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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미 조선공사관 단체 사진 속 사내들

by 한국의산천 2019. 9. 25.

[박종인의 땅의 歷史]

함께 앉아 있었으나, 그 끝은 너무도 달랐다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9.09.25 03:00


[182] 초대 주미 조선공사관 단체 사진 속 사내들


1888년에 촬영된 초대 주미 공사관 기념사진
개화를 꿈꾼 그 시대 엘리트들… 이상재…이완용…박정양…이하영…이채연…수행원들
박정양은 청나라 무시하고 단독으로 부임 행사 이후 청 간섭에 강제 소환
근대 미국 문물 흡입한 이완용과 이하영, 해바라기처럼 친일 변신… 나라 판매하고 몸 보전
이채연은 한성 개조 사업… 근대화 추진 도중 의문의 암살
국익과 사익 사이에서 근대화 물결에 대처했던 엘리트들의 상이한 자세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서기 1888년 2월 22일 맑은 날 조선국 주미 전권대신 박정양이 일기를 썼다. '서력 1888년 2월 22일은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생일이다. 평민으로, 여러 사람 추천을 받아 원수(元帥)가 되어 영국과 전쟁을 벌여서 독립한 미합중국 대통령이 되었다. 대개 미국이 민주, 독립을 이룩한 것은 워싱턴에게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국민이 추숭하여 잊지 않고 이날을 경축일로 삼아 모든 관청과 상점이 쉬면서 업무를 보지 않는다.'(박정양, '미행일기·美行日記')

그 민주와 독립의 축일 다음날 오후 3시 공사관 관원 10명 전원은 워싱턴DC에 있는 한 사진관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서력 1888년 2월 23일 오후 3시


스물일곱 먹은 하인 김노미(金老美)부터 마흔일곱 살인 전권대신 박정양까지 한자리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조선에서라면 쉽지 않은 조합이었다.

앞줄을 왼쪽부터 본다. 이상재·이완용·박정양·이하영 그리고 이채연. 이상재(당시 38)는 1881년 조사시찰단 멤버로 일본을 다녀온 개화파였다.

이완용(30)은 왕립 관료 교육기관인 육영학교 출신 엘리트였다. 박정양(47)은 조사시찰단을 이끌었던 온건 개화파였다.

이하영(30)은 일본에서 사업에 실패한 뒤 선교사 알렌을 만나 신문물에 발을 디딘 사람이었고, 이채연(27) 또한 신문물을 접한 젊은 관료였다.

그들이 한날한시에 이역만리 타국 수도에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모두 개화를 지향하는 당대 엘리트들이었다.


▲ 1888년 미국에 부임한 초대 주미 조선공사관 관원단체사진.

1888년 2월 23일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사진관에서 촬영했다. 번호 순으로 1.이상재, 2.이완용, 3.박정양, 4.이하영, 5.이채연. 뒷줄 왼쪽에서 둘째는 6.이헌용, 셋째는 7.강진희. 나머지 사람은 김노미, 이종하, 허용업인데 사진에는 아무 표시가 없다.


사학자 문일평은 '이종하는 마마 자국이 있고 눈은 감은듯하며 김노미는 용모는 추하고 애꾸였다'고 기록했다.(문일평‘, 한미오십년사’, 1975) 함께카메라 앞에 자리했던 이들의 이후 인생은 무척 달랐다. /한국이민사박물관
 
  끝은 모두 달랐다. 전권대신 박정양은 민주와 독립을 꿈꾸다 죽었다. 그 양쪽 동갑내기 이완용과 이하영은 나라를 팔아먹었다. 망국을 목격한 이상재는 계몽운동으로 식민의 시대를 살았다. 젊은 관료 이채연은 암살당했다. 뒷줄에 서 있는 하급 직원들 인생 경로는 불명(不明)이다.


풍전등화의 왕국과 청나라


1876년 2월 조선은 1000년 동안 깔봤던 일본과 수교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수도 서울에는 원세개가 이끄는 청국 군대가 주둔했다. 원세개는 가마를 타고 궁궐을 들락거리며 고종 머리 위에서 조선을 통치했다. 일본은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드는 중이었다.


