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특집 남한땅 7정맥 ②금강정맥 | 문화와 역사] 베풀 줄 아는 낮은 산이 더 풍요로워라

by 한국의산천 2019. 11. 13.


[山 창간 45주년 특집 남한땅 7정맥 ②금강정맥 | 문화와 역사] 베풀 줄 아는 낮은 산이 더 풍요로워라

[537호] 2014.07  글·신준범 기자 입력 2014.07.18 13:14 | 수정 2018.10.31 11:28


여유로운 전북과 충청의 현재를 만들어 준 산줄기

  


<신산경표>의 우리나라의 산줄기 간략 개념도. 붉은색으로 표시한 산줄기가 금강정맥이다.


<산경표>를 따라 산을 탄 이들은 ‘금남정맥’은 알아도 ‘금강정맥’은 모른다. 금강정맥은 <신산경표>에서 새로 이름 붙인 산줄기다. “우리 선조들이 만든 산경표의 원래 산줄기를 왜 바꾸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산경표의 산줄기를 충실히 걸은 산꾼일수록 금강정맥의 손을 들게 된다.


지난 6월호 ‘7정맥 특집’에서 설명한 것처럼 정맥은 우리나라의 10대강을 구획하는 산줄기다. 우리나라의 큰 강인 금강은 혼자 생긴 것이 아니고, 수많은 산줄기의 계곡물이 모인 것이다.


금강의 남쪽에서 강의 근원인 계곡의 어머니 역할을 한 산줄기가 금강정맥이다. 금강정맥이라는 단 하나의 능선을 남과 북으로 나누었을 때 북측 계곡은 모두 금강으로 흘러간다. 이것이 산경표의 기본 원리이며 산자분수령의 근간이다.


하지만 산경표에는 예외가 있어 이 원칙을 지키지 않은 곳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금남정맥이다. 금강을 나누는 정확한 산줄기는 운장산과 싸리재를 지나 760.1m봉에서 북으로 직진해서 서쪽으로 마루금을 이어 군산 장계산에서 금강 하구로 떨어지며 끝난다. 하지만 금남정맥은 760.1m봉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뻗어나간 산줄기를 택하고 있다. 이 산줄기를 따라가면 대둔산과 계룡산 같은 충청을 대표하는 명산을 만난다.


산경표는 강을 나누는 경계였으며 동시에 생활권을 나누는 경계였다. 즉 이 두 가지 원칙 중 후자에 따라 금남정맥은 강을 따르는 낮고 허름한 산줄기를 버리고 높고 화려한 산줄기를 택했다. 산줄기가 더 높기에 생활권을 가르는 경계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반면 강을 가르는 정확한 산줄기인 금강정맥은 왕사봉과 702고지를 지나면 점점 고도가 낮아져 100m 이하로까지 고도가 떨어진다.


얕은 구릉성 산줄기가 되었지만 이 산줄기는 누가 뭐래도 금강의 남쪽을 만든 ‘친부모’다. 이에 따라 <신산경표>는 교통의 발달로 생활권의 경계가 의미가 없어진 현대에 맞도록 금강 남쪽의 친부모 산줄기의 손을 다시 들어준 것이다. 비록 작고 못나서 가난해도 부모는 부모인 것이다.


금강정맥은 그런 산줄기다. 작고 못났지만 나라의 큰 강인 금강을 만든 분명 뼈대 있는 가문의 맹주격 산줄기다. 그러니 낮다고 무시하지 말길. 반면 계룡산과 대둔산을 품은 화려한 산줄기는 100km 이상 산줄기의 분류원칙에 따라 ‘기맥’으로 분류되었다. <신산경표>는 ‘금남기맥’이라 명명하고 있다. 


기존 산경표의 금남호남정맥에 대해 부연 설명하자면, 강의 하구에 가 닿는 독립적인 정맥이 아니므로 호남정맥에 편입시켰다. 그러므로 금남정맥의 새 이름인 금강정맥은 호남정맥 조약봉에서 산줄기가 시작된다. 이런 변화에 대해 <신산경표> 저자인 박성태 선생은 “산경표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기보다는, 산경표를 현대적으로 계승했다”고 설명했다.


금강정맥에 담긴 역사를 설명하자면 운장산에서 시작해 운장산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해발 1,133m로 금강정맥 최고봉이기도 하지만, 그 외의 산들은 워낙 낮고 무명이라 해당지역의 면지(面紙)를 뒤져도 많은 자료를 얻기는 어렵다. 달리 보면 운장산이 워낙 압도적인 명산이라 이야깃거리가 많다고 볼 수 있다.


