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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공세리 성당 풍경

by 한국의산천 2009. 1. 19.

공세리 성당 풍경 [2009 ·1 · 18 · 일요일]

 

공세리

공세리는 조선시대에 충청도 일대에서 관곡을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해 가던 창고집이 있던 곳이다.

마을 이름도 세금을 바치던 공세 창고가 있는 곳이라는 데에서 온 것이다.
공세리는 충청도 일대의 공세 관곡을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하던 나루였기 때문에 일찍이 마을이 형성되고 또 번창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걸매리는 물이 앝아져 공세나루가 폐쇄되고 아산만에서 삽교천에 이르는 방조제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 공세리 성당 ⓒ 2009 에코마운틴 한국의산천

공세리는 조선시대에 충청도 일대에서 관곡을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해 가던 창고집이 있던 곳이다. 마을 이름도 세금을 바치던 공세 창고가 있는 곳이라는 데에서 온 것이다.

    

조선조 성종9년(1478)부터 이곳에 세곡해운창을 설치, 운영해오면서 매년 15척의 조운선으로 서해 물결을 따라 삼도의 세곡을 한양으로 운반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1895년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드비즈 신부는 이곳에 부임해서 400년이 지난 세곡 창고터를 헐고 그야말로 복음 창고인 성당을 1922년 10월 8일 봉헌함으로써 내포지방의 신앙의 못자리를 틀게 되었다.

 

그는 지역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직접 조제한 한방 의술을 활용, 한약을 조제하였으며 '이명래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요한)씨에게 이 고약의 비법을 전수하였다. 하지만 이 고약은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명인 '성일론고약'으로 불렸었다. 

 

 

▲ 고색 창연한 공세리 성당  ⓒ2009 한국의산천      

공세리 성당은 110년 전인 1895년 세워졌다. 지금의 고딕 양식 성당은 프랑스 출신의 드비즈 신부가 1922년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지었다.

  

 

▲ 갑자기 밀려드는 안개로 인하여 더욱 신비로운 풍경이 연출되는 공세리 성당 ⓒ 2009 에코마운틴 한국의산천 

 

 

 

▲ 공세리 성당 노거수 느티나무 ⓒ2009 한국의산천    

공세리 성당 안에는 인조 9년경 세곡 상,하역 작업를 위해 노역자들의 그늘막으로 심은 나무들이 지금은 아주 큰 고목으로 몇그루 남아있다 

 

 

 

화려하지 않은 고색창연한 고딕 양식 공세리 성당은 1895년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드비즈 신부가 이곳에 부임해서 400년이 지난 세곡 창고 터를 헐고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지었다고 한다.

 

성당을 1922년 10월 8일 봉헌함으로써 내포지방의 신앙의 못자리를 틀게 되었다.  건축 당시에 아산 지방의 명물로서 이름을 날리며 멀리서부터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다고 한다.

 

공세리 성당의 초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 신부는 2대 기낭 신부가 1년 만에 전임하자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해 1930년까지 무려 34년 동안이나 머물며 성당의 기반을 굳건히 다졌다. 

 

 

  

한편, 공세리 성당은 천주교 신자들에겐 순교성지다. 조선 후기의 4대 박해에서 희생당한 총 순교자는 1만 명 정도라 한다.

이중 아산, 서산, 당진, 홍성, 예산 등 내포를 비롯한 충청권의 희생자가 무려 60~70% 정도나 된다고 한다.

공세리 성당 출신의 순교자도 28명에 이르고, 이중 박의서(사바스), 원서(마르코), 익서(미상) 3형제 순교자의 기념비가 성당 옆에 있다.    

 

 

▲ 고딕 양식의 공세리 성당 첨탑 ⓒ2009 한국의산천      

오래된 고목 (市 보호수) 와 성당의 옆 창문은 빛바랜 스테인드 그라스로 장식되어있으며 화려하지 않은 고색창연한 빛이 더욱 세월의 깊이와 역사를 되돌리게 해준다.

 

 

 

 

▲ 성당 박물관으로 개관한 사제관 ⓒ 2009 에코마운틴 한국의산천    

 

오래된 빨간벽돌 건물로 과거에는 사제관으로 사용되었으나 이제는 성당 박물관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과거 사제관이었던 이 건물 옆 성당 앞뜰에는 치명일기(致命日記) 수원 387 박의서와 388 박원서와 389 박익서, 세 분 순교자의 묘가 있다. 

 

이 분들은 모두 걸매리에서 살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난 이듬해인 1867년에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이 분들의 묘는 본디는 인주면 해암리 맹령(속칭 맹고개)에 있었는데, 1988년 9월 20일 공세리 성당 변갑철 신부의 주관하에 성당 앞뜰로 이장해 왔다.

 

 

 

 

 

 

 

 

 

 

 

 

 ▲ 질곡의 세월을 이겨낸 공세리 성당은 아름답다. ⓒ2009 한국의산천      

봄에는 영산홍이 피고, 여름에는 상사화가 화려하다.

성당 주변에는 수령 300년 이상의 고목만 7그루나 된다. 단풍도 곱고 눈 덮인 겨울 풍광도 곱다. 그래서 영화 감독과 PD들은 공세리 성당을 배경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찍었다. 

 

드라마 ‘모래시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불새’ ‘고스트맘마’ 등에서도 성당이 배경이 됐고 가수 god도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안치환도 성당의 은행나무 아래서 노랫말을 썼다고 전한다.

 

 

 

 

공세리 성당 가는 길 

공세리성당은 서해안고속도로 송악IC에서 빠진다. 38번국도를 타고 달리다 삽교천 방조제를 넘는다.

방조제를 지나자마자 삼거리(아산방면, 당진방면) 정면 낮은 구릉위에 공세리 성당의 첨탑이 언듯언듯 보인다.

오른쪽으로 ‘공세리’ 이정표를 보고 마을로 들어서면 공세리성당을 만날 수 있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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