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필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6월4일까지 특별 전시회
성북동 길로 접어들면 간송미술관이 있다.
간송미술관은 아이와 함께 따로 시간을 내서라도 둘러볼 만한 곳이다. 1938년 전형필(1906∼1962) 선생이 대지 4000평에 만든 이곳에는 훈민정음, 동국정운 등 국보급 문화재가 즐비하다.
1971년 이후 매년 5월과 10월에 약 보름 동안 소장 문화재를 전시한다. 전형필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6월4일까지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관람은 무료. (02)762-0442
관람시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스크랩 정리 한국의산천]
간송 전형필은 장안의 유명한 갑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오세창 선생의 영향으로 일본 와세다대 법대를 졸업하자마자, 서울 관훈동에 ‘한남서림’을 세우고 우리 문화재 수집에 나섰다. 추사의 글씨,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의 그림 등 조선 후기 진경시대 문화의 우수성과 고유성을 입증해준 작품들은 여기서 수집됐다.
돈벌이가 아니었으니, 오로지 가치에 따라 값을 치렀다. 훈민정음 원본(국보 70호)이 안동에서 1000원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 거간에게 1000원은 수고비로, 1만원은 물건 값으로 들려 보냈다. 그랬기에 청자 수집가 존 개즈비(영국 변호사)는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국보 66호),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65호)가 포함된 소장품을 모두 그에게 넘겼다. 이렇게 모은 작품은 38년 지은 보화각(지금의 간송미술관)에 소장했다. (당시 경성에서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쌀 한 가마니가 16원 하던 시절)
▲ 국보 제135호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중 ‘단오풍정’
간송은 우리 문화재를 사들이는 데 후한 값을 쳐준 것으로 유명하다. 자연히 그에게로 좋은 물건들이 모여들었다. 1943년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기와집 한 채가 1000원일 당시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들은 간송은 거간꾼에게 아무 소리 않고 돈 1만1000원을 내주며 ‘1000원은 수고비요’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훈민정음 원본이 간송의 손에 들어오게 됐고 지금 국보 70호로 지정돼 있다.
국보 제68호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은 푸른 창공을 날아오르는 학의 모습이 아름다워 간송 소장품의 얼굴로 꼽힌다. 간송이 1935년 일본인 골동 중개인의 소개로 당시 거금 2만원을 주고 사들였다. 서울의 어지간한 집 열 채를 살 수 있었던 돈이다.
▲ 왼쪽부터 국보 제72호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563년),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13세기 중반), 국보 제294호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연국초충문병(18세기 후반).
전시에서는 이 밖에도 국보 제73호 금동삼존불감을 비롯해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의 그림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추사체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추사 글씨 ‘명선(茗禪·차 마시며 선정에 들다)’도 내걸린다. 간송의 안목과 솜씨를 엿볼 수 있는 글씨와 문인화 8점도 함께 선보인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연구실장은 “간송이 있어서 겸재, 추사 연구가 가능했다”며 “조선 후기를 이끈 진경시대 문화의 우수성과 고유성을 밝혀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62년 세상을 뜰 때, 억만금 재산은 사라지고 문화재만 남았다. 올해 탄생(1906년 7월29일) 100돌을 맞아 특별전이 간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무료다. 여전히 바보처럼 살아 있다.
`명품세상`간송미술관 [헤럴드 생생뉴스]
간송 전형필
"내 생에 마지막 기회…"관람객 밀물
`훈민정음 원본`서 신윤복`미인도`까지 국보급 가득
문화독립운동가 간송 전형필선생 탄생100년… 비장의 명품 100선공개
"아무리 저것들이 소중하다 해도 어떻게 공주에 있는 전답을 죄다 처분할 수 있느냐. 남들이 뭐라는 줄 아냐? 문전옥답 팔아 사금파리 사는 미친 사람이란다." 1937년 어느날, 간송 전형필이 고려청자 수점을 인수한다며 공주의 5000석 전답을 팔아치우자 보다 못한 어머니가 불호령을 내렸다. 서른한살의 간송은 어머니에게 한사코 이해를 구했다.
