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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천길단애를 이루는 파주 월롱산

by 한국의산천 2014. 11. 22.

천길단애를 이루는 파주 월롱산[2014 · 11 · 22 · 오전에 이슬비가 내리며 오후부터 개인 토요일]

 

  두리뭉실 구릉지같은 非山非野를 이루는 파주일대 평원에 얕으막히 솟아있는 월롱산.

높이는 비록 200m 급이지만 파주 월롱산의 정상부를 이루는 솟아오른 바위 천길단애 위에 서면 파주일대가 한눈에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한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 멀리 보이는 나즈막한 월롱산이 운무에 덮혀있다 ⓒ 2014 한국의산천

토요일 아침 이슬비가 내리지만 큰비가 아니라는 생각에 배낭을 메고 파주로 향했다.  

 

▲ 월롱역 출발 ~ 용지골 ~월롱초교 ~ 월롱산 ~  용상골 ~ 월롱역 (약 9km) ⓒ 2014 한국의산천

 

수도권 전철 노선도 보기

http://www.smrt.co.kr/program/cyberStation/main.jsp

 

월롱산(218.5m)

  고령산 북맥벌판 가운데로 솟은 산정에 배가 떠나는 모양의 형국이 있는데 마치 반달과 모습이 흡사하여 월롱산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옛날 청전구현(교하현)청사가 있어 선성이라 불리기도 한다.산 입구에는 용주서원이 있으며 용상사라는 사찰이 있다.

  능선 곳곳에는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멋진 전망대가 여럿 있고, 특히나 정상부에는 거대한 바위절벽이 있어 마치 해안가의 절벽을 연상케 한다. 정상부의 바위를 오르면 멋진 전망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된다.

 

용주서원(龍洲書院)

  용주서원은 조선 선조(宣祖) 때 유학자이며 청백리에 녹선 된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건립된 서원으로 선조 31년(1598) 백인걸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던 옛 집터에 지방 유림들이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셨다.

   그 후 유생 정재심(鄭在心)이 사액(賜額)을 청했으나 실패하고 철폐되었으며 그 자리에 유허비(遺墟碑)만 남아 있다가 1924년 유생들이 다시 뜻을 모아 서원을 복원하고 백인걸 선생 외에 그의 문인이었던 장포(長浦) 김행(金行), 옥천(玉川) 조감(趙堪), 낙금당(樂琴堂) 신제현(愼齊賢), 당산(堂山) 백유함(白惟咸) 등 5인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고 있다.

 

▲ 만추의 용상사 일주문 ⓒ 2014 한국의산천

 

노래를 불러라 ~

 

내 꿈이여 내 사랑이여 너울대며 춤추는 내 작은 소망이여
네 푸른 희망 속에 우리 사랑 묻으면 젊은이의 가슴속엔 진실이 있어라

 

 

▲ 등산에 앞서 용상사를 잠시 둘러보고 갑니다 ⓒ 2014 한국의산천

 

이슬비 내린다

이슬비를 맞으며 산을 오른다

이슬비를 맞으며 산을 오르며 노래를 흥얼 거린다

 

푸른 산들이여 넓은 들녁이여 너울대며 춤추는 내 작은 나비여
네 고운 날개 품에 우리 마음 묻으면 아침햇살 이슬 속엔 희망이 있어라

밀려오는 파도처럼 넘치는 기쁨이여 내게 있어라, 내게 있어라
불어오는 바람처럼 싱그런 젊음이여 내게 있어라, 내게 있어라

 

▲ 용상사 대웅전 ⓒ 2014 한국의산천

 

   용상사(龍床寺)는 월롱산 남쪽 사면 중턱에 위치한다. 성종 12년(993), 현종1년(1010)에 이어 현종 9년 (1018)에 소배압이 거느린 40만의 거란군이 개성까지 쳐들어오게 되자 현종은 민간인 차림으로 이곳 월롱산까지 피신하게 되었다. 다행히 강감찬이 귀주(龜州)에서 승리하면서 나라 안이 평정되자 현종은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절을 짓게 하고는 임금이 머물렀다는 뜻으로 용상사(龍床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덕은화주(德隱化主)가 세종 27년(1445)에 중건하였으며 이때 소불석상(小佛石像)을 인근 벽장굴에 조성해 봉안하였다.

 

  임진왜란 때 승병의 도량이 되었는데 왜군의 시체가 근처 골짜기에 가득하여 한때는 “무덤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으나,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절 이름이 보이고 있고, 1779년에 편찬된 『범우고』에 보면 ‘절이 지금은 없어졌다’라는 말이있어 임진왜란 이후 어느 때인가 폐사된 것으로 생각된다.

