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내일 비가 오려나?

by 한국의산천 2007. 10. 27.

미륵리,덕주사 답사 준비 

자료 정리 2007. 10. 27 토요일.[ 한국의산천]

 

언제나처럼 산행이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바로 다음 산행지나 여행지를 준비하게 된다. 병이다 참으로 중병이다.

 

딸과의 당일 유적지 답사를 계획했다.

오래 전 몸담았던 산악회 후배들의 해외 원정 보고도 있는 날이지만 ...

늘 학교 생활과 시험 준비에 바쁜 딸아이가 시험이 끝나고 모처럼 가을 유적지 답사를 떠나기로 했다. 

며칠 전 부터 계획된 일이었기에.

아들은 군대도 갔다오고 사내아이라 그런지 같이 다니려고 하지 않는다. 딸 역시 마찬가지다.

 

딸의 부탁은 언제고 무엇이던지 들어주고 싶다. 언젠가 부모곁을 떠난다는 느낌이 들기에.... 

 

답사 예정코스 :  충주 미륵리 미륵사지~ 하늘재 ~ 덕주산성 ~덕주사~ 덕주사 마애불 ~ 청풍호 ~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비~귀가

 

기상대 내일(10월 28일) 기상안내표

 

딸아이와의 짧은 여행계획이 기쁘기만하고 마음이 설레인다. 

산에는 오르기 싫다는데, 숙녀 다리에 알이 배기면 안된다나? 

그래 산에 안올라도 족히 6시간 이상은 걸을 것이다.

 

순수 답사시간

미륵리~하늘재 왕복 2시간 , 덕주사에서 마애불 왕복 2시간

미륵리, 덕주사 주변 답사,촬영 2시간.

 

 

예습(Study) 하기

그간 충주일대와 월악산을 다녀오며 모은 팜플렛과 책,인터넷을 뒤졌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전설이 어린 유적지를 찾아서 가기전에...

 

미륵리로 가는 길은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를 거쳐 월악산으로 가는 길이다. 국립공원 관리소를 지나 월악산으로 향하다 보면 미륵리와 송계계곡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이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을 택해 조금만 가다보면 곧 미륵리 절터에 닿게 된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한 5분만 걸어가면 절터에 이르게 되는데, 이 한적하면서도 운치있는 길이 멀리 신라시대부터 만들어졌다는 '하늘재'로 오르는 길이다.

미륵리 주차장에서 하늘재 고갯마루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약 1시간.

 

156년에 한강을 차지하려는 신라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고갯길 하늘재 

전 국토가 거의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는 산줄기 사이로 수많은 고갯길이 뚫려있다. 미시령, 한계령, 대관령, 추풍령, 조령으로 불리는 문경새재등등 ...고개가 수없이 많다

이렇듯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개는 모두 한반도의 근간을 이루는 백두대간의 안부(산봉우리 사이에 말안장처럼 낮은 부분이나 고개)를 이루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백두대간의 수많은 고개들 중에서 제일 먼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고개는 어디일까 바로 충북 충주시 미륵리와 경북 문경읍 문경 관음리를 잇는 하늘재(525m)다.

계립령(鷄立嶺), 마목현(麻木峴), 지릅재, 한훤령(寒暄嶺) 한티,천티등으로도 불렸던 하늘재를 처음 연 나라는 156년에 한강을 차지하려는 신라에 의해 만들어진 길이다. (하늘재를 넘으면 바로 충주 남한강에 닿는다)
삼국사기에 ‘아달라 이사금 3년(156)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적고 있다. 
 

죽령은 이보다 2년 뒤에 개척되었으니 기록상으로 볼 때 하늘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두대간 고갯길인 셈이다.

낙동정맥 동쪽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였던 신라는 험준한 백두대간 등줄기에 하늘재를 개척함으로써 비로소 한강 이북으로 향하는 숨통을 열 수 있었고, 이를 삼국통일의 디딤돌로 삼았다.

