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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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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길, 화가의 길, 사랑의 길, 해탈의 길 … 성북동 길

by 한국의산천 2014. 10. 9.

아항

가수 '유심초'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노래 가사가 김광섭님의 詩였구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유심초
 

 


요즘은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하늘을 볼 기회도 없고 하늘을 봐도 별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참으로 별 볼일 없는 나날을 사는것이 아닐까?

별빛 한번 제대로 볼 수 없는 도시의 밤은 깊어만가고 그래도 시원한 가을 바람이 있어 참 좋은 오늘입니다

 

문인의 길, 화가의 길, 사랑의 길, 해탈의 길 … 성북동 길 [기사정리 :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

 

[서울, 오늘의 기억 내일의 유산]
한국 예술 100년 켜켜이 쌓인 '인문학 박물관' 성북동 루트

 

▲ 순애보·무소유 … 사연 많은 길상사

 시인 백석은 1930년대 말 기생 김영한에게 반해 ‘자야(子夜)’라고 부르며 같이 살았다. 동거를 반대한 집안 어른을 피해 택한 사랑의 도피처는 러시아였다. 백석은 러시아에서 자야를 기다리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썼다.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야는 러시아에 가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백석과 자야가 만날 수 있는 길은 끊기고 말았다. 자야는 성북동에 요정 ‘대원각 ’을 세워 큰 부를 일궜지만 백석의 생일(7월 1일)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자야는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화돼 95년 1000억원 상당의 대원각 부지 2만3000여㎡ 를 법정스님에게 시주했다. 그것이 지금의 길상사다. 99년 숨진 자야는 생전에 “그 돈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는 글을 남겼다. 펜화 오른쪽 불상은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가 만든 것으로 성모상을 닮은 관세음보살상이다. 종교 화합을 염원하는 작품이다. [안충기 기자]

 

  광복 이듬해인 1946년 간송(澗松) 전형필은 자신이 보관해 왔던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을 세상에 공개했다. 해례본을 통해 한글의 독창적인 제작 원리와 철학 체계가 알려지면서 ‘고대 문자를 모방한 것’이라는 오랜 왜곡이 바로잡혔다. 김종택 한글학회장은 “해례본이 없었다면 우리는 한글의 가치를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10월 9일 한글날도 책의 서문에 적힌 출판일인 1446년 음력 9월 10일을 기준으로 지정됐다”고 말했다. 간송이 해례본을 사들인 1940년은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42년엔 조선어학회 33인이 투옥됐으며 이 중 몇몇은 옥사했다.


 

 간송이 해례본을 사들여 보관한 곳이 바로 성북동이다. 비슷한 시기 문인들도 하나둘 성북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문인들이 모여드는 산 속 암자’. 수연산방(壽硯山房, 이태준 고택)의 뜻처럼 성북동은 예술가들을 끌어들였다.

 

  한용운이 ‘심우장’에 자리를 잡은 1933년 이태준이 성북동에 들어왔다. 모더니즘 문학을 선도한 이효석·정지용 등 구인회(九人會)의 활동무대였고, 청록파(靑鹿派) 조지훈이 32년간 시를 쓴 곳이다. 박완서의 소설 『그 남자의 집』,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도 이곳이 고향이다.

 

  성신여대 김명석(국문학) 교수는 “국문학사에서 이렇게 많은 문인과 예술인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온 동네는 없었다. 성북동은 살아 있는 인문학 박물관”이라고 했다. 이렇게 성북동은 한국 문학 100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곳이고, 그런 문학을 가능케 했던 문인들의 스토리가 가득한 장소이며, 한글 문학을 가능케 했던 훈민정음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곳이다.


 

 

 

◀  시인 김광섭이 1969년 발표한 시 ‘저녁에’와 이듬해 화가 김환기가 시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그린 답화(答畵)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81년에는 듀엣 ‘유심초’가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지리적으로 보면 성북동은 한양도성의 북쪽 성곽과 북악산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도시의 섬’이다. 유일하게 트인 동남쪽으로도 20여 분을 걸어나가야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 다다른다. 서울에서는 드문 ‘지하철 오지’인 셈이다. 그래서 지금의 성북동도 1940년대처럼 “숲이 있고 단풍이 들고 새가 운다”(화가 김환기), “장 볼 만한 시장이나 수퍼가 없고”(정미숙 한국가구박물관장), “언덕길이 많아 불편한”(주민 박종운) 성북동은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성북동에 이사온 지 15년째인 장석남 시인은 “한양도성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성북동의 풍광은 다른 곳에선 느낄 수 없는 감상을 자아낸다”고 했다. 미술사학자 김용준도 48년 발표한 『근원수필』에서 “기실은 진실로, 진실로 그저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라고 성북동에서 사는 이유를 설명했다.

 

  예술가들은 이곳에서 서로의 예술혼을 자극했다. 60년대 교분을 다진 시인 이산(怡山) 김광섭과 화가 수화(樹話) 김환기는 대표적인 예다. 이산이 어스름 저녁 하늘을 그린 ‘저녁에’를 짓자 이에 수화는 시의 마지막 구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제목으로 한 그림을 발표했다. 한국미술대상전 제1회 수상작인 이 작품은 한국 추상미술의 놀라운 성취다.

