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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만뢰산 진천

by 한국의산천 2007. 1. 22.

진천 만뢰산 

답사 [2007. 1. 21.   한국의산천  우관동]

 

답사코스

길상사 - 김유신 장군 생가 - 보탑사 - 만뢰산 (611.7m) -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촬영장 - 농다리  

 

충북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산2-9일원에 자리한 만뢰산이라는 이름은 고구려 시대의 지명을 본따 그대로 붙인 이름으로 추측된다. 옛지명으로는 금물노산, 만리산, 만노산, 이흘산이라고도 불리며 높이는 611m이다. 대 자연의 만물이 내는 온갖 소리라는 멋진 이름이다. 산 정상 일원에는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쌓았다는 옛성터 흔적이 남아 있는데 그 중앙이 되는 정상 꼭대기에는 지금은 메말라 버린 우물터가 있어 신라의 옛흔적을 볼 수 있다.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만근산으로 잘못 표시되어 있다.

만뢰산은 유서 깊은 곳이다 . 동쪽 산줄기를 이어간 태령산 산정에는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김유신장군(595-673)의 태를 묻어둔 태실이 천사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잘 보존되고 있다 . 최근에 건립된 보탑사의 3층 목탑법당은 최대의 규모와 빼어난 목조 건축물로 길이 남을 것이다.

 

 ▲ 경기 안성, 충남에서 충북 진천으로 넘어가는 엽돈재 (엽둔령,엽둔치) ⓒ 2007.  한국의산천         

 

금북정맥이 지나는 엽돈재. 이곳을 넘어서면 진천군 백곡면이다. 사람이 살기 좋다고 전해오는 고장 진천  

 

生居鎭川 死後龍仁(생거진천 사후용인)에 대한 이야기

 

"옛날에 진천 어는 생원의 딸이 용인으로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고 유복하게 살다가 남편이 일찍 죽어서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래서 어린 아들을 시집에 두고 진천으로 개가를 하여 아들을 낳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데, 용인에 두고 온 아들이 늘 마음에 걸린다.
한편 용인의 아들도 그동안 장성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게 소원이라 진천으로 �아와서 여쭈니 어머니는 흐뭇하나 진천의 아들이 그럴 수는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용인 아들은 그만두지 않고 진천의 원님에게 소장을 내어 해결해 달라고 하였다.

고을 원님은 고심 끝에 생전에는 진천에서 살다가 죽어서는 용인에서 제사 지내라는 "생거진천, 사거 용인" 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여기에서 '생거진천'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일설로는 진천 지방은 예부터 평야가 넓고 비옥하여 가뭄의 해가 없어 농업경영이 순조로와 살기 좋은 곳이기에 '생거진천'이요. 용인은 산자수명하여 산세가 순후하여 사대부가 유명한 산소가 많다하여 '사거용인'이라 하였다고 한다.''

 

 ▲  엽돈재에서 바라 본 만뢰산 능선위로 떠오르는 일출 ⓒ 2007.  한국의산천         

 

엽돈재 전설

3도의 경계지점 엽돈재 (葉屯峙) 혹은 협탄령(脇呑嶺)리라고도 부른다. 3도란 충남 천안시와 충북 진천시, 그리고 경기도 안성시를 말한다. 

아주 먼 옛날 백곡면 엽전고개마루에서 주막을 하던 노랭이 박서방이 있었다. 박서방은 많은 돈을 벌어놓고 써 보지도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핏줄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어서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장례를 치러주었다. 장례를 끝낸 사람들은 박서방이 생전에 벌어 놓았던 돈을 찾기 위해 집 안팎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그날부터 이 주막은 주인 없는 빈집으로 오고가는 길손의 휴식처가 되었는데, 해가 갈수록 돌보는 이가 없어 폐허로 변하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여름 밤이었다. 고개를 넘던 길손이 날도 저물고 비가 와서 이 주막에서 쉬어 가려 들어갔는데 웬지 으시시하였다. 그러나 피곤에 지친 길손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날 인근 마을에 사는 농부가 밭에 가기 위해 고개를 넘다 주막에 짚신이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방문을 열었더니 사람이 죽어 있어서 놀라 소리 지르며 사람들을 불렀다. 모인 사람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기만 하였다. 그런데, 마을에서 담이 세기로 소문난 청년 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가 시체를 끌어내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그 후로도 이곳 주막에 들기만 하면 어떤 사람이던지 아침에 시체가 되어 나오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주막에 귀신이 붙은 집이라 하여 날만 저물면 얼씬도 않게 되었다. 

