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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七步詩 - 조식(曹植)-

by 한국의산천 2005. 4. 15.

 

위(魏) 나라 조조(曹操)는 평소에 문학적 재능이 있는 둘째 아들 조식을 매우 사랑하였다.
큰 아들 조비(曹丕)는 제위(帝位)를 물려받은 뒤 아버지에게 사랑받던 아우 조식을 박대하였다.
하루는 아우를 불러 말하였다.
"네가 그토록 재주가 있다면 내가 일곱 걸음 걷는 동안에  詩 한수 지을 수 있겠지. 만약에 짓지 못한다면 너에게 혼을 내주겠다."
 
조식은 이 말을 듣고 위의 詩를 지어 형을 풍자하였다. 

 

七步詩 (칠보시) - 조식(曹植)-  
 
煮豆燃豆箕  (자두연두기)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콩을 삶는데 콩대를 태워서 불을 지피니 
솥 안에 있는 콩이 눈물을 흘리네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그리도 세차게 삶아대는가

 

------------------------------------------------------------------------ 제일교포 장명부씨 그저께 별세.  (2005.4.13)'너구리 투수' 파란만장한 삶 마감 

전설의 `철완 너구리` 장명부 투수 역시 마찬가지. 은퇴 후 건설업계에 종사하다 와카야마현 마작하우스 `MJ`를 운영하다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기억하시나요? 타자의 몸에 빈볼을 던지고도 씨~익하고 웃던 너구리 장명부

 

 

 

롯데 자이언츠 장명부 선수가 머리를 단정하게 깎고 오자 권두조 선수가 우스갯조로 "형님, 새장가가도 되겠수'라고 장난치자, 파안대소하는 장명부의 표정이 천진난만 하다.

 

 

1980년대 한국 프로야구에서 한해 30승(83년)이라는 전설적 기록을 남겼던 전 삼미 슈퍼스타즈의 ‘너구리 투수’ 장명부(55ㆍ일본명 후쿠시 히로아키)가 지난 13일(2005.4.13) 일본에서 숨졌다. 일본의 주요 언론들은 장 씨가 본인이 운영하던 와가야마현의 마작하우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14일 보도했다. 경찰은 장 씨의 사망원인을 병사라고 밝혔고, 일본 언론은 장 씨가 1년 전부터 마작하우스를 운영해 왔다고 전했다. 일본 돗토리(鳥取)현 출신인 장씨는 돗토리니시고를 졸업한 1969년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4년간 1승도 못 거두고 73년 방출됐다. 그러나 77년 히로시마 카프스로 옮긴 후 6년간 58승을 거두며 에이스로 활약했다. 장씨는 14년간 통산 91승 84패 9세이브를 기록하고 82년 일본 프로야구계를 은퇴했다. 이듬해 83년 연봉 4,000만 엔(당시 약 1억2,000만원)을 받고 한국 프로야구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했다. 당시 OB베어즈의 박철순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 최고연봉(2,400만원)을 받았다.

 

장 씨는 한국에 온 첫해 시즌 최다인 30승을 거둬 화제를 모았다. 1983년 삼미는 52승(47패1무)을 올렸는데 이중 장명부가 30승을 올려줬다. 팀 승리의 58%를 장명부 혼자 책임진 것이다.
85년에는 시즌 25패(11승5세이브)를 기록했다. 86년 통산 55승 79패 18세이브의 기록으로 은퇴한 뒤 가지고 있던 돈도 사기당하고 삼성과 롯데에서 코치를 하다가 91년에는 마약사범으로 구속돼 한국 프로야구계에서 영구제명 당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택시운전 등 힘겨운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 씨는 한 시즌에 팀당 100경기(현재는 126경기)를 치렀던 입단 첫해 60게임에 등판(선발은 44차례)해 30승 16패 6세이브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그 중 36경기는 완투였고, 모두 427과 3분의 1이닝을 던졌다.  장 씨가 83년 수립한 한 시즌 30승 기록은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 요원의 개념이 없던 시절 달성된 엄청난 기록. 때문에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장 씨는 가끔 타자의 머리를 향해 '빈 볼'을 던지고도 벙글벙글 웃어 '너구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본에서 장 씨는 한때 마약을 접했던 잘못을 씻고자 오사카시 청각장애인 야구팀에서 무보수 코치로 활동했다. 2005년 6월 제주도에서 열리는 세계장애인야구대회에 참가할 예정이었던 장 씨는 10여년 만의 고국방문을 코앞에 두고 파란만장 했던 일생을 마감했다.   아직도 사람들은 삼미 슈퍼스타즈를 말하면 '너구리 장명부'를 떠올린다. 그만큼 당시 그의 활약은 프로야구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의 활약은 한국의 프로야구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주었다. 83년 그가 거둔 시즌 30승은 아직까지 원년 박철순의 22연승, 백인천의 4할타율과 함께 한국프로야구 불멸의 3대기록으로 남아있다.