하늘재는 삼국의 북진과 남진의 통로였기에 각국은 서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예전에는 교통로중에서 물길이 가장 빠른 이동수단이었다.
죽령이나 계립령 모두 경상도 땅에서 넘어서면 곧 남한강 물길을 만날 수 있게 되니 삼국시대의 영토 다툼에 유리한 고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사실이다.

 

고구려 온달장군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다.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상주를 칠 때도 이 고개를 넘었고, 망국의 한을 품고 길을 떠난 마의태자도 이 고갯마루에서 쉬어갔다. 그리고 1362년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공민왕의 피난행렬도 이곳을 넘어 봉화 청량산으로 갔다.

 

신라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안고 금강산으로 갈때 넘었다는 고개다. 조선 태종때 한양~영남을 잇는 지름길인 문경새재가 뚫리면서 하늘재는 '옛길'이 됐다. 그러나 새재를 지키는 관리들의 횡포가 잦아, 서민들의 발길은 하늘재로 꾸준히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인 1414년(태종 14) 새재가 개척되면서 하늘재는 점점 잊혀진 고갯길이 되어갔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쳐들어오자 조정은 신립 장군께 이곳을 부탁을 했지만 신립장군은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겠다고 하다가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왜군들에게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난해 가을 문경 수리봉 릿지를 마치고 문경 IC로 나오던 중에 북쪽에는 왼쪽에는 조령산과 월항삼봉이 그리고 잘록한 부분에 실금처럼 이어지는 길 끝에 짤록한 하늘재가 보인다.

하늘에 닿을 듯이 높다 해서 하늘재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525m에 불과한 평범한 고갯길 하늘재 그러나 이 작은 고개에 굽이굽이 얽히고 깃든 사연은 고개보다 훨씬 높고 길다.


천년전 정취 그윽한 미륵리 옛 절터

하늘재와 송계계곡 주변에는 이밖에도 유적지 등 볼거리가 많다. 덕주산성과 보물 476호인 덕주사의 마애불, 보물 94호 사자빈신사지석탑을 비롯해 김세균 판서 고가, 미륵리 도요지 등이 있다. 송계계곡의 지류인 만수계곡도 경관이 좋은 골짜기다. 이곳에도 자연학습관찰로가 마련돼 있다.

 

 

 

중원문화권 이루는 중요한 문화유적. '하늘재'의 유적들 
 

중원 미륵사지
미륵사지 옆으로 우리나라의 최초로 만든 고개 하늘재(520m)가 나 있는 길,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길을 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남진을 위해 다녔던 길, 고려의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경주로 갈때도 이용했던 길, 조선 태종때 문경새재 길이 새로 나면서 부터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지만 문경에서 충주로 넘어 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이재를 넘었다. 

 

우리가 흔히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절,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벌였던 싸움은 궁극적으로 한강유역을 차지하고자 하는 싸움이었다. 국토의 중앙을 흐르는 한강 주변은 국토 전체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서해의 뱃길을 통해 당시의 선진국이었던 당나라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길목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은 나라 발전의 가장 중요한 땅을 손에 넣는 일이자 삼국간의 싸움에서도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 한강 유역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한강 줄기를 끼고 있는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 일원이다. 이 지역은 다른 말로 ‘중원中原’이라고 불렸다. 문자 그대로 국토의 중심부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 형성된 문화권, 이른바 중원문화권은 고대 삼국문화의 접점을 이루고 있는 문화유적지라는 점에서 둘러볼곳이 산재한 곳으로 손꼽힌다.

