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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오웰·마르크스… 이들은 모두 기자였다

by 한국의산천 2019. 11. 15.

[고전이야기] '패배했지만 빛났던 저항정신'… 조지 오웰이 기록한 스페인 내전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입력 : 2019.11.13 03:00 


카탈로니아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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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문 기사를 쓸까 하는 생각으로 스페인에 갔다. 하지만 가자마자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 시기, 그 분위기에서는 그것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1903~1950)이 1936년 7월부터 1939년 4월 사이 벌어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 쓴 르포르타주입니다.

스페인은 왕실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왕실 보호를 빌미로 군부 독재를 하려는 왕당파와 이를 막아내려는 공화파가 정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1936년 2월 총선에서 공화파가 승리하지만, 그해 7월 프랑코 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왕당파가 군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내전이 시작되지요.
 

▲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의용군들이 스페인 북동부 '이룬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위키피디아


당대 지식인들은 공화파를 지지하며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었습니다. 헤밍웨이는 종군기자로 전쟁을 취재했고, 훗날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합니다.

조지 오웰은 아예 공화파 의용군에 자원입대해 전장에 나섭니다. 지식인과 젊은이들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이유는 전체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였어요.


당시 독일은 히틀러의 나치가,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민족·국가만 우선시하는 전체주의가 전 유럽으로 퍼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었어요. 스페인마저 왕당파가 정권을 잡으면 유럽이 암흑에 빠질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죠.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나선 의용군은 장교와 병사가 동등한 대우를 받았어요.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옷을 입었고 받는 돈도 같았어요. 군대라면 위에서 시키면 아래가 따라야 하지만 의용군은 '동지'였기에 될 수 있으면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도 했죠.


스페인 내전은 끝내 프랑코가 이끄는 왕당파의 승리로 끝납니다. 왕당파의 전략과 전술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조지 오웰은 공화파가 스페인 내전에서 진 이유는 안으로부터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봤어요. 공화파는 자유주의자, 공산당, 무정부주의자 등 여러 사상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이들이 각자의 이념과 이익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힘을 잃어버린 것이죠. 특히 소련 스탈린의 지원을 등에 업은 공산당은 조지 오웰이 속한 통일노동자당을 모함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공화파는 패배하고, 조지 오웰은 가까스로 탈출해 '카탈로니아 찬가'를 쓰게 됩니다.


전쟁 패배, 사분오열된 공화파에 대한 환멸에도 조지 오웰이 '찬가'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실에서는 패했을지 모르나, 평범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전체주의에 저항했던 정신만큼은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헤밍웨이·오웰·마르크스… 이들은 모두 기자였다

조선일보 양지호 기자 입력 2017.08.25 03:06


대문호 헤밍웨이 "아는 것만 써야 한다"
25년 동안 400편 작성… 스페인 등 戰場만 누벼

        


더 저널리스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 김영진 엮고 옮김 | 한빛비즈|256쪽|1만6000원


"파시스트 독재자께서 어느 날 언론사 취재를 받겠다고 발표했다. 기자들이 모두 모였다. 무솔리니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까치발로 무솔리니의 등 뒤로 걸어가 그가 그렇게 관심을 두고 있는 책이 뭔지 확인해봤다. 위아래가 뒤집힌 영불(英佛) 사전이었다."(토론토 데일리 스타·1923년 1월 27일)


풍자소설 같지만 엄연한 기사다.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 같은 작품이 먼저 떠오르지만,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기자였다. 무솔리니와 대면 인터뷰를 했고, 스페인내전, 2차대전 당시에는 현장에서 기사를 썼다. 그가 작성한 기사와 칼럼은 약 25년에 걸쳐 400여 편에 이른다.


"아는 것만 써야 한다." 대문호는 좋은 글을 쓰는 법을 묻는 이들에게 답했다. 좋은 소설 쓰는 법도 마찬가지. "경험이 많을수록 더 진실에 가깝게 상상할 수 있다." 헤밍웨이는 1차대전 당시 적십자 운전병으로 6개월 동안 참전했고 총상을 입었다. 스페인내전에서는 무수한 시신을 봤고, 그리스-터키 전쟁 당시 아드리아노플(현 에디르네)에서는 30㎞를 늘어선 피난민 행렬을 보도했다. '기자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던 셈이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왼쪽)가 스페인내전 당시 독재자 프랑코와 맞서 싸웠던 아라곤 전선의 공화파를 취재하고 있다. 그는 소설가이기 전에 기자였다. /한빛비즈
 
기자 헤밍웨이는 소설보다 직설적으로 반전(反戰), 반(反)독재 같은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현대전에서는 당신의 죽음이 아름답지도 않고 의미도 없다. 당신은 그저 개죽음을 맞을 뿐이다. 머리에 총을 맞으면 빠르고 깔끔하게." "독재자가 언론을 손에 넣은 나라의 신문은 매일 희소식으로 가득하다. 정부 덕분에 얼마나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는지 빼곡하게 보도한다." 아프리카에서 부상한 이탈리아 병사들의 운명이 어떤지. 맹금류 수백 마리가 아직 살아 있는 병사의 눈알과 콩팥을 파먹는 이야기를, 헤밍웨이는 냉소적인 필치로 서술한다. 그리고 전쟁과 독재자를 맹폭(猛爆)한다.


가장 사실에 가까운(the truest) 문장부터 써야 한다는 헤밍웨이의 소설 작법은 기사와 소설의 지향점이 다르지 않음을 대변한다. 기자는 기사로 소설가는 소설로, 아름답지만은 않은 세상을 고발하는 셈이다.


엮은이가 '더 저널리스트' 후속편으로 준비하고 있는 '조지 오웰'과 '카를 마르크스' 역시 비슷하다. 이들은 시대를 고발한 소설가와 사상가, 동시에 기자였다. 마르크스는 미국 일간지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런던 특파원 신분으로 기사 수백 편을 송고했다.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대한 분노가 '카탈로니아 찬가'를 쓴 원동력이라고 했다.

     

헤밍웨이가 쓴 ‘유럽 최대의 허풍쟁이, 무솔리니’. /한빛비즈
 
2011년 작고한 영국 언론인·작가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말은 다음과 같다. "에밀 졸라도, 찰스 디킨스도 기자였다. 마크 트웨인, 조지 오웰은 최고의 기자다." 헤밍웨이, 오웰, 마르크스는 세상을 바꾼 '고발자'들인 것이다.


책은 기자 헤밍웨이의 미번역 기사와 논픽션 기고문 20여 편을 모아 소개했다. 18세 새내기 기자였던 그가 '캔자스 시티 스타'에서 처음 썼던 사회면 기사부터, 30대 후반 북미신문연합 통신원 신분으로 스페인내전 현장에서 쓴 글 등이다.


소설보다 소설 같은 기사 작법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20대 헤밍웨이가 쓴 '용기의 값은 얼마인가'가 인상적. 1차대전 종전 이후 캐나다에서 귀향 군인들이 전당포에 무공훈장을 줄지어 맡기고 급전을 당겨 쓰던 세태를 취재했다.


당시 훈장은 중고 정강이 보호대만도, 고장 난 알람시계보다도 값어치가 떨어졌다는 취재 내용을 단편소설처럼 구성했다. 훈장 3점을 3달러에 넘기겠다던 전당포 주인이 나중에는 1달러에 떨이로 모두 넘기겠다고 애걸하는 모습이 익살스러우면서도 스산하다. "용기의 시가(時價)는 그래서 아직 '미정'이다." 헤밍웨이가 기사를 마무리한 문장이다.

[출처] [고전이야기] '패배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