 

얼마전에 문을 연 그가 운영하던 일본의 마작하우스 벽에는 본인이 직접 쓴 '혼(魂)'이 남아 있는데, 현역시절 못지않게 현실 속에서 혼신을 기울여 살아가고자 했는지 말없이 대변해 주고 있다. 장명부는 겨우 테이블 두개뿐인 가게 한쪽 벽에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혼신의 1구(無二一投)', '상호신뢰' 등의 문구를 가득 써 놓고서 새로운 각오를 되새긴 듯했다.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의 마운드를 지배했던 '슈퍼 에이스' 너구리 장명부. '보너스 1억원'을 위해 선수생명을 걸었던 83년 이후 장명부의 불꽃은 꺼졌다. 하지만 그가 남긴 믿을 수 없는 기록들은 영원히 우리 옆에 남을 것이다.
 
나는 1981년 결혼을 하고 집사람과 같이 야간경기(나이트게임)시 도원고개에 위치한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을 친구들과 자주 찾았다.  삼미슈퍼스타즈의 응원을 위하여.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늘은 까맣고 조명아래 허공을 나는 야구공과 야구복이 어찌그리 포로스름 하얗게 빛나던지.... 장명부, 그는 그 시대의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멋진 야구인이었다.  -  한국의산천 -  

마운드에서 타자와의 수싸움에 능해 ‘너구리’라는 별명으로 통했던 한국 프로야구 유일의 30승투수 장명부(일본명 후쿠시 히로아키)가 13일 자신이 운영하는 일본 와가야마현 마작하우스에서 사망했다.
 
  만년꼴찌 후보로 평가됐던 삼미 슈퍼스타즈를 1983년 전기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던 주인공인 ‘재일동포’ 장명부는 국내프로야구에 올때부터 일본으로 떠날때까지 숱한 화제를 뿌린 초창기 프로야구계 최고의 뉴스메이커였다.
 
  장명부와 한국프로야구의 인연은 1983년 시작됐다. 3승 11패의 신통치 않은 성적과 일본인들의 차별대우를 견디다 못한 장명부는 장훈의 '모국행'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삼미로부터 1억3천만원에다 부대비용 5천만원을 받은 장명부는 계약조건에 불만인듯, 시범경기에서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제대로 대접만 해주면 "30승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삼미 허형 사장은 이에 장명부에게 “20승은 몰라도 30승은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했고, 장명부는 “만약 내가 30승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되받아쳤다. 허 사장은 “그럼 1억원의 보너스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때부터 장명부는 확 달라졌다. 정규시즌에 돌입한 뒤 장명부는 다양한 변화구와 타자를 짜증나게 할 정도의 수 읽기로 삼미 돌풍을 주도했고 급기야 삼미 슈퍼스타즈는 일약 우승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삼미는 김진영 감독이 폭력을 휘둘러 구속된 후 전력누수 현상을 보였고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장명부는 그러나 정규시즌 1백경기가운데 60경기에 마운드에 올랐고 36경기 완투에 30승 16패6세이브, 방어율 2.34라는 한국야구사상 불멸의 대기록을 남겼다.
 
  30승을 달성한 장명부는 시즌종료후 “사장이 약속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몰아부치며 허 사장으로부터 보너스 1억원을 받아냈다. 1983년 이후 장명부는 구단과 연봉문제로 끊임없는 갈등을 하며 ‘돈만 밝히는 선수’로 낙인찍혔다. 장명부는 은퇴후 삼성과 롯데에서 투수 인스트럭터와 투수코치를 지냈지만 지난 91년 마약사범으로 구속돼 사실상 야구계를 떠났다.
 
  장명부의 시즌 최다승(30승), 최다완투(36경기), 최다이닝(427 1/3)기록은 향후 국내프로야구에서 깨지기 힘든 대기록으로 남을 가능성이 짙다. 특히 4인 선발로테이션과 철저한 투수분업체계로 국내프로야구에선 20승투수도 드문 상황이라 장명부의 30승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인다. 구단 사장과의 내기에 이기기 위해 30승에 더욱 욕심을 냈고 도박을 즐겼던 장명부 투수가 자신이 경영하는 마작하우스에서 생을 마감한 건 하나의 운명처럼 느껴진다.

 

마이데일리 산케이스포츠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지는 타입. 한국에서는 야구는 물론, CM출연료 1000만원(당시 약 300만엔)을 복지시설에 선뜻 기부하기도 하였다"(야구관계자)

화려한 야구생활을 보낸 그이기에 야구를 떠난 인생 자체가 고통이었을까, 장명부는 은퇴 직후부터 약물에 손을 대 91년 서울지검에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십여년전 일본으로 돌아가 오사카 마쓰바라시의 한 아파트에 자리 잡고서 건설업과 부동산의 영업으로, 아내와 3명의 아들을 돌봤다.

