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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 고미영 비극의 낭가파르밧

by 한국의산천 2009. 7. 12.

비극의 낭가 파르밧

죽음이 충만한곳에 자연이 인간을 거부하고 있는곳에 인간은 기술과 의지를 무기로 도전 한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확실히 시험하는 훌륭한 행위이다.

과학과 문화도 이같은 과정을 거쳐서 발전해온 것이다.

인류의 행복도 이처럼해서 얻어진것이다. 그런의미에서 등산은 훌륭한 취미이다. 

 

▶◀ 멋진 산악인 고미영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자기 자신으로 가는 길이다

혼자 가는 길이다 -알레산드로 고오냐-

 

많은 이들이 당신을 기억 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힘들게 내려 오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안식을 누리십시요

 

힘겹게 산을 오른 후 더 올라설 곳이 없다고 느꼈을 때 그때는 어디를 가고 싶게 될까? 하늘로 오를 것인가?

정상의 마지막 바위 끝에는 하늘문을 여는 빗장이 놓여 있는가? 우리는 그 빗장의 문고리를 잡기위해 끝이 보이지 않게 반복되는 길고 긴 산행의 장막을 한겹 한겹 헤치고 있는지 모른다.[전용문著 바람으로 남은 사람들 中에서] 

 

실종 산악인 고미영, 사망 확인 [뉴델리 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입력 2009.07.12 21:38]

 

히말라야 낭가파르밧 정상에 오른 뒤 하산 도중 실종된 여성 산악인 고미영(41) 씨가 사망한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고 주(駐) 파키스탄 한국대사관 측이 12일 밝혔다.

대사관 관계자는 이날 연합뉴스와 전화 통화에서 "고씨가 이끄는 등반팀과 오늘 위성전화로 통화했다. 등반팀은 고씨가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고 전했다"고 말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린다. [2009 · 7 · 12 · 일요일 · 장마답게 비가 내리는 날 · 한국의산천]
 
뉴스에서는 여성 산악인 고미영씨가 낭가파르밧 등정후 하산 도중에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흘러 나온다.
우울한 뉴스다.
내 딸아이가 다니는 상명대. 그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중이었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꼭 살아돌아오기를 비는 마음 뿐이다.
 

 

산악인 고미영, 히말라야 하산 도중 실종
기사입력 2009-07-12 09:12 [출처 연합뉴스 최태용 기자]

11일(이하 한국시간) 히말라야 낭가파르밧 정상에 오른 뒤 하산하던 여성 산악인 고미영(41)씨가 하산 도중에 실종됐다.

고미영씨의 후원사인 코오롱스포츠는 "고미영씨가 하산 도중 실족해 벼랑쪽으로 떨어져 실종됐다는 것을 현지 캠프에 있는 대원들로부터 확인했다. 현재 파키스탄 정부에 구조 요청을 해놓은 상태이며 회사에서도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고 12일 밝혔다.

고씨는 11일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해발 8126m의 낭가파르밧 정상에 오른 뒤 하산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코오롱스포츠는 현지 대원과 위성전화 통화에서 "고씨가 정상에 오른 뒤 내려와 캠프4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하산했다. 해발 6200m지점에 이르렀을 때 고씨가 실족해 벼랑쪽으로 떨어진 것을 대원들이 목격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991년 코오롱 등산학교로 산악에 입문한 고씨는 2005년 파키스탄 드리피카(6047m) 등정을 계기로 높은 산에 본격적으로 도전했다.
2006년 10월 히말라야 초오유(8201m) 등정에 성공하고 나서 이듬해 5월 히말라야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를 정복했다.
올해에는 히말라야 마칼루(5월1일), 칸첸중가(5월18일), 다울라기리(6월8일)를 이미 오른 고씨는 이날 낭가파르밧까지 오르면서 히말라야 8천m 이상 고봉 14개 봉 중 11개 등정에 성공했다. [출처 연합뉴스]

 

고미영씨가 등정에 성공한 낭가파르밧은 수직에 가까운 경사 때문에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및 로체(8516m) 남벽 등과 함께 가장 난이도 높은 루트로 꼽힌다. 1953년 헤르만 불이 처음으로 등정에 성공할 때까지 7회에 걸쳐 31명의 희생자를 냈다.

 
장맛비가 내린다.
미용실에 가서 이발을 하고 오랫동안 미뤘던 자동차 정비를 했다.
그렇게 휴일을 보냈습니다
 
낭가파르밧 관련 글

 

▲ 낭가를 단독등정에 성공한 라인홀트 메스너의 저서 검은 고독 흰 고독. 지금도 틈나는대로 보다보니 책장이 낡었다 ⓒ 2009 한국의산천

그의 저서 "검은고독 흰고독"에서 거대한 자연앞에 선 단독등반의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두려움과 고독을 그리고 죽음에 대해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8125m의 낭가파르밧을 오르는 불굴의 의지와 도전정신 그리고 그에 따른 내면의 불안과 고독이 교차하며 진정한 자신을 의식하는 산악 팩트소설의 진수라고 느껴진다.

