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세상의 끝인 줄 알았더니 새 길의 시작이었네
신안 흑산도 |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입력 : 2021.03.31 21:55 수정 : 2021.03.31 21:56
‘자산어보’ 정약전이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은 그 섬
사리마을 정약전 동상
흑산행 남해퀸호는 도초항에서 발이 묶였다. 24일 오후 일대 해상은 안개로 자욱했다. 도초도와 비금도를 잇는 길이 937m의 서남문대교의 비금도 쪽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정약전(1758~1816) 유배지 흑산을 무대로 한 영화 <자산어보>가 31일 개봉했다. 앞서 김훈이 <흑산>(2011), 한승원이 <흑산도 하늘길>(2005)에서 이 섬을 창작 공간으로 삼았다. 안개 때문에 유배인 심정의 일단을 헤아려 본다. 안개 끝에 당도할 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
‘해상국립공원’ ‘1004섬’ 같은 단어 덕에 흑산 이미지는 맑고 깨끗하다. 조선시대 그 이미지는 어두웠다. 조선왕조실록(sillok.history.go.kr)의 ‘흑산’ 검색 결과는 204건인데, 다수가 유배 관련 내용이다.
1735년(영조 11년) 홍계유는 이태중을 흑산도로 유배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며 “험난한 바다와 악독(惡毒)한 장기(장氣)가 다른 정배지(定配地)보다 심”하다고 했다. 1738년(영조 14년) 송인명은 옛사람 말을 빌려 “(흑산도 가는) 길에 형극(荊棘)을 열어 놓았다”며 “경솔하게 귀양 보낼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인식들이 흑산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자극했을 것이다.
흑산도 지명은 지형이나 자연물에서 비롯된 게 많다. 부자가 되려는 욕망, 충효를 다하라는 강요가 없다. 심리마을은 산골짜기에 들었다고 지피미라 불렸다. 흑산도 산이 푸르다 못해 검어 보인다는 뜻이다.
도초항에 정박한 지 1시간이 지났는데도 안개가 걷힐 기미가 안 보인다. 쾌속선도 안개를 꿰뚫고 나아가진 못했다. 누군가 선내 매점에서 붕어싸만코를 사 승객에게 돌렸다. 흑산항에서 먹으려던 이른 저녁 식사를 빙과류로 때우고 났더니, 출발지 목포로 회항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안개 때문에 회항하는 건 몇 년 만에 처음인 듯하네.” 승객 몇몇이 목포여객선터미널(mokpo.ferry.or.kr)을 나오며 말했다. 터미널 직원은 “일교차가 커 안개가 낀 듯하다”고 전했다. 이튿날 오전 7시50분 출항 예정인 배도 움직이지 못했다. 터미널 대합실 대형 유리창 사이 해가 안개를 걷어내며 스며든 건 9시쯤이다. 새벽은 아니었지만, 비유적 의미의 서광(曙光)을 체험하는 듯했다.
정약전이 목포항에서 흑산도로 간 건 아니다. 1801년 11월5일 한양을 출발한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은 1801년 11월21일 나주 율정점에 도착했다. 다음날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으로 떠났다. 두 사람은 그날 이후 만나지 못했다.
정약전의 경로는 나주 다경포(현 무안군 원성내마을)를 경유한 최익현(1833~1906)의 그것과 같으리라는 추정만 나와 있다. 최익현이 입도한 곳이 우이도(牛耳島)다. 소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 우이도를 소흑산, 지금의 흑산도를 대흑산도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 가거도를 소흑산도라 부르며 혼동이 생겼다. 유배인은 소흑산과 대흑산 중에서 거처를 정했다. 정약전도 우이도 진촌(진리)에 자리 잡았다. 정약용은 강진 보은산을 우이산(牛耳山)으로도 부르는 것을 알고 형을 그리는 시를 짓기도 했다.
영화 <자산어보>로 창대 장덕순을 주목하는데, 또 살펴봐야 할 인물이 우이도의 홍어 장수 문순득(1777~1847)이다. 그의 일생 역시 극화해도 충분할 만큼 파란만장하다.
1801년 12월 태사도(현 태도)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했다. 유구(일본 오키나와), 여송(필리핀), 오문(마카오), 중국을 떠돌다 1805년 1월 우이도로 돌아왔다.
그때 만난 사람이 정약전이다.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천초(天初)라는 자(字)를 지어주었는데, ‘개벽하고 해외 여러 나라를 최초로 보았다’는 뜻이다.
정약용이 문순득 아들의 이름을 여환(呂還)이라 지었다. 문순득의 구술로 정약전이 정리한 표류기가 <표해시말>이다. 유배인과 표류인의 교류로 나온 결과물이다.
이날 뱃길도 짙은 안개가 가로막았다. 도초항에서 다시 회항할까 초조했다. 목포항을 떠난 지 2시간. 흑산항에 도착했을 때 안개는 말끔히 사라졌다.