청나라는 옛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두 나라는 조선에 더욱 집착했다. 그 위기 시대에 고종은 스스로 힘을 기르는 강병(强兵) 대신 강대국 힘에 기대는 외교(外交)를 택했다.

1882년 고종은 미국과 수교했다. 젊은 군주는 해마다 외교 파트너를 갈아 치웠다. 권력 유지를 위해 청나라를 택했다가 일본을 택했다가 미국을 택했다.

수교 5년 만인 1887년 고종은 주미 전권대신 파견을 결정했다. 그때 조선은 실질적으로 청나라 속국이었다.


스파이작전 같았던 도미(渡美)


1887년 8월 18일 박정양이 주미 전권대신에 임명됐다. 10월 23일 청나라가 시비를 걸어왔다. '사절 파송은 허가하되 전권(全權)은 불허한다.' 11월 10일 박정양이 가서 원세개를 만났다.

원세개는 세 가지 조건을 걸고 부임을 '허락'했다.

첫째, 반드시 청국 공사 안내로 미국 관리를 만난다. 둘째, 언제나 청국 공사 하석(下席)에 앉는다. 셋째, 중대 사건은 반드시 청국 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영약삼단(另約三端)'이라 한다.


11월 13일 박정양 일행이 인천항으로 떠났다. 다음 날 일행은 미 군함 오마하호에 승선해 미군 호위 속에 부산으로 출발했다. 이완용과 이채연은 이미 육로로 부산에 가 있었다. 청나라의 방해를 피해 출발하려는, 007작전 같은 출항이었다.


박정양의 배짱과 영약삼단의 파기


1888년 1월 1일 마침내 조선 외교관 일행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했다. 일본과 홍콩과 하와이를 거친 긴 여정이었다. 선내에 천연두 환자가 나와서 상륙 허가는 사흘 만에 나왔다. 1월 4일 올라탄 기차는 닷새 만에 미 동부 워싱턴DC에 도착했다.


박정양은 원세개가 경고한 '영약삼단'을 대놓고 위반했다. 도착 즉시 청국 공관에 보고하라는 첫 번째 조항을 어긴 것이다. 조선 공무원 신분으로 동행했던 선교사 알렌은 나머지 조항도 지킬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박정양은 청국 공관에서 나온 관리들에게 '서둘러 출발한 탓에 지시를 받은 적 없다'고 둘러댔다. 1월 17일 조선 외교관들은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를 전격 방문해 악수로 인사를 하고 신임장을 제정했다. 모두가 전적으로 박정양과 알렌이 결정한 일이었다. 이튿날 박정양은 본국에 전보를 보냈다. '영약삼단은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 돼 버렸음.'


일주일 뒤 박정양은 해군장관 주최 파티에서 '거의 옷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알몸 여인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알렌의 일기' 1888년 1월 28일), 또 열흘 뒤 워싱턴 탄생일 축제 때 민주와 독립을 보았다. 워싱턴을 기리는 초대형 기념물을 보며 '독립의 공업을 잊지 않는다'고 감탄했으며 조폐창에 가서는 '한갓 종이가 화폐가 되니, 국법은 신뢰가 으뜸이라!'고 또 감탄을 했다.


기차와 엘리베이터를 보고서 '국민이 편리하게 이용하는 일에 정밀함을 더해 지모와 기예가 발전하니,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이유'라고 또 감탄을 했다.('미행일기')


▲ 미국 외교관 조지 포크가 촬영한 '왕좌에 앉은 30세의 조선 국왕' 고종.

