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산행 르포] 바위산의 무뚝뚝한 직선, 흰 눈이 살포시 껴안다
글 신준범 차장대우 사진 주민욱 기자 입력 2021.02.10 09:03
대둔산 삼선계단과 마천대, 낙조대를 거치는 5㎞ 알짜 산행
설국으로의 입국처럼 금강구름다리를 지나자 눈의 세상이었다. 달력에나 나올 법한 설경이 널려 있어 좀처럼 산행 속도가 나지 않았다.
어제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휴양림 창문을 열자 -16°C의 냉기가 국경 경비원의 깐깐한 시선처럼 덮쳐왔다. 설국으로의 입국이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추위를 삼켜버린 건, 순백의 능선. 현란한 바위선의 9할이 생략된 대담한 솜씨, 순간 시간이 멈추었다. 설경에 시선이 빨려들고 있었다. 폭발적인 흡인력으로 마음을 잡아당기는 흰 산줄기, 저 산에 몸과 마음 오롯이 포개고 싶었다.
한파특보와 대설특보가 동시에 내렸다는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등산화에 스패츠를 단단히 고정했다. 공기는 냉동실 같아도 하늘은 한없이 푸르다.
한파에는 아랑곳없이 일행의 걸음이 발랄하다. 흰 산이 설레 견딜 수 없는 이들, 연세대산악부 주장 최동혁씨와 성균관대 산악부 박지우씨다. 청춘 영화의 주인공 같은 선남선녀가 순백의 세상을 자기 발자국으로 써내려간다.
마천대에서 낙조대로 이어진 주능선에서 본 첩첩산중 설경. 바위 아래로 능선길이 나있지만 대부분 바위에 올라 경치를 즐길 수 있는 틈새 길이 있다.
폭설로 교통대란이 일어났다는데, 산 입구는 고요하다. 케이블카 직원이 “전체 날씨의 1%에 해당하는 환상적인 날”이라며 “운이 좋다”고 일러 준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자 신세계가 펼쳐진다. 파란 하늘과 흰 땅의 단순명료한 조화, 순백으로 덮어 주었을 뿐인데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가.
단숨에 고도를 630m로 끌어올려 전망대에서 설국을 마주한다. 거리두기란 말이 무색하게 고요한 세상, 물결처럼 펼쳐진 능선의 바다 앞에 선다. 기침도 조심스러웠던 몸가짐이 거리낌 없이 풀려난다. 새장 밖으로 풀려난 것처럼 마음은 하늘을 가른다.
금강구름다리에 닿자 눈 덮인 바위산이 비경의 진수를 드러낸다. 눈 덮인 붉은 구름다리를 건너는 맛이 꿀맛이다. 구름다리 위 전망대에 오른다. 사람의 땅이 아닌 것만 같다. 도인들의 세상이 아니고서야 이토록 환상적일 수 있을까.
금강구름다리에서 본 설국의 향연. 우측의 햇볕을 받아 빛나는 철탑이 마천대다.
스마트폰을 꺼내어 사진 찍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황홀한 풍경의 연속이다. 달력 사진 같은 경치가 널려 있어 산행은 전혀 속도가 나지 않는다. 산행에만 집중했다면 마천대에 올랐을 시간이지만 삼선계단에서 설경 삼매경이다.
늘어선 3개의 바위 봉우리가 마치 신선 같다 하여 삼선바위라 불리며, 바위 꼭대기로 이어진 철계단을 삼선계단이라 부른다. 고려의 마지막 재상이 나라가 망함을 한탄해 이곳에 묻혀 살았는데, 그의 딸들이 선인으로 변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삼선계단은 담력 시험 코스로 꼽힌다. 사다리마냥 가파른데다 계단 아래의 고도감이 상당한 탓이다. 주말 등산객이 많을 땐 겁에 질려 손사래 치며 우회로로 돌아가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계단을 올라서서 뒤돌아보니, 양떼처럼 풍성한 구름 사이로 햇살이 쏟아진다. 속에선 무럭무럭 행복감이 솟아오르고, 대학산악부원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하늘에서 본 삼선계단.