 

 ▲ 충주 탑평리 7층석탑 (피사체 옆에 사람을 넣으면 규모를 짐작하기 쉽고 생동감이 있다) ⓒ 2007 한국의산천 

 

충주 탑평리 7층석탑 (국보 제6호)

소재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
시대 : 통일신라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불리우며, 흙으로 높게 쌓은 단 위에 2층의 기단(基壇)과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보통 중원문화권을 대표하는 유적으로는 단연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중원고구려비'와 '탑평리 7층석탑'이 꼽힌다. 앞의 것은 남한에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고구려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뒤엣것은 백제의 옛 땅에 남아있는 웅장한 규모의 신라탑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들 유적 못지 않게 중요한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 또 있다. 국립공원 월악산과 특급휴양지 수안보를 끼고 있는 상모면 미륵리 일대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유적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유적 중에서 미륵리 절터와 덕주사 마애불은 신라의 마지막 왕족인 마의태자와 그의 동생 덕주공주의 애달픈 전설이 서려있는 흔적으로 중원문화권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 지난 가을 문경 성주봉에서 바라 본 문경시내와 그 뒤로 솟은 황학산(854m). 오른쪽 이화령으로 벋는 백두대간능선ⓒ 2007 한국의산천 

 

월악산과 송계계곡

악산 국립공원은 1984년 12월 31일에 17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로 충북 제천시, 충주시, 단양군과 경북 문경시 등 4개 시,군에 걸쳐 있으며 북으로 충주호반과 청풍호반이 월악산을 휘감고, 동으로 단양8경과 소백산국립공원, 남으로 문경새재와 속리산 국립공원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월악산은 신라의 마지막 태자 김일(金鎰)과 그의 누이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고 은거한 산이다. 달이 뜨면 주봉인 영봉(靈峯)에 걸린 달 모양이 아름답다고 '월악'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비결잡록에는 "충주월악산하송계 불입병화보신산수"라고 하여 병화를 피해 숨어 살만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런 연유로 백제나 후백제가 이곳에 궁궐을 지으려 했는데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도가 될 뻔했다가 "와락" 미끄러졌다고 해서 한때 와락산으로 불리다가 "와락"이 "월악"으로 변했다는 재미있는 유래도 있다.


마의태자의 슬픈 전설 어린 월악산 자락의 유적들

미륵리 절터
이곳은 석조와 목구조를 결합한 석굴사원으로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라고도 한다.
현재 석굴 상부의 목구조는 남아있지 않으나 하부 석굴 구조물 가운데는 주존불인 미륵대불(보물 제96호)이 서있다.
그 앞쪽엔 석등을 비롯하여 5층석탑(보물 제95호), 돌거북,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 많은 석조물이 남아있다.

큰 바위를 다듬어 만든 돌거북은 머리 부분이 사실적이다. 등에 얹혀있던 비석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려 그냥 지나칠 수도 있건만, 절묘한 석공의 솜씨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충주 미륵리 절터와 덕주사 마애불

마의태자 누이인 덕주공주 상이라는 덕주사 마애불.

덕주골 입구 주차장에서 마애불까지 도보로 왕복 2시간 정도 걸린다.


중원 미륵리사지(中原彌勒里寺址)
충청북도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 있는 절터.

지정번호 사적 제317호
지정연도 1987년 7월 18일
소재지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58
시대 고려시대

 

1987년 7월 18일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었으며, 충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면적은 80,454㎡이며, 하늘재(寒喧嶺),·계립재(鷄立嶺), 새재(鳥嶺)에 둘러싸인 험준한 산골짜기 북쪽 기슭에 북향하여 있다. 창건 연대나 내력은 물론 사원의 정확한 명칭도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으로 쌓은 석굴식(石窟式) 법당의 중앙에 대좌를 두어 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측면과 후면 석벽 중앙은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을 부조하여 장식하였다. 상부에는 목조건물을 지어 천장을 만들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이는 토함산 석굴암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유일한 석조·목조 구조의 반축조(半築造) 석굴사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절터 안에는 오층석탑(보물 95), 석불입상(보물 96), 삼층석탑, 석등, 귀부(龜趺),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의 석조 유물이 있다. 이들 유물의 조형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쪽으로 지형이 낮아짐에 따라 계단식으로 대지를 조성하여 사원을 형성하고 있다.

1977년부터 연차적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사원의 옛 모습이 밝혀지고 있다. ‘미륵당초(彌勒堂草)’라 새겨진 기와, 연꽃무늬 막새기와, 금동제 귀면(鬼面) 등이 출토되었다.