"어머님! 제가 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이니 믿어주십시요." 당시 간송은 영국인 변호사 갯스비가 수십년 동안 모은 청자를 처분한다고 하자 도쿄로 날아가 이를 서둘러 인수했다. 이런 처사는 조선인에게 `금싸라기 땅을 팔아 사기그릇을 사는 바보`로, 일본인에게는 `나라도 없는 주제에 골동품을 모으는 놈`으로 손가락질 받았다. 하지만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ㆍ1906~1962)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문화민족이라고 당당히 밝힐 수 있다. 나라 잃은 설움에 빠져있던 시절, 간송은 일본으로 흘러갈 뻔한 귀한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전재산을 쏟아부었다. 문화독립운동가였다. 그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문화재 식민 상태`는 더욱 심화됐으리라는 게 전문가들 진단이다.
요즘 그가 수집한 문화유산들을 보기 위해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인파가 넘친다. 교과서에서나 접할 법한 국보급 명품 100점이 `간송 탄신 백주년 특별대전`이란 이름으로 딱 2주간(~6월4일) 공개됐다. 그동안 간송미술관은 매년 봄ㆍ가을 두 차례 보물창고를 열고, 기획전을 열어왔다. 전시는 2주에 그쳤다. `봄에 한번, 가을에 한번 간송 전시를 보면 1년이 흘러간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올해는 특히 탄신 100주년전이어서 평소 볼 수 없는 `간송 대표선수`가 한꺼번에 나와 미술 애호가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한다. 전시작은 대부분 국보, 보물급이다.
간송이 국보, 보물급 미술품을 손에 넣을 수 있던 것은 삼박자가 맞아서다. 우선 조선시대 최고 지주였기에 가능했다. 자손이 없던 큰 아버지댁 양아들로 들어간 간송은 25세에 생가와 양가 통틀어 유일한 적손(嫡孫)이 됐다. 당시 상속 받은 재산이 10만석. 인촌(仁村) 김성수의 재산이 3만석이었다니 유산의 규모가 짐작이 된다. 배우개(종로) 상권을 장악한 것은 물론, 가진 땅이 서울 일원과 황해도 연안, 충청도 공주 서산까지 뻗쳤다.
둘째로 좋은 조언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일본 와세다 법대를 나와 망국의 한을 되씹던 간송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춘곡 고희동과 위창 오세창과 교유하며 민족미술에 눈을 떴다. 휘문고보 미술교사로 간송의 은사였던 춘곡은 "암흑시대를 밝힐 수 있는 길은 민족문화재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가르쳤고, 위창은 간송에게 서화골동의 감식안을 키워줬다. 간송은 두 은인의 도움을 받아 25세 때부터 죽기 직전까지 서화와 도자기를 수집했다.
마지막으론 간송의 담력과 배포, 세상 욕심을 초월한 문화 애호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간송은 10만석에서 나오는 양곡은 물론, 갖고 있던 땅도 아낌없이 팔았다. 그가 사들인 미술품은 수천 점에 달한다. 특히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기와집 수십채 값에 해당되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명품이 수두룩하다.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의 서화도 모두 일급이다. 불쏘시개가 될 뻔 했던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을 거둔 이도 바로 간송이다.