 

  문인들의 스토리도 넘친다.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길상사(吉祥寺·펜화)엔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러브스토리가 있다. 만해 한용운이 총독부 방향을 바라보기 싫어 지은 북향집 ‘심우장’ 툇마루에선 나라를 잃은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수연산방은 이태준의 외손녀가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장석남 시인은 “학생들을 성북동에 데리고 오면 이렇게 가치 있는 볼거리가 숨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며 “책상에 앉아 교과서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공간과 이야기를 보고 듣는 것이 더 좋은 공부”라고 했다. 성북동의 유산과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 많은 사람이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김명석 교수는 “제대로 발굴되지 않은 곳도 많고, 박태원·윤이상 집터엔 비석 하나 없다”고 아쉬워한다. 서울시는 ‘윤중식 가옥’과 ‘박경리 가옥’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했지만 아직 매입조차 하지 못했다.

 

 

◆ 어떻게 둘러볼까

  성북동은 언덕과 언덕으로 이어져 있다. 달동네인 북정마을에 있는 심우장이나 2만㎡ 대지의 길상사를 둘러보는 건 웬만한 체력으로도 쉽지 않다. 대중교통으로는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걸어가거나 6번 출구의 시내버스 1111번, 2112번, 길상사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본지가 제안한 A코스에 관심이 있다면 시내버스를, B코스를 보고 싶다면 길상사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게 좋다. 성북동에는 유명한 한정식집이 곳곳에 포진해 있지만 성북초등학교 건너편에 40년째 서 있는 ‘쌍다리 돼지불백’의 7000원짜리 불고기백반은 줄 서서 먹는 명물이다.[중앙일보 구혜진 기자]

 

길상사에 얽힌 이야기


  길상사에는 아직도 우리 가슴을 덥히는 창건 실화가 스며있다. 술과 노래가 흥건히 고여 있던 유곽이 청정도량으로 바뀐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마음속에 들어있음이었다. 현대 한국불교에서 우러난 비범한 이야기이다.


창건 실화 속에는 여인 김영한(1916~1999)이 있다. 시인 백석의 애인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었다. 그녀의 삶을 더듬어본다.


서울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지만 어느 날 집안이 몰락했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조선 권번(券番, 기생조합)에 들어갔다. 정악계의 대부 하규일(1867~1937)을 스승으로 모시고 진향이란 기명을 받았다. 진향은 함흥에서 교사들의 회식장소에 갔다가 시인 백석을 만났다. 첫눈에 반한 스물 여섯 백석이 스물 두 살 기생 진향에게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백석은 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줬다.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따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왔다. 백석은 자야의 집에 머물며 시를 썼다. 1938년에 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자야와의 사랑을 읊은 시였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슬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이하 생략)”


사랑은 뜨거웠지만 백석의 부모는 기생 출신 자야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가자고 졸랐다. 그러나 자야는 따라 나설 수가 없었다. 백석의 인생길에 걸림돌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로 떠났다. 해방을 맞아 신의주로 돌아왔지만 다시 한국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동강 난 나라 남과 북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백석을 그리며 또 기다리며 자야는 치열하게 살았다. 사업을 하고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면서 재물을 모으고 지식을 쌓았다. 모두 백석이 나타나면 그에게 바칠 것들이었다.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 배밭골 일대를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열었다. 제3공화국에서 대원각은 정권실세들의 단골요정이었다.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허기진 마음은 지식으로도, 돈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

 

  격정의 세월은 흘러가고, 어느 날 자야 여사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었다. 큰 감명을 받고 돌아보니 살아온 날들이 남루했다. 자신을 비우고 싶었다. 자야 여사는 법정 스님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다. 미국에 머물던 1987년, 자야 여사는 설법을 하러 온 법정 스님을 로스엔젤레스에서 처음 뵈었다. 그리고 대원각 건물과 부지를 법정 스님께 시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1000억원대의 재산이었다. 그러나 ‘무소유’의 법정은 이를 간단히 뿌리쳤다. 이로부터 거의 10년 동안 승강이가 벌어졌다.


“제발 시주를 받아주세요. 스님.”


“시주를 받아 들일 수가 없습니다. 보살님.”


그러다 결국 1995년 법정 스님은 김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대신 대원각의 전 재산을 개인 명의가 아닌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하게 했다. 쾌락과 술수, 관능과 음모가 술상 위에 질펀했던 밀실이 도량으로 바뀌는 대역사가 시작됐다. 대원각은 7000평이 넘는 숲속 부지에 40동의 건물이 있었다. 모든 건물에는 술과 고기 냄새가 배어있었다. 청정 일꾼(스님)들은 이를 가만가만 걷어냈다.


1997년 12월 14일 마침내 길상사가 개원했다. 김 할머니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내려준 법정 스님은 보살 목에 108염주를 걸어주었다. 창건법회서 길상화 보살이 말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 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아픔과 슬픔을 넘어선 비원이었다. 보살의 소원은 참석자 모두의 가슴으로 흘러들어갔다. 법회에 참석한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 등 종교 지도자들이 길상화에게 경배했다. 보살은 그 후에도 시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드려야 큰일인데 있는 것을 드렸으니 내세울 일이 아니네.”


“내 모든 재산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만 못해.”


길상화 보살은 자신이 죽거든 눈 오는 날 자신의 유해를 길상사 뒤뜰에 뿌려달라고 당부했다. 연인 백석의 시처럼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백석에게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법보신문중에서 기사정리 :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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