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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홍천강 드라이브

by 한국의산천 2007. 8. 12.

홍천강 드라이브  [2007년 8월 11~12일  한국의산천]

 

토요일 퇴근 시간 집에 전화를 했다.

홍천강 드라이브 가자!

준비물

쌀 조금, 라면, 김치, 두터운 삼겹살 한근. 소주한병. 

 

길을 떠난다.

왜 떠나는 것일까? 

복잡한 길을 따라 어디론가 떠난다.  

일상 탈출.

다람쥐 챗바퀴 돌듯 판에 박힌 일상 생활에서 탈출하여 잠시 자연을 맛보기 위해 떠난다. 

 

 ▲ 안개비가 내리는 홍천강변 ⓒ 2007 한국의산천

밤 9시 인천 출발 밤 11시 30분 홍천강 모곡 유원지 도착    

 

 ▲ 그릴에 삼겹살 굽기와 가볍게 한잔하기 ⓒ 2007 한국의산천 

모곡유원지는 자연발생 유원지로서 입장료 2,000원을 내면 쓰레기 봉투를 준다. 그 봉투에 쓰레기를 모아두면 아침에 모두 수거해 간다.

 

 ▲ 그릴에 삼겹살 굽기와 가볍게 한잔하기 ⓒ 2007 한국의산천

 

 ▲ 쑥스럽군요 ⓒ 2007 한국의산천

 

 ▲ 그릴에 삼겹살을 구우니 눌러붙지 않으며 고소하게 잘 구워진다. ⓒ 2007 한국의산천

 

 ▲ 밤은 깊어가고. ⓒ 2007 한국의산천

 

 

 ▲ 흐린날의 아침이 밝았다 ⓒ 2007 한국의산천

 

 ▲ 사위어 가는 랜턴 불 ⓒ 2007 한국의산천

 

 ▲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자연을 호흡하고자 타프만 치고 번데기처럼 침낭속에 들어가서 잠을 잤다. ⓒ 2007 한국의산천

 

 ▲ 돌 던져서 물수제비 뜨는 아이들 ⓒ 2007 한국의산천

 

 ▲ 돌 던져서 물수제비 뜨는 아이들 ⓒ 2007 한국의산천

 

  ▲ 강변의 아침 ⓒ 2007 한국의산천

 

 ▲ 강변의 아침. 방수시트와 등산용 발포매트리스를 펴고 자니 잠자리가 편했다. ⓒ 2007 한국의산천 

 

 ▲ 강변의 아침 ⓒ 2007 한국의산천 

이른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면 평상시에는 볼 수 없는 색다른 멋진 풍경을 접할 수 있다. 그것을 알기에 늦잠을 잘 수 없다. 

 

 ▲ 강변의 아침 ⓒ 2007 한국의산천 

이른 아침 물안개가 강따라 피어오르며 전체가 띠를 형성하며 하늘로 솟아 오른다.

 

 ▲ 아침 식사 후 집으로 갈 준비 ⓒ 2007 한국의산천

 

 ▲ 낚시하는 사람들 ⓒ 2007 한국의산천

 

 ▲ 모곡의 주변풍경 ⓒ 2007 한국의산천

 

▲ 좌방산 산줄기와 홍천강 ⓒ 2007 한국의산천

 

▲ 개야강변에서 낚시하는 사람. ⓒ 2007 한국의산천

 

▲ 소리산 가는 도중 ⓒ 2007 한국의산천

 

 

 ▲ 모곡 유원지 앞에 위치한 한서 남궁 억 선생 기념관. 기념관 문이 닫겨있어 들어 갈수가 없었다.  ⓒ 2007 한국의산천

 

한서 남궁억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자 언론인인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1863-1939)

 

남궁억 선생은1884년 아무도 영어를 배우려 들지 않았던 시절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하고 어전통역관이 되어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때는 부정부패가 심하였으나 남궁억 선생은 청렴결백하여 사람들이 옥같이 맑고 얼음같이 희다고 말했다. 그는 갑오경장내각에서 토목국장으로재직할 때 좁고 꾸불꾸불한 서울 종로거리와 정동거리를 똑바로 뚫고 시내에 탑동공원을 조성하였다.
남궁억 선생은 대표적인 개화파의 한사람이었으나 정치보다도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갖고 있었으며,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에 강사로 나가 학생들에게 개화사상과애국정신을 가르쳤다. 이어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혁운동에도 참여하게 되는데 남궁억선생으로서는 일종의 외도였다고 할 수 있다.