간송은 반드시 수집해야 할 문화재에는 조금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일제시대 집 한채 값인 1000원에 나온 훈민정음 원본을 1만1000원을 주고 사면서 1000원을 수고비로 건넨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그래서 간송 손에 유일하게 전해지는 `훈민정음 해례` 원본이 들어왔고, 국보 70호로 지정돼 우리 곁에 있다. 간송은 골동상들이 "이 정도 받으면 횡재다"고 생각하는 매도금액의 서너배 높게 값을 지불했다. 결국 좋은 물건이 간송에게 모일 수밖에 없었다. 시대의 명품은 톱 클래스 수집가에게도 딱 세번 나타난다고 한다. 그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명품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한편 간송은 어떤 미술품을 얼마에 샀는지를 절친한 지인에게조차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오로지 민족문화를 지키고, 후대에 전하는 일에만 골몰했다. 간송은 또 재정 위기에 몰렸던 보성고보를 인수했으나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재산을 잃고 힘든 시기를 보내다 1962년 급성 신우염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가 1938년 설립한 보화각은 1965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됐고,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돼 유물을 본격 정리, 연구하기 시작했다. 최완수 실장은 "간송의 컬렉션은 우리 역사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며 "이들 문화재가 없었다면 어떻게 겸재와 추사를 연구하고, 기록만 갖고 갑론을박으로 일제의 식민사관을 바로 잡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간송 소장품은 우리의 얼이다. 조상의 숨결이다. 파리의 루브르, 피렌체의 메디치미술관 컬렉션과도 바꿀 수 없다. 예컨데 훈민정음 초판본은 지구상에 한 권밖에 없는 세계문화유산이고,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며 겸재 정선의 그림과 혜원의 전신첩은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문화재다. 그래서 뜻있는 인사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그토록 낡고 누추한 곳에 우리문화의 자존심을 방치햐야 하는가." 간송미술관은 1938년 개관 이후 거의 창틀 하나 안 바뀐 채 이어져 낡을대로 낡은 상태다.
간송미술관은 아직 개인 미술관이다. 미술관 등록을 하지 않았다. 정부 당국도 선뜻 나서기 힘든 대목이다. 간송미술관이 소장 중인 국보 보물급 문화재가 제 격에 맞는 공간을 차지하고, 제대로 숨쉬며 전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오려면 간송 관계자들과 정부 당국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야 한다. 그날은 과연 올 수 있을까.
최순우 옛집
최순우 옛집을 시작으로 성북동 길을 따라 간송미술관이 나옵니다.
간송미술관
5월 21일부터 6월 4일 까지 간송미술관이 100주년 기념으로 명작들을 기간내 무료 전시합니다.
수연산방
간송미술관에서 성북동 산길따라 동네를 오르면 오른편에 호젓하고 아담한 찻집. 그냥 찻집이 아니라 이태준이 월북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고 이태준의 증손녀가 고쳐 찻집을 열었답니다. 이태준의 대표작으로 '달밤'을 추천하는 이도 있습니다.
길상사
가까운 곳에 있는 길상사도 들러 보시고
심우장
한용운선생님이 사셨던 곳인데 일부러 북쪽으로 향해 지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수연산방에서 맞은 편 길을 따라 더 성북동 산비탈 마을 타고 오릅니다.
성벽 밑으로 다닥 다닥 붙은 집들 사이로 좁은 골목길을 따라 가면 심우장 문이 열려 있다 합니다.
