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그 떠난 지 한 달, 이청준 문학의 고향에 가다 [중앙일보]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세트장이 들어서 있는 장흥 회진포구 전경. 빨간 지붕의 세트는 영화 막바지 남녀 주인공이 해후하는 주막으로 쓰였다. 영화의 원작은 이청준의 소설 ‘청학동 나그네’. 사진뒤편에 보이는 봉우리가 관음봉이고 그 오른편 고개 너머가 이청준의 고향 진목마을이다. [장흥=조용철 기자]
소설가 고(故) 이청준(1939∼2008) 7월 31일 별세. 8월 2일 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고향마을에 영면.
선생님, 고향 땅에 돌아가시니 편안하십니까. 선생 떠나보낸 지 한 달. 각박한 인심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을 잊지 못하는 세대는, 그러니까 밤새워 눈물 훔치며 선생의 작품을 읽어 내려갔던 세대는 선생의 귀향을 경건한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그토록 사무쳤던 고향 땅에 마침내 돌아와 눕게 된 긴 사연을 알고 있어서입니다. ‘까까머리’ 중학생부터 이어진 긴 객지 생활을 백발 성성해진 다음에야 내려놓았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셨으리라 믿고 있어서입니다.
생전의 당신께 더운 술 한잔 못 올렸습니다. 지척에서 뵐 기회가 있었지만 쭈뼛대다 겨우 인사만 드렸습니다. 그 죄스러운 심사 못 이겨 장흥에 내려갔습니다. 선생이 태어나고 자라고 끝내 묻힌 땅, ‘눈길’ ‘서편제’ ‘선학동 나그네’ 등 선생의 주옥 같은 작품 대부분이 움트고 여문 저 외진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선생의 귀향이 알려지자 전국에서 많은 이가 찾아들었다는 사실을, 생가에 놓인 방명록을 열어보고서 알았습니다. 장흥 땅이 전국 유일의 문학관광특구로 지정돼 문림(文林)의 고장이 되었다는 소식도 촌로로부터 들었습니다. ‘문림 장흥’의 맨 앞엔 물론 선생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눈길. 당신의 그 눈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반세기쯤 전 푸진 눈 쌓여 있던 어느 이른 새벽, 당신이 당신의 늙은 어미와 나란히 걸었던 그 시오리(里) 산길을, 당신을 떠나보내고서야 한 걸음 한 걸음 디뎠습니다. 마침 장대비가 퍼부었습니다. 내리치는 빗줄기가 되레 고마웠습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감추려, 부러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그래 고향 땅 돌아오시니 편안하십니까.
# 장흥 그리고 이청준
장흥 땅 어디에도 이청준의 흔적은 묻어 있다. 대덕읍 버스터미널은 1954년 광주서중 입학생 이청준이 유학 버스에 오른 곳이고, 선생의 고향 진목마을에서 한 시간 거리인 보림사는 생전의 이청준이 곡차를 나눠 마셨던 현광 스님이 주지로 있던 절이다(보림사는 이청준 소설 ‘흰옷’의 무대이기도 하다). 가을 억새로 유명한 천관산이 배경으로 쓰인 작품도 두 편(‘잃어버린 절’ ‘무소작’) 남아 있고, 장흥의 동쪽 끄트머리 남포리 이장댁은 영화 ‘축제’의 촬영장소로 사용됐다. 이청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장흥 땅에서 발아한 당신의 작품은 서른 편이 넘는다.
심지어 귀족호도박물관(www.hodonamu.com) 같은 곳에서도 이청준을 만날 수 있다. 장흥 읍내의 귀족호도박물관은 주인 김재원씨가 명품 호두를 키우는 틈틈이 화분 따위를 가꾸는 곳. 거기에 이청준이 키우던 동백나무 분재가 있다. 슬하에 아들이 없는 선생이 ‘아들놈’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했던 그 동백이다. 주인 김씨는 “서너 해 전에 선생이 ‘더 이상 돌보기가 힘들 것 같으니 자네가 맡아주게나’ 하며 분재를 내려 보냈다”고 소개했다. 선생이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건 지난해 여름. 그 훨씬 전에 당신은 제 육신이 예전 같지 못하다는 걸 감지했던 거다. 동백을 내려 보낸 뒤 선생은 수시로 전화를 걸어 아들놈 안부를 물었고,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아들놈을 정성껏 어루만졌다. 그리고 올봄, 무슨 조화인지 나무는 유난히도 많은 꽃을 피웠다.
생가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 영화 ‘천년학’ 세트장이 들어서 있다. 영화 말미에서 남녀 주인공이 재회하는 허름한 주막이다. 득량만 바다를 바라보고 들어선 주막의 오른편 뒤쪽으로 산줄기가 둘러서 있다. 그 산줄기 너머가 진목마을이고 산줄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이청준이 “흡사 장삼을 걸치고 앉아 있는 도승의 자태와 같다”고 표현했던 관음봉이다. 지금은 관음봉 아래 터가 간척사업의 결과로 무논이 됐지만 어린 이청준이 뛰어놀 적엔 거기에도 바닷물이 들고 났었다. 그때 그 바닷물에 드리워진 관음봉의 그림자가 한 마리 학이 날아오르는 모습처럼 비춰졌다. 그 광경을 잊지 못해 이청준은 ‘선학동 나그네’를 썼고, 학 그림자를 빚어내는 관음봉 아래에서 임권택은 자신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찍었다.
