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귀촉도 촉으로 가는 길

by 한국의산천 2012. 11. 24.

촉도의 그 어려움은 하늘에 오르기와도 같이 힘들구나 

 

귀촉도 (歸蜀途)

아니 시의 제목 새이름에 途 / 길'도'字가 붙어있었다. 무슨 뜻일까?

그것이 궁금하여 귀촉도를 찾아보고 다음과 같이 중국의 촉나라와 연관이 있다는것을 알게되었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한다면 가보고 싶은 곳이다.

 

두견새의 다른 이름들

접동새, 소쩍새, 자규, 불여귀(不如歸), 두우(杜宇), 귀촉도(歸蜀途), 망제혼(望帝魂)...

 

"눈물 아롱아롱/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 미당 서정주의 시 '귀촉도'의 첫 구절이다.

 

낙화

           -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귀촉도(歸蜀道)는 본래 촉나라로 돌아가는 길이란 뜻이다. 중국 삼국시대 유비가 세운 촉이 망하자 충신들은 위나라의 후신인 진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이들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죽은 뒤 무덤가에서 슬피울던 소쩍새의 다른 이름이 귀촉도다.

미당이 일제하 망국의 한을 남녀간 애절한 이별의 정한으로 승화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시구의 서역 삼만 리나 파촉(巴蜀) 삼만 리는 중국의 쓰촨(四川)성 일대를 가리킨다. 

촉의 수도였던 청두에는 유비릉과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 등 숱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

 

 

▲ 영월시내에 자리한 관풍헌內에 있는 자규루 ⓒ 2012 한국의산천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그해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이곳으로 거쳐를 옮기고 이곳에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단종.그의 나이 열일곱, 열두살에 왕위에 올라 3년 있다가 영월로 내몰려 다시 3년 뒤 쓸쓸한 최후를 마치었다.

또한 김삿갓이 20세 되던해에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조부를 신랄하게 탄핵하는 글을 지어 장원을 한곳도 바로 이곳 관풍헌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984번지에 있는 자규루는 원래 세종 10년(1428) 영월군수 신숙근(申叔根)이 객사 옆에 지은 매죽루(梅竹樓)였는데, 청령포로 유폐된 단종이 물이 넘쳐 익사할 위험이 있자 읍내로 옮겨와 자주 올라 자신의 처량함을 자규사(子規詞)로 노래하였다고 하여 사람들이 이름을 고쳐 불렀다.

 

지금은 매죽루 현판이 같이 걸려 있다. 자규는 옛날 신하에게 쫓겨난 촉나라 임금 두우(杜宇)가 슬피 울며 진달래를 붉게 물이고 죽어 새가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뀌쭉' '찌꾸'인 새 울음이 마치 '촉으로 돌아가나 돌아가지 못하나[歸蜀道不如歸]'한 것과 같아서 일명 귀촉도(歸蜀道)라고도 하는데 일명 두견새, 소쩍새라고도 한다.

 

나는 자규루에 올라 태평무를 흥얼거렸다

사무친 옛 생각에 눈물 삼키며 재너머 강건너 흘러가는 나그네~.

태평무 - 주현미

월악산 깊은골에 밤새가 울어 객창에 비친 달이 너무설구나
꽃그림자 내려 밟고 님 떠날때 울밑에 귀뚜리도 슬피 울었지
아! 나그네 나그네 사연 사무친 옛 생각에 눈물 삼키며

재너머 강건너 흘러가는 나그네.

월악산 영마루에 달이 떠오르면 들려오는 피리소리 애닳프구나
떠난님 그리워 잠못 이룰때 추풍에 지는 낙엽 함께 울었지
아! 나그네 나그네 사연 한서린 옛 생각에 가슴 적시며

영너머 청송길로 사라지는 나그네. 

 

관풍헌 자규루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그해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이곳으로 거쳐를 옮겼다. 이곳에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한편으로는 (강요에 의해)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와 금부도사가 약사발을 드밀지 못하자 본읍에서 달려온 무지한 통인 하나가 큰 상이라도 탈줄알고 활시위를 구하여 올가미를 만들어 문틈으로 잡아당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때 단종을 옭아죽인 통인은 돌아서서 몇발자욱 못가서 입과 코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단종.그의 나이 열일곱, 열두살에 왕위에 올라 3년 있다가 영월로 내몰려 다시 3년 뒤 쓸쓸한 최후를 마치었다.

 

또한 김삿갓이 20세 되던해에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조부를 신랄하게 탄핵하는 글을 지어 장원을 한곳도 바로 이곳 관풍헌이다. 