[한겨레] 탄생 100돌 특별전
‘간송이 한국 미술사의 전부는 아니지만 간송 없이 한국 미술사는 성립할 수 없다.’ 우리 문화사의 보루라는 간송미술관(02-762-0442)이 낳은 불변의 진리다. 세태와 가치관이 표변하는 지금 이땅에서 성북골 들머리의 이 작은 미술관은 문화의 가치를 변함없이 지켜왔다. 그 이면에는 ‘꽃이 늘 피게 하려면 누군가는 꽃을 가꾸어야 한다’는 최완수 연구실장의 굳은 신념이 있었다. 21일부터 풀꽃 내음 가득한 이 미술관에서 명품 잔치가 한창이다. 일제시대 금쪽같은 전통 서화와 고문서들을 수집해 미술관의 터전을 세운 수장가 간송 전형필(1906~1962)의 탄생 100돌을 기리는 봄 특별전(6월4일까지)이다. 간송이 평생 모은 명품들을 영역별로 엄선한 최고 수준의 작품 100여점을 내놓았다. 녹음 속의 전시장은 개막 첫날부터 관객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응접실 크기의 1층 공간은 조선시대 서화 공간이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이 일궈낸 18세기 문화중흥기 진경 그림의 걸작들과 글씨들을 중심으로 서화 명품들이 내걸렸다.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가 사방 크기 73㎝나 되는 대폭으로 쓴 ‘화정(華政:빛나는 정치)’ 글씨가 눈을 휘어잡는다. 안평대군의 유려한 친필 글씨, 추사의 걸작 ‘명선(茗禪)’, 백하 윤순 시첩, 동국진체의 대가 이광사의 〈서결〉 등을 보고 나서 전시실 둘레를 돌며 18세기 대가인 단원, 혜원, 겸재, 관아재 조영석의 그림들을 본다. 떨어지는 버들잎을 보며 인생무상을 깨닫는 선비의 모습을 담은 〈마상청앵도〉, 벼루와 붓이 흩어진 방 안에서 생황을 부는 선비의 모습을 담은 〈월하취생도〉는 분명 단원 김홍도의 자화상 격이다. 웃는 듯, 홀기는 듯 여인의 신비스런 표정이 〈모나리자〉를 능가하는 신윤복의 〈미인도〉에서도 시선은 한참 머물러야 한다.
잠겼던 시선은 전시장 후면에 걸린 겸재 정선의 대폭 그림 〈청풍계〉와 금강산 내금강 경치를 파노라마처럼 압축해 놓은 〈풍악내산총람〉, 낚시꾼과 나무꾼의 대화 모습을 담은 이명욱의 저 유명한 〈어초문답도〉에서 풀린다. 그 아래 조선후기 최고 수장가인 김광국의 석농화첩이 다수 공개되어 있다. 안견·석경·강희안 같은 조선초 화인들의 관념산수화부터 조영석의 꼬장꼬장한 노승 그림(아래 왼쪽)과 최북, 이광사의 산수그림에 이르기까지 화첩 감상은 조선 미술사 소품 기행이나 다름 없다.
2층은 불교미술의 아련한 세계를 엿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6세기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은 뚝섬 출토불상과 더불어 우리 불상사의 시원이 된다. 아낙네 얼굴 같은 금동보살 입상의 정겨운 표정, 금동삼존불감이 눈을 흐뭇하게 한다. 도자기는 간송이 36년 일본까지 날아가 영국인 수장가 개츠비로부터 사들인 청자오리 모양 연적과 원숭이 모양 연적(아래 오른쪽 위)이 압권이다. 연꽃잎 줄기를 물고 있는 오리나 어미의 볼을 손바닥으로 비비는 새끼 사이의 모정이 엿보이는 원숭이 연적은 잡티 없이 맑고 푸른 발색으로 매혹한다. 상감청자의 최고봉 운학문매병과 풋풋한 진홍빛 국화문을 머금은 청화백자 양각진사채 난초국화무늬병도 빼놓을 수 없다.
전시의 끝맺음은 정갈하다. 국보 중의 국보라는 〈훈민정음〉(아래 오른쪽 밑), 〈동국정운〉 등의 한글 고문헌과 혜원의 풍속도첩, 겸재의 경교명승첩, 긍재 김득신의 풍속도를 보고 나서 19세기 대가 김수철의 펜화 같은 꽃그림, 간송의 빼어난 문인화(맨 위)와 친우들에게 써준 현판 글씨를 보고서야 동선은 갈무리된다.
