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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宮을 버렸다

by 한국의산천 2018. 12. 5.


[박종인의 땅의 歷史] 왕이 宮을 버렸다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8.12.05 03:01 | 수정 2018.12.05 03:23


[146] 아관파천(俄館播遷)과 국가 최고 지도자 고종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선조, 인조 그리고 고종


500년 조선왕조 역사에서 궁궐을 탈출한 왕이 셋이다. 횟수는 다섯 번이다.

1592년 양력 6월 9일 임진왜란 개전 17일 만에 선조가 폭우 속에 의주로 갔다. 경복궁은 불바다가 됐다.

이듬해 양력 10월 24일, 1년 넉 달 만에 서울로 돌아온 선조는 폐허가 된 경복궁 대신 성종 큰형인 월산대군 종택에 살다 죽었다.

아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한 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했다.

지금 공식 명칭은 덕수궁이다.


1623년 4월 12일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경운궁에서 즉위했다.

열한 달 뒤인 1624년 3월 26일 인조는 반란을 일으킨 이괄 무리가 임진강을 건너자 공주로 달아났다.

인조는 공주에 열흘 동안 있었다. 4년 뒤 1627년 2월 28일 정묘호란이 터졌다. 3월 13일 인조는 노량진을 거쳐 강화도로 도망갔다.

5월 26일 인조는 경운궁 대신 북서쪽 경덕궁(경희궁)으로 돌아왔다. 74일 만이다. 끝이 아니다.


1637년 1월 4일 후금 기병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1월 9일 인조가 달아났다.

강화도로 가려다가 후금 부대가 개성까지 왔다고 하자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틀었다.

후금 왕 홍타이지는 인조의 도주벽(逃走癖)을 익히 알고 있었다.

전쟁 전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에게 이리 말했다. "일개 작은 섬으로써 나라가 되겠는가(可以一小島爲國乎)?"(나만갑, '병자록')


2월 24일 남한산성에서 나온 인조는 그날 한양 문이 닫히는 인정(人定·밤 9~11시)이 돼서야 서울로 돌아와 창경궁으로 들어갔다.

잠실 삼전도에서 머리를 땅바닥에 스물아홉 번 찧은 항복식이 길었던 탓이다.

이들을 이어 세 번째 궁을 탈출한 왕이 고종이다.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란해 만 1년 9일을 살았던 조선 26대 국왕이다.

그들이 도주하고 나라가 어찌 됐는가. 고종이 남의 나라 땅에 숨고서 세상은 어찌 되었나.


800만냥짜리 경복궁 공사


1863년 음력 12월 13일 왕실 사내 흥선군(興宣君)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명복이 왕위에 올랐다.

열한 살짜리 어린 왕이었다. 권력은 수렴청정하는 조대비와 아버지 이하응에게 있었다.


즉위 2년째인 1865년 4월 2일 대왕대비가 경복궁 중건을 명했다.

"주상이 (경복궁) 궁전을 사용하던 태평한 모습을 그리면서 때 없이 한탄한다"며 왕명임을 내세웠다.(1865년 4월 2일 '고종실록')

그달 13일 임진왜란 이래 273년 동안 폐허였던 조선왕조 법궁(法宮) 재건이 시작됐다.



경복궁 근정전 정문인 근정문.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됐던 경복궁은 1865년 흥선대원군이 실질적으로 주도해 1872년 중건됐다.

자재 비용을 뺀 공식 중건 비용은 784만냥이었다. 1876년 경복궁이 또 불타자 고종은 민간 토목공사를 금지하며 20년 가까이 재중건을 강행했다.


1896년 2월 11일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한 고종은 닷새 뒤 경운궁(덕수궁) 중건을 명했다.

1904년 화재 후 다시 지었을 때 경운궁 중건 비용은 795만냥이었다. 적외선 필터 촬영. /박종인 기자
 
공사는 1872년 9월 6일 공식 완료됐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현물을 제외하고 7년 공사에 들어간 경비는 현금 783만8694냥3푼이었다.

왕실 자금 11만냥, 왕족 원납금 34만913냥6전에 백성이 원납한 돈이 727만7780냥4전3푼이 포함돼 있었다.

'원납(願納)'은 '자발적으로 낸 재물'이라는 뜻이다. 자발적이지 않았고, 막대한 대가가 있었다는 기록이 쌓여 있다.

참고로 24년 뒤인 1896년도 조선 정부 예산은 480만9410원(세입 기준)이었다.(김대준,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

대한제국 때 화폐 단위가 '원'으로 바뀌었으나 냥(兩)과 원(圓)이 혼용되고 있었다.


