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연산군이 명했다 "왕을 능멸하는 사헌부 간부를 당장 국문하라"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20.01.14 03:13
[196] 조선 검찰 사헌부 잔혹사
- 세종과 연산군의 경우
조선시대 검찰인 사헌부…
역대 왕마다 눈엣가시
세종 때 사헌부 관리들이
양녕대군 처벌 강력 요구
수사 중단 요구하던 세종은
관리들 좌천시킨 뒤
줄줄이 구속하고 파면
연산군은
사헌부 권한 박탈해
왕 직속 의금부로 넘겨
급기야 언론 삼사(三司) 폐지…
결국 쿠데타로 몰락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서울 광화문광장 동쪽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있고, 광장 건너 서쪽 인도에는 안내판이 하나 박혀 있다. '사헌부 터'라고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 전까지 광장 양쪽에 늘어섰던 관청들 가운데 검찰에 해당하는 사헌부가 있던 자리다. 그 문구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사헌부는 왕의 언행이나 나랏일에 대해 논쟁하고 비리 관원을 탄핵하는 관청이었다…. 국가 기강과 관련한 큰 권한을 지녔기 때문에…' 언행을 감시당하고 비리를 조사당하는 왕과 관리들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장악하기를 원했던 기관이었고, 본질적으로 좋아할 이유가 없는 기관이다.
권력자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조선시대 검찰 사헌부 이야기.
양녕대군의 비리와 세종과 사헌부
건국 초부터 사헌부와 왕들은 갈등이 심했다. 성군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건국 후 100년도 되지 않은 조선 왕국 조직과 이념을 정비하고 문자를 만든 왕이지만 그 또한 사헌부만은 달갑지 않았다. 특히 사헌부가 측근 가운데 최측근인 맏형 양녕대군 비리 수사에 돌입하자 세종은 학을 떼고 사헌부를 와해시키는 전제 권력을 행사했다.
1418년 6월 3일 조선 3대 국왕 태종은 세자 이제(李禔)를 폐하고 막내아들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둘째 효령대군도 세자 후보였으나 '술이 약해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양녕은 다른 사람 첩인 어리(於里)를 강제로 자기 첩으로 빼앗아 임신을 시키는가 하면(1418년 3월 6일 '태종실록'), "아버지는 첩을 마음대로 두고 아들은 못하게 하니,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고 반협박조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던 권력자였다.(1418년 5월 30일 '태종실록') 그 외에 구차하고 숱한 이유로 태종은 양녕을 경기도 광주로 쫓아버렸다.
서울 광화문광장 북쪽 끝,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맞은편 인도에는 '사헌부 터'라는 안내판이 박혀 있다. 조선시대 검찰 격인 사헌부가 있던 자리다. 권력에 대한 감시와 쟁론이 주 역할이었던 사헌부는 권력으로부터 끊임없는 견제와 압박을 받았다. 세종은 양녕대군에 대한 친·인척 비리를 수사하던 사헌부를 와해시켰고, 연산군은 아예 사헌부를 폐지시켰다. /박종인 기자
그때 그가 내린 명은 이러했다. "내가 죽은 뒤에도 양녕은 서울에 내왕하지 못한다(自予千歲之後 禔不得往來于京: 자여천세지후 제부득왕래우경)."(1427년 5월 8일 '세종실록') 이유는 '간사한 소인들이 교묘하게 꾸며댈 것을 염려함', 그러니까 왕권에 대한 도전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양녕은 이 영구 추방령을 수시로 어기며 도성에 출입했고, 그때마다 국왕 세종은 이를 묵인했다. 세종 10년인 1428년 마침내 양녕이 왕자의 난 때 공신이었던 윤자당의 첩 윤이(閏伊)를 건드렸다. 이 사실이 발각돼 윤이가 옥에 갇히자 양녕은 드러누웠다. 양녕은 "(제대로 처리해주지 않으면) 전하와 영원히 이별(與殿下永訣: 여전하영결)하겠다"고 민원을 넣었다.(1428년 1월 14일 '세종실록') 세종은 경기도 이천으로 옮긴 양녕에게 내시와 왕실 주치의를 보내 치료하게 하고 윤이를 석방했다.(1월 12일 '세종실록')
15일 사헌부 종3품 집의 김종서가 왕에게 상소했다. "태종이 온갖 방법으로 교회했으나 양녕이 뉘우치지 못했기에 외방에 폐출하고 '내가 죽은 뒤에는 서울에 왕래할 수 없다'고 했다. 지금 간통해서는 아니 될 여자와 간음하여 스스로 국법을 자청했으니, 우애도 좋지만 공도(公道)를 좇아달라." 법을 지키라는 말이었다.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끝없는 탄핵 소추와 세종의 거부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상.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대왕. 하지만 권력자로서의 세종은 어두운 그림자 또한 가지고 있었다. 사진은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상.