관풍헌은 본래 고을의 객사로 쓰던 건물로 영월읍의 중심에 있다.  고색창연한 큰 건물 세 채가 나란히 잇닿아 있는데 해방 전에는 영월군청이 썼고, 해방 후에는 영월중학교가 들어 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단종 복위 후 단종의 원찰(願刹) 이었던 보덕사(保德寺)의 포교당으로 쓰고 있다.
동헌 동쪽에 있는 누각을 자규루(子規樓)라 하는데 이 누각은 세종 때 영월군수였던 신근권이 세워서 매죽루(梅竹樓)라고 했던 것을 단종이 이에 올라 '피를 토하듯 운다' 는 두견새(杜鵑: 一名 子規)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고 하여 그 시를 자규시라 하고 이 누을 자규루라고 부른다.

 

子規詞(자규사)단종(1441-1457)

月白夜蜀魄 (월백야촉백추)달밝은 밤에 두견새 울음소리 더욱 구슬퍼
含愁情依樓頭(함수정의루두) 수심많은 이내 목 누 머리에 의지하노라
爾주悲我聞苦(아주비아문고) 슬피우는 네 목소리 내 듣기 괴로우니
無爾聲無我愁(무이성무아수) 네 울음 그쳐야 내 수심도 그치리라
寄語世上苦勞人(기어세상고로인) 세상에 괴로움 많은 자에게 한마디 부치니
愼莫登春三月子規樓(신막등춘삼월자규루)   아예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말아다오


자규시 

一自寃禽出帝宮;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와

孤身雙影碧山中; 외로운 몸과 외로운 한 그림자로 푸른 숲에 깃들었다.

假眠夜夜眠無假; 밤마다 억지로 잠들려 하지만 잠 이루지 못하고

窮恨年年恨不窮; 해마다 한스러움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원한은 끝나지 않네
聲斷曉岑殘月白; 두견이 울음 끊어진 뫼부리에 조각달만 밝은데

血漏春谷落化紅; 피를 뿌린 것 같은 골짜기에는 붉은 꽃이 지네
天聾尙來聞哀訴; 하늘은 귀머거린가 아직 애끓는 호소를 듣지 못하고
何奈愁人耳獨德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에게 귀만 밝게 하였는가.

 

 

▲ 운무속의 아미산

가장 아름다운 중국명산 13중 여섯번째인 아미산(峨眉山)은 이름처럼 눈썹같은 산봉이 아름다운 선인의 산이다. 구로동(九老洞)에서 우선사(遇仙寺)까지 꼬불꼬불한 산길이 펼쳐져 있는데 무성한 숲과 자욱한 안개가 아름다운 수묵화를 그린다.

 

아홉노인의 동굴이라는 뜻의 구로동과 선인을 만난 절이라는 우선사는 물론이고 아미산 곳곳에 신비로운 분위기가 가득해 아름답고 가물가물한 신화의 스토리가 머리에 떠오른다.

 

  이태백은 '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에서 촉나라 가는 길은 하늘에 오르는 일보다 더 험난하다고 노래한 바 있다.

'촉견폐일(蜀犬吠日)'이라는 고사성어 역시 촉나라의 지세가 험준함을 표현한 것이다. 촉나라는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해를 좀처럼 볼 수 없다, 그래서 모처럼 해가 제대로 나타나면 그것이 신기해서 개들이 일제히 짖어댄다는 이야기다. 이 고사성어는 견문이 좁아서 편협한 견해를 지닌 사람을 비유할 때에도 쓰인다.

그러나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어렵고 천혜의 방어 여건을 갖춘 촉 땅은 중원에서 패배한 영웅들이 휴식하면서 힘을 기르는 지역으로 자주 활용된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에게 일시 패한 후 촉 땅으로 통하는 외나무 다리를 불태우고 들어가 역전의 기회를 노렷고 촉한(蜀漢)의 유비(劉備)는 제갈량(諸葛亮)의 계책에 따라 이곳에서 한실중흥(漢室中興)의 대업을 도모하였다.

또 자연환경이 수려한 촉 땅은 상상력과 감성이 뛰어난 시인들도 많이 배출하였다. 사마상여(司馬相如) 이태백(李太白) 두보(杜甫) 소동파(蘇東坡) 등 대시인들이 이곳 출신이거나 이곳을 바탕으로 불후의 시편을 창작하였다.

