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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詩] 설악산 이야기 설악산 얘기 진교준

by 한국의산천 2023. 5. 18.

진교준 설악산이야기

오래전에 쓴 이야기 땡겨올림.

[작성일  2008. 2. 5.(화요일) 한국의산천 

 

[詩]설악산 얘기

 

이것이 詩인지 노래 가사인지...이것이 詩라면 시의 저자가 누구인지, 아니 작자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도 알고있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채, 마치 옛 설화처럼, 부초처럼 떠 다녔다.

그렇다 시집을 간행하여 거기에 수록된것도 아니다. 

 

그저 이 글은 산꾼 또는 산사나이라고하는 자처하는 사람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차차 일반 산사람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나는 산이 좋더라
파란 하늘을 통째로 호흡하는
나는 산이 좋더라
멀리 동해가 보이는
설 . 설악 . 설악산이 좋더라 ..하략... -진교준-[ 옮김 2008. 2. 5.(화요일) 

 

살아서 산길을 걷고 죽어서 산에 눕는다. 生死不二 (이말이 맞는지 않맞는지는 모르지만)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고 산과 사람은 남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의 산이라고 하는가보다.

  

아래 사진은 이번 설악산 토왕성 폭포 빙벽대회(2008.2. 2~3일)가는 길에 촬영한 이미지입니다.   

 

설악은 너무나 많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솜다리꽃, 박새품, 둥굴레, 함박꽃, 전나무, 아! 자작나무, 설악골, 용소골, 토막골, 잦은바위골, 곰골, 그리고 대청의 바람과 구름 그리고 동해까지…… 거기에다 설악시를 가지고 있고 또 설악가라는 노래까지 가지고 있다.

 

설악의 노래는 슬픈노래다. 아니, 서럽도록 아름다운 노래다.

"너와 나 다정하게 걷던 계곡길, 저 높은 봉우리에 폭풍우칠 적에…."

 

그 설악의 가을에 산친구는 죽었다.

죽은 친구를 설악에 묻고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부르는 노래가 설악가이다.

"잘 있거라 설악아, 내 어이 잊으리요 꿈 같던 산행을, 잘 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 지금부터 설악산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 2008 한국의산천 

 

설악산(雪嶽山) 얘기  학교산악회에 입회를 하고 활동을 하게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엉성하게 프린트된 종이 몇장을 받아서 외우는 일로 부터 산악회 모임은 시작된다.

산악인 선서, 등산史, 알피니즘, 등산용어, 매듭법, 산노래와 팝송 , 그리고 詩하나 '설악산 얘기' 였다.   

 

진교준 시인의 '설악산 얘기'는 오늘날까지 4~50대 산꾼들이 많이 알고 있으며, 술자리에서 노래 대신으로 띠엄 띠엄 몇구절 생각나는대로 낭송하는 詩이기도 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된것은 1995년 山 관련 월간지를 통해서 였다.

설악산으로 하계, 동계 등산훈련을 들어가면(짧게는 4박5일에서 보름정도) 설악가를 부르고 '설악산 얘기'를 중얼거렸다. 그 당시 이 詩의 작자를 모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  그도 그럴것이 이 詩는 산꾼 또는 산사나이라고하는 자처하는 사람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차차 일반 산사람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이것이 시인지 노래 가사인지...이시의 저자가 누구인지, 아니 작자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도 알고있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채, 마치 옛 설화처럼, 부초처럼 떠 다녔다.

그렇다 시집을 간행하여 거기에 수록된것도 아니다.  그후 산 관련 월간지(월간 산)에서 그를 찾아 취재를 했다.

 

서울고, 외대 불문과를 졸업한 그는 당시 하던 사업을 접고 서울시내 버스 운전을 하고 있었다.

우이동이 종점인 6번 시내버스의 운전기사.... 진교준 자신이 원치 않는 취재였는지도 모른다...   

그 월간 山誌에서 내가 본 그의 모습 - 담배를 손에 들고 있는 버스 기사의 모습- 은 힘들었던 그의 삶과 새로운 삶이 교차하는 .....그리고 한동안 나는 그를 잊고 있었다.


언젠가 문득 '설악산 얘기' 詩를 찾아 다니다가 그가 2003년 11월 새벽에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진교준님은 가셨지만 님의 명시 "설악산 얘기"는 모든 산악인의 가슴에 한귀절 한귀절 애송될 것이다.