운장산이 있는 진안 땅은 고도가 높은 지역이다. 서울의 북한산보다 훨씬 남쪽에 있지만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만 비교해도 운장산이 훨씬 늦다. 때문에 서울의 기후만 믿고 가벼운 복장으로 운장산을 찾았다간 큰 코 다칠 수 있다.


진안고원은 눈과 비를 합친 강수량이 전국에서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가장 수치가 높은 제주도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내륙지방 치고 상당한 강수량은 지형 탓이다. 지도를 놓고 보면 서쪽으로 덕유산의 백두대간 줄기가 벽을 이루고 남쪽으로 호남정맥, 서쪽으로 금강정맥이 에워싸고 있다. 보통 첩첩산중이라 하면 강원도를 떠올리지만 이곳 무진장(무주·진안·장수)도 과거 오지 중의 오지였다. 

 

금강정맥 최고의 명산인 운장산. 조선 중기의 문장가 송익필의 이름을 딴 산이다. 사진 김종연 기자


금강정맥의 맹주 운장산


운장산의 운장(雲長)은 조선 중기 학자 송익필(宋翼弼·1534~1599)의 자(字)에서 왔다. 산의 이름을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그는 운장산과 연이 깊은 인물이다. 그는 선조 때 8대 문장가로 손꼽힌 대학자였다. 서얼 출신인 그는 ‘서인의 모주’로 불릴 정도로 탁월한 지략가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운장산의 가파른 비탈만큼 모질고 풍파가 많았다.


젊은 시절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친할머니가 첩이 낳은 딸이었기에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다. 결국 27세에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경기 파주의 구봉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겨 학문에 전념했다. 이후 김장생을 첫 제자로 맞았고, 30대에는 이이, 성혼과 학문적 토론을 이어갔다. 송익필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상대적이라기보다 서로 연관된 관계라고 보았다. 또 주자가례의 원칙에 충실한 예학사상을 주장했다. 그의 성리학 이론과 예학은 김장생과 송시열에게 전해져 서인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는 50대에 노비가 되어 도망자로 숨어 사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었다. 송사련은 1521년 모반 사건을 조작해 중종에게 고발했다. 좌의정을 지낸 안당의 아들인 안처겸을 중상모략한 것이다. 이로 인해 안당과 안처겸·안처근 형제는 처형되고 안당 집안은 쑥대밭이 됐다. 밀고의 대가로 송사련은 당상관으로 초고속 승진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생을 마쳤다. 송사련이 안당 집안 노비의 후손이기에 노비가 주인집을 배신한 것과 같았다.


이후 안씨 집안사람들은 60여 년 전 일어난 이 밀고가 잘못됐음을 밝히고 송익필 가족이 안씨네 노비였음을 입증하는 소장을 냈다. 2대에 걸쳐 양인 호적을 인정받았음에도 송익필과 그의 형제, 자손들은 노비로 환천(還賤)되었다. 안씨네 노비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송익필 가족은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


이후 동인과 서인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송익필은 구속과 석방, 귀양으로 굴곡진 삶을 살았다. 그는 사후 영조 때 사헌부 지평의 관직에 추증됨으로써 노비의 멍에를 벗었다. 굴곡진 삶을 살았던 대학자가 은거했던 굴곡 많은 산이 운장산이다. 그의 명시로 손꼽히는 ‘산행’은 운장산을 오르내리며 마음공부를 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송익필을 두고 ‘중상모략의 대가’라고 비판적으로 평하는 이들도 있다. 이는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때문이다. 이때 1,000여명의 동인들이 제거되었고 송익필의 형제들은 양반 신분을 회복했는데 당시 이 사건을 맡아 처리한 이 중 한명이 그였다. 기축옥사로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정치세력은 피를 부르는 정쟁으로 치닫게 되어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하게 되었다.


산행(山行)  -송익필


山行忘坐坐忘行(산행망좌좌망행)
歇馬松陰聽水聲(헐마송음청수성)
後我幾人先我去(후아기인선아거)      
各歸其止又何爭(각귀기지우하쟁)


산길을 가다가 앉아서 쉴 것을 잊고,
앉아서 쉬다가 가는 것을 잊었어라  
소나무 그늘 아래 말을 매어 쉬게 하고
계곡의 물소리를 가만히 듣노라니
내 뒤를 따라오던 몇몇의 사람들은
내 곁을 지나쳐서 저만치 가는구나 
저마다 그칠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려니
또 어찌 그네들과 더불어 다투리오.

