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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수원 화성 낮풍경

by 한국의산천 2005. 11. 27.

수원의 화성(華城) 둘러보기 [2005.11.27. 일요일]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새벽의 많은 비로 인하여  천천이 일어나 향기로운 유자향을 맡으며 출근했다. 그리고 오후에 수원 화성을 다녀왔다.

수원의 화성은 놀라울 정도로 거의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수원 화성을 한바퀴 도는데 천천히 3시간 30분정도 걸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화성  

 

 

[문화재 설명: 수원시청 문화재 관리국 참고]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인해, 폐해가 극심했던 구 정치체계의 개혁 을 위해, 그리고 은퇴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행궁을 신축했으며 화성을 쌓았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던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유택(幽宅)인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정조13) 풍수지리상 최길지(最吉地) 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수원의 융,건릉)으로 옮기면서부터 정조대왕은 수원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수원의 새로운 읍치(邑治)를 팔달산 기슭(당시 지명은 신기리(新機里))으로 옮기면서 행정·치안기관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 교통기관인 역참(驛站),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민생 대책을 강구했다.

 

또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된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수원하지초록(水原下旨抄錄)'에 따르면 244호-인구 677명)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나 눠주었다. 아울러 수원부에 감금된 죄수 전원과 수원부 사람으로서 유배 중에 있는 이 들도 풀어 주고 수원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 특별 조치를 베풀었다.   

 

▲ 장안문 

 

장안문[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이 썼다]은 성의 북문이다.
성과 만나는 곳에서 다시 凸의 반쪽 모양으로 층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9척으로 각기 총안을 1구멍씩 뚫었다. 안쪽은 둘레가 평평한 여장이며 옹성 위는 모두 네모난 전()을 깔고 좌우 끝에는 벽돌로 된 홍예에 작은 판문을 설치하여 성의 위와 통하게 하였다. 
 

 

 

 

▲ 화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다.

 

 

 

또한 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한다.

 

 

수원성(화성)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는 오늘날의 설계도와 비슷한 것으로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서장대 서장대는 팔달산의 산마루에 있는데 유좌(酉坐) 묘향(卯向)이다. 위에 올라가서 굽어 보면 팔방으로 모두 통한다. 석성[석성산]의 봉화와 황교(皇橋)[대항교]의 물이 한 눈에 들어오고, 한 성의 완급과 사벽(四壁)의 허실은 마치 손바닥 위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 산 둘레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다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돌을 쌓아서 대(臺)를 만들고 위에 층각(層閣)을 세웠다.  문지방 위에 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화성 장대(華城將臺)]로 편액을 붙였다.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서포루 서포루는 서암문의 남쪽 126보의 거리에 있는데, 제도는 동북포루와 같다. 치성이 성 밖으로 튀어나와 있으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누의 위 4면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외면과 좌우에는 사안(射眼)을 내어 놓았다. 내면에 벽돌 층계를 설치하여 오르내리게 하였다.  

 

 

 

 

 

▲ 해는 서편으로 기울고 반달모양의 서호(西湖)가 석양에 어렴풋이 보인다.

 

우는 모두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일 뿐입니다.

아무 것에도 매달리지 마십시요.
영원한 것은 하늘과 땅밖에 없습니다
바람 속에 먼지처럼
우리 모두가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일 뿐입니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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