 

진교준님의 '설악산 얘기'를 읽으며 '설악가' 들으니 가슴속이 뜨거워지며 짠해진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국의산천-  산사이들의 노래 '설악가'가 왜 슬프게 들리지? 아니 산사나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모두가 애절한 사연이 깊은 음률이다. 왜그럴까? 관련글을 모아 '설악산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

 

▲ 파란하늘을 통채로 호흡하는 나는 산이 좋더라 ⓒ 2008 한국의산천   

 

설악산 얘기

서울고 2년. 진교준(서울고 12회)의 1958년도作. 조병화 선생님이 뽑은 교내 제1회 경희 문학상 수상작. 

 

    -진교준- 

 

1 나는 산이 좋더라


파란 하늘을 통째로 호흡하는
나는 산이 좋더라
멀리 동해가 보이는
설 . 설악 . 설악산이 좋더라
 

 

2 산에는 물, 나무, 돌 . . .
아무런 誤解도
法律도 없어
네 발로 뛸 수도 있는
원상 그대로의 自由가 있다.
고래 고래 고함을 쳤다. 나는
고래 고래 고함을 치러
여기까지 온 건지도 모른다.

 

▲ 멀리 동해가 보이는 설 · 설악산이 좋더라 ⓒ 2008 한국의산천   

 

3 산에는
파아란 하늘과 사이에
아무런 障碍도 없고
멀리 東海가 바라 뵈는 곳
산과 하늘이 融合하는 틈에 끼어 서면
無限大처럼 가을 하늘처럼
마구 부풀어 질 수도 있는 것을 . . .
정말 160cm라는 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을 . . .
 

 

4 도토리를 까 먹으며
설악산 오솔길을 다리쉼 하느라면
내게 한껏 남는 건
머루 다래를 싫건 먹고픈
素朴한 慾望일 수도 있는 것을 . . .
自由를 꼭 깨물고
차라리 잠 들어 버리고 싶은가

 

▲ 永遠한 休息처럼 말이 없는 산이 좋더라 ⓒ 2008 한국의산천 

 

5 깨어진 기왓장처럼
五世庵 傳說이 흩어진 곳에
금방 어둠이 내리면
종이 뭉치로 문구멍을 틀어 막은
조그만 움막에는
뜬 숯이 뻐얼건 탄환통을 둘러 앉아
갈가지가 멧돼지를 쫓아 간다는 (註· 갈가지: 강원도 방언으로 범 새끼)
포수의 이야기가 익어간다
이런 밤엔
칡 감자라도 구어 먹었으면 더욱 좋을 것을
 

 

6 百潭寺(백담사) 내려가는 길에 骸骨(해골)이 있다고 했다
해골을 줏어다가 술잔을 만들자고 했다
해골에 술을 부어 마시던 빠이론이
한 개의 해골이 되어버린 것 처럼
哲學을 부어서 마시자고 했다
해· 골· 에· 다· 가 . . . .
 

 

7 나는 산이 좋더라
永遠한 休息처럼 말이 없는
나는 산이 좋더라
꿈을 꾸는 듯
멀리 동해가 보이는
설, 설악, 설악산이 좋더라 "
 

 

- 진교준(秦敎俊) 2003년 11월 17일(월) 오전 5시30분 교통사고로 운명 -

 

 

▲ 설악산 얘기를 들으러 온 사람들 ⓒ 2008 한국의산천 

 

산을 좋아하는 시인 · 진교준님 관련글 .아래의 글은 미국에서 거주하는 김석원님이 서울고 17회 커뮤니티에 올린글 입니다. 

詩<雪嶽山 얘기>의 故 진교준兄을 추모함 작성자 김 석원 (Guest) 작성일 2003-11-26 오전 12:58:51

 

경희문학상 제1회 수상작<설악산 얘기>의 진교준(서울고 12회)시인이 지난 11월 17일(월) 오전 5시30분 교통사고로 별세하시다.


지난해 가을, 마운틴빌라(서울고 산악반OB회) 홈커밍 행사후 진교준형의 프로필을 정리해 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고인를 추모하는 글로 대신하게 될 줄이야
 

사랑하는 산사람들이여
젊은날 우리의 심금을 울리며 이제는 한국 산악인들 사이에 널리 애송하는 산악시가 되어간 <설악산얘기>의 주인, 故人을 함께 추모합시다

11/23/03 미국에서 김 석원 詩 '雪嶽山 얘기'와 진 교준  설악산


얼마나 우리를 설레이게 하는 이름인가
젊은날의 이상향으로서, 또는 현실을 뚫고 들어가는 永遠의 세계로
설악산은 늘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산악반 시절, 여름이 시작되면 1학기 말 시험은 치루는 둥 마는 둥, 벌써부터 마음은 온통 설악산에, 동해바다로 가있던 기억이 새롭다.
젊음이 용솟음치는 아름다운 사춘기 소년의 때에 설악산은 우리를 잘 인도한 스승이요 또 고향이요 안식처였던 것이다.
이즈음에 진 교준 형의 설악산 詩가 발표 되었다.
 

