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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역적 김옥균 시신을 즉시 능지처사하라"

by 한국의산천 2020. 8. 19.

[박종인의 땅의 歷史] "역적 김옥균 시신을 즉시 능지처사하라"

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08.19 03:14 | 수정 2020.08.19 11:13

 

[225] 조선형벌잔혹사 ③/끝 최후의 능지처사 - 김옥균


영조의 경고와 김옥균

재위 35년째인 1759년 한가위 나흘 뒤, 온갖 잔혹 형벌을 총동원해 정적을 다 처리한 영조가 명을 내렸다. 일체의 잔혹 형벌과 고문을 금한다는 하명이다. 아주 근엄하다. 그 가운데 역률(逆律) 추시(追施) 금지령이 들어 있었다. '추시'는 법을 소급 적용하는 조치다. 은전(恩典)이든 형벌이든 죽은 사람에게 적용하는 법적 조치가 추시다.

 

충남 아산에 있는 김옥균 유허. 1894년 양력 4월 서울 양화진에서 부관참시와 능지처사 당한 뒤 김옥균 시신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일본으로 가 묘 두 군데에 안장됐다. 아산에는 김옥균의 옷가지와 아내 유씨가 합장돼 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던 김옥균은 10년 뒤 청나라 상해에서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했다. 서울로 운송된 시신은 고종 명에 의해 능지처사 됐다. 목을 베고, 온몸에 칼집을 내고 사지를 절단하는 형벌이다. 능지처사형은 원래 산 사람에게 가하는 잔혹 형벌이지만 김옥균은 부관참시를 겸한 능지처사형을 당했다.

135년 전인 1759년 법적으로 금지된 반역죄 소급형이었고, 조선 왕국의 마지막 능지처사형이었다. /박종인 기자

영조는 이렇게 명했다.

"본인이 죽고 나서 반역죄를 소급 적용한 처벌은 금지한다.

이를 따르면 나라가 흥왕하고 따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身已死而追施逆律者禁除 遵則興不遵則亡 ·신이사이추시역률자금제 준칙흥부준칙망)(1759년 8월 19일 '영조실록')

'반역죄[逆律·역률]'에 관한 한 소급 처벌은 금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준엄한 경고도 덧붙였다.

 

"이 뒤로 군주가 이런 짓을 하거든 신하는 이 명으로 간쟁을 하라.

이를 따르지 않고 군주에게 영합하는 신하는 간사한 소인이다.

나라 흥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으니, 따르면 나라가 흥왕하고 따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이후 이 규정은 조선 형법전인 '대전통편'에 성문화됐다.

 

사자(死者)에 대한 소급 처벌은 이후 헌종 때 부모를 죽이고 자기도 죽은 황해도 재령 사람 윤가현과 충청도 정산 사람 임태두가 그 시신을 거리에 팽개쳐버리는 폭시(暴屍)형을 당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실록에 나오지 않는다.(1845년 8월 19일, 1848년 6월 17일 '헌종실록')

 

역률 추시가 법적으로 금지되고 135년 뒤 어느 봄날 역적 하나가 청나라에서 암살돼 그 시신이 돌아오매, 역적 시신은 그 즉시로 강변에서 중인환시리에 역률 추시됐다. 이틀에 걸쳐 사내는 관에서 끄집어내져 목이 베이고 온몸에 칼집이 나고 사지를 절단당하는 부관참시와 능지처사형을 당했다.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 처형 이야기다.

 

상해에서 벌어진 암살극

 

박종인의 땅의 歷史

 


1884년 갑신년 겨울 동료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과 벌였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흘 만에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일본 체류 내내 암살 위험에 시달렸다. 암살 시도 기미가 보였을 때 김옥균은 고종에게 "왜 경솔한 일을 행하여 국체를 손상시키고 성덕(聖德)을 더럽히는가"라며 원망을 하기도 했다.('한국근대사기초자료집 2', 1886년 김옥균이 고종에게 보낸 상소문)

 

메이지유신 이후 처음으로 일본으로 건너온 외국인 정치 망명객 1호였지만 일본에서도 김옥균은 골칫거리였다.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오가사와라 섬과 홋카이도 등지로 유배 아닌 유배를 보내며 해결 방안을 찾고 있었다. 그런 김옥균이 상해에 가서 청나라 거물 이홍장을 만나 조선 독립과 개혁을 담판하겠다는 것이다.

