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계속 이어지는 글입니다
교동도 연산군 유배지 가는 길 [2010년 12월 11일 토요일 날씨 하늘은 파랗고 바람 불고 아주 추웠음 / 한국의산천]
중요사항: 배의 승선권을 구입하면 입출항 신고서를 주는데 방문 목적지를 꼭 기재해야합니다. (참고하세요. 저는 교동향교와 화개사를 방문목적지로 적었습니다)
정말 추운날이었지만 완전 무장을 하고 길을 나서니 바람의 저항만 있었을 뿐 그리 춥지는 않았습니다
교동도는 민통선안 그것도 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민간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요즘은 많이 완화되었다. 교동도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출입항신고서를 작성하여 군에 제출한다. 교동도내에 방문자 및 방문자의 주소, 전화번호를 기록하게 되어있다.
교동도는 석모도 바로 위쪽 북쪽에 위치하며 방문자가 그리 많지 않기에 도로가 한산하여 편하게 자전거 여행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주로 평야로 이루어진 곳이기에 라이딩에 어려움은 없으며 아주 넓은 난정저수지와 고구저수지가 있다
교동도는 섬이라는 느낌보다는 거대한 간척지를 보는 듯 너른 평야다. 강물이 실어 나른 옥토의 땅이라 비옥하기 그지없어 예부터 교동의 쌀은 으뜸으로 손꼽혔다.
▲ 북한땅이 바로 앞에 보이는 고구저수지에서 ⓒ 2010 한국의산천
은둔의 땅 교동도
교동도 다. 푸른 하늘과 파란바다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빼어난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저 조용히 자리만 지켜온 섬. 강화도 옆의 교동도가 그곳이다.
서울에서 지척이고 국내에서 14번째로 큰 섬임에도 휴전선이 섬을 휘돌아가는 탓에 교동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엄격한 통제를 뚫어야만 했다. 가깝지만 편치 않은 곳, 그래서 외면 받았던 땅이다. 하지만 통제의 사슬은 개발의 손길 또한 막아 원형의 자연과 우리 농촌의 순박함을 그대로 남겨놓았다.
찬 겨울을 맞는 여행길, 때묻지 않은 신선함을 맡고자 한다면 교동도로 떠나라. 섬에 가득한 소박함이 온몸에 온기가 되어 퍼질 것이다.
▲ 어렵지 않은 고개를 넘어 넘어 연산군 유배지 찾아가기 ⓒ 2010 한국의산천
▲ 교동면사무소를 지나서 고목이 있는 마을 길로 들어서면 화개산 약수터로 오르며 연산군 유배지로 갈 수 있습니다 ⓒ 2010 한국의산천
▲ 임도길을 덜덜거리며 잔차를 타고 힘차게 올랐습니다 ⓒ 2010 한국의산천
산길에서 교동도 둘레길 걷는 일행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제게 말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추운데 자전거를 타세요?
저는 그냥 웃으며 네에~~ 하고 말했습니다
교동도는 조선시대부터 왕족의 유배지로 유명했다. 연산군과 광해군을 비롯해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인조의 5남 숭선군, 철종의 사촌 익평군,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등이 교동도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전남의 해남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인물은 한양에서 먼 곳으로 보내졌지만 왕권에 치명적일 수 있는 왕족 등 거물은 가까우면서도 완전히 격리된 곳에서 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하루, 이틀 거리인 교동도는 해안과 가깝지만 급한 조류로 접근이 쉽지 않아 유배지로서 최적의 땅이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됐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조선왕조의 풍운아 연산군이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바로 교동으로 유배돼 2달만에 사망했다. 교동의 역사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유배지가 교동 어디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봉소리의 신골, 고구리의 연산골, 읍내리 세곳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 화개산 기슭에 자리한 연산군 유배지 (위리안치장소) ⓒ 2010 한국의산천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역사적으로 조선시대때 나라에 중대한 죄를 범한 경우에는 전라도 방면으로 귀향을 보냈지만 왕족이나 또는 왕손에 한하여는 강화도로 보내고 조금 더 중죄를 졌다면 강화도에서 또 배를 타고 들어가는 교동도로 보내어졌다. 그렇다면 왕족은 왜 전라도로 귀향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왕족과 왕손을 가까이서 관찰해야했기 때문이다.
