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 영화 평론ㅣ<알피니스트-어느 카메라맨의 고백>] “산악영웅 이미지는 카메라 연출이 만든 것”
글 오영훈 기획위원 입력 2020.02.28 17:35
고 임일진 감독 연출작 2월 27일 개봉… 산악인의 등반 못지않게 죽음에 대한 고찰 담아
2009년 파키스탄 스팬틱 정상에 선 원정대.
산악영웅은 누굴까? 산악영웅을 정의하자면 ‘불굴의 의지로 거대한 절벽에 도전하고 세속적인 욕심에 초연하며 동료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산악영웅’이라고 칭해지는 산악인들의 실제 모습이 이 정의에 부합하는가? 우리나라 유일의 산악영화 전문 감독이었던 고 임일진(1969~2018) 감독은 “산악영웅의 이미지는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최대한 감동적으로 기록해 준 카메라 연출이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알피니스트-어느 카메라맨의 고백>(김민철·임일진 공동 연출)이 2월 27일 개봉했다. 여러 면에서 기존 산악영화·다큐멘터리의 전형을 탈피한 문제작이다. 고난 끝 승리의 영웅서사나, ‘동료를 구하는 자와 외면하는 자’의 이분법, 처절한 사투 끝에 비장한 최후 등의 천편일률적인 산악 영화의 도식을 벗어났다. 그 대신 죽음을 무릅쓴 등반과 이를 포장해 그려내는 미디어의 시선을 문제 삼았다. 임 감독은 지난 2018년 가을, 김창호 대장과 함께 네팔 구르자히말 등반에 촬영대원으로 합류했다가 사고를 당했다.
영화의 주 내용은 임 감독이 2009년부터 2013년 사이 네 번의 고산원정대 대원으로 참여해 촬영한 영상과, 이를 돌아보는 임 감독 본인의 인터뷰다. 또한 기존 산악 영화에서 암묵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장면들이 함께 놓인다. 등장인물이 카메라맨과 연출에 대해 상의하면서 ‘그럴듯한 장면’을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어떤 자세가 더 나은지, 심지어 녹음기 배터리가 충분한지 확인하기도 한다. 등장하는 대원들도 그다지 영웅적이지 않다. 서로 장난도 치고, 싸우기도 하고, 고집도 부린다.
알피니스트 - 어느 카메라맨의 고백 (Alpinist, 2016) 개요 다큐멘터리. 감독 임일진, 김민철. “아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원정대의 주인공들은 나의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돌아와야 한다.” 무명 원정대의 힘찬 도전과 짜릿한 성공부터, 동료의 죽음까지 기록해야만 했던 어느 카메라맨. 산을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결국 히말라야에 영면하게 된 그의 못다 한 마지막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는 이처럼 연출자와 등반가의 공모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대단한 성취를 강조하기 위해 등반을 연출하는 과정이다. ‘한국 최초’, ‘알파인스타일’, ‘초등’ 등의 수식어가 붙을 수 있게끔 등반의 내용을 조절한다.
2011년 촐라체(6,440m) 원정에서는 36시간 만에 등반 및 하산 완료라는 무리한 계획을 추진했다. 등반에 나선 두 대원은 꼭 36시간 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차가운 주검이었다. 김형일 대장과 장지명 대원이다.
연출자는 끝까지 이들의 죽음을 카메라에 담는다. 직접 소유자가 없어진 텐트 안의 소지품을 정리하며 영웅서사의 마지막을 완성한다. 연출자는 마침내 오열을 터뜨리고 만다. 마치 이들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촐라체 북벽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장지명 대원.
“에베레스트가 어떤 어려움을 줄까 궁금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한국 산악계에 뿌리 깊은 영웅주의를 비판하는 고발성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임 감독은 더욱 깊은 철학적 의문으로 파고 들어간다. 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이다.
촐라체 원정대에 이어 또 하나의 죽음이 얹어진다. “에베레스트가 나에게 어떤 어려움을 줄까 궁금하다”고 말하는 서성호 대원의 것이다. 서 대원은 가식적인 면모가 전혀 없는 순수한 산악인이다. 그러나 그도 마침내 사망하고 카메라는 이때도 죽음을 놓치지 않고 담는다.
촐라체 북벽 아래서 김형일 대장과 장지명 대원의 시신을 헬리콥터에 싣고 있다.