 

라인홀트 메스너( 이탈리아 1944년 9월 17일 ~)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메스너는 등반을 철학 이상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우리 시대 최고의 등반가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돌로미테 산군을 오르며 등반을 익혔고, 20대에는 알프스를 500번 이상 등반했다. 이후 1970년 낭가파르밧 등정을 시작으로, 1986년 그의 마지막 목표인 마칼루(8,463m)와 로체(8,516m)를 무산소 등정하면서 인류 최초 14좌 완등이란 대업적을 이룩해냈다.

 

1970년 낭가파르바트 등정 후 1982년 가셔브룸2봉 등정에 이르기까지 8개봉 등정에 성공한 그는 자기 능력의 한계를 확인해보려는 의도에서 14개 고봉 완등 목표를 세상에 공표한다. 그리고 4년 뒤인 1986년 로체를 등정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8,000미터 급 14개 고봉 완등이란 위업을 이룩한 것이다.

 

그는 무려 18회나 8,000미터 급 봉우리의 정상에서 ‘세기의 철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메스너는 단순히 8천미터 봉의 정상을 수집하는데 그치지 않고 1970년대 히말라야 등반사에 혁혁한 기록을 남겼다. 8,000미터에서 최초의 알파인스타일 등반이라고 할 수 있는 가셔브룸 1봉 등정(1975년)을 비롯하여 세계 산악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1978년), 그리고 난제로 남아 있던 낭가파르밧 단독 등정(1978년) 등 히말라야 등반의 변화를 주도했다. 그리고 등반 경험을 바탕으로 20권이나 되는 저술을 남겨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산악문학상을 3번이나 수상했다.

 

▲ 이곳에서 동생을 잃고 또 다시 낭가 8125m의 루팔벽을 통해 홀로 도전한 라인홀트 메스너 ⓒ 2009 한국의산천 

라인홀트 메스너. 그는 이곳에서 동생 퀸터 메스너를 잃고 다시 단독으로 낭가를 도전하고 루팔벽 초등에 성공했다.  

낭가파르밧은 파키스탄 펀잡 히말라야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중의 왕’, ‘운명의 산’, ‘벌거벗은 산’ 등으로 불리우며, 그중에서도 루팔벽은 등반 고도 4,500m, 평균경사도 60˚에 이르는 난공불락의 거대한 벽으로 8,000m 14개봉을 세계최초로 완등한 이탈리아의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초등한 루트로 유명하다. 
 

가파른 암벽을 기어 올랐다. 숨이 가쁘다. 다시는 돌아 갈 수 없을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몸이 마비 된듯하고 천막안은 추웠지만 땀이 난다. 얼굴 위로 보이는 엷은 천막 천에 서리가 엉겨있다.

나는 혼자서 뭐라고 소리 쳤으나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를 사로잡은 공포감이 몸으로 느껴졌다. 나는 무서워서 소리지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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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붙은 암벽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어디까지 올라 왔는지 알 수 가 없다. 발 아래는 밑이 보이지 않는 나락이다.

잠깐이었지만 이러한 공포감이 나를 덜덜떠는 무력한 물건으로 만들었다. 아래를 보지 않아도 된다면 암벽속으로 기어 들어서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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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쥐려해도 쥐어지지 않고 저절로 펴진다. 무릎에서 힘이 빠진다. 눈을 감으려 하지만 감겨지지 않는다. 아직 밤이었다. 얼어붙은 천막천에 별이 비쳐 보였다. 긴장이 풀리기 까지에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팔 다리를 주물렀다.

자신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 전신에서 소용돌이 쳤다. 무엇 때문에.... 요컨데 내몸에서 힘을 빼앗아 간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 고독 속에서 내 자신이 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였다.

  

- 검은 고독 흰 고독 본문中에서-  

 

▲ 고독은 너를 죽이는 힘이다 ⓒ 2009 한국의산천

3대북벽을 꿈꾸며 1983년 구입한 책. 어느새 26년이 지났군요.   

 

걷는 기술은 옳은 길을 가는데 있다.

그 길에서 친구가 있고 그 길에서 너는 강해진다

할 수 있다면 마음에 있는 쪽으로 가라

자기 길을 찾아 갈 때

힘이 되고 방향이 되며 목표가 된다

아무 것도 그 누구도 너를 막지 못한다 -쿠에타 벨루체의 모하멧 타히르- 

 

낭가는 오르기 어려운산이다.  

  

낭가파르밧의 최초 등정자(1953년) 헤르만 불

불, 헤르만 Buhl, Hermann 1924~1957

 

 

▲ 헤르만 불. 29세의 청년 그는 낭가를 올라 하룻밤 사이에 80세의 노인이 되어 돌아왔을 정도로 사경을 넘마드는 힘든 사투 끝에 살아서 돌아 왔다 ⓒ 2009 한국의산천

 
헤르만불 그는 오스트리아 티롤 출신의 등산가이며 8000m봉 최초의 단독 초등자이다. 산악도시인 인스브루크에서 출생하여 알프스 전지역의 난벽들을 상대로 등산 수업을 하였으며 강한 의지와 혹독한 훈련을 통해 심신을 단련한 세계적인 등반가다.