교동도는 일단 강화도의 ‘황복마을’로 잘 알려져 있는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눈앞에 바라보이는 교동도까지는 배로 불과 15분 거리이지만 썰물때는 해엽 가운데로 도로의 중앙선처럼 모래톱이 길게 4~5미터 솟아오르기에 돌아서 건너가면 1시간 이상 걸리는 곳이기도 하다
가시적 거리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교동도가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유형의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동도는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손꼽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역모에 연루된 왕실 친·인척들의 유배지가 되어 그곳에서 사사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섬’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교동도로 유배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한 채 그곳에서 죽은 사람으로는 고려의 희종, 조선의 연산군 등 두 왕이 있다. 그리고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도 교동도에서 비참한 생을 마쳤다.
연산군
조선조 제10대 왕이며, 1476년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 해에 어머니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연산군에 봉해졌으며, 1479년 윤씨가 폐출된 후 5년 만인 1483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그는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19세의 나이로 왕에 등극했는데, 곧 20세가 되므로 섭정을 받지 않고 즉위하자마자 직접 왕권을 행사했다. 초기 4년은 그런대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무오년과 갑자년 두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포악한 정치를 일삼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연산군으로 강등된 그는 강화도의 교동에 유배된 지 2개월 만에 전염병으로 죽었다. 재위 기간은 12년이었으며, 죽을 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연산군이 교동도로 유배된 것은 1506년 9월이었다. 성희안,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배다른 둘째아들 진성대군을 왕위로 세우는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연산군은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유배당하게 된 것이다.
연산군은 부왕 성종이 죽은 해인 1494년 12월 19세의 나이로 조선 제10대 왕으로 등극했다. 초기 4년 동안 그는 비교적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498년 김종직을 필두로 한 사림파와 훈구세력들의 대립으로 인한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는 시작되었다. 재위 8년째인 1502년에는 장록수에게 빠져 방탕한 세월을 보냈으며, 간신 임사홍은 그런 행태를 더욱 부추겼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504년에는 폐비 윤씨 사건이 밝혀지면서 갑자사화가 일어나 다시 한번 피바람을 불러왔는데, 이 두 차례의 사화로 조정의 쓸 만한 인재들은 거의 처단되거나 숨어버렸다. 친어머니인 폐비 윤씨 사건 진상을 알고 성질이 광포해진 연산군은 자신을 비판하는 신하들을 귀양 보내거나 무참하게 죽였으며, 홍문관과 사간원을 혁파하고 사헌부의 언로 기능을 없애버렸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신하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도록 억압했다. 또한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 국문으로 씌어져 나돈다고 하여, 국문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국문서적을 불사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전까지 도성 밖 10리를 한계로 삼았던 금표(禁標)를 100리 밖으로 늘려 그 안에 살던 주민들을 철거시킨 뒤 자신의 사냥터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연산군은 장록수 외에도 수많은 후궁을 거느렸으며, 전국 양가의 여자들까지 뽑아 올려 노리개로 삼은 미녀가 거의 1만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뽑은 미녀들을 ‘흥청악(興淸樂)’이라 했는데, 그는 이 흥청들과 매일 금표 안에서 사냥을 하거나 술과 춤, 노래로 질탕한 유희를 즐겼다. 후일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난 것도 그러한 유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특히 연산군은 자신의 백모이기도 한 월산대군의 아내 박씨에게 ‘승평부대부인’이라는 호를 주고 사사롭게 가까이 했는데, 두 사람 사이의 아이가 잉태한 박씨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나돌기도 했다. 이에 화가 난 박씨의 남동생 박원종이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시키면서, 그의 12년 왕권은 막을 내렸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31세에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유배 생활 2개월 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연산군이 죽자 왕자의 예로 현지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며, 나중에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했다.
