이룬 선비였다. 1808년(순조 8) 한성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부정이 있고, 관리로 나아가는 데도 권모술수가 있음을 알고는 벼슬길을 단념했다. 25세가 되던 해인 1816년(순조 16)과 이듬해 잇달아 부모를 여의고 나서는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했다. 30세 무렵에 그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하는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어 그의 강학(講學)을 들었다. 화서는 때로 너무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번잡함을 느낄 때면 쌍계사나 고달사 같은 산사를 찾아 사서삼경과 주자대전 등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 이항노 선생 생가 (유형문화재 제 105호) ⓒ2006. 한국의산천 

선생의 학덕은 점차 조정에 알려지면서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눈썹 하나 꿈적이지 않았다. 1840년(헌종 6) 휘경원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고, 다른 벼슬도 물리친 채 이곳 벽계에 머물며 오로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였다. 매월 한 차례씩 강론하였는데, 늘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의리에 관한 강론은 비유가 풍부하여 마치 용호가 뛰는 듯 통쾌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다.

1864년(고종 1) 장원서별제, 그 후 전라도사·지평·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모두 완곡히 물리쳤다. 그러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선생은 분연히 서울로 올라가 대원군에게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이 ‘항거 상소’로 화서는 공조참판으로 승진했으나, 곧바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과 조세제도의 실정을 비판하고, 만동묘의 재건을 주장하다가 결국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이태 뒤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유학은 성리학을 주류로 해서 양명학, 경학, 실학 등이 잇따라 등장하며 펼쳐졌다. 이 가운데 성리학은 크게 퇴계 이황을 잇는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를 계승한 기호학파로 나뉘게 되는데, 19세기에 이르면 중요한 학자를 중심으로 파를 형성하게 된다. 그 당시 유림은 우두머리의 학문적 내용과 인적 구성을 바탕으로 기호 계열의 화서학파(華西學派), 노사학파(蘆沙學派), 간재학파(艮齋學派)와 영남 계열의 한주학파(寒洲學派) 이렇게 4개 학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중 화서학파의 태두인 화서는 서양 충격에 의한 서구 열강문화를 미개한 이질문화라고 보고 서구문화 수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다른 학파와 달리 화서학파의 유생들은 개항 전후 현실대응론부터 일제시대 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본격적인 이론을 체계화하고, 우국충절을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 방법도 모색했다.

그 당시 항일운동에 몸 바친 많은 학자와 애국지사들 중에 화서학파 출신이 많았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을사조약 이후 1906년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군에 붙잡힌 뒤 일본 대마도에서 순국한 면암 최익현을 비롯해 조선 13도 의병도총재를 지낸 의암 유인석, 위정척사파 학자인 중암 김평묵과 성재 유중교, 외세 배척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능지처참 당한 문숙 홍재학, 병인양요 때 강화 삼랑성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한 양헌수 장군,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등이 대표적인 제자로 꼽힌다.   

 

 

 ▲ 용문산 전경  ⓒ2006. 한국의산천 

 

화서가 사랑했던 양평 고을의 진산은 용문산(1,157m)이다. 흔히 ‘경기의 금강’으로 알려진 용문산은 경기도에서 가평에 있는 화악산(1,468m), 명지산(1,267m), 그리고 국망봉(1,168m) 다음으로 높은 4위의 고봉이다.

용문산의 옛 이름은 미지산(彌智山). 대동여지도나 동국여지도에는 용문산으로 적고 있지만, 그보다 앞선 신경준의 산경표엔 ‘일명 미지라고 부른다’고 덧붙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 미지산으로 나온다. 경기도 지평현 편을 보면 ‘용문사는 미지산에 있다.

산을 용문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절 때문이다. 절에 이색의 대장전기가 있다’고 했다. 미지를 우리말 어원으로 풀어보면 미르, 곧 용의 순우리말이다. 결국 미지산과 용문산은 우리 말 어원이 같은 셈이다.

용문산의 주찰인 용문사(龍門寺)로 들어서는 숲길은 신록으로 물들어 있다. 물소리, 소리에 넋을 빼앗기듯 짙은 숲길을 20여 분 걸었을까. 파란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두 눈을 가득 메운다. 용문사보다 더 유명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에, 이렇게 큰 나무도 있다니!’ 하는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린다.

