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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삼성산 만안교 삼귀자 남근석 여근석

by 한국의산천 2012. 10. 22.

붉은 단풍과 억새가 아름다운 가을

그 가을속으로 떠나기

 

삼성산으로 가며 만안교를 둘러보고 단풍을 보며 산을 오르고 삼막사 뒤편에 자리한 남근석과 여근석을 둘러보았습니다

 

▲ 가을속으로 달린다 ⓒ 2012 한국의산천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정일근 가을억새 中에서

 

가을꽃

 

                - 정호승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

 

▲ 일요일 아침 8시 30분 집을 나섰습니다 ⓒ 2012 한국의산천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강물이 생사(生死)가 명멸(明滅)하는 시간 속을 흐르면서 낡은 시간의 흔적을 물 위에 남기지 않듯이, 자전거를 저어갈 때 세상의 온갖 길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몸 밖으로 흘러 나간다.

  흘러 오고 흘러 가는 길 위에서 몸은 한없이 열리고, 열린 몸이 다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은 낡은 시간의 몸이 아니고 생사가 명멸하는 현재의 몸이다. 이끄는 몸과 이끌리는 몸이 현재의 몸 속에서 합쳐지면서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고, 가려는 몸과 가지 못하는 몸이 화해하는 저녁 무렵의 산 속 오르막길 위에서 자전거는 멈춘다. 그 나아감과 멈춤이 오직 한 몸의 일이어서, 자전거는 땅 위의 일엽편주(一葉片舟)처럼 외롭고 새롭다. 

 

 

▲ 왼쪽부터 흰구름님 / 맑은샘님 / 이글님 / 한국의산천 (4명) ⓒ 2012 한국의산천

 

 

 

 

 

 

▲ 7개의 아름다운 홍예가 있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만안교 ⓒ 2012 한국의산천

 

효성이 지극하시고 성군이셨던 정조

아버지(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보며 살얼음판을 딛듯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세손(정조).

이 아름다운 다리를 보니 정조에 관한 글이 떠오른다. 잠시 정조에 대해 돌아보고자 한다.

 

▲ 만안교를 바라보며 ⓒ 201 한국의산천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2동에 위치한 만안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38호 지정되었다.

 

만안교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22대 정조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갈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하기 위해 축조하였다.

길이 31.2m, 너비 7m에 7개의 갑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을 깔아 축조하였으며, 축조 양식이 정교하여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예석교이다 

 

만안교....이곳을 지날때면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생각난다.

 

▲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만안교에서 ⓒ 2012 한국의산천

만안교(萬安橋)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22대 정조(1776~1800 재위)가 당파싸움 사이에 끼어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을 참배 하러 갈 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축조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虹霓石橋)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楊洲)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장한 후, 자주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한다.

 

당초의 참배행렬은 궁궐을 떠나 노량진, 과천, 수원을 경유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 노변에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한 김상로의 형(兄) 약로(若魯)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하여 시흥쪽으로 행로를 바꾸면서 이곳 안양천을 경유하게 되었다.

정조가 만안교를 지난 것은 7번째 능행부터이다. 이 다리는 처음에는 나무로 다리를 놓아 왕의 행렬이 지날 수 있도록 하였으나 경기관찰사 서용보에 의해 돌로 이를 대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795년(정조 19)에 당시 경기관찰사 서유방이 왕명을 받들어 3개월의 공역 끝에 길이 31.2m, 너비 8m에 7개의 갑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長臺石)을 깔아 축조하였다. 축조양식이 정교하여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고 있다.

 

원래 위치는 남쪽 200m 지점의 안양천에 있었으나 국도확장사업으로 1980년 8월에 이곳 만안구 석수2동의 삼막천으로 이전하였으며, 다리 앞에는 서유방이 글을 짓고 조윤형이 쓴 만안교비가 있어 이 다리의 연혁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안양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만안교 다리밟기가 펼쳐진다.

 

 

 

▲ 만백성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만안교라고 이름지어졌는가? ⓒ 2012 한국의산천 

 

 

세종에 버금갈 만큼 수신(修身)과 제가(濟家)에 완벽했던 정조. 

