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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비운의 민회빈 강씨 영회원

by 한국의산천 2006. 6. 17.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 그래서 더욱 한적한 영회원

 

경기 광명 영회원 (永懷園) 가는 길  [답사 2006. 6. 17   한국의산천 ]

 

 


▲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의 묘 영회원  ⓒ2006. 6. 17 한국의산천    

   

 

영회원

조선 제16대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비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의 묘소. 
국가 사적 제357호 
소재지  경기 광명시 노온사동 산141-20 

영회원은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57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아왕릉(兒王陵: 일명 아기릉)이라고도 한다.

 

민회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로 강감찬의 19대 손녀이다. 1627년(인조 5) 세자빈이 되었으며 소현세자가 병자호란으로 끌려갔다가 귀국한 뒤 죽자, 반목하고 있던 조소용(趙昭容)은 강빈이 세자를 죽였다고 무고하여 궁중 후원에 유치되었다가 1646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죽음과 함께 폐서인(廢庶人)이 되어 서민의 신분으로 묻혔다가 1718년(숙종 44) 무고함이 판명되어 복위되고, 복원묘(復元墓)를 만들어 민회묘라 부르다가 1750년(영조 26) 영회원으로 개칭되었다. 

 

묘의 시설은 봉분,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석양(石羊), 석호(石虎), 문인석(文人石), 석마(石馬) 등이 있으나 비석과 정자각(丁字閣)은 남아 있지 않다. 
 

인조는 억울하게 청나라에서 볼모살이를 하다가 돌아온 소현세자를 귀인 조씨나 장렬왕후 조씨의 모함 때문에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짜고, 자신을 몰아내려한다'고 의심하며 돌아온 소현세자를 냉대하였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얼마되지 않아 병을 얻었고,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  민회빈 강씨 묘역 표석(사적 357호 영회원) ⓒ2006. 6. 17 한국의산천  

능 보호를 위하여 능 가까이 갈수 없도록 망을 쳐 놓았다. 

 

능과 원의 차이점 

 

능은 왕과 왕비, 원은 세자와 세손의 묘이다.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원(園)은 세자와 세손, 사친(私親)의 무덤이다. 사친이란 왕을 낳아준 부모를 뜻한다. 대를 이을 임금이 없을 경우 왕족 중에서 왕을 세우는 데 이때 왕을 낳아준 부모의 무덤이 묘에서 원으로 격상된다.

묘(墓)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이다. 서오릉에 있는 장희빈의 무덤은 능이라고 하지 않고 대빈묘라고 한다.

때로는 원에서 능으로 격상시키는 경우도 있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원래 현릉원. 후에 아들 정조가 임금이 되자 아버지를 장조로 추존하고 능을 화성으로 옮겨 융릉이라고 했다. 능에는 재실을 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는데 이 사람의 벼슬이 정9품인 능참봉. 또 능령이란 벼슬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 조선 왕실의 능은 북한에 2기(신의황후의 제릉, 정종과 정안황후의 후릉), 등 모두 44기.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의 장릉과 명당 중의 명당으로 땅을 사서 쓴 세종대왕의 여주 영릉을 제외하고는 모든 능은 하루 내에 도착할 수 있도록 경복궁에서 80리 내에 썼다. 당시는 10리는 4㎞가 아니라 5㎞ 남짓 됐다지만 어쨌든 약 40㎞내로 가깝다.

 

ⓒ2006. 6. 17 한국의산천

 

 제2 경인 고속도로 광명IC에서 서울 광명 방향으로 나가면 사거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접어들면 약 700m정도에 영회원 푯말이 있다.

저수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저수지옆 농원길을 따라 약 900m 정도 들어거면 영회원이 있다. 왕복 2km가 안되는 거리에 천천히 둘러보면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영회원 입구의 저수지.물이 맑다. ⓒ2006. 6. 17 한국의산천

 

▲ 저수지를 끼고 들어가다보면 애기릉 저수지를 지나서 오른쪽에 보이는 연꽃이 핀 연못.ⓒ2006. 6. 17 한국의산천

 

▲ 영회원은 개인의 농원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농원에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있다. ⓒ2006. 6. 17 한국의산천

 

숲에서는 산비둘기와 여러새의 지저귐이 들리고 푸르름이 가득하다. 숲 가운대서 꿩이 한마리 푸드득하고 날았다. 