 

1894년 양력 3월 23일 김옥균은 고베 항에서 청나라 상해로 가는 배를 탔다. 일본에서 친해진 조선인 홍종우도 동행했다. 출국 직전 김옥균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 만사 운명이다. 이홍장은 나를 속일 생각이겠지만 나는 속을 작정으로 배를 탄다. 5분만이라도 담화 시간이 주어지면 나의 것이다."(미야자키 도텐, '김옥균 선생을 회고하며', 박은숙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너머북스, 2011, p197 재인용)

 

3월 27일 상해 동화양행 호텔에 투숙한 다음 날 옆방에 있던 홍종우가 '자치통감'을 읽고 있던 김옥균에게 권총을 쐈다. 세 발을 맞은 김옥균은 즉사했다. 프랑스 유학파인 홍종우는 일찌감치 병조판서 민영소가 밀정 이일직을 통해 포섭한 자객이었다. 수구 근왕파인 홍종우는 2년여 김옥균과 친분을 쌓은 끝에 '역적 처단'에 성공한 것이다.

 

"역적에게 또 한 번 죽음을!"

김옥균이 처단됐다는 소식이 조선 조정에 전해지자 '온 조정은 뛸 듯이 기뻐하며 모든 관리가 도성문으로 나가 맞이해야 한다고 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권 3. 제방기밀신 '김옥균의 유해와 홍종우의 도착 및 김옥균의 유해처분의 건') 4월 12일 홍종우는 김옥균 시신을 중국식 관에 넣고 '大逆不道玉均(대역부도옥균)'이라 적은 천을 덮은 뒤 청나라 군함을 타고 인천에 도착했다. 홍종우는 관과 함께 배를 갈아타고 다음 날 양화진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관리는 몇 명에 불과했다.

 

 

1894년 일본에서 발행된 '김옥균씨 조난사건' 목판화. 왼쪽이 김옥균이고 오른쪽 권총을 든 사람이 홍종우다. /도쿄게이자이대 도서관

4월 14일 검시관을 보내 김옥균임을 확인한 조정에서는 난리가 났다. 전·현직 대신들이 연명해서 고종에게 이렇게 상소했다. "천하 고금에 없는 흉악한 역적으로서 누군들 그 사지를 찢고 살점을 씹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외국에서 목숨을 부지하여 천벌을 받지 않았으므로 여론이 갈수록 들끓었는데 이제 귀신과 사람의 격분이 조금 풀리게 되었습니다. 김옥균이 비록 죽었지만 소급해서라도 목을 잘라 두루 돌리고 법을 밝힐 수 있게 되었나이다.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이어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인조 때 역적 이괄과 영조 때 역적 신치운이 능지처사를 당했듯 김옥균에게도 능지처사형을 내려달라"고 연명으로 보고서를 올렸다. 곧바로 홍문관에서도 사헌부·사간원과 똑같은 내용으로 상소문을 올렸다.

 

고종이 말했다. "간절한 경들 청은 피를 뿌리고 눈물을 머금고 징계하고 성토하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다. 귀신과 사람이 공분하고 여론이 더욱 격화되어 그만둘 수가 없다. 윤허한다."(1894년 음력 3월 9일 '고종실록')

 

고종은 스스로 의견을 내기보다는 관료들의 의견을 마지못해 따르는 식으로 정책을 결정하곤 했다. 고종의 의사 결정 패턴은 40년 동안 그렇게 동일했다. 김옥균 시신 처리 방침 또한 그 패턴에 따라 결정됐다. '관료들의 결정이 그러하니 나 또한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의금부에서는 "'대명률'에 따르면 모반과 대역은 모두 능지처사를 하되, 즉각 시행한다고 규정돼 있다"고 보고했다. 또 "연좌된 사람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집은 허물어 연못으로 만들겠다"고 보고해 고종 윤허를 받았다. 그러니까 죽은 김옥균은 그 자리에서 재판도 없이 '부대시(不待時·즉각) 능지처사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불법으로 진행된 마지막 능지처사

문제는 이날 결정된 역률 추시는 135년 전 영조와 법률에 의해, 죽은 사람 가족을 연좌시키는 '노적(孥籍) 추시'는 1776년 9월 1일 정조가 즉위하면서 금지된 형벌이라는 사실이었다. 더 큰 문제는 현직 대신과 사간원과 사헌부 그리고 홍문관은 이 금지 조항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전문 관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 최후의 능지처사는 그렇게 감정 가득한 회의 속에서 법을 무시한 채 결정됐고, 집행됐다. 그것도 죽은 자를 관에서 꺼내 그 시신에 집행하는 부관참시를 겸한 능지처사였다.