영화 속 임 감독은 서 대원의 마지막을 보며 “(서성호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을까?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자살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돌아가야 할 곳, 마침내는 가야 할 곳으로 간 것”이라고 말한다.
임 감독은 두 죽음을 나란히 회상하며 질문을 던진다. 순수한 산악인이나 영웅적인 산악인이나 모두의 죽음은 왜 다를 것이 없는가?
혹 죽음은 제각각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 의미는 후에 덧씌워진 것에 불과하다. ‘순수’, ‘진짜’란 수식어도 마찬가지로 ‘만들어진’ 의미다. 자아의 승리를 기대하지 않는 ‘순수 등반’, 의도된 연출이 없는 ‘진짜 영상’은 모두 허울일 뿐이다.
서성호 대원.
그래서 임 감독은 스스로 순수하다고, 진짜를 촬영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학산악부 출신으로 영화보다 산을 먼저 접한 그는 “나도 ‘알피니스트’라 불리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이제 영웅의 꿈을 체념한 듯 보이는 그는 “36시간 따위”의 과도한 연출은 그만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담담하게 하자”며 구르자히말로 떠난다. 자기 안에 뭐가 있는지는 산에 가보면 안다고 했던 김창호 대장과 함께.
그리고 임 감독은 스스로 덧없는 죽음을 맞는다. 죽음의 덧없음을 끝까지 기록하고 회상한 뒤, 스스로 이를 증명한 셈이다. 결국 죽음이 무엇인지, 우리의 운명이 무엇인지는 끝까지 가봐야만 한다.
북한산 인수봉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인터뷰에 임한 임일진 감독.
그렇게 90분에 걸친 임 감독의 죽음에 대한 고찰은 끝이 난다. 언덕 너머 까만 점이 되어 사라지는 등반가를 지켜보며 장대한 오케스트라 곡으로 재탄생한 설악가가 흐르는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산악인을 지배해 온 온갖 이분법들의 허망함을 노래한다.
알피니스트는 삶의 철저한 공허 앞에 온몸으로 그림을 그려 온 예술가들이다. 따라서 생애를 바쳐 산을 그려낸 임일진도 알피니스트다. 지독한 ‘영웅병’을 앓으면서도 철저히 카메라 뒤에서만 평생을 보낸 그를 기어코 카메라 앞에 앉힌 김민철 감독의 연출도 좋았다. 산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꼭 봐야 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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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촬영 1인자 임일진 감독, 네팔 참변
By 뉴시스 -
등록 : 2018년 10월 14일 오후 5:32 / 수정 : 2018년 10월 14일 오후 5:32
13일(현지시간) 네팔 구르자히말산에서 산사태를 만나 한국인 등반대원 5명, 네팔인 셰르파 4명 등 9명이 숨졌다.
사고를 당한 한국인은 ‘2018 코리안웨이 구르자히말 원정대’ 대원들로 김창호(49) 대장을 비롯해 유영직(51·장비 담당), 이재훈(25·식량 의료 담당) 대원과 한국산악회 정준모 이사, 임일진(49) 촬영감독이 숨졌다.
이 중 임 감독은 원정대의 루트 개척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하기 위해 동반했다가 변을 당했다.
임 감독은 한국외국어대 88학번으로 외대산악회 입회하면서 등반을 시작했다. 한국 산악 촬영의 1인자이자 산악 영화 개척자로 통한다. 알프스 몽블랑(4808m), 히말라야 마힌드라(6020m), 스팬틱(7020m), 가셔브룸 5봉(7147m), 촐라체(6440m), 에베레스트(8848m) 루굴라(6899m), 임자체(6189m) 등을 직접 오르며 장엄한 대자연과 인간의 지칠 줄 모르는 도전을 카메라에 담았다.
2007년 캐나다 부가부 산군 빅월 원정대 활약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벽(The Wall)’으로 이듬해 제56회 이탈리아 트렌토 국제 산악 영화제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본상인 ‘이탈리아 알파인 클럽상’을 거머쥐었다.
2015년 황정민(48)·정우(37) 주연 영화 ‘히말라야'(감독 이석훈)의 네팔 에베레스트 특수 촬영 감독으로 나서 생생한 현장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영화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임 감독은 최근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북한산 인수봉을 배경으로 한 극영화 ‘북한산 다람쥐'(가제) 제작을 추진하는 등 국내 산악 영화의 신기원을 만들어가던 중 안타까운 죽음을 맞아 등산계는 물론 영화계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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