 

"나는 산이 좋더라
파란 하늘을 통째로 호흡하는
나는 산이 좋더라
멀리 동해가 보이는
설. 설악. 설악산이 좋더라" . . . 로 시작되는 이 시는 弱冠의 서울고 2년 진교준형(12회)의 1958년도 作이며 교내 제1회 경희 문학상 수상작이 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이다.

  

 

 

▲ 설악산 노적봉 ⓒ 2008 한국의산천  

 

교준형의 친구이자 그의 <설악산 얘기> 詩集에 拔文을 써준 朴泰洵형의 얘기를 들으며 그에 대해 좀더 다가 가도록 하자 “ . . .그때 서울고는 <一流高>이면서도 운동도 꽤하던 학교였다. 깡패도 좀 있었고. . .

그와 나는 서울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이다. 우리의 중학교 시절이란. . .

전후파적 기질이 팽대하고, 자유당 독재가 말기적 징조를 보일 적이었다.

그리하여 조숙하다는 것으로 밖에는 자기를 증명해 낼 도리가 없는 <앙팡 떼리블>로써 무섭게 속력을 내며 달려갔던 것이다. 진교준은 이 때에 럭비를 하고 있었고 . . . ”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진교준은 문학과 불량기와 무전여행으로 뒤범벅이 된 그러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병아리가 세상에 나오자면 자기의 달걀의 세계를 깨뜨려야 하듯이 “. . .

그의 주변에는 건강한 惡童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도스토에프스키의 적자라고 선언한 한원삼, 문학의 정도를 내 디디었던 김광규, 황야의 무법자란 별명의 노창수, 계속 럭비를 했던 계희득, 공상적 과학도였던 이세중 그리고 당시의 도심지대에서 판을 치던 무수한 少年 英雄들이 그의 주변에서 水湖誌를 엮었던 것이다.

이런 악동들과 무전 여행식으로 당시로서는 삼엄하기 짝이 없는 前方인 설악산등반을 뻐근하게 하고 돌아온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설악산 얘기>이며 이 우렁찬 詩는 조병화 선생님에 의하여 <제1회 경희 문학상>수상 작품이 되었다.  . . .

 

진교준은 詩라는 것을 가지고 자신을 규정하기엔 너무도 奔流되어 나오는 것이 많았다고 생각 된다.

지금 문단 인구가 된 김승옥, 이청준, 진교준, 한원삼 그리고 내가 우리집에 모여 문학서클을 만들던 일이 기억 난다 . . .

지금도 그렇듯이 그때에도 그는 詩를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詩를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 했을지언정 자기가 詩쪽으로 다가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이 진교준에 대한 찬사도 되고 비난도 된다.

 

그러나 발자끄가 <진정한 재능이란 언제나 착하고 순수하고 개방적이어서 도도한 데가 조금도 없다>라고 말한 대로 진교준의 시는 그리고 시에 대한 태도와 執心은 언제나 착하고 순수하고 개방적이어서 도도한 데가 조금도 없었다 ”  

4.19때에는 마포 형무소에 일주일간 붙잡혀 들어가 두들겨 맞고 나오기도 했다는 대학생(외대 불문과) 진 교준은 강의를 듣는 쪽이 아니라 사회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過客이였다.

 

그는 땅딸막한 어깨를 재면서 걷는 버릇이 있어서 중학생 일 때에는 이미 똥지게라는 별명을 얻었고 누구든 그 별명을 부르면 혼껍을 만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똥지게를 진 사람처럼 흔들거리며 변두리를 얼씬 거렸다고 한다.

 

괴팍한 연애를 했고, 장 쥬네를 동경했고 싸닌이라 자처했다.

문학을 써서 말한다면 진교준은 이때 <관념의 궤변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 . . .모두들 자기네의 인생을 요란하게 윤색하고 싶어하는 때가 되어 친구들이 그의 주변에서 떠나 가고 있음에도 진교준은 19세기 러시아 소설의 주인공처럼 里文洞 하숙집에서 엎드려 지냈다.

