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 봄… 퇴계의 유언은 “저 매화나무 물 줘라”였다
[당신의 리스트] [10] 최갑수 시인·여행작가
코로나 꽃놀이 자제중인, 당신을 위한 매화 풍경 5
최갑수 시인·여행작가
입력 2021.03.09 03:00 | 수정 2021.03.09 03:00
문화는 선별과 여과의 오랜 역사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리스트를 제출하느냐는 것.
서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의 ‘지하철에서 만나는 최고의 풍경 5’로 시작한 당신의 리스트 제10회에선 여행 작가 최갑수 시인이 코로나로 집에 발이 묶인 독자들에게 매화 풍경을 배달합니다.
낙담한 상춘객을 위로하는, 매화향 가득한 풍경 5 ㅡ편집자
최갑수 시인·여행작가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했던 화가 김홍도는 어느 날 그림을 팔아 3000전이라는 큰돈이 생겼다. 그는 2000전을 털어 매화나무를 사고 800전으로 술 여러 말을 사다가 친구들과 꽃 핀 매화나무 아래에서 술을 마셨다. 그 술자리를 매화음(梅花飮)이라 한다.
퇴계 이황의 마지막 유언은 ‘저 매화나무에 물 주라’였다. 미당은 “매화에 봄 사랑이 알큰하게 펴난다 / 알큰한 그 숨결로 남은 눈을 녹이며”라고 노래하는 시 ‘매화’를 지었다. 매화는 봄을 끌고 오는 꽃이다. 은은한 매화향 끝에서 봄이 시작된다.
매화향 달큼한 다섯 곳을 소개한다. 해마다 봄이면 몰래 또는 대놓고 찾아가 봄을 취하던 곳이다. 아무래도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명소 꽃놀이는 어려울 듯싶지만, 동네 주변에 매화나무에도 봄은 또 봄. 지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면, 마스크 잠깐 내리고 동네 골목길 매화 앞에서라도 봄을 들이마셔 보시기를.
◇낙동강변 기찻길… 2만 그루의 매화향 - 양산 순매원
양산 원동면 일대 영포마을을 비롯해, 쌍포·내포·함포·어영마을 등에 매화밭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영포리 영포마을은 마을 전체가 거의 매화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년 남짓 된 2만 그루의 매화가 봄이면 기다렸다는듯 피어난다.
개인 농원인 ‘순매원’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낙동강변에 위치한 까닭에 매화밭과 강, 철길이 어우러진 멋진 장면을 만날 수 있다. 마을 위에는 사진을 찍고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도 만들어져 있다.
경남 양산시 원동면 일대에 백매(白梅)와 홍매(紅梅)가 흐드러지게 폈다. 경부선 원동역에서 매화 군락지까지는 200m. 낙동강 제방과 경부선을 낀 매화들은 코를 찌르는 향기로 상춘(賞春)을 알린다. 2019년.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순매원은 고향 살 때 자주 드라이브 삼아 찾던 곳이었다. 무궁화호가 때때로 드나드는데 기차가 매화꽃밭과 어우러져 동화 같은 풍경을 그려낸다.
남쪽은 봄이 일찍 그리고 느닷없이 찾아온다. 어제부터 겨울, 오늘부터 봄, 이런 식이다. 통영이 고향인 내 친구는 도다리쑥국을 먹은 오늘부터 봄이라 했고, 나는 순매원 개화 소식을 듣고 아내와 매화를 보러 간 오늘부터가 봄이라고 여겼던 때가 있었다.
매화나무 사이로 지나는 기차를 보며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슬그머니 잡던 때. 벌써 이십년 전이다. 이메일도 인스타그램 메시지도 없었다. 고백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 앞에 서야 했던 시절이었다. 음악도 영화도 만남도 헤어짐도, 모든 것이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어져 왔을까. 매화나무 꽃잎 사이로 기차가 지나는 소리가 귓전에 아련하다.