 

ⓒ2006. 6. 17 한국의산천

 

영회원 가는 길 오른쪽으로는 제2경인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유월의 따가운 햇살아래 모가 푸르름을 보이며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 영회원 100m 전방에 있는 수령 400년의 노거수 느티나무  ⓒ2006. 6. 17 한국의산천

 

▲ 영회원 앞의 오름길 ⓒ2006. 6. 17 한국의산천

 

▲ 영회원에 대한 안내문 (클릭하시면 확대됩니다) ⓒ2006. 6. 17 한국의산천  

안내문의 내용은 기사 상단에 기재 했습니다.

 

 

▲ 영회원 (민회빈 강씨의 묘) ⓒ2006. 6. 17 한국의산천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 ?∼1646. 인조 24). 조선시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 본관은 금천(衿川). 우의정 석기(碩期)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가례를 올려 소현세자빈이 되었다. 병자호란 뒤인 1637년 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갔다가 1644년에 귀국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심관(瀋館)에서 국왕의 대리자로서 많은 재량권을 행사하였고 청측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귀국하게 되자 인조는 세자에게 전위(傳位)를 강요당하거나 세자 대신 입조(入朝)의 요구를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세자는 환국 후 두달 만에 병증이 있은 지 3일 만에 34세로 급서(急逝)하였다. 세자의 독살혐의가 짙은데도 인조는 입관을 서두르고 강빈(姜嬪)과 대신들의 간청도 뿌리치고 장례를 매우 간소하게 지냈다. 그해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가 되었고, 소현세자의 원손(元孫)은 왕위계승자격을 잃게 되었다.


여기에다 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강빈과 반목질시하던 조소용(趙昭容)이 강빈이 인조를 저주하였다고 무고하여 그의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키자, 강빈은 인조거실 근처에 가서 통곡하고 그때부터 왕에게 조석문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도 받게 되어 후원별당에 유치되었다가 조정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46년 3월에 사사(賜死)되었다.
이어 세자의 어린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가서 두명은 병사를 하고, 강빈의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 혹은 장살(杖殺)되는 비극이 전개되었다.
조선 역사상 가장 비운의 여인이 아닐런지...

 

 

조선 최초의 무역상, 경제통 민회빈 강씨 ⓒ2006. 6. 17 한국의산천

 

민회빈 강씨, 보통 소현태자의 빈으로 알려져 있다 민회빈 강씨는 부군인 소현태자가 의문사를 당한것처럼 그자신도 끝내 사사 당하는 비참한 말로의 주인공이다 더구나 슬하에 3남을 두었지만 두아들이 유배지에서 요절하니 그야말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라 할 것이다.
민회빈 강씨는 1637년 조선이 청나라에 패전하면서 군신지국이 될때 부군인 소현태자를 따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게 된다
이때부터 민회빈 강씨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부군인 소현태자가 주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정치,외교문제를 관장하고 있을때 민회빈 강씨는 안살림을 건사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민회빈 강씨는 경제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청나라 지배층을 상대로 조선의 면포,표범가죽,종이.약재,생강 등의 무역을 하게 된다 그리고 청나라 조정의 권유로 농사를 짓게 되는데 민회빈 강씨는 주로 한인(漢人) 노예와 소를 이용하여 농사를 관리하게 된다 이렇게 무역과 농사를 통하여 민회빈 강씨는 조금씩 부를 축적하게 되는데 민회빈 강씨는 이렇게 모은 돈으로 인질들의 생활비를 충당하고 또한 포로로 잡혀온 많은 조선인들을 속환시켜 주기도 한다
이렇게 민회빈 강씨는 인질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대처하여 무역과 농사를 통한 새로운 경제모범을 보이게 된다 더하여 소현태자는 이미 천주교와 서양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개방주의자로 변화 되었기에 훗날 조선의 역사는 새롭게 바뀔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민회빈 강씨나 소현태자는 모두가 비참한 말로를 당하게 된다. 참으로 처참한 부부의 운명이 아닐수 없다. 