 

충남 연기군 일대의 금강 평야지역. 금강은 충청도와 전라도를 흘러 여러 평야를 만들며 곡창 역할을 해왔다. 사진 조선일보DB


금강에 꽃 피운 불교문화


운장산의 옛날 이름은 주줄산(珠山)이었다. <대동여지도>와 <동국여지승람>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한자뜻을 보면 ‘구슬 주’에 ‘산 높을 줄’이니 구슬처럼 두드러지게 산이 높다는 뜻이지만, 이 고장말로 읽으면 ‘주줄이산’이다. 즉 산이 죽 늘어선 모양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명산들은 유서 깊은 사찰 등 불교 유적을 안고 있는 곳이 많지만, 운장산은 예외다. 알려진 암자 하나 찾기 어렵고 그나마 가까운 곳이 구봉산 기슭의 천황사이고, 위봉산의 위봉사, 진락산의 보석사다. 불교보다 유교 자취가 많은 것은 여러 지명에서 알 수 있다. 학선동(學仙洞), 무이동(武夷洞), 칠은동(七隱洞), 오성대(五星臺), 명도봉(明道峰), 명덕봉(明德峰), 운일암(雲日岩)반일암(半日岩), 처사동(處士洞), 주양리 주천서원(朱川書院), 공자의 수제자 이름인 주자천(朱子川), 정자천(程子川), 안자천(顔子川) 등이다.


그러나 운장산으로 국한시켰을 때 불교의 흔적이 적다는 것이지 금강정맥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산줄기는 곧 강줄기이므로 금강의 영역으로 확대하면 유구한 세월 속에서 찬란히 빛났던 불교문화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금강과 불교는 1,400여 년의 시간을 함께했다. 백제가 불교를 수용한 이후, 웅진과 사비 백제시대에서 가장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웠고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에도 금강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융성했다. 삼국시대의 금강지역 불교 문화유적은 공주, 부여에 집중돼 있다. 공주지역의 대통사지, 금학동사지, 수원사지와 부여의 정림사지, 왕흥사지, 군수리사지 등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공주 갑사, 연기 연화사, 옥천 용암사, 영동 영국사와 고려시대의 논산 개태사, 청주 흥덕사 등 사찰과 다양한 석탑, 불상 등은 현대에서도 금강권 전통문화의 귀중한 자산이다.


운장산을 통해 설명한 것처럼 금강은 유교문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 3대 유교문화권의 하나가 금강 권역이다. 16세기 중반까지는 이 지역 출신 사림이 기호학파의 한 축을 형성하다가 17세기 중반부터는 연산, 회덕, 청주, 공주 등을 중심으로 호서유학의 중심권이 형성되었다. 당시 호서유학은 학문과 사상의 기상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에서도 영남권과 경기권을 압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향교뿐만 아니라 서원과 사당이 대거 분포하고 있는 것은 금강 유역에서의 유교문화의 발전상을 보여 준다.


신산경표의 금강정맥. 호남정맥 조약봉에서 시작해 군산 장계산에서 끝난다. <산경표>의 금남정맥은 금남기맥으로 바뀌었다.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의 생활권 경계 역할을 한 <산경표>의 금남정맥. 금강정맥의 점선으로 표시한 부분은 해발고도가 30~50m대로 낮아지는 구간이다.


금강은 충청과 전북 역사문화의 젖줄이다. 금강이 빚어낸 천혜의 자연환경은 선사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토대였다. 395.9km의 긴 강줄기는 상류에선 구불구불한 골짜기를 만들어내고 하류에선 곡식이 있는 여유로운 평야의 풍경을 빚어냈다. 풍요의 터전인 금강 유역은 왕성한 문화활동의 본류를 이끈 것이다. 낮은 산줄기인 금강정맥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금강의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은 유구한 문화 생성과 창조의 터전이 되었다.


풍요의 땅인 금강 인근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성을 세우기도 했다. 금산의 금성산성, 옥천의 고리산성과 노고성, 보은의 매곡산성, 대청댐 인근의 구룡산성, 대전의 계족산성, 공주의 웅진성, 부여의 사비도성 등 수 백여 개의 산성과 전적지가 흥망성쇠의 역사를 묵묵히 보여 준다. 또 강을 중심으로 폭포와 바위, 벼랑 등에 얽힌 수 만 가지 설화는 금강의 오랜 역사가 풀어내고 있는 문화적 유산이다.