 

 

  근대에는 1926년에정염스님이 폐허가 된 절터에 사찰을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현재의 용상사는 옛 터에서 약간 아래쪽에 터를 닦아 해방 전에중건되었고, 벽장굴에 있던 석불을 대웅전에 모시게 되었다. 1967년에 대웅전을 다시 개축하면서서쪽에 삼성각(三聖閣)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는데 소속은 대한불교 일승종(日乘宗)이다.

 

  정통십년명석불좌상(正統十年銘石佛坐像)은 높이61cm에 폭이 50cm정도인 소형불좌상이다. 석불의 전면에는 회칠이 되어 있어 세부적인 특징을 자세히 관찰하기는 어려우나 목이 짧고 직사각형의 모난 얼굴에 육계가 두툼하다. 바닥에는 “正統十年 乙丑五月○○德隱”이라 새겨져 있어 덕은에 의해 용상사가 중창될 때 같이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 조성연대는 1445년으로 조선 초기의 불상양식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파주(坡州)

 

  파주는 본래 고조선의 땅이었다가 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했다. 삼국시대에 최초로 파주에 자리 잡은 나라는 백제였으나 고구려와의 계속된 영토싸움으로 475년에는 파주 땅 전체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가 그 뒤 신라 진흥왕이 파주를 차지하였다. 고려시대의 파주 지역은 무신정변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데 1170년(의종 24)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보현원이 바로 옛 장단군 지역이기 때문이다.

 

  파주는 조선시대에 지금의 명칭을 얻었으며 세조(1459년)는 이곳이 왕비의 친정이 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그전까지 원평도호부로 불리던 곳을 ‘목(牧)’으로 승격시키고 명칭도 파주로 고쳤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13년(광해군 5) 이의신(李懿信)에 의해 교하천도론(交河遷都論, 지세가 노쇠해진 한양에서 파주의 교하로 서울을 옮기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논의에 그치고 말았다.

 

  파주 지역에는 한강과 과거 칠중하(七重河)라 불렀던 임진강을 비롯하여 공릉천, 문산천, 갈곡천, 비암천 등 크고 작은 강이 많았다. 파주는 북녘의 산하를 위에 두고 구불구불 흐르는 임진강과 대한민국의 심장을 관통하여 흐르는 한강이 함께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하구(河口)에 위치해 있어 예로부터 둑과 제방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파주(坡州)는 ‘둑 위의 마을, 즉 둑과 제방이 많은 마을 또는 둑, 제방 역할을 하는 마을’이란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파주는 한양에서 가까워 임진강을 따라 각종 유통이 발달하였으며 그 중 고랑포와 문산포가 물류 집산지로 유명하여 조선시대에는 서민들이 한강 마포나루에서 고랑포나루까지 소금과 새우젓을 황포돛배로 실어 날랐는데 배 모양이 둥글넓적하며 선저가 평판으로 된 우리나라 특유의 한선으로 이순신 장군이 사용하였던 거북선, 판옥선과도 흡사하였다. 고속도로가 뱃길을 대신하기 전까지 임진강변은 사람들의 흥겨운 노랫가락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파주는 동쪽의 마식령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임진강의 하류 유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적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물줄기는 임진강이 서남쪽으로 흐르는 만우천과 북서쪽으로 흐르는 문산천, 서쪽으로 흐르는 공릉천 등을 받아 안고 북서쪽으로 경계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들고 서남쪽으로는 한강이 경계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들고 서쪽에는 해안 평야가 넓게 발달되어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산줄기는 동쪽으로 감악산(紺嶽山, 675m), 노고산(老姑山, 401m)의 산줄기가 양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황룡산(135m), 명봉산(248m)의 산줄기가 고양시와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남부는 한강(漢江)을 경계로 김포시와, 북부는 임진강(臨津江)을 경계로 북한의 개풍군과 접하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파평산(坡平山, 496m), 봉서산(鳳棲山, 216m), 월롱산(月籠山, 229m), 박달산(368m) 등이 남쪽으로 그 높이를 낮추어 가며 이어져 있다.

 

 

 

산은 산을 가리지 않는다

 

                         - 이 하 (李 夏 : 시인, 교수)

비킬 뿐
산은 산을 가리지 않는다.
낮은 데로 낮추어
소리도 묻어나지 않게
앞은 앉고 뒤는 서고
크면 큰 대로 빛깔을 던다.
 

언젠가
강이 지나칠 무렵
한 자락씩 거두어 길을 내고는
은밀히 강바닥으로
무릎을 맞대어,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
 
산은
산을 밀어 내지 않는다.
무성한 제 그림자를
강물에 담글 때면
건넛산이 잠길 어귀를
비워둔다.
 

때로 겹친 어깨가
부딪칠 때도
조금씩 비켜 앉을 뿐
산은
산을 가리지 않는다.