 

그 후 집 장사를 시작해서 <노가다>판에 어울려 들었고 술이 취하면 기행을 벌리기도 했다.

또 영업용 택시를 월부로 사서 직접 끌고 다녔지만 결국 운수업자에게 농락당하는 바 되고 말았다.

 

진교준은 지금 어느 회사에서 말단 직원 노릇을 하고 있다. 일찍부터 그는 <관념의 궤변시대>, <행동의 궤변시대>을 거쳐 지금 <생활의 궤변시대>을 맞이하고 있는데 그러한 진교준의 괘변시대는 우리의 궤변시절과 同代의 것이므로 애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 [1972년 가을 박태순]

  

 

▲ 꿈을 꾸는 듯 멀리 동해가 보이는 설, 설악, 설악산이 좋더라 ⓒ 2008 한국의산천  

 

내가 1974년에 고국을 떠나 L.A.에 와 살던 중 남가주 산악회를 창설하게 되었다.

내노라 하던 Climber들이 여기 저기서 모인 클럽이었는데, 십 수년 전 어느날, 산악회 가족 해변 Camping이 있었다. Camp Fire 주변에 모여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데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노래대신 옛날 Mountain Villa(서울고 산악반OB)나 경희대 산악부시절에 곧잘 읊던 '설악산 얘기'를 읊었는데 모두들 이 詩를 다 잘 알고 있어 적잖이 놀란 적이 있다.

이 詩가 이미 한국 산악인들 사이에서 널리 애송하는 山岳詩가 되 버린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과 입으로 전파된 이詩의 진원지가 바로 '나', '우리'라는 점이 놀랍고 자랑스럽지만 정작 진교준형이 베일에 쌓인 것 같아 그분을 찾아 나서야겠다고 마음 먹게 되었다.

그리고 보니 옛날 진교준형이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면서 학교 문예신문반이 慶熙誌(서울고문예지)에 졸업생 몇 명에게 배포한 설문 내용이 생각나는 게 아닌가  

 

질문 1. (졸업 후) 30년 후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리라 예측하십니까 ?
답변 1. 30년 후라 ? 내가 이미 자살해 버린 지 30년이 지난 다음 날인지도 모른다. 물론 농담이겠지만. . .

 

질문 2. 6년 동안 학교생활 중 잊을 수 없던 일은 ?


답변 2. 고등학교 2학년 때, 추석이 지난 가을방학, 동해바다 속초에서의 하룻밤이었다. 우리는 바다 깨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사색>을 피우고들 있었다. 나는 그때 감기에 걸렸었는데 창문을 활짝 열고 가슴을 헤치고 <사색>을 자꾸자꾸 피웠다. 그랬더니 이튿날부터 감기가 깨끗이 나았다. 요새도 가끔 <사색>을 피우는 건 그날의 은혜를 생각해서 라고
 

 

질문 3. 귀하가 소유하고 싶은 것 두 가지만 든다면 ?
답변 3. 파도와 바다 깨지는 소리 같은 것들
 

 

질문 4. 20년간 얻으신 당신의 병아리 인생관은 ?
답변 4. 산다는 것은 혹시 허영을 위한 허영이나 아닐는지. 조용한 광인은 신사복을 입고서 속으로 웃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본다
 이렇게 답변 한 것으로 기억나는데 고등학생 때 벌써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더욱 한번 만나고 싶어졌다.  

 

1995년 여름, 수소문하여 그와 연락이 되었다.
수유리 4.19탑에서 만났는데 형의 댁이 쌍문동이고 마침 수유리 山에 있는 나의 부친 묘소성묘후 시간이 맞아 그렇게 하였다. 그런데 자기가 다니는 쌍문동의 운수회사 배차시간이 곧 있다며 근처 찻집으로 나와 내 식구를 잠시 맞아 주었다.

그분은 말이 없었다. 주로 내가 말을 많이 하였다.

요란하게 자신을 윤색하기에 바쁜 세대 속의 군상은 분명 아니였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 오는 것 같아 더 많은 얘기를 내가 해도 그는 조용히 듣기만 하였다. 그러더니, 아마도 자기 책상에 하나 밖에 없을 듯하게 생긴 <설악산 얘기>詩集에 내 이름을 써주며 건넨다. 그리곤 표표히 일어나 수유리 네거리 방향으로 걸어간다.

 

Bus 기사로 배차시간을 받기 위해 쌍문동 Bus 종점으로 훌훌 걸어가는 그는 진작 <네발로 뛸 쉬도 있는 자유>를 갈구하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당당함으로, 거침없는 자유함으로,. . .


