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종인의 땅의 歷史] “저 험한 내포(內浦) 가야산에는 예부터 사연이 많았느니라”
[227] 충남 내포 이야기① 남연군묘의 비밀
2.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석탑에서 나온 700년 명차를 추사에게 선물했다네”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09.02 05:00
천하 명당 남연군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남연군묘. 가야산 자락이 날개처럼 무덤자리(가운데)를 에워싸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자기 선친 남연군을 연천에서 이장한 자리다. 목적은 '천자 2명을 낳을 명당을 찾아서.' 아들 고종과 손자 순종이 왕과 황제가 되면서 목적은 이뤘다.
대원군은 어떻게 이 '촌구석'에 명당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강화도 유배지를 땅굴을 파고 탈출하던 광해군의 아들에서 동학농민혁명까지 가야산에서 벌어진 역사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충남 예산 가야산 주변에 있는 열 고을을 내포(內浦)라고 한다. 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덕산, 예산, 신창, 면천, 당진 같은 마을이 그 내포다. 큰 바다가 내포를 만나면 뭍으로 파고들어 ‘육지 속 바다’가 된다. 그래서 ‘내포(內浦)’다.
바다와 땅이 섞여 있기에 천주교 같은 바깥 문물도 일찍 들어왔고, 비산비야(非山非野) 충청 땅답지 않게 산도 험준해 산이 품은 사연도 많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광해군 아들 이지가 도망가려 했던 땅.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자기 부친 묘를 옮겨 기어이 아들과 손자를 천자(天子)로 만든 땅. 심지어 최근 소유자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무상으로 기증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와 너무나도 깊은 인연을 가진 땅이다. 인조반정에서 대원군과 세한도까지, 그 사연 이야기다.
광해군 세자 이지의 탈출극
1623년 3월 13일 능양군 이종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이 죽인 이복동생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유폐 중이었는데, 그녀는 모시러 온 반정 세력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친히 그들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사하고 싶다.”(1623년 3월 13일 ‘인조실록’) 반정 세력이 겨우 뜯어말려 참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광해군과 왕비는 강화도로, 그 아들인 세자 이지(李祬) 부부는 부속 섬 교동으로 유배당했다.
두 달 뒤인 5월 22일 밤 이지가 땅굴을 파고 도망가다가 체포됐다. 땅굴 길이는 70척(약 23m)이나 됐다. 이를 위해 세자는 보름 넘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몸을 줄였고, 세자가 굴을 파면 세자빈 박씨가 그 흙을 받아 방에 쌓았다. 체포된 세자는 6월 25일 자진(自盡) 왕명을 받고 목을 매 죽었다. 세자빈은 남편 체포 사흘 만에 역시 목매 죽었다.(1623년 5월 22일 등 ‘인조실록’)
그런데 함께 체포된 하인 막덕(莫德)은 이렇게 증언했다. “(세자가) 바로 도망쳐 나와 마니산으로 가려다가 가야산(伽倻山)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러니까, 최종 목적지가 예산에 있는 가야산이라는 것이다. 왜 가야산인가. 이유가 있었다.
충청도 양반 조극선의 일기
“어제 모두 가야사에 모였다. 가야사는 지금 동궁의 원당이다. 궁중 노비라는 자가 막 와서는 양반 욕질을 해댔다. 그래서 돌아왔다(昨日會伽寺 今爲東宮願堂 所謂宮奴者方來 辱極兩班 故還也·작일회가사 금위동궁원당 소위궁노자방래 욕극양반 고환야).”(조극선 ‘인재일록’ 4책 1620년 10월 1일)
양반들이 승려들을 천민 취급하던 그때, 조극선이라는 예산 양반이 가야산 가야사에 놀러 갔다가 혼쭐이 나서 돌아왔다는 일기다. 여기에 ‘지금 동궁의 원당’이라는 말이 나온다. 가야사가 훗날 왕이 될 세자의 원찰이라는 뜻이다. 왕실 원찰이 되면 그 지역에서 막강한 권력자가 된다. 절은 세금을 면제받고 부역 또한 면제받는다.
천대받던 절집 사람들과 지역 양반들 신세가 완전히 역전되는 것이다. 넉 달 뒤 조극선이 다시 가야사에 가보니 거기에는 하늘 높이 ‘東宮願堂(동궁원당)’이라는 금표(禁標)가 걸려 있었다.(조극선, 앞 책 1621년 2월 30일)
그때 동궁은 바로 광해군 세자 이지였다. 그러니까 2년 뒤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 그 원찰의 주인, 세자 이지가 ‘가야산’을 목적지로 정하고 탈출극을 벌인 것이다.