 

[홍정선의 중국 기행 ‘시간의 풍경을 찾아서’] ⑫ 촉으로 가는 길<세계일보>

 

높고도… 험하고도… 아득한 길…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구나

 

  촉으로 가는 길에 대한 나의 가장 빠른 기억은 김소월의 시와 관계가 있다.  김소월의 시 ‘접동새’에 등장하는 접동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름이 있어서 중학생인 나를 골치 아프게 했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 중 소쩍새와 접동새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촉(蜀) 지방과 관계가 있었다.  두견(杜鵑), 두백(杜魄), 두우(杜宇), 두혼(杜魂), 망제혼(望帝魂) 등의 이름은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해서 전하는,
망제(望帝)라는 제호(帝號)를 가진 촉나라의 두우(杜宇)란 왕과 관계가 있었고,  불여귀(不如歸), 귀촉도(歸蜀道), 촉백(蜀魄), 촉혼(蜀魂), 촉조(蜀鳥)라는 이름은 ‘촉’이란 지방과 관계가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촉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해서 ‘귀촉도’란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불여귀’란 말은 ‘되돌아감만 같지 못하다’는 뜻인데 촉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험하다는 이야기인가?

 

 

 

▲ 잔도(棧道). 절벽에 홈을 파서 통나무를 박아 만든 사다리를 눕혀 놓은 모양의 길.

 

 

  이후에 알게 된 “눈물 아롱아롱 서역 삼만리”라는 구절로 유명한 서정주의 ‘귀촉도’란 시는 촉으로 가는 길에 대한 신비함을 더하고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촉으로 가는 길은 죽어서 혼백이나 갈 수 있을 정도로 험하고 아득한 길이란 말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백의 시가 등장했다. “아아, 높고도 험하여라! / 촉으로 가는 길은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구나(噫?? 危乎高哉! 蜀道之難, 難於上靑天)”라는 구절은 촉으로 가는 길에 대한 모든 설명을 넘어서는 표현이었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나는 반드시 촉도(蜀道)에 가보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백의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구나”라는 표현은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1993년 초 구정이 지난 지 닷새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나는 촉도를 보기 위해 용기있게 떠났다. 나는 그때 창춘(長春)에 살고 있었고, 구정을 지내기 위해 잠시 귀국한 처지였다. 돌아가는 경로를 먼저 다리(大理)와 리장(麗江) 지역을 돌아 청두(成都)로 가고, 다음에 청두에서 광위안(廣元)으로 가서 남쪽 촉도를 본 후 창춘으로 귀환하는 방식으로 짰다. 전시의 피난열차를 방불케하는 구정 전후의 교통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동쪽은 평원이고 서쪽은 산악지역이다. 이런 지형에서 남과 북을 가르는 기준은 동쪽의 경우 화이하(淮河)이고, 서쪽의 경우 친링산맥(秦嶺山脈)이다. 그런데 촉 지방은 친링산맥이 바로 밑 지역이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다바산맥(大巴山脈) 아래 지역을 가리킨다. 친링산맥과 다바산맥 사이에는 한중(漢中)지역이라 부르는 분지가 형성되어 있고, 다바산맥 아래에 있는 쓰촨(四川)분지를 촉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 때문에 촉도는 북쪽 촉도와 남쪽 촉도로 나누어진다.

 

장안(長安, 현재의 西安)이 자리 잡고 있는 관중(關中)지방에서 친링산맥을 넘어 한중지방으로 가는 산길을 북쪽 촉도라 부르고 한중지역에서 다바산맥을 넘어 쓰촨지방으로 가는 길을 남쪽 촉도라 부르는 것이다. 나는 두 차례에 걸쳐 촉도를 찾았는데 첫 번째는 남쪽 촉도에서 가장 유명한 자링강(嘉陵江)의 금우도(金牛道)를 보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북쪽 촉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포사도(褒斜道)를 보기 위해서였다.

 

 

▲ 검문관(劍門關). 쓰촨 검문산 최고봉인 대검산에 있는 군사요새.

  광원에서 옛날 촉도를 제대로 보고, 걷고, 느끼자면 먼저 남쪽으로 검문관(劍門關)을 찾아 산을 넘어가는 길을 보아야 하고 다음에는 북쪽으로 명월협(明月峽)을 찾아 강에 걸린 길을 보아야 한다. 이 두 곳을 찾아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옛길을 걸으며 나는 행복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촉도를 보고 싶어했던 소망이 이루어진 탓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검문관에서 제갈량의 체취를 맡은 탓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공부보다 ‘삼국지’를 읽는 데 몰두했고 중학입시에 떨어졌었다. 그래서 농사꾼이 되라는 아버지의 불호령 아래 소를 먹이며 1년을 보냈지만 대학입시 때는 초등학교 때의 독서 덕분에 제갈량의 출사표를 쉽게 해석할 수 있었다. 제갈량은 그렇게 나에게 새옹지마의 인생을 가르쳐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는 그를 통해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학식과 윤리, 공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포용력과 엄격함, 인간관계에서 갖추어야 할 신의와 의리를 배웠다. 그래서 나는 제갈량이 천험의 요새를 자랑하는 자리에 세운 검문관에서 파촉의 심장인 청두를 향해 굽이굽이 이어진 촉도를 천천히 오가며 그에 대한 개인적 추억과 그가 키우던 중원 도모의 꿈을 떠올렸고 행복할 수 있었다. 