◇초입부터 매화나무 빼곡한 ‘분홍 마을’ - 하동 먹점마을
하동군 악양면 구재봉 중턱에 자리한 마을이다. 십 수년 전 차밭 취재를 갔다가 산등성이가 온통 희끗한 것을 보고 좁고 비탈진 시멘트길을 따라 휘청휘청 차를 몰았던 것 같다.
이삼킬로미터를 갔을까, 마을 초입부터 매화나무가 빼곡하더니 어느 순간 부챗살처럼 풍경이 열리며 만개한 매화 군락이 드러났다. 누군가 꼭꼭 숨겨놓은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경남 하동군 먹점마을 담 위로 매화가 폈다. 밤나무가 많아 ‘밤골’로 불렸지만, 40여년 전부터 주민들이 매화를 가꿨다. 2008년. /최갑수
당시만 해도 먹점마을은 하동에서도 오지로 불렸다. 한국전쟁 때에도 큰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봄마다 사람들이 제법 알음알음 찾아든다. 다 매화를 보러 오는 이들이다. 논두렁과 밭두렁, 지붕과 지붕 사이가 온통 매화밭이다. 마을 사이로 시냇물처럼 난 좁은 길을 걷노라면 그윽한 매화 향기가 온 몸을 감싼다.
먹점마을의 매화는 폭죽처럼 핀다. 바람이 불면 매화잎이 나비처럼 날아다닌다. 햇빛 속에서 여려졌다 짙어지는 분홍빛에 취해 한참을 서 있었던 것 같다. ‘하루 이틀 생활 따위는 잊으련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상은 나를 찾거나 말거나. 그 오후를 매화나무와 매화나무 사이를 어린 나비처럼 펄럭거리며 옮겨다니며 보냈다.
그날 밤은 먹점마을 가까운 어느 마을 민박집에서 묵었다. 새벽 잠결이었다. 톡톡톡, 귓가에 희미하게 울리던 소리는 꽃이 피는 소리였던가. 섬진강을 오르던 참게의 발걸음 소리였던가.
◇차디찬 바람 속 남도의 첫 봄을 알린다 - 순천 금둔사 납월매
금둔사 납월매는 남도의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이다. ‘납월’은 음력 섣달을 가리키는 말이다.
금둔사 경내에는 홍매화와 청매화 여섯 그루가 자라는데 각기 일련번호를 달고 있다. 납월홍매가 피었다 지기 시작하면 일반 매화가 핀다. 납월매는, 그러니까, 봄이 왔나 안 왔나를 살피러 나온 ‘꽃의 첨병’인 셈이다.
납월매는 겨울 공기의 가장 허술하고 무른 공간을 골라 옜다, 하고 꽃잎을 디밀고 찔러 본다. 납월매 이후 다른 꽃들이 납월매가 만든 얇은 틈으로 봄 공기를 힘껏 불어넣고 마침내 대기를 봄으로 가득 채우겠지.
전남 순천시 금둔사의 매화. 음력 섣달 납월(臘月)에 일찍 핀다 해서 납월매라 한다. 2016년.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여행기자 초년병 시절, 여행 기자에게도 ‘특종’이란 게 있어 노심초사 남도의 화신에 안달하던 때가 있었다. 피었어? 피었어? 각지의 지인들에게 꽃이 필 기미가 있으면 전화를 달라고 부탁해놓고 연락 오기를 기다렸다. 다른 기자가 먼저 쓰면 큰 낙종이라도 한 듯 아쉬울까 봐. 금둔사 매화도 먼저 쓰고 싶어 꽃봉오리가 맺혔다는 말을 듣자마자 차를 달려 갔지만 꽃은 아직 일러서 봉오리 아래서 일박 이일을 서성이다 돌아온 적이 있다.