사헌부 학살의 시작이었다. 다음 날 김종서가 세종에게 대놓고 진행 상황을 물었다. 세종은 "그대들뿐만 아니라 상소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너무 심하지 않은가." 김종서가 답했다. "왕의 형제는 형제가 아니라 신하이니, 마땅히 추국해야 한다." 세종이 미적대자 사헌부는 즉석에서 재차 상소를 올렸다. "윤허를 얻지 못하니 분격함을 견디지 못하겠다. 대의로써 결단하시라." 세종은 '윤허하지 아니했다.'(1428년 1월 16일 '세종실록')
이틀 뒤까지 사헌부는 물론 사간원 관리들까지 세종에게 양녕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1월 18일 하루 동안 자그마치 열다섯 번 이어진 처벌 요청에 세종은 짜증을 내며 이렇게 말했다. "옛말에 세 번 직언을 해도 듣지 않으면 사표를 낸다고 했거늘, 당신들도 그만두면 되지 어찌 말이 많은가." 그러자 사헌부와 사간원 전원이 모두 물러가 사표를 제출했다.(1월 18일 '세종실록') 다음 날 세종이 사표를 반려하고 이들을 소환했다. 사헌부 집의 김종서가 말했다. "죽기를 작정하고 다시 처벌을 요청한다." 그날 두 기관 간부들이 올린 처벌 요청은 모두 13회였다.
세종의 사헌부 학살극
2월 7일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 김맹성이 형조참판으로 전격 좌천됐다. 집의 김종서는 농사와 농지 담당관인 전농윤으로 좌천급 이동발령됐다. 장령 윤수미와 양질은 파면됐다.
그렇게 일이 끝나는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2월 20일 사간원 헌납 최효손과 신임 사헌부 장령 진중성이 또 양녕 처벌을 요구한 것이다.
사흘 뒤 전 장령 윤수미와 양질, 전 집의 김종서, 전 대사헌 김맹성이 의금부에 전격 체포됐다. 이들은 '일찍이 사헌부 부원이 됐을 때 세금 포탈범을 눈감아 준 혐의'를 받았다. 당시 함께 사헌부에 근무했던 김연지도 체포됐다. 양질과 김연지는 세종의 허락하에 각각 두 차례와 한 차례 고문까지 받았다.(1428년 2월 7일~29일 '세종실록') 김종서가 사헌부에 발령 난 해는 1419년이니 무려 9년 전 일을 들춰내 이들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2월 30일 하명 수사를 진행한 의금부가 사건 전모를 발표했다. 양질은 곤장 100대에 해당하는 벌금형과 유배형을, 김종서와 윤수미는 곤장 80대짜리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김맹성과 김연지는 관직에서 파면됐다. 쫓겨난 사헌부 관리들은 훗날 중앙 요직으로 대부분 복귀했지만, 세종은 끝까지 법과 우애 사이에서 우애를 택했다.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믿어 의심치 않는 성군(聖君) 세종의 민낯이다.