 

  산의 정상에 있는 검문관 남쪽으로는 거대한 바위가 갈라져서 만들어진, 버스 1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절벽 사이의 길이 200여m 가량 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이백이 “검각의 봉우리들은 가파르고 뾰족해서,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사람도 뚫지 못하네(劍閣?嶸而崔嵬, 一夫當關, 萬夫莫開)”라고 말한 구절은 바로 이 같은 길의 모양을 두고 읊은 것이었다.

 

  나는 이 바위 절벽 사이의 촉도를 걸으며 강유(姜維)가 3만의 대군으로 이곳을 지키던 장면과 위나라의 명장 등애(鄧艾)가 음평(陰平)의 산길로 우회하여 촉을 멸망시키던 장면을 떠올리고는 안타까움보다는 제갈량이란 거인이 사라진 후의 공허함을 생각했었다.  

 

 

▲ 자링강(嘉陵江). 쓰촨성을 흐르는 양쯔강(揚子江)의 제3대 지류. 명월협은 자링강의 상류에 있다.

 

  명월협에 걸려 있는 촉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촉으로 가는 길의 험난함을 자링강 협곡에 걸려 있는 옛날 잔도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강의 양쪽에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수직의 가파른 절벽과 그 절벽을 따라가며 마치 눕혀 놓은 사다리처럼 걸려 있는 잔도에서 아래의 강물을 내려다보면 오금이 저려서 발걸음을 떼기조차 힘들었다. 이런 길을 아득한 진나라 시대에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절벽에 아래위로 나란히 달리는 홈을 파고 그 홈에 통나무 말뚝을 박아서 만든 길, 그 옛날에 아무런 장비도 없이 사람의 힘으로 이 길을 어떻게 건설했을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아마도 이백의 말처럼 “땅이 꺼지고, 산이 무너지고, 장사들이 죽는(地崩山?壯士死)” 그런 엄청난 사건이 있은 후에야 “하늘에 걸린 구름다리 같은 잔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然後天梯石棧相鉤連)”.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젊은이가 절벽에 매달려 홈을 파다가 떨어져 죽는 일이 있은 후에야 이 길은 만들어졌을 것이다.

 

 

▲ 광위안잔도(廣元棧道)-명월협(明月峽). 쓰촨과 산시(陝西)를 잇는 교통의 요지인 광위안 북쪽에 있는 명월협에 세운 고잔도.

 

그렇지만 잔도는 오랫동안 중국 서부지역의 중요한 간선도로로서 중원지방과 쓰촨지방의 인적·물적 교류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관중지역이 중국역사의 중심지였던 진·한·당 제국 시절 수도인 장안과 촉의 청두를 연결하는 가장 빠른 교통로는 이 잔도였다. 여러 개의 잔도 중에서도 장안에서 한중으로 넘어가는 포사도와 한중에서 청두로 넘어가는 금우도가 가장 빠른 고속도로로 널리 이용되었다.

이 고속도로를 따라 수많은 물건이 오가는 교역이 이루어졌고, 군대가 진군하고 후퇴하는 전쟁이 발발했고,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애틋한 일들이 발생했고, 이질적인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하는 교류가 일어났다. 그래서 잔도는 교역의 길이고, 전쟁의 길이고, 문화의 길이고, 상봉과 이별의 길이었다.

 

 

◀측백나무 숲. 역도(驛道) 주변에 심은 측백나무가 긴 세월이 지나 무성한 측백나무 숲이 되었다. 둘레 2미터 이상 된 나무는 진나라 때 심은 것이다.

 
 중국사람들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밝을 때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며 어두울 때 진창으로 간다(明修棧道, 暗渡陳倉)”는 말은 이 잔도가 전쟁과 관련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咸陽)에 먼저 입성하는 공을 세웠음에도 항우의 위세에 눌려 궁벽한 한중지역으로 쫓겨나 처박혀 있어야 했던 유방은 한신을 중용하여 권토중래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내가 두 번째로 찾았던 한중지역의 포사도는 유방이 한중지역으로 쫓겨 들어오며 중원 도모에 대한 항우의 의심을 없애기 위해 스스로 불살라버렸던 잔도인 동시에 한신이 중원으로 군대를 진출시키기 위해 수리하는 척한 바로 그 잔도였다. 한신은 낮에 포사도를 수리하는 척하며 더 외지고 험한 진창 고도를 통해 몰래 관중지역에 성공적으로 군대를 진출시킴으로써 한 제국 건설의 일등공신이 될 수 있었다.