 

 

 

한창 젊었던 시절 선인이나 인수야영장에서 함께 모여서 코러스로 자주 부르던 노래

한마음의 꿈이여 사랑이여  

 

1.
푸른 창공이여 넓은 바다여 너울대며 춤추는 내 작은 갈매기여
네 하얀 날개 품에 우리 마음 묻으면 반짝이는 물빛 속엔 사랑이 있어라

밀려오는 파도처럼 넘치는 기쁨이여 내게 있어라, 내게 있어라
불어오는 바람처럼 싱그런 젊음이여 내게 있어라, 내게 있어라

 

2.

푸른 산들이여 넓은 들녁이여 너울대며 춤추는 내 작은 나비여
네 고운 날개 품에 우리 마음 묻으면 아침햇살 이슬 속엔 희망이 있어라

 

3.

내 꿈이여 내 사랑이여 너울대며 춤추는 내 작은 소망이여
네 푸른 희망 속에 우리 사랑 묻으면 젊은이의 가슴속엔 진실이 있어라

 

 

 

  탄현면 금승리와 월롱면 덕은리, 그리고 금촌 야동동에 걸쳐 우뚝 솟아 있는 해발 246미터의 월롱산은 예로부터 신산으로 알려져 있다. 월롱산 내령은 크게두 개의 봉우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월롱면 덕은리와 야동동 쪽을 ‘파주 월롱산’이라 하고 탄현면 금승리 쪽을 ‘교하 월롱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월롱산 서쪽에월롱산과 해발높이가 비슷한 기간봉이 있으며 이곳에는 측량에 이용된 기가 꽂혀 있어 깃대봉으로 부르기도 한다. 월롱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파주 일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어 월롱산은 천연 요새와 같은 곳이다.

 

▲ 월롱산 성지 (경기도 기념물 196호)

 

 파주월롱산 성지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에 있는 임진강과 한강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축조한 옛 산성이다. 시야가 막힌 곳 없이 탁 트여 멀리까지 아주 잘 보이기 때문에 자연지형을 이용한 뛰어난 요새로서 평가받고 있다. 최근 경기도박물관의 정밀 학술조사에서 밝혀진 바로는 성에서 주로 회청색격자문토기가 출토되었으며, 백제의 전성기인 3~4세기 근초고왕 때 백제의 주성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곽의 길이는 약 1,315m이고 면적은 33,232㎡에 달한다. 전형적인 퇴뫼식 산성이며 월롱산 꼭대기의 내성과 동쪽 능선을 따라 자리 잡은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2004년 5월 6일 경기도기념물 제196호로 지정되었다.

  그 동안 문헌적으로 월롱산성이 존재하고 있음은 보고되었으나 구체적인 산성의 규모와 실체에 대한 조사가 없었다. 그러나 경기도박물관의 정밀 학술조사에서 월롱산성이 임진강과 한강 하구지역을 통제하던 초기 백제의 주성 역할을 담당했던 성으로밝혀졌다. 월롱산성은 동서남북이 벽으로 구성되어 있다.성의 외벽은 거의 20미터 이상이 절벽인 자연지형을 이용하였고, 현재 내벽의 대부분은 정연한 석축형태를 보이지않고 일부 석재만이 노출되어 있다.

 

  문지는 동문지, 서남문지, 서북문지, 북문지가 확인되며 동문지와 북문지를 제외한 서남문지와 서북문지는 자연암반을 계단 모양으로 깎아내면을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산 정상에는 체육시설이들어서 있고 등산객들이 수시로 월롱산을 찾고 있어 주민들의 체육 및 휴식 공간으로 잘 알려져 있다.

 

 

 

 

 

▲ 장단콩으로 만든 두부정식집에서 늦은 점심 식사 후 귀가 ⓒ 2014 한국의산천

 

▲ 집 앞에서 하루일과를 마무리하기 .. ⓒ 2014 한국의산천

1.
푸른 창공이여 넓은 바다여 너울대며 춤추는 내 작은 갈매기여
네 하얀 날개 품에 우리 마음 묻으면 반짝이는 물빛 속엔 사랑이 있어라

밀려오는 파도처럼 넘치는 기쁨이여 내게 있어라, 내게 있어라
불어오는 바람처럼 싱그런 젊음이여 내게 있어라, 내게 있어라

 

▲ 늘 미안한 마음이 드는 집사람과 함께 ⓒ 2014 한국의산천  

 

2.

푸른 산들이여 넓은 들녁이여 너울대며 춤추는 내 작은 나비여
네 고운 날개 품에 우리 마음 묻으면 아침햇살 이슬 속엔 희망이 있어라

 

▲ 넘치는 사랑을 내게 주는 집사람 ⓒ 2014 한국의산천

밀려오는 파도처럼 넘치는 기쁨이여 내게 있어라, 내게 있어라 / 불어오는 바람처럼 싱그런 젊음이여 내게 있어라, 내게 있어라

 

3.

내 꿈이여 내 사랑이여 너울대며 춤추는 내 작은 소망이여
네 푸른 희망 속에 우리 사랑 묻으면 젊은이의 가슴속엔 진실이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