사헌부를 증오한 연산군
연산군은 등극한 지 10년째인 1504년 광기가 극에 달했다. 친어머니인 성종 왕비 윤씨 폐비 사건에 연루된 모든 인물을 극형으로 처벌하고 이미 죽은 자는 관에서 꺼내 다시 죽였다. 죽일 사람이 없어지자 그 칼날을 사헌부에 돌렸다. 이미 언급한 대로, 사헌부는 '국가 기강을 위해 왕의 언행이나 나랏일에 대해 논쟁하는' 기관이 아닌가.
인천광역시 강화도 교동에 있는 연산군 유배지. 교동에는 유배지로 선정된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1504년 봄날, 연산군의 애첩인 장녹수가 이웃집들을 빼앗았다가 사헌부에 적발됐다. 연산군이 말했다. "사헌부가 민원을 빙자해 개인 간 계약에 간섭했다. 이는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선동하는 행동이다." 선동가로 낙인찍힌 대사헌 이자건, 대사간 박의영, 집의 권홍, 사간 강숙돌, 장령 이맥과 김근사, 지평 김인령과 김철문, 정언 김관이 구속됐다. 사헌부는 물론 사간원까지 떼로 체포된 것이다. (1504년 3월 12일 '연산군일기')
닷새 뒤 연산군이 명했다.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줬던 이세좌가 유배형에서 풀려났는데, 이자를 찾아간 자들 명단을 적으라." 승지 이계맹이 답했다. "사헌부에 사람이 없나이다." 연산군이 답했다. "의금부에서 맡으라."
이제 정국 주도권은 왕 직속 수사기관 의금부로 넘어갔다. 그해 12월 연산군은 의금부에 "매질을 잘하는 자를 골라서 수사를 맡기라"고 명했다. 수사가 미진하면 의금부 고위 관리까지 처벌하도록 하고, 그 규정은 사헌부가 마련하라고 지시했다.(1504년 12월 16일 '연산군일기')
폐지된 사헌부와 권력의 몰락
그리고 1504년 12월 26일 마침내 연산군은 삼사(三司)라 불리는 홍문관과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정언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이들을 모두 하급 관리인 낭청으로 강등시켰다. 이듬해 연산군 명으로 대제학 김감이 쓴 혁파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아랫사람들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임금을 손 위에 놓고 권력이 이들에게 돌아가리라(長此不已 將至於置君掌上 政歸臺閣:장차불이 장지어치군장상 정귀대각)' 연산군은 혁파문을 목판으로 새겨 보존하라고 지시했다.(1505년 1월 13일 '연산군일기')
이빨이 빠진 사헌부는 시녀로 전락했다. 고위직 비리 척결 대신, 대궐을 향해 손가락질하거나 무리를 지어 얘기를 나누는 자들을 단속하고(1504년 9월 10일 '연산군일기') 대궐을 등지거나 쭈그려 앉은 자를 체포하고 이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 또한 찾아내는 일이 사헌부에 맡겨졌다.(1505년 5월 26일 '연산군일기') 이 모두 죄목은 '위를 능멸하는 풍습'이었다. 사헌부 관리들은 왕에게 올린 기존 보고서가 무례하면 고문당하거나 관 뚜껑이 열리는 신세로 전락해버렸다.(6월 19일 '연산군일기') 왕권은 이제 무소불위(無所不爲)였다.
1506년 9월 1일 연산군은 경복궁에서 대비(大妃)를 위해 잔치를 열었다.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승정원 승지들에게 연산군이 명했다. "승지들은 큰절을 하지 말고 앉아 있다가 예의를 잃은 자들을 색출하라."
폭군의 마 지막 명령이었다. 다음 날 연산군은 축출되고 중종이 즉위했다.
한 달 뒤 연산군 때 수없이 구속되고 고문당했던 전 사헌부 장령 류숭조가 중종에게 말했다. "사헌부 대간들은 국가를 위해[公儀:공의], 대신들은 권력을 위해[權宜:권의] 입을 여니 대간 말을 따르소서."(1506년 10월 3일 '중종실록') 공의를 앞세웠다가 학살당한 조선 검찰 사헌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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