문경에서 하늘재로 오르는 길목의 동네 지명은 관음리이고 하늘재를 넘어서면 충주시 수안보 미륵리이다. 두 사찰은 오래전 폐사가 되었고 절이름을 딴 지명만이 현존하고 있는것이다.

 

미륵리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에 있는 리(里)이다. 전설에 의하면 마의태자가 이곳을 지나다가 주변 경관이 장엄하고 수려하여 미륵불상을 조각하고 큰 절을 세웠다 한다. 마을 중심부에 미륵불상이 있어서 미륵리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중심부를 말무덤이라 부르는데, 옛날 온달장군이 적병과 싸우다가 그의 말이 창에 맞아 죽어 그 말을 이곳에 묻었다 한다. 지금도 미륵리 분교 앞에 그 말을 묻었다는 큰 무덤이 있다.

중원문화권, 오늘날의 충주 일대에 형성된 이 문화유적벨트는 국토의 중심부에 서린 역사적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유적지다. 그 중에서도 국립공원 월악산과 수안보를 끼고 있는 미륵리 일대는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소중한 문화유적들이 흩어져 있는 지역이다. 미륵리 절터와 덕주사 마애불이 그 곳에 있다.

 

마의태자의 슬픈 전설 서린 미륵리 절터

마의태자의 속명은 김일이다. 그의 아버지 경순왕도 외자 이름으로 김부이다. 경순왕 김부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신라천년의 사직을 바치자 아들 마의태자 김일은 이에 반발하며 경주를 떠난다. 이때 같이 떠난 군속들의 행렬이 30여리를 이어졌다고 한다.

민초들은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 남매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하늘재를 넘다가 충주 미륵대원지의 대불과 덕주사 마애불을 세웠다고 믿었다.

그러고는 대불은 마의태자 상이요, 마애불은 덕주공주 상이라 여겼다. 대불의 시선은 북향이고, 마애불은 남향인 까닭도 두 남매가 마주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완형의 사찰이 아닌, 절터에서 느끼는 색다른 매력 중의 하나는 쓰러지면 쓰러진 대로 허물어지면 허물어진 그대로 고풍스런 옛 자태를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미륵사 절터가 바로 그런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유적지 중의 하나이다.

절의 입구에 서서 절터를 바라보면 맨 끝에 보이는 우람한 석조 미륵불을 중심으로 석탑, 석등, 돌거북, 건물의 주춧돌 등 여러 흔적들이 검붉은 세월의 이끼를 둘러쓴 채 초연하게 서 있다.

 

전설에 의하면 미륵사는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하늘재를 거쳐 금강산으로 향하다가 이곳에 머물며 지은 절이라고 하나 사찰의 규모로 미루어 힘없는 망국의 태자가 잠깐 새에 지었다고는 믿기 어렵다. 오히려 절터의 만만치 않은 규모와 인근에서 발견된 큰 규모의 병영터 등과 어울려 생각할 때, 삼국시대 이래 이 지역은 국가적 차원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진 요충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천 덕주산성 (堤川德周山城)
소재지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1-1 외
지정번호 충북기념물 제35호

1983년 3월 30일 충청북도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천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월악산국립공원 남쪽에 있으며 면적 9,800㎡의 석성이다. 성의 유구는 윗 덕주사를 에워싼 내성(內城), 그 바깥의 하성(下城)과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 동문, 북문 등 아치형의 성문 3개소만 남아 있다.

 

덕주공주가 세웠다는 덕주사의 마애불
미륵사지를 나와 앞서 갈라졌던 삼거리에서 왼편 송계계곡 방향으로 향하면 이번에는 마의태자의 동생 덕주공주가 세웠다는 거대한 덕주사 마애불과 중원지역을 방어했던 덕주산성을 만날 수 있다.

