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포암산 만수봉 산행 중 하늘재 풍경 [2008 · 8 · 17 일요일 한국의산천]
만수휴계소 - 용암봉 - 만수봉(983.2) - 마골치 - 궁고개 - 관음재 - 포암산(961.7m) - 하늘재 - 미륵사지 ( 13km : 점심시간 휴식 포함 6시간 30분 소요)
포암산과 부봉 사이에 있는 하늘재(525m)
하늘재는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읍 미륵리를 잇는, 신라때 뚫린 오래된 교통로다. 하늘재 북측에 길이 480m의 차단성 형태의 석성유지(石城遺址)가 있으며, 계립령 서측에서 신선봉, 조령관, 깃대봉을 거치는 능선 북측 2~3m아래에 길이 2.7km의 성지, 월악산 정상에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곳곳에 쌓인 성, 조령산성 외에도 그 동쪽에 어류성이 있어 성첩 5,6백파를 고려 태조가 설치하였으며 그 동쪽에 작성(鵲城)이 있다.
▲ 만수봉을 거쳐서 포암산 정상에 오른 후 하늘재, 미륵리로 하산 ⓒ 2008 한국의산천
왼쪽부터 한국의산천, 평행선, 강릉제량, 영월선달, 추억의연가, 노을, 여명.
하늘재(계립령)
우리나라의 최초로 만든 고개 하늘재(계립령 : 520m)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길을 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남진을 위해 다녔던 길, 고려의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경주로 몽진을 할때도 이용했던 길, 조선 태종때 문경새재 길이 새로 나면서 부터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지만 문경에서 충주로 넘어 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이재를 넘었다.
우리가 흔히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절,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벌였던 싸움은 궁극적으로 한강유역을 차지하고자 하는 싸움이었다. 국토의 중앙을 흐르는 한강 주변은 국토 전체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서해의 뱃길을 통해 당시의 선진국이었던 당나라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길목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은 나라 발전의 가장 중요한 땅을 손에 넣는 일이자 삼국간의 싸움에서도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 한강 유역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한강 줄기를 끼고 있는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 일원이다. 이 지역은 다른 말로 ‘중원中原’이라고 불렸다. 문자 그대로 국토의 중심부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 형성된 문화권, 이른바 중원문화권은 고대 삼국문화의 접점을 이루고 있는 문화유적지라는 점에서 둘러볼곳이 산재한 곳으로 손꼽힌다.
▲ 포암산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월악산 영봉 ⓒ 2008 한국의산천
▲ 포암산에서 하늘재로 내려서는 길에 만나는 하늘샘 ⓒ 2008 한국의산천
▲ 해발 525m에 위치한 하늘재 ⓒ 2008 한국의산천
문경쪽에서는 하늘재까지 도로가 나있으나 충주쪽인 미륵리에서 하늘재까지는 도로가 없으며 옛길 그대로의 소로길이 보존되어있다.
▲ 하늘재에 있는 계립령 유허비 ⓒ 2008 한국의산천
한적하면서도 운치있는 길 멀리 신라시대부터 개척되었다는 '하늘재'
전국토가 거의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는 산줄기 사이로 수많은 고갯길이 뚫려있다. 미시령, 한계령, 대관령, 추풍령, 조령으로 불리는 문경새재등등 ...가 있다
이렇듯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개는 모두 한반도의 근간을 이루는 백두대간의 안부(산봉우리 사이에 말안장처럼 낮은 부분이나 고개)를 이루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백두대간의 수많은 고개들 중에서 제일 먼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고개가 바로 충북 충주시 미륵리와 경북 문경읍 문경 관음리를 잇는 하늘재(525m)다.
계립령(鷄立嶺), 마목현(麻木峴), 한훤령(寒暄嶺) 한티,천티등으로도 불렸던 하늘재를 처음 연 나라는 156년에 한강을 차지하려는 신라에 의해 만들어진 길이다.
하늘에 닿을 듯이 높다 해서 하늘재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525m에 불과한 평범한 고갯길 하늘재 그러나 이 작은 고개에 굽이굽이 얽히고 깃든 사연은 고개보다 훨씬 높고 길다.
삼국사기에 '아달라 이사금 3년(156)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적고 있다.
죽령은 이보다 2년 뒤에 개척되었으니 기록상으로 볼 때 하늘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두대간 고갯길인 셈이다.
낙동정맥 동쪽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였던 신라는 험준한 백두대간 등줄기에 하늘재를 개척함으로써 비로소 한강 이북으로 향하는 숨통을 열 수 있었고, 이를 삼국통일의 디딤돌로 삼았다.
하늘재는 삼국의 북진과 남진의 통로였기에 각국은 서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예전에는 교통로중에서 물길이 가장 빠른 이동수단이었다.
죽령이나 계립령 모두 경상도 땅에서 넘어서면 곧 남한강 물길을 만날 수 있게 되니 삼국시대의 영토 다툼에 유리한 고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사실이다.
고구려 온달장군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다.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상주를 칠 때도 이 고개를 넘었고, 망국의 한을 품고 길을 떠난 마의태자도 이 고갯마루에서 쉬어갔다. 그리고 1362년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공민왕의 피난행렬도 이곳을 넘어 봉화 청량산으로 갔다.