 

 

처형 직후 양화진 형장 사진. 참수된 머리에 내걸린 '대역부도옥균' 글자는 암살범 홍종우가 썼다. /미 헌팅턴도서관 잭 런던 사진 자료

조정의 일치된 결정에 따라 김옥균 시신에 대해 곧바로 형이 집행됐다.

집행은 양화진 보리밭에서 있었다. 땅에 반듯하게 엎드린 시신에 나무받침을 댄 뒤 머리와 오른손, 왼손이 톱으로 잘려나갔고 이어 두 발이 도끼로 잘려나갔다. 이어 등 양옆으로 1인치(약 2.5센티미터) 깊이 칼집을 세 군데 낸 다음 머리를 밧줄로 묶어 대나무 삼발이에 내걸었다. 손과 발도 양쪽으로 함께 내걸었다. 몸은 그대로 바닥에 내버려놨다.

 

집행을 마치는 데 모두 이틀이 걸렸다.('한국근대사에 대한 자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외교보고서' 47, 1894년 5월 10일, p153)

 

그렇게 실패한 혁명가는 재판 없이 암살당했고, 그 시신은 본국 정부에 의해 불법적으로 훼손돼 흩어졌다. 외국 공사들이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조각난 시신은 반도 전체에 종횡으로 조리를 돌리다가 경기도 직산 야산에 버려졌고 손과 발 하나씩은 일본으로 옮겨져 안장됐다.(위 보고서)

 

한 달 보름이 지난 5월 31일 고종은 "역적에게 능지처사를 추시하여 귀신과 사람의 분이 풀렸다"며 대사면령을 발표했다.(1894년 4월 27일 '고종실록') 또 한 달 뒤인 6월 30일 고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직접 과거시험 합격자 방을 붙였다.(5월 27일 '고종실록') 거기에는 김옥균 암살자 홍종우도 이름이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 과거시험을 '종우과(鍾宇科)'라고 불렀다.(황현, '매천야록'2 갑오년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 홍종우는 다음 날 6품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됐다. 바야흐로 동학혁명군에 의해 전주성이 함락된 다음이었다.

 

영조가 한 예언은 옳았다.

"따르면 나라가 흥왕하고 따르지 않으면 멸망하리라."


[사진 한 장에 담긴 악연]

왼쪽은 갑신정변 주역인 서광범(왼쪽)과 김옥균 사진이다. 서광범은 1881년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양복을 구입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서광범과 김옥균은 각각 미국과 일본으로 망명했다.

서광범(왼쪽)과 김옥균.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조선사편수회 유리건판(1884년 촬영 추정)이다.

1886년 지운영이라는 사내가 '도해포적사(渡海捕賊使·바다 건너 역적을 잡는 특사)'라는 고종 국서를 들고 김옥균을 암살하러 일본에 갔다. 미수에 그친 지운영은 유배형을 받았다.

 

옆 사진은 갑신정변이 터진 1884년에 촬영 한 사진이다. 촬영한 사람은 바로 김옥균 암살을 시도한 그 지운영이다. 지운영은 종두법을 도입한 지석영의 형이다.

 

지운영은 1882년 수신사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사진술을 배워 1884년 3월 서울 종로에 사진관을 차렸다. 훗날 암살범이 훗날 역적들 사진을 촬영한 것이다. 몇 달 뒤 두 사람은 망명하고 사진관은 일본인 소유로 착각한 시민들에 의해 파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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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년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한 갑신정변 주인공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반청(反淸) 자주와 반(反)부패를 내건 혁명이었지만 여건과 준비 부족으로 4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또 다른 주역 홍영식은 고종을 북묘까지 호위했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난자당해 죽었다. 박영효는 훗날 친일파로 돌아섰고 서광범은 미국에서 죽었다. 서재필은 미국인이 되었다. 김옥균은 1894년 고종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김옥균의 시신을 능지처참한 뒤 고종은 이를 축하하는 대사면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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