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토기행 서산
충남 서북부에 있는 서산시(瑞山市)는 동쪽은 당진군·예산군, 남쪽은 홍성군, 서쪽은 태안군에 접하고, 북쪽은 아산만에 면한다. 금북정맥이 서산 북부를 동서로 지나고, 동남부에는 서산의 최고봉인 가야산(伽倻山·678m)을 중심으로 삼준산(三峻山·490m), 석문봉(石門峰·653m), 일락산(521.4m) 등 400~600m급 산들이 솟아 가야산군을 이룬다.
서부에는 금북정맥의 금강산(316m)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지맥을 뻗었다. 북부 지맥엔 연화산(蓮花山·234m), 팔봉산(八峰山·361.5m), 망일산(望日山, 302m)을 비롯한 150m 내외의 낮은 산지가 곳곳에 구릉지를 이루고 있고, 남부는 도비산(島飛山·352m) 등 낮은 구릉성 산지가 뻗어 각각 가로림만과 적돌만으로 태안반도와 내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가야산권을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해발고도 100~300m 내외의 저산성 산지들이 곳곳에 분포되어 완사면과 구릉지들이 있을 뿐, 큰 하천과 퇴적평야의 발달은 미약하다. 금북정맥 분수령을 중심으로 북부에는 40여 개의 소규모 하천이 곳곳에 산재해 인근 곡창지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대교천이 남서류하며 시 중앙을 적시며, 가야산 남쪽에서 발원한 해미천과 만나 간월호로 흘러든다. 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굴곡이 심하며, 조석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수심이 얕다.
오늘날의 서산시 지역은 고려시대의 지곡현 땅이었다.
고려 인종 때 부성(富城)에 현령을 두었다가 읍치(邑治)를 지곡에서 오늘의 서산시로 옮겼다. 1284년(충렬왕 10) 다시 복군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안군·서산군·해미현이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모두 합쳐 서산군이 되었다. 1989년 서산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서산은 서산시와 서산군으로 나누어졌고, 태안군은 서산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1월 서산군과 서산시가 다시 서산시로 합쳤다.
주요 농산물은 쌀·고구마·콩·참깨·인삼·마늘·생강 등이다. 특히 마늘과 생강을 많이 생산하는데, 서산육쪽마늘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낮은 구릉지는 목축에 알맞아 대규모 농장이 많다. 주요 수산물로는 갈치·민어·농어 등의 어류와 꽃게·굴을 비롯한 각종 조개류가 많이 잡힌다. 간월도의 어리굴젓은 서산의 특산물로서 맛과 향기가 좋다.
리아시스식 해안의 여러 만(灣)과 금북정맥의 가야산군이 가로막아 지리적으로는 교통이 불편한 편이었으나 서해안 고속도로가 나면서 수도권과의 연계가 편리해졌다. 당진 - 서산 - 태안을 연결하는 32번 국도가 시를 동서로 관통하고, 대산 - 서산 - 해미 - 홍성을 잇는 29번 국도가 남북을 관통한다. 가로림만과 천수만이 가로막긴 해도 각 면 단위로 지방도가 잘 나있어 자체 교통은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
서산마애삼존불상
운산면 용현리 가야산 계곡 층암절벽에 새겨진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국보 제84호)은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연꽃잎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에서 당시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보원사지
운산면 용현리 보원 마을에 있는 절터. 보원사(普願寺)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 사이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요즘은 백제 때의 절로도 보고 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 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이 발견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다.
10세기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조(石槽·보물 제102호)와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103호)·5층석탑(보물 제104호)·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보물 제105호)·법인국사보승탑비(보물 제106호) 등의 유물과 초석이 남아 있다. 1968년에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9.5㎝)과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7.5㎝)이 발견되었다. 사적 제316호.
개심사
운산면 신창리에 있는 개심사(開心寺)는 649년(백제 의자왕 9)에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세웠다고 전해지며, 1475년(조선 성종 6) 불탄 것을 1484년에 중건한 뒤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보물 제143호)과 명부전·팔상전·심검당 등이 남아 있고,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4호)이 보관되어 있다. 건물 배치는 조선 초기의 배치법을 따르고 있으며, 건축 양식은 다포계(多包系)·주심포계(柱心包系)·익공계(翼工系)의 형식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현재 건물은 고쳐 지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개심사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이 건물은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양식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과 대비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부석사
부석사(浮石寺)는 677년(신라 문무왕 17)에 의상대사가 창건했으며, 조선 초기에 무학(無學)대사가 중건하였다. 근대에는 만공(滿空)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기도 하였다. 경내에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같은 건물로 연결된 심검당, 무량수각 등의 건물이 있으며, 극락전 앞에 안양루가 서해를 향하고 있다.