월악산 남쪽 기슭 덕주골에 자리잡은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 되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본래 이름은 월악사였으나 마의태자의 동생 덕주공주가 이곳에 머물면서 덕주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유서깊은 전설이 서린 고찰인데 비해 남아있는 옛 유물은 거의 없다. 덕주공주의 전설이 서린 마애불은 산 아래 덕주사에서 빠른 걸음으로 한 20-30분 쯤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월악은 험한 산이지만 마애불까지 가는 길은 험하지도 않고 제법 운치도 있어 가볍게 산책하는 마음으로 왕복 2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다. 

 

덕주사 마애불은 산 중턱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의 평평한 벽면에 음각과 양각을 섞어가며 새겨넣은 석불이다. 얼굴 부분은 비교적 뚜렷한 양각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선각에 가까울 정도로 얇게 새겼다. 부처의 이름과 역할을 상징하는 수인(手印)도 형체를 알기 어려울 만큼 형식적이고, 복잡한 선으로 새겨 놓은 옷주름 역시 또렷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13m나 되는 거대한 규모에 비해 거칠고 소박한 솜씨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지방양식의 불상이다. 얼굴 부위의 벽면에는 무엇을 박았던듯한 홈이 서너개씩 있어 원래는 불상의 머리 위로 지붕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법상 그리 세련되고 뛰어난 불상은 아니지만 서민적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고려시대 지방 마애불의 형식과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이 밖에도 미륵리절터에서 덕주사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사적 317호로 지정된 ‘미륵대원터’ 보물 제94호로 지정된 독특한 모양의 고려탑 사자빈신사석탑, 우람한 규모의 덕주산성 등 중원문화권을 구성하는 가치있는 유적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덕주사
마의태자 누이 덕주공주의 비원 제천 월악산 덕주사

덕주사라는 이름이 그 옛날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로부터 유래했다는 전설이 있다.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9년(서기586)에 창건되었다. 당시에는 월형산 월악사였으나 신라 경순왕이 천년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손국한뒤 경순왕의 제일녀인 덕주공주가 월악산 경내에 있는 높이 13m의 거암에 마애미륵불(보물406호)을 조성하고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일생을 마친 후 산 이름을 월악산으로, 절이름을 덕주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덕주사는 이곳에서 동편계곡으로 1.5km 올라간 산중턱에 자리했었으며, 마애불보호전실, 우공탑, 삼층석탑 요사 등이 있었던 중원 제일의 사찰이었느나 1951년 12월 전화(戰禍)로 폐사되어 지금은 마애불상, 우공탑, 삼층석탑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옛날의 규모를 알려주는 석축만이 제행무상함을 전해주고 있다.

 

예전엔 하덕주사라 불리우는 이곳은 절골이라 했고, 상덕주사인 마애불사지는 윗절이라 했다고 한다. 이곳에 언제부터 사찰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절 입구에 있는 남근석을 보면 이곳이 남아선호 신앙이 깃들었던 곳이 었음을 알 수 있으며 덕주사가 원시신앙으로부터 시작된 곳으로, 그 옛날 사찰이 창건되었던 곳임을 서쪽 언덕 산 밑에 네기의 부도와 장대석 등이 증명해 준다. 신앙형태로 볼때 특이하게 유서깊은 이곳도 6.25때 불타 없어진 뒤 1963년 지암화상이 5칸 인범당을 중창하였으며, 1985년 성주화상이 현재의 법당을 다시 중창하고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고려시대에 조성된 약사불을 덕주사로 이운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구전으로 587년(진평왕 9)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그것에 따르면 신라의 마지막 공주인 덕주공주(德周公主)가 마의태자(麻衣太子) 일행과 이곳에 들렀을 때 이 절을 세워 절이름을 덕주사라 하고, 골짜기 이름을 덕주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때 지은 사찰은 보물 제406호인 덕주사마애불 앞에 세워졌었는데, 6 ·25전쟁 때 훼손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사지에서 1.7km쯤 떨어진 곳에 1970년에 중창된 것이다.