백제 시대 공주에서 당진으로 가는 옛길에 서 있는 미륵불. 불상 앞쪽이 당진 방향이다. 이 길목에 서산 마애삼존불도 있다.
인조반정과 몰락한 가야사
‘본궁(本宮)의 원당이랍시고 양반을 능멸하던’(조극선, 앞 책 1621년 11월 24일) 기세등등한 가야사였다. 그 절이 인조반정 7개월 뒤인 1623년 10월 17일 ‘절집은 텅 비고 승려들은 모두 숨어버리는’ 완전히 몰락한 절로 변해버렸다. 가야사를 들볶아서 종이를 공급받던 양반들은 임박한 과거시험에 쓸 종이를 마련하지 못해 달아난 승려를 잡으러 돌아다닐 정도로 대혼란에 빠졌다. (조극선, 앞 책 1623년 윤10월 6일) 종이 만드는 ‘지역(紙役)’을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만, 쿠데타로 왕이 바뀌고 옛 왕 아들이 자살 ‘당한’ 이유가 더 컸을 것이다.
이후 가야사는 몰락했다. 1700년대 문인들이 쓴 가야산 답사기에는 ‘가야사’ 대신 ‘묘암사(妙巖寺)’라는 절이 나온다. “옛날에 묘암사는 가야사에 속했다. 가야사가 훼손된 이후 그 이름을 사칭 중이다. 불당 뒤 언덕에 층계가 77계단이 있고, 그 위에 석탑 하나가 우뚝 솟았다. 지세가 쥐 달아나는 형국이라 언덕에 탑을 세워 쥐를 눌렀다고 한다.”(이철환 ‘상산삼매·象山三昧’, 1753)
흥선대원군의 야심과 석탑
100년 뒤 바로 그 가야산 절집에 흥선대원군이 선친인 남연군 상여를 들고 나타나 절을 부수고 선친 묘를 이장했다. 사연은 이러하다.
“가문 부흥을 염원하던 흥선군 이하응에게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가야산 가야사 석탑 자리에 묏자리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원군이 전 재산을 털어 가야사 주지를 2만 냥으로 매수한 뒤 가야사를 불 질러버리고 석탑을 도끼로 부순 다음 그 자리에 묘를 옮겼다. 형제들이 악몽을 꾸고서 석탑 부수기를 주저하자, 이하응이 직접 도끼로 내려쳐 탑을 없앴다. 그리하여 13년 뒤 아들 명복과 손자 척이 왕이 되었다, 운운.”
지금도 풍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예산 남연군묘 역사는 그러하였다. ‘하늘을 찌르던 외로운 탑’(孤塔撑天·고탑탱천: 송인(宋寅·1517~1584))은 ‘백 척 누대 위에 깨진 채 서 있다가’(百尺危臺破塔留·백척위대파탑류: 임방(1640~1724) ‘수촌집’) 권력을 염원한 중년 사내 손에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남연군 묘에서 남쪽 개울가 숲을 ‘남전(南殿)’이라 부르는데, 예산 토박이인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장 이기웅에 따르면 연전에 땅속에서 ‘폭삭 주저앉은 서까래와 기와가 나왔다’.
자, 그러니 대원군이 부순 절은 가야사가 아니라 묘암사다. 그리고 석탑 또한 전설 속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탑이다. 하나 더 있다. 대개 남연군묘에 대해 대원군이 선친 묘를 이장한 해를 ‘고종이 왕이 되기 13년 전’인 1850년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남연군묘 입구에 있는 비석에는 역사적 진실이 기록돼 있다.
‘처음 마전 백자동에 장사 지냈다가 바로 연천 남송정에 이장하고 을사년에 덕산 가야산 북쪽 기슭에 이장했다가 병오 3월 18일 드디어 중록 건좌한 언덕에 면례하였다’. 이미 대원군은 연천에서 선친을 한 차례 이장한 뒤 을사년(1845년) 가야산 북쪽에 이장하고 이듬해에 지금 자리에 묘를 썼다는 뜻이다.
을사년에 첫 이장한 자리를 주민들은 ‘구광터[舊壙址·구광지]’라 부른다. 옛 무덤 자리라는 뜻이다. 남연군 묘에서 400미터 북동쪽 산기슭 밭이다. 이기웅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부터 구광터라 불렀다”고 했다.