‘우리 문화유산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사설 컬렉션’이라는 강관식(한성대 교수) 연구위원의 자부처럼 출품작들은 대부분 분야별로 미술사 연구의 기준이 되는, 이야깃감이 넘치는 유물들이다. ‘문화광복’을 염원한 간송의 수집 열정을 바탕으로 60년대 이후 최완수 연구실장을 비롯한 후학들의 연구성과가 아롱져 있는 셈이다. 71년 첫 전시 이래 집중 연구한 겸재, 단원의 진경 화풍 작품들을 전시장 곳곳에 내걸어 민족미술사에 대한 집념을 내비친 것도 그러하다. 한편 간송과 절친했던 혜곡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성북동 옛집(미술관 아래쪽·02-3675-3401~2)도 28, 31, 4일 나들이 길목으로 개방된다.
간송문화재는 간송만의 것이 아니다. [중앙일보]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골목을 벗어나 대로변의 인도까지 600m 정도의 줄을 선 사람들이 1시간 이상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입구에 도착하니 안내원이 "2층부터 관람하세요"라고 말했다. 2층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겨우 틈을 비집고 유물을 보기 시작했다. 광배가 아름다운 불상이다. 하얀색 종이에는 단지 '癸未銘金銅三尊佛立像(국보 제72호)'이라고만 써 있을 뿐 제작연대.국가.출토지역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안내원에게 "어느 시대의 유물이냐"고 물었더니 간단하게 "가야시대"란 답이 돌아왔다. "최소한 '가야시대'라고는 밝혀 놓아야 하지 않느냐"고 따졌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이게 무슨 국립중앙박물관도 아니고, 그렇다고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도록을 사서 보시면 다 나와요." 지난 주말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하 '간송')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재를 털어 일제로 넘어갈 뻔하던 우리 문화재들을 사들여 간송이 있게 한 전형필 선생의 훌륭함은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전형필 선생 덕분에 간송에는 국보급 문화재가 많이 소장돼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간송을 아끼고 보호해야 한다. 최근에는 "간송이 넉넉한 전시 공간을 갖출 수 있도록 정부나 기업이 지원해야 한다"는 뜻있는 분들의 애정 어린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말하기 전에 간송이 먼저 고쳐야 할 점이 있다.
간송은 그 많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면서 왜 연중 상설전시할 방도를 연구하지 않고 1년에 딱 두 차례만 전시하는가. 연구자들이 소장 유물 열람을 아무리 간청해도 절대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시 장소를 좁은 간송만으로 한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번 전시만 해도 그렇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국보급 청자와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과 같이 유명한 작품을 전시하면서 전국에서 연구자들과 학생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그 정도 무게 있는 유물이라면 국립박물관이나 시설이 잘 갖추어진 사설미술관 등과 사전협의해 보다 넉넉한 장소에서 많은 사람이 여유를 갖고 감상할 수 있도록 기획했어야 했다. 아울러 설명서도 보다 친절하고 자세하게 작성해 첨부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 '간송 전형필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특별전'기획은 너무나 안일했다. 낙후한 시설, 좁은 공간에 그 이름난 국보들을 전시했기 때문에 국보의 아름다움은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紋梅甁)은 2층 전시실 구석에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조명이라곤 천장에 높이 매달린 둥근 주황색 수은등 12개가 고작인 전시실의 허름한 유리 진열장 안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전시된 청자매명은 오히려 초라하게 보였다. 국보를 이렇게 홀대해도 되는가. 게다가 1분이 멀다 하고 진열장에 사람이 부딪쳤다. 누군가 진열장으로 넘어져 유물이 훼손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간송은 더 이상 고집 부리지 말고 스스로 거듭나야 한다. 간송 연구원들만 유물을 독점해 세칭 '간송풍(風)' 연구실적을 내놓는 일에 집착하지 말고 관심 있는 학자들과 함께 열린 연구를 해야 한다. 유물을 효과적으로 보관하고 상설 전시할 방법을 찾으면서 연구자와 관람자에게 최대한 봉사할 생각을 해야 한다. 간송의 문화재들은 간송만의 것이 아니다. 국민의 문화재이기 때문에 애정 어린 쓴소리를 해 본다. [김병기 전북대 중문과 교수.서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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