둘레 14m, 높이 60m, 가지는 동서로 27m, 남북으로 28m나 퍼져 있는 이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 중에서도 가장 큰 나무로 꼽힌다. 나이도 1,100살을 훌쩍 넘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은행나무들 중엔 가장 연장자다. 수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처럼 고령임에도 해마다 은행을 열다섯 가마 이상 거둘 수 있어 유실수 가운데에서는 동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라 한다. 물론 가을에 나뭇잎이 노랗게 물든 광경은 그 자체가 절경이다. 도대체 누가 심은 것일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그의 스승인 대경대사를 찾아와서 심은 것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에 이곳을 지나다가 심은 것이라고도 한다. 시기를 좀더 거슬러 오르면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자란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렇다면 이 은행나무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구한말의 의병투쟁, 그리고 6·25전쟁 당시의 용문산전투에 이르기까지 양평과 용문산 일대에서 벌어졌던 1,000년 이상의 역사를 모두 꿰뚫고 있는 유일한 생명체인 것이다.

어쨌든 이 나무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상 징후를 보였던 모양이다. 고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커다란 가지가 부러졌고, 8·15해방과 한국전쟁 때도 이상한 소리를 냈다고 한다. 그래서 천왕목(天王木)으로도 불렸고, 조선 세종 때는 정3품인 당상관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져 왔다.

이 은행나무에 치이는 감이 있지만, 나무와 역사를 같이한 용문사는 913년(신라 신덕왕 2)에 대경(大鏡)이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일설에는 649년 원효가 세운 뒤 892년 도선이 중창하였다고도 하며,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지었다는 설도 있다. 제법 사세가 컸던 모양인지 양평군지에 의하면 용문사 창건 당시 당우가 304칸에 스님이 300명쯤 머물렀다 한다. 절의 앉음새나 터로 보아 300칸이 넘었다는 당우는 부풀려진 것이라 해도 양평 지역에 기대 살던 수많은 민초들을 위로해주던 대찰이었음은 분명하다.

그 후 고려가 쇠락기에 접어든 1378년(고려 우왕4)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대장전을 짓고 봉안하였고, 1395년(조선 태조 4) 조안화상이 중창하면서 그의 스승 정지국사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세종 때에는 수양대군이 부왕의 명으로 모후인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보전을 지었다. 이때 불상 2구와 보살상 8구를 봉안하였고, 이듬해 이곳에서 경찬회를 베풀었다.

그가 왕으로 등극한 뒤인 1457년(세조 3)엔 용문사를 크게 중수하여 원찰로 삼았다. 1480년(성종 11) 처안 스님이 중수한 뒤 1893년(고종 30)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1907년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에 의해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는다. 일제 때 중건하였으나 6·25전쟁 당시 용문산전투 중에 큰 피해를 입고 만다.

용문사는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절집임에도 환란을 겪은 탓에 아쉽게도 천년고찰이 갖는 세월의 더께를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많이 아쉽다. 현존하는 대웅전, 산신각, 종각, 요사채, 일주문 등은 모두 20세기에 들어와 새로 지은 것들이다. 그나마 돌로 된 덕에 남은 정지국사부도(보물 제531호)만이 우람한 은행나무와 함께 용문사의 내력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용문사는 방문객에게 놀라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안겨주는 절집이다.

절 오른쪽의 ‘정지국사부도 200m’라는 팻말을 따른다. 산등성이에 정지국사 부도가 있고, 부도비는 그 50m쯤 아래에 있다. 전투 와중에도 비교적 보존이 잘된 부도는 팔각원당형의 기본틀에서 많이 변형된 편이지만, 주위의 산세와 어울린다. 이 부도와 부도비는 그의 제자 조안 스님이 용문사를 중창할 때 그의 사리를 모셔다가 건립한 것이다. 비명은 당대의 명신이며 학자인 권근의 찬(撰)이다. 정지국사는 1395년(태조 4) 천마산 적멸암에서 입적하였는데, 다비 후에 찬연한 사리가 많이 나오자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를 추증하였다고 한다.

용문사에서 산길을 1시간쯤 걸으면 상원사(上院寺)가 나온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상원사는 고려 말기인 1330년대에 보우가 이 절에 머물며 고행했고, 조선 초기엔 무학이 왕사를 그만둔 뒤 잠시 머물렀다. 평창 오대산의 상원사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세조와 얽힌 일화가 전해온다.

왕위찬탈의 과정에서 명분과 정통성, 도덕성에 심각한 결점이 있던 세조는 왕권이 취약했다. 그래서 그는 왕권 강화책으로 육조직계제를 강행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더불어 친왕 세력 확보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세조가 1462년(세조 8) 이곳을 찾았다. 당시 세조는 경기 지방을 둘러보고 상원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날 밤 갑자기 관음보살이 나타나 상서로운 빛이 온 누리를 비추고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다가 한참만에 흩어졌다. 세조는 기뻐하여 절에 많은 상을 내리고 불전을 세워 절을 크게 중수했다. 지금도 전하는 최항의 관음현상기는 그때의 광경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세조는 나라의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이는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쌓였던 시대의 원한을 풀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관음보살을 만난 것을 계기 삼아 나라의 안녕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상원사의 역할은 크다 할 것이다. 당연하게 상원사는 그 뒤로 계속 중수되었으나 1907년 의병봉기 때 일본군이 불을 질러 겨우 법당만 남게 되었다. 일제 때 있었던 몇 번의 중창도 6·25전쟁 당시 용문산 전투를 겪으면서 불에 타버려 허사가 되어버렸다.