 

조가 83세로 승하한 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1776년 3월10일 영조가 세상을 떠난 지 엿세만에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했다. 그리고 임오년(사도세자가 죽은 해) 이후 하루도 잊지 않고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서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하지 않는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즉위 일성(一聲)에 대신들은 경악했다. 특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물어넣었던 노론은 공포에 휩싸였다. 14년전 뒤주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가 다시 살아난 듯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노론이 가장 두려워한것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이 즉위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어찌 그 아들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세손(정조)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서 희생되었듯이 항상 죽음의 위협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며 고립무원의 길에서 살얼음을 밟듯 조심 조심 두렵게, 위태 위태하게 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왔다.

 

정조는 열흘 후인 3월 20일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이라 올리고 묘호는 영우원, 사당은 경모궁이라 높혔다. 그리고 그 5일 후 홍인한등과 결탁해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환완공주의 양아들 정후겸을 경원으로 귀향 보냈으며, 이어 정후겸의 양모이자 자신의 고모이기도한 화완옹주를 서녀로 강등시켰다. 화완은 이후 정치달의 부인을 뜻하는 '정처(鄭妻')라는 치욕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정조가 선왕의 대를 이어 왕이되고 비운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릉을 화성으로 이장하게 된다. 아버지를 죽인 노론과 강화된 왕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사도세자의 뜻을 계승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날 사도세자의 영구는 열번 죽어도 씻을 수 없는 한을 지닌 시신이 27년만에 임금이된 자신의 아들 정조와 함께 새로운 안식처로 떠나는 날. 이날 이 행렬을 호위한 사람은 사도세자를 살리지 못했다고 꾸짖고 그 이유로 귀향을 떠났던 병조판서 윤숙이었다.

 

어가와 잉여가 함께 새로운 안식처인 화성으로 향했는데 떠나는 행렬은 웅장했다. 경기 관찰사가 선도하고 담당 신하들은 예법에 따라 좌우로 늘어섰다. 취타수 18명과 붉은 군복을 입은 4백여명의 군사들이 세줄로 늘어섰으며, 사도세자와 잉여 곁에는 호위군사 200여명이 겹줄로 늘어섰고 가가각 50여개의 만장이 앞뒤로 하늘을 수놓았다. 노제 장소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했으며, 수백리 밖에서 어가와 영가의 행렬을 보기위해 몰려 들었다. 이 행렬을 호위한 인물은 병조판서 윤숙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날 정승들에게 세자를 구하라고 명한죄로 홍봉한의 주청으로 인해 탄핵당해 해남으로 귀향길에 올랐던 한림 윤숙이었다.다시 사도세자를 구하려던 자의 호위를 받으며 안식처로 길을 떠나고 있다.  

(젊은 사관이었던 윤숙은 해남으로, 영조의 명에도 물러가지 않고 세자를 지키고 세손 정조를 업고 들어와 할아버지에게 죄를 빌게 했던 사관(한림) 임덕제-'나의 손은 사필(史筆)을 잡는 손이다. 내 손이 짤릴 지언정 나를 끌어낼수는 없다'고 외쳤다-는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기를 비롯하여 사방을 표시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수많은 깃발을 펄럭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화산(現 융건릉) 으로 가고 있었다.

 

'부주(父主)여 살려주소서!' 했던 아버지와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시옵소서!' 라고 호소했던 세손이 왕이되어 함께 떠나는 길. 

각영마다 늘어선 깃발, 그리고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북소리와 취타소리는 사도세자의 혼이 펄럭이고 울부짓는 소리였다. 

 

사도세자의 고백 / 클릭 >>> http://blog.daum.net/koreasan/13737026 

 

 

아래 몇장의 사진은 정조의 꿈이 담긴 수원의 화성입니다 

 

▲ 의왕시에서 수원을 향해 오르는 길 고개. 지지대 전각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 2012 한국의산천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지(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지대비(遲遲臺碑)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 24호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 47-2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비. 비의 높이 150㎝, 너비 60㎝.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 비문을 통하여 정조(正祖)의 부왕에 대한 사모의 정을 엿볼 수 있다.

지지대비는 조선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인 화성 현륭원의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능이 있는 화산을 볼 수 없었기에 으레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고 능이 있는 방향을 뒤돌아 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지(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 유수 홍명호가 전액을 썼다.   