극락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는 건축물이다.
일락사
상왕산 남쪽 기슭에 있는 일락사는 663년(신라 문무왕 3)에 의현선사가 세웠고, 1487년(조선 성종 18) 이후 여러 차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명부전이란 현판이 달려있는 대웅전은 1993년에 건물을 해체하여 원래 자리 오른편에 세웠는데, 이전 자리에는 대적광전을 새로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을 한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전체적으로 조각을 가하여 단정하고 아담한 형태미를 보여 주고 있는 건물이다. 기록으로 미루어 일제시대 초기인 1919년에 고쳐 세운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대적광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삼층석탑은 기단 일부가 부서지고 탑신의 3층 몸돌이 없어지는 등 보존상태가 좋지 않으나, 원래의 옛 모습은 단아함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간월암
부석면 간월도리 작은 바위섬에 있는 간월암(看月庵)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無學)대사가 창건한 암자다. 무학이 이곳에서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데서 간월암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그 후 퇴락하여 폐사된 절터에 만공이 다시 세우고 간월암이라 불렀다. 법당에는 무학대사를 비롯하여 이곳에서 수도한 고승들의 인물화가 걸려 있다.
간월도는 밀물 때는 섬이 되고 썰물 때는 길이 열린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보낸 어리굴젓이 진상품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또한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부르기 군왕제가 매년 정월 보름날 만조 때 간월도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서 열린다. 이곳에서 보는 서해의 낙조가 유명하다.
가야산
충청도 금강 이북 지방의 근간을 이루는 금북정맥이 서해로 빠져 세력을 다하기 전에 남은 힘을 쏟아 예산과 서산 사이에 빚은 산이 바로 가야산(伽倻山·678m)이다.
봄이면 아기자기한 암릉 곳곳에 피어 있는 연분홍 진달래가 곱고, 가을이면 한들한들 흔들리는 억새풀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요즘 같은 초겨울이라면 전망 좋은 능선에서 널따랗게 펼쳐진 내포지방의 산야를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봉인 가야봉 정상 부근은 군사보호구역이라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산행은 석문봉(658m)으로 한다. 상가리의 남연군묘 - 옥양봉 - 석문봉 - 남연군묘로 돌아오는 회귀코스는 4시간쯤 걸린다.
옥양봉에서 석문봉까지의 암릉구간이 압권으로, 좌우 깎아지른 절벽에 서면 전망대가 따로 필요 없다.
문화유적을 겸한 답사산행에 좀더 치중하고 싶다면 황락리 해미읍성 - 일락사 - 석문봉 - 남연군묘 코스와 상가리 - 석문봉 - 일락산 - 개심사 코스가 적당하다. 산행은 4 - 5시간 소요된다.
팔봉산
팔봉면에 솟은 팔봉산(361.5m)은 채 400m도 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아기자기한 암릉과 주변 조망이 좋다.
능선에 오르면 북쪽으로 가로림만의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특히 바위에 붉은 노을이 물드는 저녁 시간의 풍경이 장관이다.
팔봉산 산행에서는 제1봉에서 제3봉 사이에 펼쳐진 암릉구간이 백미다. 암릉을 오르내리며 걷다보면 현란한 암릉의 조화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요즘엔 위험한 곳에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가족산행을 하기에도 별 무리가 없다. 팔봉산만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데는 3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도비산
부석면 추평리 동아반도에 우뚝 솟은 도비산(桃肥山·352m)은 조망이 뛰어나다. 부석사 같은 유서 깊은 절집이 있어 등산인들의 발길이 잦다.
정상에 오르면 천수만 간척지를 비롯해 너른 들판과 그 너머로 서해바다와 드넓은 간척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겨울이면 간월호와 부남호의 철새도 볼 수 있다. 옛 서산군지인 ‘호산록’엔 날씨가 쾌청할 때 도비산에서 서해를 바라보면 해로가 분명하게 보여 중국 청제의 지경을 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행은 보통 추평리 부석사 입구에서 시작하고, 부석사에서 30여 분이면 정상에 설 수 있다.
부석사 - 도비산 정상 - 석천암 - 부석사를 도는 회귀 코스와 부석사 - 정상 - 산동리로 넘어가는 두 코스가 있다. 총 산행시간은 어느 코스를 이용하나 3시간 정도 걸린다.