 

당우(堂宇)는 법당과 요사채 뿐이지만 어느 때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우탑(牛塔) 1기(基)와 조선시대의 부도(浮屠) 4기가 있는데, 이 우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얽혀 있다. 덕주사에 승려가 많아져 절이 좁아서 새로이 부속건물을 지으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건장한 황소 한 마리가 나타나 목재를 어디론가 실어 날랐다. 뒤따라가 보니 지금 마애불이 있는 바위 아래였으므로 거기에 절을 짓고, 목재를 다 실어나른 황소가 죽은 자리에는 우탑을 세웠다고 한다.


가는 길
자가운전

1.영동고속도로 ~ 이천JCT ~ 중부내륙고속도로 ~ 수안보 나들목 ~ 연풍 T/G ~ 문경방향 우회전 ~  충주,수안보 방향 우회전 ~ 수안보 좌회전 ~ 수안보온천, 월악산 국립공원 우회전 ~ 지릅재 지나 삼거리 직진 ~ 미륵리 주차장
2. 영동고속도로 이천나들목을 나와 3번국도 타고 장호원~38번국도~하영에서 19번국도~충주~3번국도~수안보~지릅재~월악산 미륵리사지로 간다.
3. 중앙고속도로의 경우 남제천나들목을 나와597번지방도~청풍~수산에서 36번국도 우회전~송계계곡 597번지방도 좌회전해 송계계곡 따라 미륵리로 간다.

  

 

경순왕

천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왕위에 오른 지 8년 만에 고려에 나라를 넘겨주고 왕위에서 물러남으로써 신라는 56대 922년 만에 막을 내렸다.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써 성은 김, 이름은 부이다. 신라 문성왕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이찬 효종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계아태후이다.927년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재위 당시 각처에서 군웅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고, 후백제, 고려, 통일 신라로 분열되어 있었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각 지방 호족들의 할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였다.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군신회의를 소집,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에 귀부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금강산(일설에는 설악산)으로 들어가고 막내 아들 범공은 화엄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귀부후 경순왕은 태조로부터 궁궐 동쪽의 좋은 집 유화궁을 하사받았으며,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에 봉해졌으며,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43년 후인 고려 경종 3년(978년) 세상을 떠났다.능은 경기 연천군 장남면에 있다.

(우리 역사에는 낙랑공주가 둘있었으니 한 사람은 호동왕자를 지극히 사랑했기에 목숨까지 바친 비련의 주인공 낙랑공주요, 또 한사람은 고려태조 왕건의 맏딸로서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에게 시집간 낙랑공주이다.
후자의 낙랑공주는 왕건의 셋째 왕비인 유씨 부인의 소생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가 그에게 시집보낸 여인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신명순성태후 유씨(劉氏) 사이에서 태어난 낙랑공주(樂浪公主)는 태조 왕건의 맏딸이자, 3대 정종, 4대 광종의 친누이가 된다. 일명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이라고도 하며, 결혼 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로 불렸다. 935년 11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金傅)가 백관을 이끌고 고려에 자진하여 항복하자, 왕건은 자신의 아홉 딸 중 맏딸인 낙랑공주와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 소생의 공주를 김부와 혼인시키고, 자신은 신라왕실에서 신성태후 김씨를 맞아들였다.

 

경순왕 (참고 디지털 한국학 三國史記 卷 第十二)
경순왕 8년(934) 가을 9월에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났다. 운주(運州) 땅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八年 秋九月 老人星見 運州界三十餘郡縣 降於太祖

 

경순왕 9년(935) 겨울 10월에 왕은 사방의 토지가 모두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는 외롭게 되어 스스로 힘으로 안정시킬 수 없다고 여겨,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도모하여 땅을 들어 태조에게 항복하려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하고 어떤 이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왕자가 말하였다.