원효 “사흘 둘러보고도 발 떨어지지 않아”
앞으로는 마천대 위에 우뚝 솟은 철탑이 햇볕에 반사되어 빛난다. 문지를 마摩, 하늘 천天 자를 쓰는 마천대는 ‘하늘에 닿을 듯 높다’는 뜻이며, 원효대사가 대둔산에서 수도할 때 지은 이름이다.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원효대사 또한 대둔산을 가리켜 ‘사흘을 둘러보고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극찬했다. 1400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명산임을 실감하며 비탈길을 오른다.
눈 덮인 돌계단에 발자국을 새기며 오른다. 발로 눈을 치우며 안정적인 디딜 곳을 가늠하며 오른다. 가쁜 숨결에 증기기관차마냥 연기가 솟아오르고, 근육이 달궈진다. 비로소 몸이 풀리며 산세를 몸으로 읽어 낸다. 잡념은 사라지고 온전히 산과 하나가 되는, 산행의 맛을 만끽한다.
간식을 달라는 몸짓이었을까? 박지우씨의 손에 곤줄박이가 날아와 앉았다.
대둔산 정상 마천대에 닿자 하늘에 닿을 듯한 경치가 마스크 쓴 듯 갑갑한 사람들의 속을 후련히 열어젖힌다. 대둔산은 879m로 고산이라 할 정도로 높지 않지만, 에워싼 주변 산 높이가 낮은 탓에 여간한 1,000m대 산보다 더 시원한 경치를 볼 수 있다.
속 시원히 펼쳐지는 설국의 향연. 사방을 둘러보아도 평범한 능선이 없다. 비범한 붓질로 남은 능선이 뻗어 있다. 복잡한 세상을 다 덮어버린 폭설의 단순명료한 힘. 세상 모든 소리를 삼켜버린 양 조용하다. 그 많은 말을 다 덮어버리는 폭설. 율곡 이이가 쓴 <격몽요결>의 ‘많은 말과 많은 생각은 마음에 가장 해롭다’는 지혜를 설산이 일러 준다.
낙조대로 발길을 돌린다. 얼어붙지 않은 눈을 과소평가했다. 아이젠 착용을 미루다 비탈진 바윗길을 가로지르는 산길에서 “철퍼덕” 소리가 날 정도로 넘어진 것.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으나 체중을 감당하지 못한 스틱이 뚝 부러졌다. 알루미늄 합금이든 카본이든 아무리 최신 소재라 해도 큰 충격을 받으면 부러지거나 휘어지게 마련이다.
수북이 눈이 쌓인 대둔산 주능선 암릉지대. 황홀한 경치만큼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조심스럽게 걷는다.
낙조대에서 눈길 사로잡은 산은?
곧장 아이젠을 착용하고 집중해서 산길을 걷는다. 이정표와 난간이 많은 대둔산이지만 바위가 많고 가팔라 어디서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실감한다. 실제로 주능선은 거칠게 솟은 암릉이 많아 바위 아래를 우회하는 산길이 많다.
사람이 못 오를 것 같은 바위도 절묘하게 길이 나 있어, 유심히 살피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바위 사이로 난 능선의 날 위에 서면 논산·금산·완주 일대가 한눈에 드러난다. 대신 1만 대군 병사가 얼음화살을 쏘는 듯한 능선 특유의 칼바람을 감내해야 한다.
평범한 숲길이지만, 어떤 나무도 평범하지 않다. 빛나는 웨딩드레스 입고 햇볕에 반사되어 한껏 멋을 부린 것이, 순백의 황홀한 세상으로 초대한다. 잠깐 걸음 멈춰 보노라면 자꾸 어디론가 데려간다. 틈만 나면 넋 놓게 만드는 탓에 정신줄 꽉 붙들고 걷지 않으면 산행 시간이 무한정 늘어나기 마련이다.
발목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낙조대에 오르자 마천대와는 달리 푸근한 맛이 있는 경치가 드러난다. 특히 북쪽 계룡산과 대전시 일대가 드러난다.
대둔산의 대표적인 명물 중 하나인 삼선계단. 일방통행이라 올라갈 때만 이용할 수 있다.