양평과 용문산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두 전투를 잠깐 살펴보면, 정미의병(丁未義兵)은 1907년(융희 1)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확대된 의병활동이고, 용문산전투는 1951년 5월 중공군의 2차 춘계 공세 때 양평 북방의 용문산을 방어 중이던 한국군 제6사단이 중공 제63군 예하 3개 사단의 침공을 크게 격퇴한 방어전투를 말한다.

용문산을 벗어나 동쪽의 지제면으로 간다. 사실 동부쪽은 문화재만으로 평가한다면 그다지 눈길을 끌 만한 지역은 아니다. 그래도 길손의 발길을 끄는 까닭은 수도권임에도 아직까지 깔끔하고 정겨운 농촌 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양평의 땅이름 유래를 짚어볼 수 있는 계기도 된다.    

 

 

 

 ▲ 운길산 ⓒ2006. 한국의산천 

지금의 양평은 옛 양근(楊根)과 지평(砥平)을 1914년에 합쳐서 이루어진 고을이다. 우리 땅 이름에서 평지나 큰 들이 있는 곳엔 坪(평)·平(평)·原(원) 등의 한자가 많이 쓰였다. 경기도의 양평을 비롯해 가평·청평·부평·수원, 강원도의 철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서 당시 두 고을의 경역을 살펴보면 경기도 남양주·광주 등과 맞닿은 서쪽의 양서·서종·옥천·강상·강하면과 양평읍 등이 양근 고을이요, 강원도 횡성·홍천군 등과 가까운 동쪽의 지제·양동·청운·단월면, 그리고 용문산을 포함한 용문면 지역이 지평 고을에 속한다. 양근 관아가 있던 곳은 현재 양평읍인데, 양근리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지평현의 중심은 지금의 지평리라는 지명으로 전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양평은 동쪽과 서쪽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엔 양근의 토산물이 쏘가리요, 지평의 토산물은 송이버섯으로 적고 있으니 조선시대 양쪽의 차이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금세기의 차이는 이런 게 아니다.  

 


 

▲ 두물머리는 사진촬영장소로 유명하다 ⓒ2006. 한국의산천  


수도권에서 가까운 서쪽의 강변엔 부유층의 별장이나 전원주택지, 그리고 펜션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터만 될 듯 하면 산을 깎고, 논밭에 흙을 채워 집터를 만들고 있다. 서쪽은 그래서 늘 공사 중이다. 반면에 널따란 농토와 산간지역이 혼합된 동쪽은 서쪽에 비해 거창한 유적이나 유물 같은 문화재가 적은 편이지만 시골다운 풍경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이렇게 양근과 지평이 만나 이루어진 양평은 기도에서 땅덩이가 제일 크다. 그럼에도 남한강과 북한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양평은 자연보전권역에 속해 있고, 상수원보호지역답게 물도 맑다. 물론 주변 환경도 비교적 청정한 편이다.

양평을 상징하는 캐릭터는 물과 관계가 있는 ‘물사랑이’다. 용문사 은행나무 잎을 망토로 두른 귀엽고 똘똘한 물의 모습을 의인화한 것이다. 양평 주민들은 이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메뚜기’와 ‘반딧불이’를 보조캐릭터로 삼았다. 청정 생태계의 지표 생물을 상징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만큼 양평의 환경에 자신이 있다는 뜻일 게다.

맑은 자연 속엔 도시인이라면 대부분 꿈꾸는 전원주택 자리로 사랑 받는 고을. 번잡한 시가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반딧불이 초여름의 밤하늘을 밝히며, 가을엔 누렇게 익은 들판에 메뚜기가 날아다니는 고을. 거기에 어디서나 올려다보이는 듬직한 용문산이 중심을 잡아주고, 양팔엔 나라의 큰 물줄기인 남한강과 북한강을 한꺼번에 품고 있으니 이보다 큰 복을 가진 고을이 어디에 있으랴. 

 

 

 ▲ 두물머리 느티나무로 가는 길 입구 은행나무 ⓒ2006. 한국의산천  

 

 

▲ 두물머리 주변지도 (클릭하시면 선명하게 확대됩니다) ⓒ2006.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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