금강정맥은 전북과 충청을 연결하는 산줄기지만 생활권의 경계가 되지는 못했다. 앞서 얘기했듯 고도가 너무 낮기 때문이다. 논산평야와 호남평야 사이의 이동수단이 되며 해발고도가 30~50m에 이르다보니 심지어는 인위적으로 만든 수로가 지나는 곳도 있다.


운장산 이외의 낮은 산을 언급하자면, 금강정맥이 시작되는 주화산(565m)은 구슬 주(珠), 빛날 화(華)를 쓴 구슬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산이라는 의미다. 낮은 편이지만 호남정맥과 금강정맥을 잇는 중요한 산이다. 운장산을 지나면 왕사봉과 칠백이고지가 정맥의 흐름을 잇는다. 전북 완주군 운주면에 있는 왕사봉(718m)은 금강의 지류 중 하나인 논산천이 발원한 산이다. 칠백이고지는 산의 고도에서 유래되었다. 정상 안내판에 희미하게 칠백이고지라 적혀 있다. 실제 산의 높이는 701m이지만 ‘702고지’로 불려왔다. 산의 북쪽인 충남 지역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전투를 기념하는 육백고지전승탑이 있다.


전북과 충남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는 500m 이하로 몸을 낮추며 남당산과 작봉산, 까치봉으로 연결된다. 남당산(376m)은 전라북도 완주군의 화산면과 충남 연무군, 논산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정상에는 산성의 흔적이 있으며 초소와 성벽이 남아 있다. 작봉산(419.6m)은 논산 양촌면 중산리에 있으며 장성천과 승치곡천의 발원지다. 불명산(佛明山)이라고도 한다. 북쪽 기슭에는 고려시대에 창건한 쌍계사(雙溪寺)가 있으며, 쌍계사 대웅전은 보물 제408호로 지정되었다.

 

금강정맥 미륵산의 기준산성.


평야의 전망대 미륵산


까치봉(456m)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봉우리이다. 논산시는 전체적으로 동고서저의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까치봉이 동남쪽의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억울한 누명을 쓰고 피신했던 노인이 정세를 살피기 위해 아들을 고을에 보낸 뒤, 돌아올 때쯤 산봉우리에서 까치가 떼 지어 울어대는 소리를 듣고 나가 아들을 반겼다고 한다. 까치가 울어대는 산봉우리라 하여 이름이 유래한다.


익산을 지나며 정맥은 용화산과 미륵산으로 이어진다. 미륵산의 높이는 430m이며 옛날에는 용화산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구분하여 미륵사지가 있는 북쪽은 미륵산이라 하고, 나머지 지역은 용화산이라 하고 있다. 미륵이나 용화는 모두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는 명칭으로서, 원래는 용화산이라 하던 것이 미륵사가 지어지면서 그 주변 산만을 미륵산이라 칭한 것이라 보인다.


익산 미륵산은 높이는 낮지만 주변이 평야지대임을 감안하면 일대를 호령하는 산세다. 북으로는 황산벌이 보이고, 남으로는 멀리 호남평야를 바라보는 평지에 우뚝 솟았다. 여기서 발원한 도천, 부상천, 궁평천 등은 만경강의 상류를 이룬다. 이 산의 최고봉을 운제봉이라 하고, 조금 낮은 앞 산봉을 장군봉이라 하는데, 장군봉에는 마치 장군이 투구를 쓴 것 같은 모양으로 생긴 까닭에 투구 바위라고 부르고 있는 바위가 있다.


<여지승람> 익산군 산천조에서는 “장군봉은 용화산에 있는데, 남쪽에 있는 바위에는 두어 말의 기름을 녹일 수 있는 구멍이 파져 있어 이 바위를 등잔암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100m대로 고도가 낮아진 금강정맥은 결국 군산 장계산에서 금강과 서해가 조우하며 끝을 맺는다. 장계산은 108m로 구릉에 가까운 산이지만 현재 군산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월명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낮지만 수천 년 맥을 이어온 금강의 모친 금강정맥은 말한다.

“낮은 산줄기가 이렇듯 풍요로운 강과 평야를 만들어 여유로운 전북과 충청의 현재를 만들었다”고 말이다. 
 
Copyrights ⓒ 월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