  

비문의 내용 중 "우리 전하께서 능원을 살피시고 해마다 이 대를 지나며 슬퍼하시고 느낌이 있어 마치 선왕을 뵙는 듯 하시어 효심을 나타내시어 여기에 새기게 하시니, 선왕께서 조상의 근본에 보답하고 너그러운 교훈을 내리시는 정성과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뜻과 일을 이어 받으시는 아름다움을 여기에 그 만의 하나로 상고했도다."라는 사실에서 정조의 애틋한 심정이 드러난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전판돈녕부사겸판의금부사(前判敦寧府使兼判義禁府使) 윤사국(尹師國)이 글씨를 쓰고, 수원부유수겸총리사(水原府留守兼總理使) 홍명호(洪明浩)가 비의 상단 전자(篆字)를 썼다.

숭정기원후일백팔십년정묘십이월일입(崇禎紀元後一百八十年丁卯十二月日立)이라는 사실로 1807년(순조 7) 12월에 건립됨을 알 수 있다.

 

 

  정조께서는 아버지이신 사도세자를 모신 현륭원(現 융·건릉)을 참배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 갈때 이곳에 이르면 말씀하셨다. 이제 이 고개를 넘어가면 선왕(아버지·사도세자)께서 잠들어 계신 화산(花山)이 보이지 않는다. 천천이 가거라. 아주 천천히...

 

하마비(下馬碑)가 서있는 지지대 고개 - 이 앞을 지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馬)에서 내려야 한다 - 저 역시 고개를 올라와 이곳에서 잠시 자전거에서 내렸습니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느껴지는 지지대(遲遲臺) 고개는 수원과 의왕 경계를 이룬 곳이다. 예전 명칭은 사근현(沙斤峴)이었으며 또는 미륵댕이 또는 미륵당 고개로 불렸으나 지금은 '지지대 고개'로 불린다.

 

서울에서 국도를 타고 수원 오산방향으로 가다보면 안양,의왕을 지나서 수원과의 경계인 고개를 넘게 된다. 지금은 넓은 도로에 자동차가 빠르게 지나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넓은 도로가 아니었고 지금보다도 더 높은곳에 굽이 굽이 이어지는 길이 있었을 것이다. 고개의 제일 높은 마루턱 이곳이 사근현이었으며 지금은 지지대고개라고 부른다. 

 

▲ 교통방송을 듣다보면 도로 체증 구간중에 꼭 나오는 지지대고개 (의왕~수원 사이의 고개) ⓒ 2012 한국의산천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이후 영조가 83세로 승하한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정조대왕께서는 1776년 3월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면서 12년 넘게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라고 선포한 뒤 사도세자 추숭작업에 나섰다. 이때 많은 신하들은 기겁을 했다 죽은 사도세자가 살아온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는 왕으로서 내 아버님께는 효도 한 번 못하다니..."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늘 가슴 아파했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돌 것만 같았다.  

정조가 즉위하자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열고 다시 염을 한다음 궁중으로 모시고 국장처럼 성대하게 장을 치룬 후 지금의 능자리인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으로 옮겼다.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영구를 파내니 광중(壙中)에 물이 한자 남짓이나 고여 있었다. 부친이 물속에서 신음하는것을 본 정조가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사도세자의 영구는 새로운 안식처인 화성으로 향했는데 임금을 상징히는 황룡기를 비롯하여 사방을 표시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수많은 깃발을 펄럭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화산(現 융건릉)에 도착했다.   

 

정조는 보여(步與)를 타고 산능성이를 한바퀴 빙 돈 다음 하교하여 "이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꽃나무를 많이 심는것이 좋겠다."고 하여 이후 화산은 지극한 정성으로 나무가 울창하고 사시사철 꽃이 수를 놓은 꽃산이 되었다.

 

정조는 이곳을 현릉원이라 이름짓고(장조로 추존된 뒤에 융륭으로 변경) 틈만나면 이곳을 찾았다.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위해 부근 화산일대 13개 마을에 영을 내려 집집마다 재 한 삼태기씩을 모아 뿌리게 하고 솔밭에 송충이 극성이면 손수 나가 송충이를 잡고 송충이구제를 독려 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신도 부친곁에 묻힌다.