귀신이 붙었다는 소문이 돌자 담 세기로 이름난 청년이 자기 손으로 귀신을 잡겠다고 하며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그 주막으로 들어갔다. 주막에 들어서니 등골이 오싹하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젖었다. 그렇지만 청년은 정신을 바싹 차리고 불을 밝히고 커다란 몽둥이를 준비해 놓고 귀신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자정이 되자 방안에는 바람이 일고 방문이 덜컹덜컹 흔들리기 시작하며,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천장 속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청년은 마음을 가다듬고 "귀신이냐? 사람이냐? 어서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잠시 발 소리가 멈추더니 천장 판자가 떨어지며 별안간 사람의 다리 하나가 축 늘어져 흔들리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청년은 벌떡 일어나 저도 모르게 발목을 잡고 힘껏 당겼다. 다리가 쑥 빠지는 순간 천장 속에서 '와르르' 하고 엽전꾸러미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어찌나 많았던지 방에 가득 쌓였다.

 

이튿날 날이 밝자 청년은 곧장 마을로 내려왔다. 청년을 본 마을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어찌된 영문이냐고 묻는데 청년은 태연하게 집으로 가서 커다란 자루를 가지고 다시 주막으로 올라가 엽전꾸러미를 자루에 담아 가지고 내려왔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천장 속에 감춰 놓앗던 엽전들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둔갑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한 청년은 그 후로 이 고장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살았다고 전한다. 당시에 주막이 있었다는 곳은 도로확장과 오랜 풍상 탓인지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길이 없다. 

 

 ▲ 개죽교 앞에 서있는 만뢰산 입구 안내석비 (아래 지도 참고) ⓒ 2007.  한국의산천         

 

만뢰산을 오르는 코스는 다양하다. 엽돈재에서 만뢰산~보탑사까지 능선길을 이어도 되고(약 11km) 엽돈재에서 내려와 개죽교를 건너 수문마을 하수문으로 오르는 코스도 있다. 또한 가족산행,자가 운전자들은 보탑사로 들어가 원점회기 산행(약 5km)을 한다.

 

개죽(介竹)마을

개죽마을을 개죽이 가죽골 대촌등 이름이 많다. 또 한자로도 여러가지 쓰인다. 介竹洞, 嘉竹洞, 佳竹洞 이라고 쓰는데 글자는 틀리지만 음은 같다 하겠다. 신라시대에 김유신 장군이 이 곳에서 군사 훈련을 할 당시 가죽으로 말 안장 갑옷 등을 만들었다 하여 가죽골이라 하였다는 설과 동리 뒷산에 조리 대나무가 많아서 개죽 또는 대골 등으로 일컬어 왔다. 마을 동편에 절터가 있어 지금도 깨진 기왓장이 나오고 있다. 40여호에 전주 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대문리 (大門里) 

수문(水門)마을

동네가 서쪽으로 만뢰산을 등지고 산계곡에 산재(散在) 위치하여 숨은골이라 하였다. 따라서 하수문, 절골, 궁수문, 쇠당이, 칡목, 새터, 대삼 등 자연마을이 골짜기마다 자리잡고 있다.

동리 입구에 돌벙거지가 있기에 돌벙거리가 숨어 있다고 하여 숨음이라 칭하였다 한다. 또한 옛날 군사 훈련을 할 당시 물을 가두었다가 이용하는 수문(水門) 이 있었다하여 수문이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수문골 50여호 가구에 경주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얼음이 얼은 넓은 백곡 저수지 ⓒ 2007.  한국의산천         

 

 ▲ 보탑사. 만뢰산 산행은 보탑사를 둘러본 보물 백비가 있는 곳에서 산길로 오른다. ⓒ 2007.  한국의산천         

 

  ▲ 보탑사 목탑  ⓒ 2007.  한국의산천         

 

보탑사의 목탑은 겉모습은 탑이지만 각층마다 법당인 다층집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이래 1300년만에 사람이 오르내릴 수 있게 지어진 목탑이다.
각층은 부처님과 경전. 그리고 미륵불을 모시고 있는데 신라가 통일국가를 염원하여 황룡사 9층탑을 세웠듯이 남북통일은 물론 옛 고구려 땅까지 통일하려는 염원을 담아지은 것이 바로 보탑사이다.

