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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스탈린 때 350만 굶어죽었다, 우크라이나는 그 악몽 잊지않는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61] 우크라이나 대기근 ‘홀로도모르’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2.03.15 03:00
얼어붙은 감자 캐는 어린이들 -
1930년대 초반 극심한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약 350만명이 굶어 죽는 비극이 벌어졌다.
소련이 집단 농장, 국영 농장에 농민들을 강제 편입시킨 데 이어 대량 공출로 곡물을 수탈하면서 굶주림이 심해졌다.
스탈린은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소비에트의 적으로 규정하고 가혹하게 처벌했다.
1933년에는 굶어 죽는 이가 하루 평균 1만5000명 규모로 늘어날 정도였다.
사진은 1933년 도네츠크의 한 집단 농장에서 어린이들이 얼어붙은 감자를 캐는 장면이다. /위키피디아
1930년대 초반 소련은 극심한 기근으로 대량 아사(餓死) 사태가 벌어졌다. 현재 학계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 350만 명, 카자흐스탄에서 150만 명, 그리고 볼가강 유역, 서부 시베리아 지역, 우랄 남부 지역 등지에서 100만 명, 도합 약 600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본다.
그동안 소련에서는 이 사실을 감추고 ‘심각한 식량 문제’ 정도로만 표현할 뿐 제대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조명되고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해 기존과 다른 학설이 나온 것은 소련이 몰락한 1990년대 이후다. 이에 따르면 스탈린은 ‘의도적으로’ 농촌 사회를 공격하고 곡물을 빼앗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사태의 발단은 농업의 강제 집단화다.
1928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한 소련 당국은 낙후한 농촌 지역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겠다며 1929년부터 집단농장(콜호스·우크라이나어로는 콜호스프) 혹은 국영농장(솝호스·우크라이나어로는 라도호스프) 속에 대다수 농민들을 강제로 편입시켰다.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은 생산 수단의 ‘공유’냐 ‘국유’냐의 차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같은 성격이다. 농민들은 이 체제를 ‘새로운 농노제’라고 부르며 저항했다. 이전의 지주 자리를 국가가 꿰차고 농민을 착취한다는 의미다.
스탈린은 대다수 농민들의 저항을 힘으로 눌러버리고 2년 내에 90% 이상의 농가를 집단화했다. 그는 ‘봉건적인’ 농촌을 사회주의 방식으로 ‘진보’시키면 생산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오히려 곡물 생산이 15~20% 감소했고, 가축 수도 40% 감소했다.
애초에 집단농장 방식은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의 것은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닌 법, 농민들은 논밭에서 설렁설렁 일했고, 더 이상 자기 소유가 아닌 가축들을 애써 돌보려 하지 않았으며, 처음 사용해 보는 트랙터들은 대개 고장 나기 마련이었다.
생산이 급격히 감소하자 당연히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몫도 크게 줄었다. 집단화 이전에는 일 년에 1인당 평균 300㎏을 수확했었는데, 이제는 많은 가구가 100㎏이 안 되는 배급을 받았다.
1933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의 한 거리에 굶주린 농민들이 쓰러져 있다. /위키피디아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대량 공출이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도시와 산업 부문, 군대를 먹여 살리고 수출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집단화 이전인 1920년대만 해도 정부는 시장가격으로 곡물을 수매하여 1000만 톤 정도를 조달했으나, 1931년에는 거의 무상으로 2300만 톤을 공출했고, 그중 500만 톤을 해외로 수출했다.
1932년의 경우 정부는 수확량을 9000만 톤으로 예상하고 2900만 톤을 공출하려 했다. 그런데 실제 수확량이 6700만 톤에 불과했지만 공출은 크게 줄지 않은 2200만 톤으로, 수확의 약 3분의 1에 해당했다.
특히 수확의 43%를 빼앗긴 우크라이나의 피해가 극심하여 농민들의 반발이 거셌다. 수도 하르키우(러시아 명 하르코프)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우크라이나 대표들은 정부 정책이 비현실적이며 이 상태라면 대기근이 불가피하다고 비판했다.
농민들은 조직적으로 수탈에 저항했다. 때로 콜호스 관리들의 공모하에 수확한 곡물을 구덩이에 묻거나 마을 밖 비밀 창고에 숨기고, 공출을 피하기 위해 급히 맷돌로 밀을 빻았다. 잡히더라도 당국이 비교적 관대하게 대하리라 기대하고 아이, 노인, 여성들이 야밤에 몰래 들판에 나가 밀을 거두어왔다.
스탈린은 보고를 통해 이런 사태에 대해 알고 있었다.
1932년 10월, 측근인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를 우크라이나에 파견했다. 이들이 스탈린 및 공산당 고위 관리들과 주고받은 기록들을 보면 당시 우크라이나 상황이 어떻게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
수색과 심문, 압수 조치가 이어졌다. 식량을 숨긴 것이 발각되면 원래 내야 하는 양의 15배에 해당하는 감자와 육류를 물어야 했다. 이 경우 그야말로 마지막 남은 식량과 가축을 빼앗겨서 죽음으로 내몰렸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콜호스는 5일의 시간 여유를 주고 이 기간이 지나면 다음 해 농사를 위해 남겨 놓은 종자까지 압수했다. 압수 조치를 수행하는 말단 관리들은 닭, 토끼, 밀가루, 메밀, 심지어 절인 배추까지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공출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가혹한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1932년 11월에 5만 명이 체포되고 이 중 500명이 처형되었다. 저항하는 마을 주민 전체를 시베리아로 유형 보내기도 했다.