계립령은 신라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안고 금강산으로 갈때 넘었다는 고개다. 조선 태종때 한양~영남을 잇는 지름길인 문경새재가 뚫리면서 하늘재는 `옛길`이 됐다. 그러나 새재를 지키는 관리들의 횡포가 잦아, 서민들의 발길은 하늘재로 꾸준히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인 1414년(태종 14) 새재가 개척되면서 하늘재는 점점 잊혀진 고갯길이 되어갔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쳐들어오자 조정은 신립 장군께 이곳을 부탁을 했지만 신립장군은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겠다고 하다가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왜군들에게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 만수봉~포암산 산행을 마치고 하늘재에서 미륵리로 내려오는 옛길을 따라 내려오는 한국의산천팀 ⓒ 2008 한국의산천
하늘재 (충주교육 참고)
계립령은 문헌에 기록된 우리니라 최고의 고갯길이다. 그 기록은 '삼국사기'권2 '신라본기'에 나온다. 이 책에는 아달라이사금 3년 "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했다. 아달라왕 3년은 서력으로 156년이니, 지금으로부터 무려 1847년 전의 일이다. 같은 책 권41 '열전'의'김유신 조'에 등장하는, 계립령의 다른 이름은 마목현이다.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러 간 김춘추에게 보장왕이 말하기를,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보내 주지 않겠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같은 책 권45 '열전'의 '온달 조'에는 “계립현과 죽령의 서쪽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온달의 출사표로 등장한다.
'고려사'에는 대원령이란 이름이 나온다. 고려 고종 42년(1255년) 10월에 차라대가 이끄는 "몽고군 이 대원령을 넘자 충주에서 정예군을 보내 천여 명을 죽였다"고 기록하였다. 대원령이란 미륵대원과 관련된 이름이다.
계립령 고갯길 들목에 남아있는 미륵리 절터는 본래 경주의 석굴암보다도 큰, 대규모 석굴사원이었다. 그러나 오랜 풍상을 겪으며 석굴사원으로 건립되었던 목조 건물은 사라지고 지금은 미륵불상 앞에 대충 그 윤곽을 어림잡을 수 있는 주춧돌만 남아있다. 연구가들은 미륵리 석굴 사원의 창건 연대를 대략 11세기에서 12세기 전후로 어림잡고, 고려시대의 절 이름을 대원사로 추측하는 것에 거의 동의한다. (미륵리 절터 발굴 조사 과정에서 대원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참이 전국적으로 체계를 갖추는 것이 고려 시대이니, 그 과정에서 본래의 석굴 사원에 원을 두고 대원, 혹은 미륵대원이라 불렀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조선 시대에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마골점 봉수의 기록이 나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면 비로소 이를 정리하여 "계립령을 사람들은 마골점이라 한다"거나 "속칭 마골산이라 한다"는 기록으로 발전한다. 계립이나 마골, 마목은 모두 껍질을 벗긴 삼대, 즉 겨릅대를 가리키는 동의어들이다.
현재 이 일원에는 모두 세 곳에 각각 달리 부르는 고갯길이 있다. 충주댐이 된 남한강에서 송계계곡을 타고 오르다 보면 '닷돈재'라는 고개이름이 남아있고, 수안보에서 미륵리 절터로 넘어오는 고개 이름이 '지릅재' 다. 그리고 미륵리 절터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경북 문경 관음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오늘날에는 '하늘재'라 부른다.
백두대간의 개념을 모르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연구가들이 지금껏 그 이름이 뚜렷이 남아있는 지릅재를 계립령이라 믿었다. 그러나 지릅재나 닷돈재의 경우에는 다만 한강유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넘어가는 같은 유역 내의 고개일 뿐이고,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나누는 백두대간의 고개는 바로 하늘재다.
▲ 하늘재에서 미륵리로 내려오는 옛길을 따라 내려오는 한국의산천팀 ⓒ 2008 한국의산천
▲ 하늘재에서 이곳 표석까지 약 3km이며 이곳에서 약 200m를 더 내려가면 미륵사지터가 나온다. ⓒ 2008 한국의산천
계속해서 아래 웹페이지에 미륵사지 소개가 이어집니다.
만수휴계소 - 용암봉 - 만수봉(983.2) - 마골치 - 궁고개 - 관음재 - 포암산(961.7m) - 하늘재 - 미륵사지 ( 13km : 점심시간 휴식 포함 6시간 30분 소요)
조상들의 애환과 기쁨이 서린 한반도 한가운데의 옛 고개, 하늘재
하늘재는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읍 미륵리를 잇는, 신라때 뚫린 오래된 교통로다. 하늘에 닿을 듯이 높다 해서 하늘재라 부른다지만, 실제 높이는 525m에 불과한 평범한 고개다. 그러나 이 작은 고개에 굽이굽이 깃든 사연은 고개보다 훨씬 높고 길다. 조선 태종때 한양~영남을 잇는 지름길인 문경새재가 뚫리면서 하늘재는 `옛길`이 됐다. 문경쪽은 고개 꼭대기까지 포장됐지만, 충주쪽은 옛길 그대로인데다 숲이 울창해 산책 코스로 좋다. 석조물이 잘 보존된 옛 절터와 자연관찰로도 있어 가족이 함께 찾아가볼 만하다. 미륵리에서 3㎞, 왕복 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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