목수 신영훈 선생은 쇠못하나 쓰지 않은 순수한 목탑으로서 42.7미터의 3층탑을 삼국시대 목탑 형식을 빌어 고스란히 재현했다.

 

흔히 절에는 불국토를 상징하는 여러 구조물들이 미혹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순서처럼 차례차례 펼쳐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목탑은 한층의 사방에 각기 다른 편액이 붙어있다.즉 한 건물에 법당 다섯과 대장전을 모두 포함한 샘이니 편액만도 열두 개나 붙어 있다. 1층 사방의 약사불전, 극락보전, 대웅보전, 적광보전의 편액은 이곳이 각 부처님을 모신 곳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2층 사방이 구장전, 수다라전, 법보전, 보장전, 편액은 경전을 모시고 있음을. 3층 사방에 걸린 용화보전, 대자보전, 미륵보전, 도솔천전은 이곳이 미륵전임을 알리고 있다.

 

 ▲ 백비(보물 4040호)ⓒ 2007.  한국의산천   


요사채 옆 비각에는 비석에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 (진천 연곡리 석비 보물 404호)

우리나라에 4, 5기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백비는 무자비(無字碑)라고도 한다.


연곡리 백비는 조형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고려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말을 닮은 귀부의 머리는 전면과 좌우가 모두 깎여져 모습을 알 수 없지만 여의주를 문 용 아홉 마리가 뒤엉킨 이수는 사실적인 조각이 돋보이는 비석이다.

처음부터 글씨를 새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비석 귀부의 거북 등 표면이 박리현상으로 벗겨지고 있는데 한 꺼풀 벗겨진 곳에서도 표면과 같은 거북 등 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 백비 옆에 있는 등산로 표지 ⓒ 2007.  한국의산천         

 

 ▲ 오름길에 내려 본 보탑사 ⓒ 2007.  한국의산천         

 

 ▲ 봄날같은 포근한 날에 말잔등 처럼 생긴 안락한 산길을 기분 좋게 걸었다.ⓒ 2007.  한국의산천         

 

  ▲ 이정표는 매우 잘되어 있다. ⓒ 2007.  한국의산천         

 

 ▲ 정상 아래 120m 지점에 있는 신선샘 ⓒ 2007.  한국의산천  

눈이 내리지 않아 가뭄 탓인지 샘에 물이 말라 있었다.        

 

 ▲ 신선샘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 ⓒ 2007.  한국의산천         

 

 ▲ 만뢰산 정상에 있는 헬기 착륙장 ⓒ 2007.  한국의산천         

요즘 뉴스에 나온 만뢰산 정상의 헬기장으로 군에서 설치하였으나 진천군 의회에서 철거와 원상 복구를 요구하고 나섰다.(알루미늄 강판으로 조립되어있다)

 

 ▲ 만뢰산 정상에서  ⓒ 2007.  한국의산천         

만뢰산은 611m의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사방이 일망무제로 트여서 멀리 산능선이 하늘금을 이루고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곳이다.

 

 ▲ 만뢰산 정상에 있는 삼각점ⓒ 2007.  한국의산천         

진천. 11 . 1984 제설이라고 새겨져있다.         

 

▲ 봄날 같은 날에 만뢰산 정상에서 ⓒ 2007.  한국의산천  

산정에 서있는 아주 커다랗고 무거운 돌비보다 이렇게 작은 정상석이 더 정겹다.        

 

 ▲ 만뢰산 정상의 등산로 안내문 ⓒ 2007.  한국의산천  

정상에서 여러 코스로 내려 갈 수 있다.하수문 코스와 보탑사 코스, 길게는 김유신장군 탄생지코스로 갈수있다.       

 

 ▲ 만뢰산 정상 풍경 ⓒ 2007.  한국의산천         

 

 ▲ 보탑사 코스로 내려오는 도중의 낙엽송지대 ⓒ 2007.  한국의산천     

낙엽송 사이를 걷노라니 어느해 눈이 아주 많이 내렸던 민주지산을 오를때 낙엽송 숲이 생각났다.     