민회빈 강씨의 무고함은 효종 이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효종때 김홍욱은 민회빈 강씨의 무고를 주장하다가 장살되기도 하였다. 결국 민회빈 강씨는 1718년 숙종 45년에 와서야 비로소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벗게된다. 사망한지 72년만의 일이다. 

 

아무리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소현태자나 민회빈 강씨가 정상적으로 임금과 황비의 자리에 올랐다면 조선의 역사는 또한 그만큼 새로와 졌으리라

 

 

▲ 광명 서독산 아래 자리한 영회원은 농원이 자리하고 있어 숲이 우거지고 산비둘기, 꿩, 까치등등 새소리가 귀를 즐겁게 해준다. ⓒ2006. 6. 17 한국의산천

 

소현세자

이름 왕(炡). 인조의 장자, 효종의 형이며, 어머니는 한준겸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부인은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강씨이고 보통 강빈(姜嬪)이라고 부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이후 9년간 심양(瀋陽)의 심관(瀋館)에 머물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동시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서 창구역할을 맡아 조선인 포로 도망자의 속환문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군량 ·선박 요구, 각종 물화의 무역 요구 등 정치 ·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하였다. 또 청나라 인사들이 벌인 대부분의 행사에 참여하고 청나라 황제의 사냥 등에도 동행하였다.

1640~1642년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하였고, 1644년 청나라 제9왕 다리콘[多爾袞]의 원정군을 따라 베이징[北京]에 들어갔다. 베이징에서 독일인 선교사 샬 폰 벨[湯若望]을 만나 그로부터 서양 역법과 여러 가지 과학에 관련된 지식을 전수받고 천주교에 관해 소개받았다.

 

당시 베이징에서 명나라 멸망의 현실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인지 그는 청나라의 현실을 인정하고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원활히 하려고 애썼다. 이에 청나라의 경제적 요구를 들어주면서 환심을 얻었는데, 그들은 그를 ‘소군(少君)’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심관으로 들어가는 조선 정부의 재정부담이 커졌고, 동시에 부왕 인조의 의구심을 사게 되었다. 인조는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즉위시키고 자신을 몰아내려는 공작을 펴는 것으로 의심, 그를 감시하였다.

 

1645년 영구귀국하였으나 청나라에서의 행실을 문제삼아 인조의 냉대를 받았고 급기야는 병을 얻어 급사하였다. 일설에는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당시 조야의 배청적(排淸的)인 분위기를 염두에 두면 가능성이 있다. 그가 죽은 뒤 인조는 왕권강화 차원에서 세손(世孫:소현세자의 장자)을 폐위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러한 전후과정에서 부인인 강빈 역시 죽음을 당하고, 세 아들은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이후로 강빈의 옥사를 억울하게 여기고 소현세자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있어, 19세기 말에는 그의 후손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경기 고양시에 서삼릉이 있다. 효릉·희릉·예릉의 3능을 일컬어서 서삼릉이라 한다.

서삼릉에는 왕릉 외에 3기의 원이 있다. 이중 소경원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묘이다. (소경묘로 불리웠으나 고종때 이르러 소경원으로 격상되었다)

 

 

▲ 민희빈 강씨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름모를 꽃은 하얗게 피어있다.ⓒ2006. 6. 17 한국의산천

 

 ⓒ2006. 6. 17 한국의산천

ⓒ2006. 6. 17 한국의산천

ⓒ2006. 6. 17 한국의산천 

 

영회원을 답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유월의 아침 햇볕은 따사롭고 산새들의 지저귐이 숲속의 신선함을 더해 주었다.  

 

돌아나올 무렵 노란 병아리 같은 유치원생들이 답사하러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 영회원 입구의 애기릉 저수지에서는 강태공들이 주말을 맞아 시간을 잊은 채 한가로이 세월을 낚고 있다.ⓒ2006. 6. 17 한국의산천

 

 

○ 가는 길

광명에서 목감방면으로 가다보면 광명IC입구 사거리(지하차도)에서 철산리 방향으로 돌아 약 1km정도 가면 애기능 저수지 입구에 영회원 안내판이 서있다. 애기능 저수지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약 9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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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빈집을 드나드는 바람처럼 그렇게 떠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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