 

  교역의 길이기도 한 잔도를 통해 오간 상품 중 잊을 수 없는 과일은 리즈(?枝)이다. 나는 이 과일의 맛에 매료되어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열심히 과일가게를 들락거렸다. 또 그 때문에 이 과일과 관련된 양귀비의 이야기를 부지런히 찾아서 읽었다.

 

  당나라 때 이조(李肇)라는 사람은 ‘당국사보(唐國史補)’라는 책에서 “양귀비는 촉 지방에서 태어나서 리즈를 무척 좋아했다. 남해에서 나는 리즈가 촉지방에서 나는 리즈보다 훨씬 맛이 있어서 매년 날 듯이 말을 달려 남해의 것을 운반해 와서 진상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시인 백거이는 리즈에 대해 “하루가 지나면 색이 변하고, 이틀이 지나면 향이 변하고, 사흘이 지나면 맛이 변하고, 나흘이 지나면 색과 향이 다한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당나라 시절에 수천 ㎞나 떨어진 광동지방의 리즈를 어떻게 맛이 변하기 전에 장안까지 운송할 수 있었을까?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두목(杜牧)은 당 현종과 양귀비의 호사한 생활을 비판하면서 “흙먼지 일으키는 한 필의 말에 양귀비는 웃으나/ 이 사람이 리즈를 가져오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 없네(一騎紅塵妃子笑, 無人知是?枝來)”라고 읊고 있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의 양귀비전(楊貴妃傳)에서는 “현종이 기병을 보내 수천리 길을 달려 신선한 리즈의 맛이 변하기 전에 장안까지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건대 그리고 금우도의 바로 왼쪽에 있는 잔도의 명칭이 리즈도(?枝道)인 것으로 미루어 촉지방의 낙주(洛州, 현재의 ?陵)와 가주(嘉州, 현재의 樂山)에서 나온 리즈를 기병을 동원하여 장안으로 운송했을 것이다. 아마도 남해의 리즈보다 촉의 리즈가 더욱 분주히 잔도를 지나 장안으로 갔을 것이다. 나는 포사도 위에서 사흘 안에 장안으로 리즈를 전달하기 위해 밤낮으로 아슬아슬한 잔도 위를 달리는 기병의 모습을 상상하며 아득해졌다. [문학평론가]

 

<걸어서 삼국지 기행12-쓰촨성편> 2-1 촉도(蜀道) 복원, 삼국지 영웅들의 부활

 

 

기원전 3세기 진(秦)나라가 험준한 산세를 뚫고 촉(蜀)으로 들어오기 위해 만든 고촉도(古蜀道)를 취재팀이 걷고 있다.


이 길이 처음 닦인 것은 기원전 3세기, 지금으로부터 2300여년 전이었다.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가 당시만 해도 미개척 지역이었던 촉을 정벌하기 위해 만든 길.

그로부터 500여년 후인 서기 214년, 유비가 대군을 이끌고 이 길을 통해 들어와 토착 세력을 멸하고 촉한(蜀漢)을 건국했다.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이 길에 들어서자 마치 진나라 군대의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유비군의 함성 소리가 마치 지척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주변에 널린 암석을 깔아 만들었다는 길은 닳고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였다.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삼국지 영웅들을 비롯한 수많은 백성들이 때로는 부푼 꿈을 안고, 때로는 좌절을 안고 이 길을 지났을 터였다.

길 좌우로는 높이 70~80cm 정도 되는 돌담이 쌓아져 있었다. 전마(戰馬)가 지나갈 때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조성한 일종의 울타리였다.

이 길을 란마창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 전마(戰馬)가 도로를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돌로 쌓은 울타리인 란마창(?馬墻). 가장 오래된 것은 이미 23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란마창을 둘러싼 숲은 온통 측백나무였다. 장정의 팔 길이로 세 아름이 넘을 만큼 굵었다. 한 여유국 관계자가 "둘레가 2m 이상 되는 나무는 진나라 때 심은 것"이라고 귀뜀해줬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아방궁(阿房宮)을 지을 때 이 곳의 측백나무를 베어다가 대들보로 썼다는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한(漢)과 당(唐)의 수도이며 장안(長安)이라고 불렸던 산시성 시안(西安)에서부터 청두까지 이어지는 외길인 촉도의 전체 길이는 대략 300km. 란마창의 길이는 800m 정도다.

 

  촉은 주변이 온통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거대 분지다. 예로부터 중원 세력은 비옥한 촉을 손에 넣기 위해 공을 들였지만 들어오는 길을 찾지 못해 번번히 실패했다.