# 생가에서
마흔여 개 낮은 지붕이 바다를 향해 들어앉은 언덕배기 갯마을. 이청준의 생가가 있는 진목마을이다. 비탈길 오르고 좁은 골목 돌고 돌아 문간 앞에 섰다. ‘눈길’에서 어머니가 “다섯 칸 겹집에다 앞뒤 터가 운동장이었더니라”고 자랑했던 그 집이다. 대청 얹은 방 세 칸 겹집은 틀림이 없지만, 옥수수 심어둔 앞터는 여염집 안뜰만 하다. 방마다 선생의 작품이 진열돼 있고 바랜 옛 사진이 걸려 있다. 마루에 걸터앉으니 바다가 훤히 내다보인다. 왼편 바다로 죽 나아가면, 이청준을 베스트셀러 작가로 키운 『당신들의 천국』의 소록도가 나타날 것이고, 거기서 오른편으로 뱃길을 돌리면 청산도에 당도할 것이다. 청산도. 영화 ‘서편제’에서 그 유명한 시골길 장면을 찍은 곳이다.
마루 구석에 놓인 방명록을 집어 들었다. 7월 31일 이후 145명이 이름을 남겼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들었고, 하나같이 안타까운 심정을 적었다. 생가 탐방에 동행한 소설가 김석중(59)씨가 옆에서 “방명록에 서명한 사람보다 족히 열 배는 생가를 다녀갔다”고 한마디 거든다. 그리고 여태 모르고 있었던 일화 하나를 들려준다.
중학생 이청준이 광주에서 유학하던 때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는 집을 판다. 그 뒤로 이청준은 집 안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았다. ‘눈길’에 나오는 것처럼, 어머니가 집주인에게 사정하고 집안 사정 어두운 아들을 속여 저녁 해 먹이고 재웠던 그 하룻밤만 빼고서 이청준은 예전의 제집에 들어서지 않았다. 독자들 이끌고 고향마을에 문학기행을 와서도 동네 어귀까지만 들렀다 발길을 돌렸다. 고향 사람들이 앞장을 서도 그는 모질게 돌아섰다. 이청준이 제집에 다시 발을 들여놓은 건 군청이 집을 사서 생가로 복원한 2005년 이후의 일이었다.
# 눈길을 걷다
‘눈길’에서 어머니는 아들을, 이미 남의 것이 된 집에서 하룻밤 재운 뒤 함께 길을 나선다. 고갯길 시오리를 걷다 보면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는 대덕 읍내에 다다른다. 아들은 거기서 광주행 버스를 타고 어머니는 그 길을 되밟아 돌아온다. 눈이 소복이 쌓인 새벽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남긴 발자국을 오목오목 디디며 홀로 그 길을 걷는다.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뿌리며 어머니는 그 길을 다시 밟는다. 이청준은 소설의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눈길’의 이야기는 나와 노인에 관한 한 많은 부분이 사실 그대로였고, 그날 새벽 어둠 속에 어머니를 뒤에 남겨두고 버스에 올라타버린 나는 그 후 긴 세월 그날 아침 당신이 날도 덜 밝은 그 추운 눈길을 혼자 어떻게 되돌아가셨는지를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지냈었다. 당신의 대답이 지레 너무 아프고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 눈길을 따라 걸었다. 진목마을이 기대어 앉은 언덕배기 위로 비스듬히 나 있는 산길이었다. 바닷가를 끼고 번듯한 신작로가 난 뒤로, 진목마을의 유일한 진입로였던 그 길은 잊혀져 있었다. 고개 너머에는 수풀이 우거져 옛길의 흔적을 찾기도 힘들었다. 길은, 늙은 어미의 손등 모양 거칠고 지쳐 있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무겁고 더뎠다. 고작 시골 뒷산의 흔한 오솔길인데 디디는 발걸음은 마냥 조심스러웠다. 고향의 어머니 얼굴이 길바닥 위에 자꾸 겹쳐졌다. 문득 동네 촌로로부터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진목리에서 이청준은 말 그대로 개천에서 용 난 경우였다. 남도의 명문 광주서중·광주제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 들어간 이청준에게 고향 마을은 잔뜩 기대를 걸었다. 이청준이 큰 사람이 되어 낙후한 고향을 키워줄 거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이청준은 소설가가 됐다. 이청준이 신작로라도 내주리라 바랐던 동네 사람은 실망하고 돌아앉았다. 그러나 진목리 주민이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다. 문학관광 특구로 지정된 장흥군이 조만간 눈길 복원사업에 착수할 예정이다. 지금은 가뭇없는 옛 고갯길이 말끔하게 단장된 새 길로 거듭날 참이다. 고향의 묵은 소원을, 이청준은 죽어서 들어주는 것이다.