완공 이듬해 음력 12월 10일 자경전에 불이 났다. 성인이 되며 권력을 장악한 고종은 즉각 경복궁 재중건을 명했다.

공사 3년째인 1875년 5월 10일 큰아버지 이최응이 상소했다. "땅이 줄지 않았고 백성이 없어진 것도 아닌데 재물은 고갈됐다.

오직 날로 용도를 절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께서는 소박함을 급선무로 삼으시라." 고종은 "삼가 명심하겠다"고 답했다.(1875년 5월 10일 '고종실록')


9일 뒤 고종은 하급시종 사알(司謁)을 시켜 명했다. "중건이 한창인데 민가에서 토목공사를 벌이는 일이 있다.

중건을 마칠 때까지 금지하도록 하라."(1875년 5월 19일 '승정원일기') 1876년 11월 4일 또 불이 났다. 전각 830여 칸이 재로 변했다.

고종은 사흘 동안 소식을 하고 재재중건을 명했다.(1876년 11월 4일 '고종실록')

공사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1888년 7월 15일 고종이 어전회의에서 또 한 번 민간 토목공사 금지령을 내렸다.

5년 뒤인 1893년 8월 25일 또다시 민간 토목공사 금지령을 내렸다. 예전 명령처럼, 위반 시 처벌 명령도 함께였다.(1893년 8월 25일·양력 10월 4일 '승정원일기')

2년 4개월 뒤인 1896년 양력 2월 11일 고종이 그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俄館)에서의 1년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건청궁에서 왕비 민씨가 일본인 패거리에게 살해당했다.

고종은 경복궁에 치를 떨었다. 생명의 위협도 느꼈다. 그리하여 이듬해 2월 11일 아침 단행한 조치가 아관파천이었다.

1897년 2월 20일까지 아관에서 보낸 1년을 오로지 기록으로만 본다.



1908년 9월 8일 덕수궁 준명당에서 찍은 고종 탄생일 기념사진.

왼쪽부터 원로 각료인 이정로(남작), 심상한, 김윤식(자작), 김성근(자작), 이용원(남작), 고종, 김병익(남작), 민종묵(남작), 서정순, 이주영(남작), 김영전. 괄호 안은 1910년 10월 총독부로부터 받은 조선 귀족 작위. 김윤식은 3·1운동에 참가해 박탈됐다.

원본은 대지(臺紙)로 포장돼 있다. 무라카미 덴신(村上天眞) 촬영.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러시아공사관 도착 첫날 고종은 유길준과 조희연과 장박, 권영진, 이두황, 우범선, 이범래와 이진호 체포령을 내렸다.

을미사변 주동자로 낙인찍힌 자들이다.

을미사변 이후 내각 총리였던 김홍집 또한 체포하려 했으나,

'하늘의 이치가 매우 밝아서 역적의 우두머리는 처단되었다.'(1896년 2월 11일 '고종실록')


김홍집은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맞고 찢겨 죽었다.

13일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포고령을 내린 고종은 닷새째인 16일 "경운궁과 경복궁 수리가 끝나는 대로 환궁 여부를 확정하겠다"고 했다.


그해 8월 10일 고종은 "궁내부와 탁지부가 경운궁을 수리하되 간단하게 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간단하지 않았다.

23일 경복궁에 있던 왕비 민씨의 빈전과 왕들 초상화를 모신 진전을 경운궁으로 옮기라고 명했다.

이미 석 달 전인 5월 고종은 경운궁으로 가서 일본 공사(公使)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를 접견한 적이 있다.


조선 왕실은 '이미 파천 전부터 명례궁(明禮宮·경운궁) 수선 공사에 착수했다.'('주한일본공사관 기록' 9권, '기밀 본성왕래' 1896년 2월 13일)

민간 공사를 금지하며 완성한 800만냥짜리 경복궁에는 애당초 뜻이 없었다.


3월 11일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민영환을 파견했다.

3월 29일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양여했다.

4월 17일 역시 미국인 모스에게 평안도 운산금광 채굴권을 양여했다.

4월 22일 러시아인 니시켄스키에게 함경도 경원과 종성 사금광 채굴권을 양여하고

7월 3일 프랑스 기업 그리러사(社)에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양여했다.

9월 9일 러시아인 '뿌리너'가 설립한 합성조선목상회사(合成朝鮮木商會社)에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벌목(伐木)과 양목(養木) 권한을 허락했다.