▲ 연산군 위리안치장소를 돌아보고 다시 나오는 길 ⓒ 2010 한국의산천
즉위 초에는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 사가 독서의 부활 '국조보감', '여지승람'의 간행등 다소의 업적을 이룩했으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사사된 후 세자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으로 이상성격이 형성,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량 학살 숙청했고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어 황음을 일삼는 등 갖은 횡포를 자행했다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의 딸인 폐비 윤씨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공부하기를 권계하는 이가 있었지만,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왕으로 등극하여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와 사가독서의 부활, '동국여지승람'의 간행 등 국방과 내치면에서 다소의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폐비 윤씨 사건을 계기로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대간·시종을 거의 다 주살하여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자행했다고 한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어 31세에 병으로 죽었다. 연산군의 적거지는 봉소리 신골과 고구리 연산골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어, 종합적인 정확한 고찰이 필요하다.
▲ 연산군 적거지에서 내려 오는길이 폭우에 쓸렸는지... 길이 끊겼습니다 조심하여야 할 구간입니다 ⓒ 2010 한국의산천
▲ 유실수 가득한 아름다운 산길입니다 ⓒ 2010 한국의산천
▲ 양지 바른 곳에서 햇볕을 쐬며 휴식. 산불 조심은 산과의 약속입니다 ⓒ 2010 한국의산천
▲ 북한땅이 손앞에 잡힐 듯 보이는 고구저수지에서 ⓒ 2010 한국의산천
▲ 매우 거센 바람소리가 귓전을 때린 그런 주말 이었습니다 ⓒ 2010 한국의산천
일반장갑을 착용하고 달리니 너무 손이 시려워서 벙어리 장갑으로 바꿔서 착용하니 아주 따듯하고 쾌적한 라이딩을 할 수 있었습니다
▲ 심심하면 자화상도 한잔 ~! ⓒ 2010 한국의산천
▲ 헬멧속에 방풍 라이너를 쓰고 귀마개를 하고 안면 마스크, 그리고 방풍바지와 윈드재킷, 벙어리 장갑에 고어텍스 방한화 착용 ⓒ 2010 한국의산천
▲ 고생하는 라이딩은 싫어요. 완벽한 준비가 즐거운 라이딩을 약속합니다 ⓒ 2010 한국의산천
저는 추위가 너무 싫고 추위에 약하기에 오리털 벙어리장갑과 시마노 고어텍스 클릿 방한화를 착용하고 다닙니다. 매년 겨울이면 효자 노릇 톡톡히합니다
▲ 우리를 도시로 귀향보내기 위해 배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 2010 한국의산천
▲ 이제 고요한 섬, 은둔의 섬 교동도 그 섬을 떠나고 있습니다 ⓒ 2010 한국의산천
▲ 강화 본섬에서 교동도와 이어지는 연육교를 건설중입니다 그 이유는 아래를 보시면 더욱 이해가 가실듯 ⓒ 2010 한국의산천
▲ 창후리 선착장과 건너 보이는 섬 교동도 사이에 솟이오르는 모래톱 썰물시에는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약 3~5m 까지 성벽을 이룹니다 ⓒ 2010 한국의산천
밀물때에는 배가 15분 정도 소요하며 직선으로 바로 건너 갈 수 있으나 썰물시에는 모래톱이 성벽처럼 솟아 오르기에 석모도 아래쪽으로 돌아서 1시간 이상을 돌아 창후리 선착장으로 돌아옵니다. 저는 오히려 배를 많이 탔기에 즐거웠습니다.
▲ 고요하고 아름다운 섬 교동도 ⓒ 2010 한국의산천
교동도 유적지 돌아보기 바로가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4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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