# 그리고
이청준 생가.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애도객이 줄지어 찾아왔다. [장흥=조용철 기자]
생가에서 5분 거리에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러나 마을 주민의 안내 없이는 방문이 어렵다. 이정표도 없고, 삼각형꼴로 들어앉은 봉분 세 기의 주인도 알 길이 없다. 김석중씨가 세 기의 봉분 중에서 꼭대기가 선생의 어머니 것이고 왼편이 선생의 것이며 오른편이 선생 부인의 가묘라 일러줬다. 번다하게 일 벌이지 말라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비석도 일 년 뒤에 세우기로 했다는 사정까지 귀띔해 주었다. 선생은 노제도 반대했었다고 한다.
장흥은 요란스러운 관광지가 아닌 까닭에 몇몇 명소를 빼곤 찾아가는 길이 쉽지는 않다.
다음 연락처에 미리 도움을 청하는 게 낫다. ▶장흥군청 문화관광과(061-863-7071, 0527) ▶별곡 문학동인회장 김석중(019-633-0456) ▶진목마을 주민 오세훈(017-608-5592), 이황우(010-4118-5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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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은 뿌리 깊은 문림(文林)의 땅
송기숙·한승원 … 현역만 70여 명
장흥은 이청준 말고도 여러 거장을 배출한 문림의 고장이다. 그 중엔 한승원 선생도 있다. 선생의 처소인 해산토굴 앞에서. ▶▶
언제부턴가 장흥은 지나쳐 가는 고장이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남도답사 1번지’라 명명한 강진을 왼편에 두고, 사시사철 관광객이 밀려드는 차밭의 보성을 오른편에 둔 지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흥은 예부터 문림의향(文林義鄕)이었다. 국어교과서에서 배웠던 최초의 가사 ‘관서별곡’이 장흥사람 백광홍의 것이다. 안양면 기산리에 백광홍을 모시는 ‘기양사’란 사당이 있다. 장흥은 전남에서 가장 많은 서원사우(書院祠宇)를 거느렸던 고을이다.
그러나 장흥의 문학 전통은 당대에 들어 더 빛을 발한다. 현재 활동 중인 장흥 출신 문인은 한 달 전에 돌아간 이청준 선생을 포함해 70명이 넘는다. 소설가 송기숙·한승원·이승우, 시인 위선환·전기철·김영남·이대흠·문정영, 시조시인 김제현·이한성 등 유명 문인이 수두룩하다. 심지어 이명흠 현 장흥군수도 지난해 문예지로 등단한 시인이다. 이와 같은 내력을 내세워 장흥군은 올 4월 지식경제부로부터 전국 최초로 문학관광특구로 낙점을 받았다. 천관산 남쪽 아래에 문학비 54개를 세워 천관산 문학공원도 조성해 놓았다.
문림 장흥의 빠뜨릴 수 없는 명소 중 하나가 시인 겸 소설가 한승원(69) 선생의 처소 해산토굴(海山土窟)이다. 선생의 태자리는 동갑내기 이청준과 같은 회진면이지만, 선생은 지금 장흥의 서쪽 끝 안양면 율산마을에 들어와 있다. 연꽃 무성한 앞마당 연못과 해산토굴 앞 해안에 늘어선 한승원 시비 30여 기가 인상적이었다. 마침 선생은 토굴 안에 있었다. 선생이 손수 덖은 차 한잔 얻어마시다 문림 장흥의 연원을 물었다.
“장흥의 산 중에 억불산(億佛山)이라고 있소. 여기서 ‘억(億)’자는 ‘인민’이란 뜻이오. 옥편만 찾아도 알 수 있지. 인민 부처의 산, 그러니까 미륵보살의 산인 게지. 실제로 억불산 중턱의 며느리바위는 미륵부처의 형상을 빼닮았소. 백제 때 장흥의 이름이 ‘고마미지’요. ‘고마’는 ‘검’, 즉 신을 뜻하고 ‘미지’는 미륵의 옛말이지요. 미륵이 누구요. 중생을 깨우쳐 극락으로 이끄는 부처 아니오. 지금 세상에서 삶의 이치를 전파하는 일, 그게 문학의 소임 아니겠소.”
출처 : 중앙일보 손민호 기자/조용철 기자
이청준 연보 [정리:한국의산천]
1939년 전남 장흥 출생
1960년 광주 제일고 졸업
1965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단편 '퇴원' 당선하며 등단
1966년 서울대 독문과 졸업
1967년 '병신과 머저리'로 동인문학상 수상
1976년 장편'당신들의 천국' 출간
1981년 장편 '낮은 데로 임하소서' 출간
1993년 단편 '서편제'가 영화로 만들어져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수상
1998년 '이청준 문학전집'출간 (2003년 25권으로 완간)
2007년 단편'벌레이야기'가 영화'밀양'으로 제작 상영 됨
2007년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출간
2008년 7월31일 영면(永眠).
이청준 관련 글 더 보기>>> http://blog.daum.net/koreasan/15228916 (어머니 곁으로 돌아간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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