이듬해 1월 18일 일본 황태후가 죽자 19일부터 27일까지 경운궁에 가서 상복(喪服)을 입었다.(이상 1896~97년 '고종실록')


23일 뒤 경운궁으로 고종이 돌아갔다. 이게 아관 1년 동안 고종이 한 일이다.

한 정권이,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바를 한다고 해서 이를 칭찬한다면 잘못이다.

근대화 시기에 법제를 정비하고 정부 조직을 개편하는 조치는 칭찬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이를 하지 않으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

고종이 한 일은 장차 황제로 등극해 머물 황궁(皇宮) 설계와 시공, 이권(利權) 양여와 미래의 황제로서 평시에나 해야 할 의전(儀典)이었다.


경운궁 중건과 상소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황제에 등극했다.

경운궁 전각들도 착착 완공되고 있었다. 그런데 1904년 2월 29일 또 궁궐에 불이 났다.

함녕전 온돌 공사 때 붙은 불이 궁궐 전역을 휩쓸었다.

특진관 이근명이 "처소를 다른 궁으로 옮기시라"고 권했다.

고종이 답했다. "비록 곤궁하지만 이 궁궐을 반드시 중건해야 한다."(1904년 2월 29일 '승정원일기')



해방 때까지 덕수궁 정관헌 옆에 서 있던 비석.

1909년 7월 5일 덕수궁에서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따위가 쓴 시다.

이완용이 쓴 마지막 연은‘두 땅이 한 집 되니 천하가 봄이로구나’다. 시제(詩題)는 고종이 내렸다. /국립중앙박물관
 
그 비상식적인 지도자에게 중추원 의관 안종덕이 상소를 했다.

요지는 "왕께서 하신 말씀만 모으면 훌륭한 황제가 다섯에서 여섯으로 늘겠다"였다.

"경복궁과 창덕궁이 있는데 왜 경운궁을 중건하나"는 내용이다.(1904년 7월 15일 '고종실록')

열흘 뒤 봉상사 부제조 송규헌이 작심을 하고 일격을 날렸다.

"군신상하가 바삐 뛰어도 두려운데 대궐 수리나 하고 있는가. 저 간신들을 다 처벌하고 공사를 중단하라."

귀는 열리지 않았다. 비상식적인 판단에 의해 중건이 결정되고 2년 뒤 공사가 완료됐다.

중건 공사 비용은 모두 795만2764냥4전이었다.('경운궁중건도감의궤') 1906년이었다.


파탄


1907년 7월 20일 그 황궁에서 고종은 황제 자리에서 내려왔다.

일본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정도로 황실은 쇠약해 있었다.

이듬해 9월 8일 고종 생일날 고종이 재중건한 덕수궁 준명당에서 일본 사진가 무라카미 덴신(村上天眞)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때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개칭돼 있었다.


 

1910년 3월 27일‘황성신문’에 실린 궁내부 광고.


‘경복궁과 창덕궁의 쓸데없는 건물(不用建物) 4000여 칸을 판다’고 적혀 있다.

2년 전인 1908년 사람없는 경복궁은 입장료를 받는 공원으로 변했다.
 
  1909년 7월 5일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으로 돌아가며 고종을 알현했다. 비가 내렸다.


고종이 시제(詩題)를 내리니 이토와 후임 통감 소네 아라스케, 이완용 따위가 시를 썼다.


이완용이 쓴 마지막 연은 '兩地一家天下春', '두 땅이 하나가 되니 천하가 봄이다'였다.


1935년 덕수궁 정관헌 옆에 시를 새긴 비석이 건립됐다.

비석 뒷면에는 '태황제께서 크게 기뻐하였다(大加嘉賞)'고 적혀 있었다.(오다 쇼고,

'덕수궁사(德壽宮史)'·1938년) 해방 후 비석은 땅에 묻혔다.


  1908년 2월 왕비 민씨 시신이 불탔던 경복궁 녹산에서 사슴들이 굶어 죽었다.(1908년 2월 12일 등 '대한매일신보')


3월 8일 고종이 공사를 독려하고, 초개처럼 팽개쳤던 경복궁이 민간에 유료 개방됐다.(3월 10일 같은 신문)


2년 뒤 경복궁 전각 일체가 민간에 매각됐다.(1910년 3월 27일 '황성신문') 5개월 뒤 나라가 사라졌다.

고종은 '도쿠주노미야 이태왕(德壽宮 李太王)'이었다.

그래, 하필이면 그때 그 왕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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