해넘이가 아름답다는 낙조대. 천혜의 경치를 보여 주는 시원한 전망터라 어느 시간에 올라도 실망시키지 않는다.
의외로 눈길을 끄는 산은 덕유산이나 운장산이 아닌 서대산이다. 백두대간과 정맥에 속한 명문가의 자제들을 제치고 빼어난 산세로 솟아 충남 최고봉다운 힘을 보여 준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 용문골로 내려선다. 낙하하는 눈처럼 가파른 비탈로 이끌며 고도를 뚝뚝 떨어뜨리던 산길은 용문굴에 이르러서야 숨 돌릴 틈을 준다.
선도대사가 수련할 때 용이 석문을 열고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골짜기를 내려서자, 단단한 고요함이 “뿌드득 뿌드드득” 눈 소리를 들려준다. 어떤 사연, 어떤 인연 거쳐 낙하했는지, 눈은 할 말이 많았던 것이다. 눈의 말을 안으로 삼키며 걷는 이 길이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길 바랐다.
산림청에서 산림명문가 증서를 받은 유숭열씨가 운영하는 대둔산자연휴양림.
이왕영 전 대둔산산악구조대장이 운영하는 산산산식당의 돌솥비빔밥.
산행길잡이
겨울에는 오전 10시부터 케이블카가 운행한다. 눈이 많이 오거나 한파가 심해도 정상 운행하며, 바람이 심하게 불 때만 운행이 중단된다. 대둔산은 바위산 특유의 아름다움이 마천대 부근에 압축되어 있다. 산이 크지 않지만 산세가 가파르고 거칠어 산행 거리가 짧다고 얕봐선 안 된다.
경치가 수려한 명소로 꼽히는 것이 금강구름다리, 삼선계단, 마천대, 낙조대이다. 삼선계단은 일방통행으로 상행일 경우에만 거칠 수 있다. 따라서 비경이 압축된 케이블카 정류소 방면을 들머리로 잡아야 비경을 즐길 수 있다.
낙조대로 가는 능선길 곳곳에 전망바위가 있어, 몇 곳을 골라 오를 수도 있다. 하산은 정맥길을 따라 배티재로 가거나, 온 길을 600m 되돌아가 용문골로 하산하거나, 상부 정류소로 돌아가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하는 방법이 있다. 다만 겨울엔 하행 막차가 오후 4시이므로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주능선은 산행이 비교적 수월하지만 상행과 하행 길이 가파른 돌계단이므로 아이젠을 필수로 준비해야 한다.
교통
대전 서남부터미널에서 대둔산 휴게소(배티재)까지 34번 버스(06:00~22:00)가 4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1시간 정도 걸린다. 여기서 대둔산케이블카 입구까지 1.6km 떨어져 있으나 전북 완주와 충남 금산의 경계인 배티재까지만 버스가 운행한다. 배티재에서 곧장 산행을 시작하거나 도로를 따라 30여 분 걸어서 케이블카 정류소까지 가야 한다. 대둔산콜택시 063-263-7290.
숙식(지역번호 063)
대둔산자연휴양림(041-752-4138)은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 숙박시설이다. 금산의 유숭열씨가 부친 유성준씨의 뜻을 받들어 1968년부터 낙엽송을 심어 현재 풍성한 산림을 가꾸었으며,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산림청으로부터 산림명문가 증서를 받았다. 최신 시설이거나 국립휴양림만큼 저렴하지는 않지만, 숙박객을 위해 새벽 1시에 장작불을 추가로 때 줄 정도로 성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휴양림 카페에서 본 대둔산 기암 전경이 장관이며 6km의 산책로가 있다. 케이블카 정류소 바로 앞에 자리한 산산산 식당(010-9412-6454)은 이곳 토박이자 대둔산산악구조대 대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산악인 이왕영씨와 부인 천옥랑씨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돌솥비빔밥(1만 원), 산채비빔밥(9,000원), 된장국 또는 청국장을 곁들인 백반(8,000원), 더덕구이산채정식(1만8,000원), 능이버섯전골(중 4만 원) 등이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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