오죽하면 당나라 때 시선(詩仙)인 이백(李白)이 촉도를 일컬어 “하늘보다 더 오르기 힘들다”고 표현했을까.

촉을 최초로 점령한 사람은 진시황의 고조부뻘인 진 혜문왕(惠文王)이다. 그는 촉을 얻기 위해 한가지 꾀를 냈다.

돌을 깎아 다섯 마리의 소를 만든 후 황금 똥을 싼다고 소문을 낸 것이다. 탐욕스러웠던 촉왕은 이 소를 갖기 위해 스스로 중원으로 나오는 길을 냈다.

진 혜문왕은 이 길로 들어와 촉을 멸하고 천하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이 때부터 촉도를 금우도(金牛道)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란마창 주변에는 측백나무 숲이 무성하다. 족히 네 아름은 돼 보이는 측백나무를 현지 안내원이 안아 보고 있다. 둘레 2m 이상 된 나무는 진(秦)나라 때 심은 것이다.


  촉도는 청두를 기점으로 방통묘(龐統廟)와 검문관(劍門關), 소화고성(昭化古城), 명월협(明月峽) 등 쓰촨(四川)성에 산재해 있는 각종 삼국지 유적을 하나로 잇는 길이다.

쓰촨성 정부는 수년 전부터 촉도 복원 사업에 착수했으며 내년부터 란마창도 관광상품화하기 위해 개발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쯤 되니 쓰촨성 삼국지 유적 탐방의 큰 그림이 그려졌다. 쓰촨성 정부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촉도 복원의 현장을 함께 하며 곳곳에 숨겨져 있는 삼국 문화의 향취에 젖어드는 것이다.

 

  촉도 복원 사업이 완료되고 쓰촨성이 삼국지 유적 관광의 메카로 떠오르게 되면 지역 경제의 대전환을 이룰 수 있다.

2000년 전 중원 세력은 촉도를 통해 새로운 문물을 전파하고 쓰촨 지역을 문명 세계로 편입시켰다.

이제 분지 속에 갇힌 채 세태 변화에 뒤쳐져 있던 과거 촉나라의 후예들이 스스로 길을 내 세상과 소통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경제 이재호 기자]

 

<걸어서 삼국지기행15-쓰촨성편> 5-2 촉도의 그 어려움은 하늘에 오르기와도 같이 힘들구나  
 

 

▲ 촉의 입구 명월협

 
명월협 입구의 전경.

(아주경제 이낙규 기자) 황룡이 지나간 자리안가? 대지가 파이고 산이 솟는다. 깎아지를 듯한 협곡 사이로 황토 빛 강물이 흐른다. 너무도 빠르고 매섭게 흐르는 강물 사이로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이 실로 엄청나 입을 다물기 힘들다. 하지만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자연이 빚은 절경에 구멍을 뚫고 길을 낸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려고 애쓰는 인간들의 아귀다툼을 대하다 대자연으로 고개를 돌리면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세삼스럽게 느껴진다.

 

  이른 아침 ‘걸어서 삼국지 취재팀’의 차량이 광음을 울리며 도로 위를 달린다. 어느 덧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가릉강의 물줄기. 취재차량은 그 물줄기를 따라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취재팀의 목적지는 명월협, ‘사기’에는 “천리의 잔도 촉한까지 통하다”고 기재되어 있다. 진혜왕이 촉나라를 멸망시키고 제갈량의 북벌 또한 이 잔도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태백도 “촉도의 그 어려움은 하늘에 오르기와도 같이 힘들다”라고 감탄하였던 그곳. 진한, 삼국시기 잔도의 웅장한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있는 그곳에 취재팀 다가가고 있다.

 

명월협 입구 역시 한산했다. 제법 웅장한 명월협 입구 앞이지만 주차장에는 취재팀의 차량외에 차량이 몇대 없었다. 다만 저멀리 울려퍼지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명월협 입구의 적막함을 깨고 있을 뿐이었다. 안내원을 기다리며 명월협을 안내판을 바라보다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다. 안내판에 표기된 한글 안내문구 때문이었다. 그만큼 많은 한국 사람들이 찾는 명소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기대가 한층 더 커졌다. 안내 문구를 읽고있는데 안내원이 나와 반갑게 인사를 건낸다.


◆ 모든 길을 한몸으로 안고 있는 ‘중국교통사 박물관’


“명월협은 쓰촨성 광위안(廣元)시 성북 26km, 조천구 조천진에서 2km 떨어진 가릉강변에 위치합니다. 협곡의 길이는 4km , 강폭은 평균 100m 정도이며 수심은 5m 이상 됩니다. 당나라때 이후에는 이 곳을 조천협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서기 756년, 당의 현종은 범양절도사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 황급히 쓰촨 지방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초가을 가릉강변의 조그만 진영에 이른 현종은 그곳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온 관리들의 조회를 받는데, 이때부터 그 인근의 지명에 `천자에게 조회한다` 는 뜻의 조천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것입니다.”


