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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분성군 김응수선생 영모재

by 한국의산천 2006. 6. 7.

호성공신 분성군 김응수선생의 사당 영모재   

 

아침 출근길에 매번 지나쳤던 도로가의 영모재 안내판을 보며 오늘은 일찍 준비를 하고 출근길을 나섰다.

광명에서 목감방향으로 또는 목감에서 광명방향으로 국도를 따라가다보면 노은사동 동창골 입구에 영모재라는 입간판이 서있다. 

 

호성공신(扈聖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훈호().

 

※ 아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확대됩니다.

 

 

▲ 분성군 김응수선생의 사당  ⓒ2006 한국의산천    

 

 

▲ 경기도 목감에서 광명으로 가는 국도 중에 있는 노은사동 동창골 영모재 입구 ⓒ2006 한국의산천         

 

▲ 영모재 ⓒ2006 한국의산천     

 

광명시 남쪽에 위치한 노온사동 동창골에는 고풍스러운 사당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은 400여년전 평화롭던 조선을 몰아친 임진왜란시 호종(扈從)의 공을 세운 김응수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 분성군 김응수 선생 영정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나타난 왜군의 무리는 조선 전국을 흔들었다. 거침없는 기세로 한성을 향해 달려오는 왜적의 기세에 4월 28일 신립장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왜군에게 패하고, 마침내 4월29일 한양이 함락되었고 선조는 30일에 한양을 버리고 떠나게 되었다.
일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사대부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 또한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에 급급하였다. 북쪽으로 파천한 선조의 어가도 빈약하기에 이를데 없었다.

선조의 파천행렬은 한양 - 벽제 - 개성 - 평산 - 평양으로 이어지며 그 운명이 일각에 달하였다. 5월 4일 황해도 평산에 도착한 선조는 주변을 추스리던 중 당시의 하급잡과직 중 이마(理馬)김응수와 오치운만이  남아 임금을 호종하였던 사실을 보고받은 후 둘을 동반(東班)에 서용할 것을 명하였다. 즉 문과양반으로 특별 임용한 것이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양반들은 신분의 차이를 들어 임금의 파격에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응수는 이에 더욱 분발하여 선조를 지극히 호종하였다. 후에 기록에 따르면 김응수는 주부, 판관, 첨정을 거치며 사복시(司僕侍)에서 임금의 지근거리를 보필하며 지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종손인 김우택선생 댁에는 당시에 받은 교지(敎旨)가 전해져온다. 

더불어 김응수 선생은 단지 자신만의 노력 외에도 장남인 김몽상이 1597년 시행된 무과에 응시토록 하여 급제를 하도록 하였다. 김몽상은 훗날 선무원종공신으로 봉해지고 인조대에 일어난 정묘, 병자의 양대 호란시에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오르게 되었다. 일가 중 동생인 파진군(破陣軍) 김응명, 조카인 수문장(守門將)김윤신, 김준남, 장손 김계현, 김승현 등이 호성원종공신에 이르러 전란에 큰 공을 세웠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당시의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던 도덕적 해이와 견주어봤을 때 비록 명문 가문은 아니어도 김응수 가문의 헌신이 뒷받침되었기에 신분제 수호자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끝까지 신임하고 보호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러 주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4년 대대적인 논공행상시 호종의 공으로 3등 호종공신에 책봉되었고 분성군의 존칭까지도 얻게 되었다.
이때의 공신에 대한 특전은 초상을 그려 후대에 전할 것, 관직을 일계급씩 올려줄 것, 부모처자의 관작과 봉호를 1계급씩 올릴 것 등이었다. 

분성(盆城)은 지금의 김포지역으로 선생의 고향이다. 김포에 살던 선생의 후손이 광명에 정착한 것은 1850년경으로 추정된다. 선생의 11세손인 김계욱이 세거하여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작은 서면 지역에 이원익과 김응수 두 분의 호성공신이 있게 된 것이다. 이후 1855년 집성마을에 사당을 세우고 영모제라 이름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은 1940년 증축하였다. 과거에는 영정이 있었다고 하나 도난을 당하였고 지금은 새로이 그린 영정이 남아 있다. [광명 문화원향토사연구회 참고]

 

 

▲ 영모재 안내문(클릭하시면 확대됩니다) ⓒ2006 한국의산천    

 

판서(判書) 김복룡(金福龍)의 아들 김응수(金應壽)가 형제들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랐으며, 담양부사(潭陽府使) 김언공(金彦恭)은 권율(權慄)의 영천 전투와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노량대첩(露粱大捷)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명성을 떨쳤다. 

 

 

ⓒ2006 한국의산천    

▲ (上)클릭하시면 원본을 보실수 있습니다.  

 

▼ (下) 위의 안내문 주 내용

본 영모재는 임진왜란때 공훈을 이루신 호성공신 자헌대부 한성 부판윤 분성군 김응수의 사당이니 공은 순충보조공신 공조판서 분능군 복룡의 장남이시며 본관은 김녕(별관은 분성) 신라 경순대왕 21세 손이요 김녕군 문열공 14대 손으로 배정경부인 전주이씨 양위분의 불천위패와 분성군 영정을 모신 부조묘이다.

 

공께서는 일찍이 등조하시어 사복시첨정을 거쳐 절충장군 충죄위부호군에 재임중   임진왜란에 참전 하시었다.

 

때는 조선조 선조 25년 (임진 1592) 4월 11일 왜장 소서행장이 선봉장으로 왜군 15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불법으로 침략하니 동년 5월 29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에 선조께서는 임진강을 건너 개성을 거쳐 최북단에 위치한 의주로 파천하실때 유성룡,이항복, 이원익 (클릭 ■☞ 청백리 오리 이원익)  등과 같이 대왕을 시위호종하시면서 삼형제(응수 응부 응명)와 창의하여 의병과 함께 왕실을 위협하는 왜적을 격퇴하고 많은 전공을 세우시어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굳게 지키시니 선조께서는 환도후 왜란 7년 난시중에 오직 구국일념의 충성심과 그 용감함을 높이 평하시어 선조 37년(1604) 10월 12일 충근정량 갈성효절협제 호성공신 자헌대부한성부판윤에 책록과 분성군에 봉군하시고 후에 승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하셨다.

 

분성군의 사실(事實)은 단서철권 공신회맹록 선조실록에 기록되어있으며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지축리 산 119번지 마류산 기슭 간좌향에 모셔져있다. 

 

 

ⓒ2006 한국의산천    

호국보훈의 달  유월의 푸르름은 영모재 주변을 감싸며 포근하고 시원스런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출근길에 들려본 관곡지옆 연꽃마을.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재배지에 계절이 아직 일러 꽃은 피지 않았다. ⓒ2006 한국의산천     

 

▲ 클릭해서 보시면 연 재배단지 규모를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LC-1 28mm) ⓒ2006 한국의산천     

 

클릭 ■☞ 관곡지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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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함만 못하고, 좋아함은 즐김만 못하다.”(論語, 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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