해미읍성
해미면 읍내리의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세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하여 1491년(성종 22)에 완성되었다. 성 둘레에 탱자나무를 돌려 심었기 때문에 탱자성이라고도 했다. 읍성은 지방 행정관청이 있는 마을에 들어서며,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갖는 형태로서, 평시에는 행정중심지가 되고 비상시에는 방어기지가 되었다.
해미는 1414년(태종 14)부터 1651년(효종 2)까지 군사 중심지였다. 이 성은 동문·서문·남문의 3문 가운데 남문인 진남루만 원래의 모습이고, 동문과 서문은 1974년에 다시 쌓은 것이다. 성 안의 시설은 1980~81년에 일부가 발굴되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읍성으로는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어 대표적인 표본이다.
한편, 해미읍성은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지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유적이다 1866(병인)년 대박해 동안에만 순교한 숫자가 1,000여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790년대부터 희생된 순교자는 3,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주교인을 처형한 회화나무와 사형대 등이 남아 있는데, 이 회화나무에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서 고문하였으며,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전화 041-660-2540
안견기념관
조선 초기의 화가인 안견(安堅·?-?)을 기념하여 세운 박물관으로 지곡면 화천리 언덕에 있다. 1619년(광해군 11)에 기록한 서산의 지방지 <호산록>에 안견의 출신지가 서산 지곡면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1991년 10월 서산시가 사업비 2억2천여만 원을 들여 지었다.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안견의 작품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실측 크기로 제작한 영인본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적벽도(赤壁圖)’ 등 총 18점의 작품을 향토 작가들의 미술품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매년 10월 안견 탄신기념 학생미술사생대회를 개최한다.
관람시간은 09:00~18:00(동계 17:00), 공휴일에는 쉰다. 관람과 주차는 무료. 전화 041-660-2536.
김기현 가옥
음암면 유계리 평야마을에 있는 김기현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99호)은 북동향하고 있는 기와집으로, 지은 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一자형의 행랑채 안쪽으로 ㅁ자형의 안채가 있고, 안채의 동쪽 옆에 사랑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행랑채는 7칸 규모로 왼쪽 끝에 바깥대문이 설치되어 있고, 부엌과 광·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향한 안채는 중문을 들어서서 안마당의 오른쪽에 있다. 이는 대부분의 중·상류 주택이 몸채를 안마당 건너편에 두는 것과는 달리, 일조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간결한 구조를 한 3칸집으로, 사랑채 남쪽에 단 차양지붕이 돋보인다. 차양지붕은 사랑채 1칸 앞에 팔모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을 얹은 것이다. 앞면에는 겹처마를, 뒷면에는 홑처마를 달아 앞쪽을 더 길게 처리하였다.
안채의 뒤뜰에는 3칸의 초가집이 있는데 공부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 공간의 짜임새가 빈틈없이 구성되었으며, 호두나무나 감나무 등이 어우러져 소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무학대사 출생지
조선 건국의 정신적 스승인 무학(無學·1327-1405)대사의 출생지는 경남 합천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산 사람들은 인지면 애정리 쑥댕이가 무학대사의 출생지라 여기고 있으며, 서산시에서는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경상도 합천이 고향으로 알려진 무학대사가 사실은 여말 왜구들에게 붙잡혔던 그의 부모가 안면도 부근에서 탈출하여 이곳에서 정착하면서 갈대로 갓을 엮어 파는 생활을 하다가 무학대사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 후 무학대사는 간월도 바위섬에 암자를 짓고 불경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서산엔 무학에 대한 전설이 많이 남아있다.
정순왕후 생가
음암면 유계리에 있는 정순왕후 생가는 조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順王后·1745-1805)가 출생한 곳. 정순왕후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영조 35년(1759)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 집은 조선 효종이 김적에게 내린 집으로 1649에서 1659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건물은 ㅁ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 건물 좌우에 각각 3칸씩 덧달아 ㄷ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에는 앞면 5칸 옆면 1칸의 별채를 배치하였는데 ㅁ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대문은 평문이다
웅도
가로림만 안에 있는 섬들 가운데 가장 큰 섬인 웅도(熊島)는 면적 1.58㎢이고,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하며 농업도 겸한다.
장골, 큰골, 동편말 등의 갯마을에 사는 주민은 54가구에 190여 명. 근해에서 새우·조기의 어획이 많고, 김·굴·바지락 양식업도 활발하다. 경지면적은 36ha로 쌀·보리·마늘·무 등을 생산하며 자급자족하고 있다. 소달구지를 타고 갯일을 나가는 풍경 때문에 유명해졌다.
섬 안에 민박은 물론 매점도 없으므로 대산읍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 하루에 두 번 썰물 때만 드나들 수 있다.