 

독립협회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궁억 선생은 언론계에 투신하게 된다. 독립신문을편집한 경험을 살려서 황성신문 사장으로 취임한 남궁억 선생은 1902년 일본이 러시아와한반도 분할안을 토의하는 것을 폭로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백일하에 폭로하였다.그 때문에 남궁억 선생은 심한 고문을 받아 병약한 몸이 되었고 황성신문 사장직을사임하였으나 그의 불같은 항일정신은 더욱 더 뜨겁게 달아 올랐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애국계몽운동이 벌어지고 남궁억 선생이 대한협회장을 맡는 등 운동의 핵심에 서게 되었으나 아무도 망국의 운명을 막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1910년 마침내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고 일제는 토지약탈을자행하여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동토나 다름없는 간도땅으로 쫓겨가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궁억 선생은 무엇보다도 자기 분수에 맞게 각자 할 일에 충실하는것만이 살길이라고 믿고 여성교육의 일선에 나섰다. 여성교육이란 당시 하찮은 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남궁억 선생은 알고 있었던것이다. 그는 벌써 50대 나이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무궁화를 통한 애국심의함양과 여권의 신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교단을 떠나야했고 정든 서울을 떠나 낯선 고향 강원도 홍천으로 가야만 했다. 이 낙향의길에는 남궁억의 생애 최후의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1910년부터 배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가정교육>, <신편언문체법> 등 교과서를 지었으며, 1918년 강원 홍천의 보리울(牟谷)에 교회와 학교를 건립하고 무궁화 묘포를 조성하였다.

그는 먼저 모곡리 고향 마을에 교회를 짓고 주일학교를 개선하였다. 새 교사를짓고 국민학교 인가를 받은 것은 그의 나이 60이 되던 해였다. 남궁억 교장은학교 뒤뜰에 무궁화밭을 일구어 7만이나 되는 많은 무궁화 묘목을 길러서 몰래나누어주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 무궁화 노래를 지어 널리 퍼트려 민족정신을일깨웠다. 나라꽃 무궁화처럼 독립운동을 하는데 무난한 상징물은 달리 없었다.남궁억은 무궁화만이 아니라 국어와 국사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그가 직접 쓴 역사책으로 <동사략>이 있고 <조선이야기>라는 동화도 국사책이었으며 국사교육이 더욱 어려워지자 <조선어 보충>이라는 한글책에 국사이야기를 담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궁억 선생의 외로운 민족운동을 일제가 탐지하게 되어 끝을 맺게 되었으니 1933년 무궁화 사건이 그것이었다. 모진 일본경찰의 고문을 받고 병이 든 남궁억 선생은 그 여독(餘毒)으로 1939년 77세를 일기로 한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현재, 한서 남궁억이 활동하던 서면 모곡리엔 남궁억기념관과 무궁화 묘포장이 있고, 당시의 예배당도 복원해 놓았다. 묘소는 모곡초등학교 뒷산인 유리봉 중턱에 있다. 매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남궁억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는 한서문화제가 열린다.

저서로 <동사략(東史略)> <조선이야기> <무궁화 동산> <기러기> <조선의 노래> 등이 있다. 
 

▲  모곡예배당 복원 ⓒ 2007 한국의산천 

1919년 9월 한서 남궁 억 선생께서는 이곳에 예배당을 지으셨고 모곡학교를 설립하여 무궁화 운동을 전개하셨다. 1933년 11월 무궁화 사건으로 구속되시고 일제에 의해 뜯기고 강제 폐교된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  한서 남궁억 선생 기념관 옆에 복원된 모곡예배당 ⓒ 2007 한국의산천 

 

▲ 교회 앞에 있는 무궁화 동산 ⓒ 2007 한국의산천 

  

 

▲ 소리산 석산계곡 ⓒ 2007 한국의산천

 

 ▲ 두물머리 일대에서는 세계야외공연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2007 한국의산천

 

▲ 집사람 기념사진 한장. ⓒ 2007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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