명월협 인근지역에 조천협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유래에 대해 현지 안내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협곡 내에는 잔도, 견부도, 수로, 도로, 철도 등 옛적부터 가장 현대의 최신 교통이 모두 망라돼 있어 ‘중국교통사 박물관’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적으로도 보기가 드문 경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안내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 명월협 입구 앞에 있는 제갈량의 동상.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취재팀을 반긴 것은 제갈량의 동상이었다. 마차에 앉아 가릉강을 바라보며 고뇌에 잠겨있는 한 제갈량의 모습 속에서 주군을 잃고 무능한 후주를 받들며 혼자 북벌을 진행하는 쓸쓸함과 고단함이 묻어나는 듯 하다.

제갈량 동상 뒤에는 웅장한 크기의 출사표가 병풍처럼 서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저에게 역적을 무찌르고 한나라를 부흥시키는 책임을 맡겨주옵소서. 그렇지만 성과가 없으면 저의 죄를 다스려 선제의 영령에게 고하옵소서. 폐하도 스스로 살피시어 정도(定道)를 자문하시고 순리에 맞는 말만 받아들이시되 선제의 유조(遺詔)를 기억하소서. 저는 폐하의 은혜를 받들게 되어 복받치는 감격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원정에 오르게 되어 표를 올리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제갈량의 눈물어린 충정과 절절한 진심이 명월협에 울려 퍼지는 듯 하다.

 

  제갈량의 동상과 출사표 옆에는 제갈량이 발명했다는 목우(木牛)와 유마(流馬), 다연발 쇠뇌가 복원 전시되어 있었다.
안내문구에는 1700여년전, 촉나라가 북벌에 나설 당시 대군은 험준한 산과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군수품을 운송하기가 어려워 촉한의 재상인 제갈량은 목우와 류마를 발명한 후 이를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병마와 군수품을 운송할 수 있게 됐다는 애기가 적혀있다.

또한 천북일대에서 계공차(독륜차)는 당시 가장 훌륭한 교통도구로 이용됐다고 쓰여있었다. 하지만 다연발 쇠뇌를 제외한 목우와 유마가 군수품 수송에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는지 의구심이 간다. 오히려 그 형태로 봐서는 잔도를 건널때 방해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 황홀한 절경앞에 절로 나오는 감탄사

 

▲ 입구에서부터 2km나 이어지는 명월협 잔도.


  회랑을 지나고 계단을 통해 잔도 내려가려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나도 모르게 또다시 탄성이 터져나온다. 가릉강 양쪽에는 암벽이 병풍처럼 높이 솟아 있다. 그 사이로 거센 물보라를 일으키며 흐르는 가릉강의 풍광은 흔히 달력에서만 보아왔던 한폭의 산수화 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동쪽으로는 고본산의 줄기인 조천령이있고, 서쪽으로는 남롱산의 줄기인 백운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웅장한 절경에 연신 감탄사를 내뿜고 있는 취재진에게 안내원이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간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 잔도에 첫발을 내딘다. 잔도 곳곳에는 이곳이 촉의 땅임을 각인 시키듯 제갈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노랑색 깃발과 촉이라고 쓰여진 하얀색 깃발에 곳곳에 꼳혀 있었다.

 

  명월협의 잔도는 2km나 이어진다. 또한 기다란 잔도의 거리만큼이나 여러가지 이야기가 잔도 곳곳에 서려있었다.
10분쯤 걸었을까 신선동(神仙洞)이라고 하는 동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 이곳에서 신선이 살았다고 하여 신성동이라 불려진다고 하는데 이렇게 웅장하고 빼어난 경관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인들 신선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계속해서 발길을 옮기다보니 집채만한 커다란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바위에는 빨간색으로 지진석(地震石)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있다. “이 바위는 2008년 쓰촨성 대지진 때 협곡 위에서 떨어진 바위입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듣는 순간 잔도 옆으로 협곡에 솟아있는 바위들이 불안하게 다가온다. 쓰촨성 대지진은 이곳 명월협에서도 어김없이 상채기를 남겼다.

 

  커다란 바위와 협곡을 번갈아 바라본 나의 모습에서 어떤 궁금증을 눈치 챈 것일까? 안내원이 갑자기 잔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한다.