 

  ▲ 포근한 겨울 날씨 속에 보탑사 ⓒ 2007.  한국의산천         

 

 ▲ 만뢰산 주변지도 ⓒ 2007.  한국의산천         

소형차는 보탑사 앞 주차장까지 집입이 가능하나 대형버스는 길이 좁아 진입하지 못하므로 저수지 위 주차장에 세우셔야 합니다. 

 

 ▲ 클릭하시면 확대됩니다.ⓒ 2007.  한국의산천         

 

만뢰산 등산코스

 

1) 태령산 - 만뢰산  - 비선골 코스
만뢰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여럿 있으나 김유신 장군의 태가 묻힌 문봉리의 태령산과 만뢰산을 잇는 종주능선을 택하여 보물 404호의 백비와 보탑사가 자리한 연곡리의 비선골을 내리는 산길이 가장 보편적이다. 


진천읍 문봉리 계양마을 길가에 있는 김유신 장군 탄생지를 돌아 본 후 등산 안내판 옆으로 오르면 태령산의 들머리다. 엄청난 참나무 낙엽을 밟으며 호젓한 산갈을 약 40분 올라가면 전망대바위를 지나 김유신 장군의 태실과 안내문이 설치된 태령산 정수리에 올라서게 된다.

 
태령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능선길을 따라가면 (약 1시간소요) 태령산과 만뢰산의 경계인 쥐눈이 안부를 거쳐 임도에 도달한다. 제법 힘이드는 550봉을 올라 (약 20분) 느긋한 주능선길을 다시 약 30분 이어가면 드디어 만뢰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에서의 하산길은 백엽상자와 진천군에서 세운 만뢰산 안내판이 있는 서쪽의 능선길을 이어 삼거리에 이르고, 좌측으로 90도 꺾어 남녘 능선길을 이어가야 하고, 다시 첫 능선에서 좌측으로 90도 꺾어 산악회의 표지기를 따르면 삼층법당이 우뚝한 비선골의 보탑사에 도달하게 된다. 문봉리의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를 구경하고 태령산, 만뢰산을 이어 비선골의 보탑사 주차장까지 약 4시간 30분 소요된다.

 

태령산과 만뢰산 종주
진천읍 문봉리 계양마을 김유신 장군탄생지 옆 등산 안내문이 있는 곳이 태령산의 들머리이다. 40분정도 올라가 전망대바위-태령산 정수리 - 쥐눈이 안부를 거쳐 임도에 도착 - 550봉 - 만뢰산 정상 -백엽상자- 서쪽 능선길 - 삼거리 - 좌측으로 90도 꺾어 남녁 능선길- 다시 첫 능선에서 좌측으로 90도 꺽어 산악회 표지기 따라 - 비선골 보탑사   (약 4시간 30분)   
 

2) 백곡면 대문리 하수문에서 시작한다. 하수문에서 우측으로 들어가 정상까지 40여분정도 소요되고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다. 시야에 연곡저수지와 몽각산 (403m)이 전망돠고 하산은 정상에서 동쪽으로 난 주능선을 따라 540봉을 거쳐 연곡리 쪽으로 내려가거나 남쪽 연곡지를 통하여 내려온다. 연곡리 보련 마을에 도착하면 진천연곡리 석비와 보탑사 삼층목탑이 볼거리이다. 겨울 얼음 낚시로 유명한 연곡지를 거쳐 40분정도 내려가면 김유신의 탄생지에 닿게되며 산행거리는 6.8km, 약   3시간 소요. 

 

3) 연곡리 보련마을이 산행기점이 된다. 마을 왼쪽으로 올라가면 천수탑과 기도터를 지나며 주능선에서 오른쪽으로 따라가면 정상이다. 하산은 동북쪽으로 난 능선길을 따라 540봉을 거쳐 남동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산행거리는 7.5km, 약 2시간 40분이 소요.
 

4) 보탑사 - 백비 - 낙엽송 숲길 - 능선 -  보련산 정상 (원점 회기 5km 약 2시간 30분)

 

클릭 ■☞ 보탑사와 보물 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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