기자를 그만두고 금둔사를 찾은 어느 날 활짝 핀 납월매를 만난 적이 있다.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그 향을 종일 맡고 머릿속에 꼭꼭 저장해뒀으니 말이다. 금둔사야 크지 않은 절이라 돌아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지만 그 깊고 그윽한 매화향 때문에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남명 조식의 강직함 그대로 빼닮았네 - 산청 산천재 남명매
지리산 기슭에 자리한 경남 산청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남명 조식이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른 곳이다. 그의 사상은 실천을 강조하고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을 적극 비판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런 입장은 제자들에게도 이어졌다. 곽재우, 정인홍 등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들이 남명의 제자다.
경남 산청군 산천재에 핀 남명매. 조선 명종 16년(1561) 때 남명 조식이 손수 심었다. 2019년.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남명은 말년에 산청으로 들어와 산천재를 짓고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어 마지막 거처로 삼았다. 산천재는 불과 서너 칸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건물이지만 앞마당에 서면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명매는 백매다. 꽃잎이 눈처럼 희다. 나이가 450년을 훌쩍 넘어 가지 일부는 말라 죽고 또 다른 가지는 시멘트로 보완했지만 그 기품이 훼손되지는 않았다. 해마다 3월 하순에서 4월 초면 어김없이 맑고 눈부신 꽃을 피운다. 남명의 강직한 정신과 올곧은 성품을 매화나무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일까.
남명매는 매화 향이 유독 짙다. 아마도 지리산 정기도 매화 향에 지분이 있을 것이다. 남명은 정원의 매화를 보며 “매화가 피어나니 맑은 기운이 생긴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경남 산청에는 남명매와 더불어 산청 3매(三梅)로 불리는 매화나무가 있다. 남사예담촌의 분양매와 단속사 옛 절터의 정당매가 그것이니 함께 보면 근사한 매화 여행이 된다.
◇한 송이, 한 송이 누가 촘촘히 새겼나 - 김해 건설공고 와룡매
경남 김해 구산동에 자리한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에는 와룡매라 불리는 매화나무가 있다.
매화나무 모양이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기어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런 이름으로 불린다.
경남 김해시 김해건설공고 교정 안에 핀 와룡매. 입학식 때마다 사진 배경이 되는 지역 명물이다. 2021년. /조상호 사진가
3월이면 용이 기어간 구불구불한 흔적을 닮은 이 나뭇가지를 따라 분홍의 꽃들이 주르륵 핀다. 누군가 촘촘한 설계로 새긴 것 같기도 하고, 바늘로 한 송이 한 송이 가장 아름다울 자리에 매달아 둔 것 같기도 하다. 만개한 매화나무 아래 서서 찬란한 햇빛 아래 빛나는 꽃잎을 바라보고 있으면 실핏줄이 선명한 미인의 피부를 살피는 것만 같다.
건설공고 와룡매는 군락이다. 학교 정문부터 130미터에 이르는 진입로 양쪽에 30~100여 년의 고매들이 줄지어 서 있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 매화가 만발할 무렵이면 교정은 매화를 보려는 방문객들과 삼각대에 카메라를 단 사진작가들로 넘쳐났지만 지금은 들어갈 수가 없어 아쉽다.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는 원래 1927년 김해농업고등학교로 출발했는데, 학교에서 근무를 하던 일본인 교사가 매화를 심고 가꿔, 지금처럼 매화나무가 많아졌다는 것이 학교 측의 설명이다. 몇 해 전 그 교사가 90대 노인이 되어 이곳에 찾아 자신이 심었던 고매들을 둘러보고 어루만지며 한참을 서 있다가 갔다고 한다. 노인의 매화 핀 봄날은 어땠을까.
올해 봄이 가면 우리 인생에 남은 봄도 한 번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니까 음악을 틀어놓고 꽃놀이를 즐겨보는 게 그리 큰 흉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코로나 시대,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이 다섯 마을의 풍경을 떠올린다. 우리에게 이제 몇 번의 봄이 남았는가를 짐작해보며 말이다. [글 최갑수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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