고파도
가로림만 안에 있는 고파도(古波島)는 외지인들의 발길이 드문 섬이다. 주요산업은 어업으로 해태가 많이 잡히고 굴·김 양식도 같이 한다. 북서해안에는 형제염전·고파도염전이 있다. 길이 4.5㎞. 면적 1.04㎞², 인구 92(1999). 해안선길이 4.5㎞에 이른다.
고파도는 섬이름에서부터 파돗소리가 풍기지만, 가로가림만에 안겨있어 파도는 높지 않고 잔잔한 물결만이 밀려온다. 이 물결에 실려온 결 고운 모래는 고파도 해변에서 백사장을 이룬다. 여름에 피는 붉은 해당화는 다른 곳보다 색깔이 더욱 곱고 건강하다. 청정지역으로 해산물이 많이 잡혀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구도포구 선착장(017-216-3496)에서 고파도행 여객선 이 1일 2회(07:30, 16:10) 출항한다. 45분 소요. 여름철에는 2회 증편 운행.
천수만간척지
서산 남쪽에 있는 만으로 동쪽은 홍성군 서부면과 보령시 천북면, 서쪽은 태안군 남면과 안면도, 북쪽은 서산시 부석면과 접하고 있다. 입구는 2km, 만의 길이는 40km로 전형적인 익곡만(溺谷灣)이다. 천수만(淺水灣)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수심이 10m 이내로 얕고 작은 섬들과 암초가 많아 대형 선박이 출입하지 못하는 반면 갯벌이 매우 넓어 바지락, 김·굴 양식과 천일제염이 이루어진다.
서산 A·B지구 간척지는 1979년 간석지 매립허가를 받은 현대건설이 1980년 5월부터 16년 동안 6,470억 원을 들여 서산시와 홍성군, 태안군 일대 천수만(15,409㏊)을 매립해 조성했으며, 담수호 면적은 4,174㏊(총 저수량 20억867만톤), 농경지 면적은 10,121㏊이다.
비행기로 볍씨를 뿌릴 정도로 끝없는 논은 새의 먹이인 낟알이 풍부하고 주변엔 새들의 은신처 역할을 하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우리나라 최대의 철새 휴식처로 꼽히고 있다.
천수만 일대에선 해마다 100만 마리가 넘는 겨울철새들이 월동하는데, 우아한 자태의 고니를 비롯해 청둥오리, 가창오리, 기러기 등이 수만 마리씩 날아들고, 최근엔 ‘겨울철의 진객(珍客)’으로 전 세계에 600여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는 황새(천연기념물 제199호)를 비롯해 노랑부리저어새, 재두루미 같은 희귀조도 목격할 수 있다.
오리 중에서 가장 작고 아름답다는 40여만 마리의 가창오리가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벌이는 군무가 일품이다.
겨울 철새가 날아들기 시작하는 매년 11월 한 달간 간월도와 천수만 간척지 일원에서 천수만 철새기행전이 열린다. 이 기간 중엔 천수만 간척지와 간월호를 한 바퀴 도는 탐조투어에 참가하면 철새를 관찰할 수 있다.
적돌만
현재 부남호가 있는 부석면과 태안 남면 사이의 적돌만(積乭灣)은 천수만 북서쪽 깊은 곳에 있는 또 하나의 작은 만이었다. 부석면의 서쪽 끝 송리 해안가에 ‘검은여’라는 바위가 있어서 이를 ‘적돌’이라고도 불렀고, 그 강을 적돌강(積乭江)이라 했다.
한편, 여는 본래 물속에 잠겨 있는 바위를 말하지만, 검은여는 밀물이나 썰물에 관계없이 언제나 그만한 상태로 드러나 있는 바위라 멀리서 보면 마치 돌이 물위에 떠 있는 것같이 보인다 하여 부석(浮石)이라고도 했다.
그 검은여 밑에는 온 국민이 석 달 먹을 양식이 거기 잠겨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서산 B지구 매립지 공사로 1982년 검은여 주변은 육지로 변하였다.
가로림만
천수만 반대쪽으로 만입하는 가로림만은 서산의 대산면·지곡면·팔봉면과 태안의 태안읍·원북면·이원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으로는 덕적군도가 있다.
부근 해안에서 성행되는 어업의 중심지로 연안 일대는 어류의 산란장으로 적합하며 굴, 바지락, 김 등의 양식이 성하다. 대산면을 중심으로 염전업이 발달하였다. 가로림만 안에는 웅도, 고파도 등의 섬이 자리하고 있다.
교통
○ 자가운전
서울 등 수도권에선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산 나들목, 해미 나들목, 홍성 나들목으로 접근할 수 있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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