“나라가 존속하고 망함에는 반드시 하늘의 명(命)이 있습니다. 단지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과 더불어 합심하여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아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 한 이후에 그만둘 일이지, 어찌 1천 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외롭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형세를 보전할 수가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것도 없으니 죄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간(肝)과 뇌(腦)를 땅에 바르도록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서신을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왕자는 울면서 왕에게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11월에 태조가 왕의 글을 받고 대상(大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왕은 백관을 이끌고 서울에서 출발하여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아름다운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들이 30여 리에 이어져 뻗쳐 길을 꽉 메웠으며 구경하는 사람들은 담을 두른 듯하였다. 태조가 교외에 나가 맞이하여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가장 좋은 집 한 채를 내려 주었으며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월에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으로 봉하고 지위를 태자(太子)보다 위에 있게 했으며, 봉록(俸祿) 1천 섬을 주었다. 시종(侍從)한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등용해 썼고 신라(新羅)를 경주(慶州)로 고쳐 공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처음에 신라가 항복하자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두터운 예로써 대우하고 사람을 시켜 고하였다.

“지금 왕께서 나라를 나에게 주었으니 이는 큰 것을 주신 것입니다. 바라건대 (왕의) 종실과 혼인을 맺어 장인과 사위의 우호를 영원히 누렸으면 합니다.”

경순왕이 대답하였다.

“나의 큰아버지 잡간(干) 억렴(億廉)은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인데, 그 딸자식은 덕과 용모 모두 뛰어났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집안 살림을 갖출 수가 없을 것입니다.”

태조가 마침내 그를 아내로 삼아 아들을 낳으니 이가 현종(顯宗)의 아버지로, (후에) 안종(安宗)으로 추봉되었다. 경종(景宗) 헌화대왕(獻和大王) 때 이르러 정승공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고 정승공을 상보령(尙父令)으로 봉하였다. 공은 송(宋)나라 흥국(興國) 4년 무인에 이르러 죽었는데, 시호를 경순(敬順)<또는 효애(孝哀)라고도 하였다.>이라 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시조로부터 이 때까지를 삼대(三代)로 나누었는데, 처음부터 진덕왕(眞德王)까지 28명의 왕을 상대(上代)라 하고 무열왕(武烈王)부터 혜공왕(惠恭王)까지 8명의 왕을 중대(中代)라 하였으며 선덕왕(宣德王)부터 경순왕(敬順王)까지 20명의 왕을 하대(下代)라 일컬었다. (三國史記 卷 第十二) 

 

신라왕 김부(경순왕)는 민심이 신라를 떠나서 고려로 쏠리고 있음을 알고, 민심을 따르고 민심을 따른 다는 것이 곧 하늘을 공경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고려조정이 <김부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 마음에 순민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그의 시호를 경순이라고 정했다.

 

 

 

경순왕릉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1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978, 재위 927∼935)의 무덤.
경순왕은 신라 46대 문성왕의 후손으로 이름은 김부(金傅)이며,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살해된 뒤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지 8년 만에 고려에 나라를 넘겨주고 왕위에서 물러남으로써 신라는 56대 922년 만에 막을 내렸다.

경순왕릉은 신라 왕릉 중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왕릉으로, 봉분 앞에 비석을 세우고 봉분에 호석을 둘러 십이지신상을 새기고, 주위에 난간석을 두르며 봉분의 삼면에 담장을 쌓았다. 능 앞을 고려 시대의 특징인 2단의 석단으로 정리하였으며, 봉분 앞에는 장명등과 망주석이 있고 문인석, 무인석, 사자석 등을 세우는 형식을 취하였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43년 후인 고려 경종 3년(978년) 세상을 떠났다.

경순왕릉은 조선 건국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실전되었던 것을1748년(영조 24년) 다시 찾게 되었는데 신라 왕릉 중 경주 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다. 왕릉의 구성을 살펴보면 원형의 봉분 하단에 둘레돌을 돌렸고 봉분 앞에 상석, 표석, 장명등과 석양 1쌍, 망주석 2기를 배치하였는데 석물들 대부분은 조선후기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지정번호 : 사적 제244호 [두산대백과 사전 참고]

'MTB등산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0) 2007.10.29
충주 답사중 딸사진  (0) 2007.10.28
군포 덕고개 당숲 가을풍경  (0) 2007.10.25
동계등산장비  (0) 2007.10.23
물왕리 저수지 풍경  (0) 2007.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