볼거리는 흑산항 일대의 죽항리, 예리, 진리에 집중됐다. 흑산항을 조망하는 상라산 전망대, 포토존으로 유명한 S자 모양의 구불구불 일주도로가 흑산도 북쪽에 있다. 관광 키워드 중 하나인 ‘흑산도 아가씨’ 동산도 흑산항 오른편에 들어섰다. 신안철새전시관 같은 문화시설도 진리에 건립됐다. 관광이 목적이라면, 이곳부터 섭렵해야 한다.
정약전 지낸 사리마을 포구와 칠형제바위
정약전이 유배 기간 중 가장 오래 살았던 사리(沙里)마을의 옛 이름은 모래미다. <자산어보>를 지을 때 장창대와 함께 이 포구를 드나들었을 것이다. 시스택엔 칠형제바위 전설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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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와 <자산어보>의 흔적을 찾으려면 사리(沙里)마을로 가야 한다. 옛 이름은 모래미다. 흑산도 곳곳의 지명은 담백하다. 해양 생물을 건조하게 기록한 <자산어보>의 문체나 서술과도 닮았다.
한국 지명은 설화나 유교, 기복신앙에서 온 것이 많다. 삼학도나 구룡마을, 효자동, 보화마을 같은 이름이 사례다. 지형이나 산, 바다, 바위 같은 자연물도 한국 지명의 한 축을 이룬다. 흑산 이름이 지형이나 자연물에 기댔다. 흑산(黑山)도 산이 푸르다 못해 검어 보인다는 뜻에서 왔다.
청촌(靑村)마을은 푸르미였는데 주변 수림이 울창해 붙은 이름이다. 심리(深里)마을은 산골짜기에 형성됐다고 지피미라 불렸다. 곤궁한 사정을 그대로 옮긴 이름도 있다.
암동(暗洞)마을은 살기 힘든 어두운 곳이란 뜻이다. 미사여구나 인간의 욕망을 찾긴 힘들다. 자연에서 낚시와 채취로 먹고살던 이들의 가난하지만 간소한 삶을 지명에서 들여다본다.
사리마을과 한다령 고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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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가 없는 건 아니다. 사리마을로 가는 묵령고개 마루 거북 겹 바위엔 전설이 흐른다. 만삭의 바다거북이 표류 중인 어부를 구해 등에 업고 마을로 왔다. 세 마리를 순산하고 죽자 주민들이 마을 수호신으로 모셨다. 작은 이야기에서 인간과 동물의 연대를 본다.
사리포구에도 칠형제바위 전설이 내려온다. 일곱 개의 크고 작은 섬이 자연 방파제를 이룬다. 암석해안이 침식 작용으로 생긴 시스택(Sea stack)이다. 사람들은 이 지질 작용에 ‘홀어머니가 태풍 때문에 물질을 못하자 칠형제가 바다에 들어가 태풍을 막다 섬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정약전 동상이 포구를 내려다본다. 바다는 수면 아래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맑다. 주황색 지붕을 얹은 주택들이 돌담, 밭길 따라 옹기종기 들어섰다. 어두운 기운을 느낄 순 없다. 미역을 공동 재산으로 여겨 평등하게 분배한 기록도 남았다.
사리마을 정약전 사촌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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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은 <자산어보> 책머리에 “흑산이란 이름이 멀고 어두운 것을 뜻해 무서웠다”고 적었다.
정약용도 “흑산이라는 이름이 듣기만 해도 으스스하여 내 차마 그렇게 부르지 못하고 서신을 쓸 때마다 玆山(자산)으로 고쳐 썼는데, 玆(자)란 검다(黑)는 뜻”이라고 기록했다.
정약전은 유배인으로 추정되는 ‘계고재’라는 인물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늘가에 똑같은 나그네 신세”라고도 적었다.
정붙여 산 때문일까, 타고난 성정 덕일까. 정약전은 이곳을 예찬한다. 연세대 학술정보원이 2012년 발견한 정약전 시문 40여편 중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에서 흑산을 두고 “세상의 교만과 사치, 음란과 방일, 절도와 같은 갖가지 악한 습관들이 더럽히지 않는다”고 썼다. 형제는 편지에서 각자의 유배지 강진과 흑산을 두고 서로 자랑했다.
정약전(왼쪽)과 최익현의 이력과 죄명을 적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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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흑산 주민들을 ‘오랑캐 같은 섬사람’이라고 표현했지만, 정약전은 계급 구별 없이 섬사람들과 어울렸다. 정약전은 ‘사포에 몇 명이 모여 두보의 시에 차운하다’라는 시에서 “푸른 산 오두막집에 찬 기운 스며들자/ 사방 이웃들이 막걸리 잔을 건네네/ 나무꾼에 고기잡이까지 기쁘게 친구 되니/ 집집마다 마음껏 웃음꽃 피었구나”라고 썼다. 1814년(추정)
정약용이 해배된다는 소식을 듣고 “아우가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며 보러 오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면서 우이도로 가려 했다. 주민들은 정약전을 붙잡아 말렸다. 정약용은 ‘귀양살이하는 사람이 다른 섬으로 옮기려는데 길을 막으며 더 있어달라고 했다는 일은 형님 말고는 들은 적이 없다’는 기록도 남겼다.