 
내 인생의 잔뼈가 굵던 산악반 시절부터, 아름답던 청년의 때를 지나오면서, 나는 <설악산 얘기>로 인하여 얼마나 潤澤하게 젊음을 구가하며 지내 왔는가 ! 수 없이 암송하던 <설악산 얘기>에 비하여 그 와 더 <얘기>하지 못한, 아쉬운 만남이었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시인은 산과 하늘이 融合하는 틈에 서기만 하면 가을 하늘처럼 무한대처럼 마구 부풀어 질 수도 있는 자유함에 대하여 가르치고 갔다.

 

진교준 그는 <설악산 얘기>를 남기고 갔다 사실, 세월이 흘러도 그의 <설악산 얘기>는 石化되지 않고, 潤色되지 않으며 아직도 내 속에서 우렁차게 살아 숨쉬고 있지 않는가 그의 詩集後記에 이렇게 써 있다


“나는 힘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을 좋아하고, 다소의 희생 정신이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 무상으로 부채질을 해주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
그는 <착하고, 순수하고, 개방적이어서 도도한 데가 조금도 없는> 그런 분이었다.

 

 

▲ 自由를 꼭 깨물고 차라리 잠 들어 버리고 싶은가? ⓒ 2008 한국의산천  

 

위의 '설악산 얘기'의 原文과 그의 또 하나의 詩 '가을과 고독'을 싣는다

 

가을과 고독   해변의 저자를 거두고
가을이 오는데
나도 좀 더 조용해야겠다
나의 우울은
日記를 쓰지 않으면서 始作되었지
生活은
虛榮과 정밀(靜謐)
가을은 詩人이
그토록 아끼던 허영을
都市에 남기고
홀로
旅行을 떠나는 季節
밤을 새워
귀뚜라미가 울면서 부터
제 姿勢를 찾은 하늘에
코스모스가 피고
내게도 孤獨이 오면
나는 멀리 思索을 피우러 간다.
 

 

▲ 멀리 토왕성의 하얀 빙벽이 보인다 ⓒ 2008 한국의산천  

 

▲ 웅장한 협곡 토왕골을 지나며.ⓒ 2008 한국의산천  

 

▲ 꿈같은 산행 ⓒ 2008 한국의산천  

 

▲ 약 360m의 토왕성폭포 ⓒ 2008 한국의산천  

 

 

▲ 이들은 무엇을 찾아 힘들게 오르는가?ⓒ 2008 한국의산천  

 

▲ 가자 설악산 이야기를 들으러...ⓒ 2008 한국의산천  

 

 

▲ 눈이 많이 쌓여있어 설동을 파고 있다.ⓒ 2008 한국의산천  

 

 

▲ ⓒ 2008 한국의산천  

 

 

▲ ⓒ 2008 한국의산천  

 

▲ 설악산 토왕폭을 바라보는 산악인들 ⓒ 2008 한국의산천  

 

 

▲ 설악산 이야기를 듣는가? ⓒ 2008 한국의산천  

 

▲ 일명 선광(禪光)폭포라고도 불리는 토왕성폭포는 명주천을 펼친듯 장엄하게 얼어있다  ⓒ 2008 한국의산천  

 

▲ 하늘을 떠 받치는 기둥처럼 서있는 토왕성 폭포 ⓒ 2008 한국의산천   

 

참고

설악산 토왕성 폭포 전경사진 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13784959

하얀 빙벽 위에 울던 표범. 송준호 傳 >>> https://koreasan.tistory.com/13784103

산악인 애송 詩  설악산 얘기 - 진교준 - >>> https://koreasan.tistory.com/13784952

북한산 산악인 추모비 >>> https://koreasan.tistory.com/15608050

 

ⓒ 2008 한국의산천 

 

운악산 홍폭에서 먼저간 후배를 찾아>>> https://koreasan.tistory.com/13832495

 

운악산 그리고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최지호(지훈), 곽명자 추모등반. 운악산 무지치(무지개) 폭포 2008. 2월 8일(음력 1월2일) 오늘 찾은 이곳은 운악산 현등사 반대편에 자리한 운주사 코스입니다. [촬영. 2008. 2. 8일(음력 1월 2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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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하다.  - 노자 도덕경에서

 

대한민국 구석구석 즐겁고 행복하게

한국의산천 일상탈출 더 보기 >>> https://koreasan.tistory.com/

 

한국의산천

거친호흡 몰아쉬며 바람저편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자유 발의자유 정신의자유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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