1882년에 서른살이 된 고종은 외교를 통한 독립과 자주를 기대하며 그해 미국과 수교했다. 자력에 의한 부강보다 수월한 길이었지만, 천진난만하고 무책임한 결정이었다. /미국 위스콘신대 디지털사진아카이브
 
그리고 그해 11월 18일 박정양은 10개월 만에 본국으로 소환 조치됐다. 영약삼단을 어겼다는 청나라 항의에 조선 정부가 고개를 숙인 것이다. 가진 힘 하나 없이 외교로 자주를 지키려는 계획 자체가 무리였다. 1898년 서재필이 만든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고위 관료였던 박정양은 공동회에 참석해 근대적 개혁을 약속했다가 수구 세력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이완용의 현실감과 변신


신임장을 제정하고 며칠 뒤인 1888년 2월 10일 이완용은 박정양에게 "공사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장관(壯觀)이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관원들이 모두 가서 원형 집으로 들어가니 갑자기 눈앞에 사막이 나타나고 석양이 산에 걸리고 수많은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먼지가 휘날리고 전차가 뒤집히며 칼이 번쩍이다가 갑자기 사위가 밝아지는데, 알고 보니 그곳이 '영화관'이었다.


박정양이 쓴 '미행일기'에 이완용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완용은 부임한 지 5개월 만에 병을 앓고 귀국했다. 그리고 박정양을 대신해 이듬해 대리공사로 임명됐다. 알렌은 이완용을 '전반적으로 조선 사절단의 나쁜 인상을 벌충해주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알렌의 일기') 훗날 일본 우익단체 '흑룡회' 회장 구즈 요시히사는 이완용이 '한국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기록했다.(김윤희, '이완용 평전', 한겨레출판, p48 재인용) 극우 인사의 기록이니 적당한 가감이 필요하겠지만, 초강대국 미국 체류 경험은 이완용의 미래를 매우 현실적인 방향으로 끌고 갔음이 분명했다.


일본의 힘이 강성해지고, 미국이 기대에 못 미치자 고종은 아내 민씨와 함께 러시아로 돌아섰다. 1895년 왕비 민씨가 일본인에게 살해됐다. 이듬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을 주도한 사람은 친러파였다. 이완용도 그중 하나였다.


똑같은 경험, 그리고 악연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겼다. 이완용은 다시 일본으로 갈아탔다. 고종은 또 미국 힘을 빌리려 했지만 대신들 그 누구도 고종을 돕지 않았다. 그해 11월 이토 히로부미가 방한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조약 체결을 주도한 다섯 대신 가운데 초대 주미공사관 관원이 두 명 있었다. 학부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이하영이다.


11월 17일 조약이 체결되자 반대하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열흘 뒤 "역적들을 공개리에 처단하지 않으면 국가의 정사가 사라진다"고 이들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상소한 사람은 이완용, 이하영을 지휘해 대미 외교를 주도했던 박정양이었다. 박정양은 18일 뒤 죽었다.


초대 공사관원 가운데 막내였던 이채연은 훗날 한성 판윤이 되었다. 도로를 정비하고 위생시설을 건설하며 워싱턴DC에서 봤던 근대 도시를 건설해나갔다. 이채연은 한성전기회사 사장으로 서울 시내 전차 사업을 주도했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 1900년 나이 마흔 살에 죽었다.


당시 대한제국 고문이었던 미국인 윌리엄 샌즈는 이렇게 기록했다. '어느날 밤 한성 판윤 이채연이 갑자기 나를 불러 자기 아들을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하더니 "오늘 저녁을 같이 먹은 사람들이 어찌 됐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하인을 시켜 사정을 알아보니, 모두 죽고 이채연만 살아 있었다. 소식을 들은 이채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죽었다.'(윌리엄 샌즈, 'Undiplomatic Memories', 1930, p127) 누가 그를 죽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샌즈에 따르면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이러했다. "그럴 줄 알았다. 내 아들이나 잘 지켜주소. 이 나라는 가망이 없네."


1910년 이완용은 한일병합조약에 총리대신 신분으로 도장을 찍었다. 이하영은 기업가로 변  신했다. 두 사람은 일본 황실이 주는 조선 귀족 작위를 받았다. 이상재는 계몽운동으로 식민지 조선인을 이끌고 안재홍과 함께 좌우 합작 항일단체 신간회 설립을 주도했다. 낮은 신분 탓에 사진 속 뒤편에 서 있던 나머지 인물들 행적은 알 수 없다. 1888년 정초 이역만리에서 함께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개화의 의지를 불태웠던 사내들의 상이한 인생 경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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