그렇게 정성을 쏟은 탓인지 융·건릉은 조선조 왕릉중 어느 능보다 규모와 조성미, 특히 소나무가 울창하며 주변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또 어느날 40대의 정조는 능행차 길에 70대의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아버지가 계시는 현륭원 근처 언덕에 묻어 주시오."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세상에서 하지 못한 효도를 죽어서라도 해야 겠다는 비장한 유언이었던 것이다.

 

▲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성문인 장안문. 성문앞에 반원형태의 옹성을 지어 놓은 것이 이채롭다 ⓒ 2012 한국의산천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중 북쪽대문으로 정문이라 할 수 있다. 197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완공하였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의 안녕을 상징하는 의미이다.

장안문 누각의 지붕은 우진각 지붕으로 웅장한 위엄을 나타내고 있으며 서울에 자리한 국보1호인 숭례문보다 더 큰 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성문 바깥에는 반원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마치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것과 같다고해서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 장안문 옹성 안에서 바라본 장안문 ⓒ 2012 한국의산천

중국의 번화가 장안을 생각하며 정조께서 지으신 이름. 장안문

화성에는 팔달문,창룡문,장안문,화서문 등 4대문이 있다. 남북의 정문인 팔달문과 장안문의 위용이 눈길을 끈다. 봉돈(비상사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통신시설),치성(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성곽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한 구조물),공심돈(적을 살피는 망루의 일종),암문(군수물자를 성 안으로 공급하는 곳) 등을 볼 수 있다.

 

 수원에 자리한 화성(華城). 그의 이상향으로 꿈꾸던 곳인데...노론과 소론의 갈등속에 이상향을 꿈꾸전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바라던 그 뜻을 이루고 못하고 역시나 아쉬운 죽음을 맞는다.  

  정조께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現 융,건릉)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화성은 정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던 실학의 대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 팔달문 ⓒ 2012 한국의산천

 

정조는 노론의 서울이 아닌 백성의 서울, 사도세자의 서울, 국왕의 서울을 만들려고 노력하였기에 규장각 설치와 장용영 강화와 새로운 신도시 서울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지로 손 꼽은 곳이 수원면 용복면에 있는 '지극히 길하고 모든것이 완전한 묏자리' 화산(花山) 이었다.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화성을 완공한 후 펴낸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팔달문 옹성 중앙의 출입문은 사통팔달하는 화성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은 수원의 상징이며 중심이다. 서울의 남대문 격인데 옹성까지 갖추고 있어 훨씬 더 크고 웅장한 느낌이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무너진 것을 다시 복원했고, 팔달문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화성을 남과 북으로 가로지르는 장안문~팔달문 길은 경제도시 수원의 중요 통행로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시전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18세기 조선 상인들의 분주한 생활을 상상하며 종로삼거리 쪽을 둘러봐도 좋다. 본래 십자로였던 곳이지만 지금은 화성행궁으로 난 길을 막아 종로삼거리가 됐다.

 

 

 

 

 

 

 

 

 

 

정조

아버지(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보며 살얼음판을 딛듯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세손(정조).

왕위에 올라 노론과 소론의 나라가 아닌 진정한 백성의 나라이기를 바라고 선정을 베풀고자 고뇌했던 그 아픔을 조금만이라도 이해 할수있다면...

 

정조(正祖,이산 1752년 ~ 1800년)
조선의 제 22대 임금.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묘호는 정조(正祖),

시호와 존호는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렬성인장효대왕(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대한제국 때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되었다.

 

 

 

 

 

 

 

하데스는 명계에 있는 높은 바위산을 가리키며 그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라고 했다. 시지프스는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바위는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 굴러떨어져 버렸다. 시지프스는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하데스가 "바위가 늘 그 꼭대기에 있게 하라"고 명령했기에 시지프스는 "하늘이 없는 공간, 측량 할 길 없는 시간"과 싸우면서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늘 그렇게 다다를 수 없는 정상을 향해 오늘도 달린다.