주민들이 정약전에게 애정을 품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듬해 우이도로 가 동생을 기다리던 정약전은 다음해인 1816년 죽었다.
장창대에게 지어준 시도 함께 발견됐다. 장창대에 관한 기록은 “집에 틀어박혀 손님을 거절하면서 고서를 탐독했다” 등 <자산어보> 몇 구절이 전부다.
장창대 고향 대둔도에도 이 시가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장창대를/ 남들보다 뛰어난 선비라 하지/ 옛 책을 언제나 손에 들고/ 오묘한 도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네/ 초저녁부터 이야기 나누다 보면/ 어느새 바다 소리가 들리니/ 어찌하면 한낮부터 밤이 다하도록/ 이치의 근원을 깊이 더듬어 볼까.” 장창대를 선비이자 동료로 여기며 교류했다. 기록들에서 세상 끝 같은 곳에서 단절을 극복하며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한 정약전을 본다. 흑산 사람들과 함께하며 새 세상을 능동적으로 끌어내려 한 듯하다.
허경진(연세대 국문과 교수)의 ‘조선시대 유배지의 글쓰기-정약전·정약용 형제를 중심으로’ 등이 정약전의 흑산도 삶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최근의 자료다.
허경진은 “주민들과 친구가 되어 살았기에 낙원처럼 인식된 것”이라고 했다. 허경진이 번역한 시비가 사리마을 유배문화공원 곳곳에 들어섰다. 이 공원에 정약전이 아이들을 가르치던 사촌서당(복성재)을 복원해뒀다. 폐교된 흑산초등학교 서분교 앞에도 정약전을 비롯한 유배인 17인의 기념비가 설치됐다. 박치륭 비에 적힌 죄목은 ‘간언(諫言)’이다. 여러 사람들이 당시 역적을 시대와 권력에 맞선 이들로 받아들인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야 했던 이들에 대한 연민의 정도 작용하는 듯하다.
사리마을은 옛날 오지였다. 중심인 흑산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마을이다. 조선시대 흑산진에서 사리마을로 가려면 배로 이동하거나 산을 넘어야 했다. 지금은 일주도로가 생겼다. 일주(一周)는 그저 한 바퀴 돈다는 뜻인데도 질주의 느낌이 강하다. 흑산일주도로를 제주일주도로와 비교해선 안 된다. 절벽을 깎아 포장한 곳이 많다. 오르고 내리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일주도로에서 본 대장도4
일주도로와 거북 겹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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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도로를 돌아 흑산항으로 향했다. 해가 떨어지기 전 상라산 전망대에 도착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경치에 종종 발걸음을 멈췄다. 도로변 만개한 동백나무가 따라온다. 산중 곳곳엔 진달래가 피었다. 사리마을 갈 때는 영산도가, 떠날 때는 대장도가 시선을 잡아 끈다.
안내지도엔 없는 장소도 있다. 그중 하나가 현충탑이다. 흑산도에 현충탑이라니? 한국전쟁과 월남전 참전 군인과 전사자를 기념하는 비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사망자 이름도 새겼다. 외딴 섬도 전쟁을 비켜나지 못했다. 징집과 징용의 대상이 됐다. ‘반공’의 기록도 여기저기 남아 있다. 비리마을 간첩은거동굴 쪽엔 특전사 대원들이 1969년 6월 간첩을 소탕했다는 표지판이 걸려 있다. 사리마을 폐교에도 이승복 동상이 서 있다.
폐교된 흑산초 서분교와 이승복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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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라산에 이르니 김이수의 묘가 나온다. 수탈과 착취로 시달리던 섬 주민들의 참혹한 삶을 바로잡으려 한 이다.
신안문화원의 <김이수 전기>에 기록된 도갈가(搗葛歌)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아침 저녁 주리다 참지 못해서 모두 칡이나 캐려고 저 산 언덕을 오른다오. 큰 돌도 굴리며 거친 가시밭을 뒤져서 칡 한 뿌리 얻기가 마치 용이 여의주를 얻는 것처럼 어렵다네.”
김이수는 1791년(정조 15년) ‘닥나무 세금’을 개혁하려고 한양까지 올라가 정조의 행차를 가로막고 ‘격쟁(擊錚)’을 올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매번 종이를 뜨는 일이 생길 때면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에게 닥나무 껍질 1만2900근의 대가로 돈 500냥을 규정으로 정해 받아들이는 것이 잘못된 규례가 되고 말았다”고 호소하는 내용이 나온다. 김이수 고향도 대둔도다.
최익현 유허비와 수령 250년인 보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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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반기부터 근대와 현대까지 표류와 유배, 착취와 저항, 참전과 징용 같은 작은 섬에서 진행된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면 놀랍기만 하다. 이런 주제를 잡고 흑산도로 갈 만하다.
촬영지를 찾을 목적으로 간다면 헛걸음이다. 영화는 도초도·비금도·자은도에서 촬영했다
흑산도…세상의 끝인 줄 알았더니 새 길의 시작이었네. [출처 : 경향신문 트레블]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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