그는 힘든 조건만을 골라 겨울철과 야간에 단독등반을 하면서 스스로 냉혹한 채찍질을 하였다.
1947년까지 134개에 이르는 난봉들을 골라 등반했으며, 이중 11개 봉은 초등반을 기록한다. 돌로미테 지역의 최고 난벽 피즈바틸레 북벽을 단독으로 4시간 만에 올라 세인들을 놀라게 했으며, 동부 알프스의 최대 난벽인 표고차 1800m 높이의 와츠만 동벽의 잘츠부르크 루트를 한겨울 밤 시간을 택하여 단독으로 9시간 만에 완등한다.

1953년 2월에 시도된 와츠만 동벽 등반은 낭가파르바트 원정에 앞서 자기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등반이었다.
1952년 여름, 8등을 기록한 아이거 북벽 등반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당대 유럽의 쟁쟁한 클라이머인 장꾸지, 레뷔파 등과 함께 줄을 묶은 이 등반에서 그는 가장 어려운 구간을 선두에서 리딩하였다.
이때 보여준 등반 솜씨에 대해 이 벽의 초등자인 하러조차도 그를 가리켜 ‘신의 경지에 이른 달인의 솜씨였다’고 극찬하여 당시의 비평가들을 침묵시켰다.

그는 1953년 헤를리히 코퍼(K. H. Herrigkoffer)가 이끄는 독일·오스트리아 합동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참가한다.
이 원정대는 1934년 이 산에서 희생된 메르클(W. Merkl)을 추모하기 위해 ‘메르클 추모원정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고소 포터의 부족으로 캠프 설치에 많은 시간을 소요했기 때문에 5캠프를 설치하고 정상 공격을 시작할 때는 몬순이 불어 닥쳤다.
기상이 악화되자 대장은 정상공격을 중지하고 캠프를 철수하라고 지시했으나 다시 기상이 호전되자 불, 에르틀(H. Ertl), 프라운 베르거(W.
Fraunberger), 켐프터(O. Kempter) 등 4명은 대장의 명령에 불복한 채 정상 공격을 결정한다. 5캠프까지 이들과 함께 오른 불이 단독으로 정상 공격에 나섰다. 정상으로 향하던 중 방풍의, 피켈, 카메라만 남기고 나머지 장비는 크레바스에 넣어둔다.
그는 7820m 지점에서 흥분제 두 알을 먹고 드디어 오후 2시 독일, 오스트리아의 숙명의 산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선다.

이후 하산 과정은 너무도 유명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두 차례의 비박을 하고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다량의 혈액순환 촉진제를 복용한 그는 환청과 환각상태에 시달리면서 하산길을 재촉한다.
동상에 걸린 발가락이 마비되고, 빈사의 상태로 40여 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면서 가까스로 5캠프에 도착하여 에르틀의 도움을 받는다.
죽음을 극복하고 베이스캠프로 귀환한 그에게 베풀어진 분위기는 너무나 냉랭했다. 철수명령을 어기고 등정한 행위가 대장측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장 자신이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동상에 걸린 발가락을 치료해주지도 않았다. 이후 동상 후유증으로 그는 발가락 두 개를 절단한다.

1954년 불은 <8000m의 위와 아래>라는 낭가파르바트 등정기를 출간한다. 그러나 이 등정기는 대장의 사전 동의 없이 발표되었다 하여 헤를리히 코퍼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다. 이로 인해 불은 오랫동안 심적 고통을 받는다.
원정대 출발에 앞서 대원들은 원정이 끝난 뒤 등반에 관한 글을 발표할 때는 대장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했기 때문에 대장은 저작에 관한 계약 위반을 빌미로 불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1957년 불은 슈무크(M. Schmuck) 대장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브로드피크(8047m) 원정대에 참가한다. 이 원정대는 대장을 포함하여 4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히말라야 등반 사상 가장 규모가 작은 소규모 원정대로 히말라야에서 알파인 스타일을 최초로 실천한 등반대였다.
이들은 산소용구와 고소 포터를 쓰지 않은 채 전 대원 모두가 6950m 높이의 고소캠프까지 직접 짐을 운반하고, 대원 모두가 등정에 성공한다. 불은 이때 그의 생애에 두 번째로 8000m봉 정상을 등정한다.
이 등반을 끝내고 딤베르거(K. Diemberger)와 초골리사(7668m) 등반을 시도하던 중 짙은 안개와 폭풍설 속에서 철수하면서 커니스(눈처마) 붕괴로 인하여 추락사한다.
저서로는 '8000m Druber und Drunter' (1954), '8000m의 위와 아래' (이종호역·1976·국내발췌 번역판), '8000m의 위와 아래' (김영도 옮김·1996·국내완역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