건설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는 "전 히로시마의 명투수 라는 이름이 있었기에 계약건수를 많이 올렸다. 정식사원이 아니라, 계약이 성립되면 몇 퍼센트 수당을 받는 할당제로 일했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장명부의 장남이 운동을 하던 어린이 리틀리그에서 함께 야구를 하였던 아들을 둔 일본인 남성은 "그는 자식을 정말 아끼는 아버지였다. 시간이 나면 늘 시합을 구경하려고, 투구를 지도하기도 했다. 뒤풀이에서는 술도 마시지 않고 항상 조용히 들어주던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후일담을 소개했다.

한편, 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마쓰바라시내에 있는 골판지 제조회사의 한 관계자는 "몇 년 전에 면접을 보러 왔었는데, 낡아서 더러워진 재킷을 입고 와 그를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장명부는 어머니의 병간호 때문에 오사카에 가족을 남겨둔 채 혼자서 고향으로 되돌아 온 후 특히 아들들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스모에서 활약하고 있는 둘째 아들 토시히로(稔啓·25)씨는 야구가 아닌 스모를 선택했을 때 "그래?"라고 짧게 말한 게 전부라고 하면서, 무척 쓸쓸한 표정을 짓던 게 아직 기억난다고 회고했다.

"아버지한테 자주 전화가 왔다. '이겼어?'로 시작해 '네가 진 상대방을 잘 메모해 둬'처럼 여러 가지 조언을 받았다. 마지막까지 승부에 집착하는 분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괴물투수의 가려진 참모습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마지막까지 승부의 세계를 고집했던 우직스러움, 그 고독한 싸움 그 자체였는지 모르겠다.

 

재일동포 장명부씨 별세 [주간한국 2005.04.21 (목)]
'너구리 투수' 파란만장한 삶 마감

 

 

 
 

1980년대 한국 프로야구에서 한해 30승(83년)이라는 전설적 기록을 남겼던 전 삼미 슈퍼스타즈의 ‘너구리 투수’ 장명부(55ㆍ일본명 후쿠시 히로아키)가 지난 13일 일본에서 숨졌다.


일본의 주요 언론들은 장 씨가 본인이 운영하던 와가야마현의 마작하우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14일 보도했다. 경찰은 장 씨의 사망원인을 병사라고 밝혔고, 일본 언론은 장 씨가 1년 전부터 마작하우스를 운영해 왔다고 전했다.

일본 돗토리(鳥取)현 출신인 장씨는 돗토리니시고를 졸업한 1969년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4년간 1승도 못 거두고 73년 방출됐다. 그러나 77년 히로시마 카프스로 옮긴 후 6년간 58승을 거두며 에이스로 활약했다. 장씨는 14년간 통산 91승 84패 9세이브를 기록하고 82년 일본 프로야구계를 은퇴했다.

 

이듬해 83년 연봉 4,000만 엔(당시 약 1억2,000만원)을 받고 한국 프로야구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했다. 당시 OB베어즈의 박철순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 최고연봉(2,400만원)을 받았다.

 

장 씨는 한국에 온 첫해 시즌 최다인 30승을 거둬 화제를 모았다. 85년에는 시즌 25패(11승5세이브)를 기록했다. 86년 통산 55승 79패 18세이브의 기록으로 은퇴한 뒤 삼성과 롯데에서 코치를 하다가 91년에는 마약사범으로 구속돼 한국 프로야구계에서 영구제명 당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택시운전 등 힘겨운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 씨는 한 시즌에 팀당 100경기(현재는 126경기)를 치렀던 입단 첫해 60게임에 등판(선발은 44차례)해 30승 16패 6세이브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그 중 36경기는 완투였고, 모두 427과 3분의 1이닝을 던졌다. 장 씨가 83년 수립한 한 시즌 30승 기록은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 요원의 개념이 없던 시절 달성된 엄청난 기록. 때문에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장 씨는 가끔 타자의 머리를 향해 '빈 볼'을 던지고도 벙글벙글 웃어 '너구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본에서 장 씨는 한때 마약을 접했던 잘못을 씻고자 오사카시 청각장애인 야구팀에서 무보수 코치로 활동했다. 6월 제주도에서 열리는 세계장애인야구대회에 참가할 예정이었던 장 씨는 10여년 만의 고국방문을 코앞에 두고 파란만장 했던 일생을 마감했다. 장 씨의 장례식은 미정. [주간한국 조신 차장]

 

# 칠보시 #조식 #장명부 #너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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