스탈린은 1933년 1월 1일 자로 우크라이나 공산당에 수색을 더 빠르게 진행하고, 만일 곡물을 숨겨놓은 농민들을 찾아내면 사회주의 재산을 훔친 절도범으로 강력 처벌하라는 전신을 보냈다.
법령에 따르면 10년 강제노동과 사형이 가능했다.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탈출하려 했다. 당국은 이들을 ‘소비에트의 적’으로 규정하고 기차역에 특수부대원을 배치하여 체포했다.
고향 마을로 돌려보내는 정도면 다행이지만 잘못 걸리면 쿨라크(원래 부농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당국의 방침에 저항하는 모든 농민들을 그렇게 불렀다), 반혁명 반동분자로 몰려 강제 노역을 하는 특수 지역으로 끌려갔다.
홀로도모르 추모광장의 소녀상 -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의 홀로도모르 추모 광장.
우크라이나는 매년 11월 넷째 주 토요일을 홀로도모르 추모일로 정해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본격적으로 기근과 아사가 시작되었다. 죽은 말 사체를 놓고 마을 사람들이 싸워서 힘센 사람이 고기를 얻어 집으로 갔다. 개를 잡아먹은 다음에는 쥐 고기를 먹었다.
당대의 한 기록에 의하면 자그라도브카라는 지역에서 니콜라스라는 12세 소년이 죽었는데, 어머니가 이웃 주민과 함께 시체를 먹은 후 “머리, 발, 어깨, 척추골, 갈비뼈 일부만 남았다.” 당국은 이런 상태에 처한 사람들에게 노동을 강요했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감옥으로 끌고 가서 총살에 처하거나 굶어 죽게 만들었다.
하루 평균 1만5000명씩 아사자가 나오는 현상이 8개월 동안 계속됐다. 이 기간 중 우크라이나 인구의 12%가 사라졌다.
우크라이나뿐 아니다. 카자흐스탄 또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 주민들은 목축을 하며 살아갔는데, 스탈린은 이 지역을 혁신한다며 생활 방식을 강제로 바꾸었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주민들을 정주하도록 하고, 목축 경제를 집단화했다.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정책은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1931~1933년 기간에 가축 수가 90%나 줄었다.
정부 정책에 격렬히 저항한 카자흐 주민들은 가축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도살한 후 시베리아나 중국의 신장 지역으로 도주하려 했다.
경제의 기반이 무너지자 심각한 기근 사태가 일어났다. 3년 동안 국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50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럼에도 소련 당국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정책이 사회주의적 진보라고 강변했다. 비슷한 사례로, 수십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진 19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대의 상황은 남이나 북이나 언급 자체를 피하지만 이 역시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폴란드, 오스트리아 등 주변 강국들에 둘러싸여 오랜 기간 국가를 이루지 못한 상태로 살아왔다. 처음 제대로 독립 국가를 이룬 것은 소련 몰락 이후인 1991년 이후다.
이제 독립과 자유가 무엇인지를 경험해 본 이상 또다시 타 민족의 지배하에 깔려 사는 것은 감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과거 민족 말살에 가까운 착취를 했던 러시아가 아닌가. 러시아에 주권을 빼앗기느니 목숨 바쳐 싸우고자 하는 데에는 우크라이나 민족의 아픈 역사 경험이 깔려 있다.
[홀로도모르]
우크라 민족주의 말살하려 고의로 대기근 유발해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단어를 만든 폴란드 법학자 렘킨(Rafał Lemkin·1900~1959)은 1930년대 우크라이나의 기근 사태 또한 제노사이드에 속한다고 보았다. 스탈린 당국은 생존이 위협받으리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강압적인 방식으로 식량을 유출하여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연구자들은 이 사태를 홀로도모르(Holodomor)라고 부른다. 이 말은 굶주림을 뜻하는 ‘골로드(golod)’와 탈진시켜 죽인다는 뜻의 ‘모르(mor)’를 더해 만든 단어다. 이 단어를 사용하면 가혹한 수탈 정도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 농촌은 장구한 세월 이어져온 전통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농민들은 강압적 러시아화와 사회주의 경제 조치에 저항했다.
그 때문에 소비에트 당국은 기근을 유발하여 이 세계를 몰락시키려 한 것이다. 1930년 ‘프라우다’지는 “집단화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기반을 파괴하는 특별 임무를 맡는다”고 명백하게 표명했다.
당시 곡물 징발만 없었다면 우크라이나의 수확량은 모든 사람이 충분히 생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정체성 확립에 홀로도모르는 핵심 요소다.
이 사태를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학살, 20세기 초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 사건과 같은 성격의 제노사이드라고 공식 인정한 나라는 미국, 캐나다, 폴란드, 바티칸, 브라질 등 24국에 달한다.
다만 유엔이나 유럽의회는 이 사건이 제노사이드는 아니되 ‘비인도적 범죄(crime against humanity)’라고 결정했다.
물론 러시아 학계는 우크라이나 기근 사태는 그 당시 소련 여러 지역을 덮친 식량 위기의 지역적 사례일 뿐이라며 제노사이드라는 주장을 부정하고 있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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