 

▲ 조강지처가 제일이다 ⓒ 2012 한국의산천 

우리는 반짝 반짝 빛나는 초보 라이더의 새 자전거 보다는 색깔이 바라고 흠집이 있어도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낡은 자전거를 사랑해야 한다.

 

낡은 자전거

                    - 안도현

 

너무 오랫동안 타고 다녀서
핸들이며 몸체며 페달이 온통 녹슨 내 자전거
혼자 힘으로는 땅에 버티고 설 수가 없어
담벽에 기대어 서 있구나


얼마나 많은 길을 바퀴에 감고 다녔느냐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많이 알수록
삶은 여위어가는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자전거야
자전거야


왼쪽과 오른쪽으로 세상을 나누며
명쾌하게 달리던 시절을 원망만 해서 쓰겠느냐
왼쪽과 오른쪽 균형을 잘 잡았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이만큼이라도,

왔다.

 

 

 

 

 

 

 

 

 

 

 

▲ 삼막사 도착 ⓒ 2012 한국의산천

이곳에 자전거를 묶어두고 산으로 올랐습니다. 

 

 

 

▲ 삼귀자 (三龜字) ⓒ 2012 한국의산천

거북귀(龜)字를 세가지의 변형된 예술적인 글씨체로 바위에 새겨놓았다

 

조선조 말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형의 형인 지운영(1852~1935)이 이곳 주변에서 은거할 당시 바위면을 다듬어 음각으로 거북귀자를 새겨 놓았다 한다. 비의 우측에 관음몽수장수영자(觀音夢授長壽靈字), 좌측에 불기 2947년 경신중양 불제자 지운영 경서(佛紀 二千九百四十七年庚申重陽佛弟子池雲英敬書)란 명문이 있어 지운영이 꿈에 관음보살을 본 후 쓴 것으로 1920년에 새긴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글씨 크기는 왼쪽부터 74cm, 77cm, 86cm, 이며 바위 우측에는 77cm X 70cm 크기의 바위에는 시주자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삼막사와 국기봉 중간지점에 있는 칠성각 앞에 남녀근석이 우람하게 버티고있다. 남녀근석을 바라보고 치성드리는 분과 수줍게 웃기만하는 여성분들, 걸죽한 입담의 남성분들의 대화(?)가 재미있다.

이 남녀근석(경기 민속자료3호.시대미상)은 신라 문무왕 17년에 원효대사가 삼막사를 건립하기 전부터 토속신앙으로 숭배되어 온 것으로 이 바위를 만지면 다산, 번영, 무병장수의 효험이 있다고 전해온다. 특히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엔 음식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린다고한다.

전국에 산재한 남근석은 비일비재하나 남녀근석이 나란히 있거나, 여근석만은 삼성산 삼막사의 칠성각이 유일한 바위라 추정된다. 특히 여근석의 모습은 "오묘한 구조"에 실소를 넘어 신기함을 갖게한다.

 

 

남.녀 근석

신기한 자연의 예술품인 남녀근석(男女根石)은 삼막사 칠성각 앞에 있으며, 1983년 9월19일 경기도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풍화된 2개의 자연암석인데 그 모양이 남녀 성기 (性器)의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남녀근석이라고 부르고 있다.

남근과 여근의 거리는 2m이며 남근의 높이는 1.5m, 여근의 높이는 1.1m이다. 속전(俗傳)에는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원효대사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전부터 이 바위를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여 왔다고 한다. 이 바위를 만지면서 자식을 원하고, 출산(出産)과 일가(一家)의 번영, 무병 및 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전하여, 4월 초파일과 칠월칠석날 등에는 경향 각지에 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 칠성각 마애삼존불 ⓒ 2012 한국의산천 

 

이 마애불은 자연암벽에 감실(龕室)을 만들고, 거기에 부조(浮彫)한 치성광삼존불(熾盛光三尊佛)로 조선후기를 대표할 만한 걸작 이며, 석굴사원 유구(遺構)로 전해 오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불상아래 건륭(乾隆) 28년[영조(英祖)39년, 1763]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되며, 칠성신앙(七星信仰)과 다산신앙(多産信仰)이 결합한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상태를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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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삼막사로 내려간 다음 삼성산 정상을 향해 라이딩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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