“명월협의 잔도는 낭떠러지에 구멍을 뚫고 나무대들보를 설치한 후 지면에 나무기둥을 직접 세운 후 대들보를 놓고 그 위에 목판을 펴서 길을 만든 것입니다. 구멍의 깊이는 약 75cm, 너비는 45cm이며 암벽내의 아래로 경사졌고 삽입된 나무대들보는 위로 경사졌으며, 밑부분에는 대들보를 삽입한 구멍이 있습니다. 어떤 구멍의 밑 부분의 옆선에는 작은 홈이 있는데 이는 물이 홈을 따라 흘러내려가 대들보의 밑 부분이 부식되는 것을 방지함으로서 사용시간을 연장시킵니다. 명월협 협곡에는 이러한 돌구멍이 약 400여개 있습니다.”

 

  비록 지금의 잔도가 최근에 다시 복원 되었다고는 하지만 과거 400여개의 구멍을 뚫고 험한 협곡을 넘어 새롭게 길을 개척하려 했다는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인간의 끈기와 의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황토색으로 얼룩진 협곡이 눈에 들어온다. 안내원은 이곳을 명월협 폭포라고 소개했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이곳에 황토빛 폭포수가 떨어져 내린다고 한다. 그러서 인지 명월협 폭포를 안내하는 안내판 역시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황토빛으로 얼룩져 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황토빛 자국이 선명한 명월협 폭포 자리를 바라보며 이토록 멋스러운 절경에 황토빛 폭포가 내리는 장관을 생각하니 흐릿한 날씨가 원망 스러웠다.

 

명월협 폭포를 지나 이어지는 잔도부터는 지붕이 있다. 낙석과 유수를 방지하고자 잔도에 지붕을 추가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멀리서 이 지붕이 있는 잔도를 바라볼라치면 마치 공중에 걸려있는 누각과도 같다고 하여 '비각' 또는 '운잔'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잔도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커다란 망루와 넓은 야외무대가 나온다. 관광객이 많은 주말에는 이곳에서 삼국지의 한장면을 재현한 공연이 열린다고 했으나 아쉽게도 우리 취재팀은 볼 수 없었다.

 

◆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명월협

 

잔도의 끝자락에 도착하여 잔도 위쪽으로 나있는 보도 블록을 걷어간다. 명월협 잔도가 황토빛 가릉강과 협곡의 절경이 함께 이어져 지루함을 몰랐다면 잔도 위에 새롭게 만들어진 보도블록으로는 명월협 잔도에 얽힌 이야기가 담긴 조각상이 담겨있어 재미를 더한다.

 

조각상과 관련해 전해져 오는 이야기중에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기원전 316년 전국시기 진혜왕은 대군을 거느리고 촉나라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산길이 너무 험하여 촉나라로 진군하기 매우 어려웠다. 이에 진혜왕은 5 마리의 돌소를 만든 후 금똥을 눌 수 있다고 촉왕을 기만하였다고 한다. 촉왕은 사람들을 파견시켜 돌소를 끌어오게 하였고 진나라의 대군은 이들을 따라가서 촉나라를 멸할수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 길이 지금의 금우도(金牛道)라는 것이다.
안내원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황금똥을 누고 있는 돌소의 상이 눈앞에 보인다. 안내원이 전한 이야기와 돌소 상을 바라보니 진혜왕에게 속은 촉왕이 우둔함에 실소가 머금어진다.

 

수많은 이야기 앍혀있는 조각상을 지나니 호랑이 아가리 모양의 협곡이 나타난다.

이 협곡의 이름은 노호취(老虎嘴)로 1936년 6월에 건설됐다. 예전의 인근 5개 성을 연결하는 도로중의 하나였으며 항일전쟁시기에는 전방과 후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군사통로 였다고 한다. 당시 사용된 인력은 10만여명에 달하는데 사망자가 수백명에 이르렀을 만큼 작업조건이 열악했다. 노호취와 작별인사를 하고 우리 취재팀은 명월협 입구로 향했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그 옛날부터 무수한 피와 땀과 생명까지 받쳐가며 이 길을 개척하고자 노력했을까. 쓰촨으로 들어가는 입구 광위안, 그리고 그 입구의 문에 해당하는 명월협. 악조건을 무릅쓰고 협곡에 구멍을 뚫고 수많은 인명을 희생해가며 만들어진 이길에 서니 길을 개척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인간들의 집념에 새삼 마음 한 구석이 숙연해 진다.

 

  우리 취재팀은 어느새 다시 명월협 입구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마주하게된 제갈량의 동상, 제갈량은 선제의 요지를 받들어 한중의 요충지인 양평관 북벌기지를 구축한다. 그리고 이곳을 전진기지로 삼아 죽는 날까지 북벌을 단행한다. 군마 수송을 위해 반드시 지나야만 했던 명월협 잔도, 그곳에서 끝까지 출사표의 결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제갈량의 고독한 전투가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듯 하다.[아주경제 이낙규 기자]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