왜 처음부터 석탑 자리에 옮기지 않았을까. 이기웅이 말했다. “묘암사와 주변 주민들과 땅 문제를 협상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다 마지막 남은 절을 불태웠고.” ‘만세 권력을 누린다는 지관 말에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서 급히 가야사라는 대찰(大刹)을 방화하고 주민을 내쫓았다’는 대중매체와 공식 안내문은 수정돼야 마땅하다.
남연군 묘가 있는 예산 곳곳에서 발견된 '이산' 표석
미륵불과 세한도
18세기까지 석탑은 ‘층마다 작은 부처가 있었고 돌 틈에 쇳물을 부어 비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았다’.(‘가야산기’, 이의숙(1733~1805), ‘이재집’ 권4) 탑 자리에 지금 큰 무덤 하나가 앉아 있다. 풍수를 논하지 않아도, 남연군묘 풍경은 압도적이다. 땅에서 보면 아늑하고 하늘에서 보면 웅장하다. 산줄기가 끝나는 언덕에 나무를 다 베고 묘를 썼으니, 언덕 전체가 왕릉처럼 보인다.
남연군묘가 있는 상가리 마을 옛길에 미륵불이 서 있다. 숲으로 들어가는 서쪽 방향을 보고 있다. 남연군묘에 대한 전설에는 “절을 불태우던 날, 탑을 바라보고 있던 돌부처가 돌아섰다”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그 숲속에 웅거할지도 모를 산적과 산짐승에게서 행인을 지키려는 비보(裨補) 석불로 봐야 한다. 전설과 신화와 사실(史實)과 동화가 섞여서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언제나 사실은 전설을 앞서는 법이다.
예산 마을 사람들 집에는 ‘李山(이산)’이라 새겨진 표석이 눈에 띈다. “우리 아버지가 이장을 했는데, 땅문서에 소유주가 ‘이왕직(李王職)’인 땅이 그렇게 많았다. 나는 사람 이름인 줄 알았다.”(이기웅) 이왕직은 식민시대 전주 이씨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법인이다. 망해버린 옛 왕실 땅이 예산에 그리 많았다는 뜻이다. 이기웅은 그 ‘이산’ 표석이 이왕직 재산을 알리는 안내석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끝이 아니다. ‘근래 이하응이 덕산현에 묏자리를 살피러 갔다가, 고려 옛 탑에서 용단승설(龍團勝雪) 4덩이를 얻었다. 내가 하나를 얻어 간직하였다.’(이상적, ‘기용단승설’, 은송당집 속집, 정민, ‘한국의 다서’, 김영사, 2020, 재인용) 용단승설은 송나라 때 명차(名茶)다. 700년 전 명차가 이 탑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로 연결된다.<다음 주 계속>
* 이 기사에 나온 사료는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 도움을 받았습니다.
박종인 선임기자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역사가 됩니다. 땅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그게 역삽니다 역사.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석탑에서 나온 700년 명차를 추사에게 선물했다네”
[228] 충남 내포이야기② 세한도를 그린 암행어사 김정희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09.09 03:00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한 ‘세한도’(부분). 오른쪽 위 제목 옆에는 ‘藕船是賞(우선시상)’, ‘우선, 보시게나’라고 적혀 있다. ‘우선’은 이상적의 호다. /국립중앙박물관
충남 보령 남포면 남포읍성에 있는 비석군. 왼쪽에서 두번째 비석은 남포현감 성달영 영세불망비다.
두 영세불망비 이야기
청나라 연호로 도광 6년 7월 어느 날 충청우도(지금 충남과 얼추 비슷하다) 보령군 남포현 주민들이 현감을 위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웠다. ‘도광 6년’은 순조 26년인 1826년이다. 날짜를 기억해둔다.
현감 이름은 성달영(成達榮)이다. 영세불망비는 ‘은덕을 영원토록 잊지 못한다’는 뜻을 담은 비석이다. 석 달 전인 4월 6일 충청감사 김학순(金學淳)이 “남포현감 성달영이 세금을 잘 거둬 지극히 가상하니 상을 달라”고 이조에 보고서를 올렸다.(1826년 4월 6일 ‘승정원일기’) 이 대단한 사또 비석은 남포읍성 입구에 서 있다.
충남 서산시 대산사거리에는 순조 때 충청우도 암행어사였던 추사 김정희 공덕비가 서 있다. 김정희는 충청남도 전역을 암행하며 대소 고을 관리들이 비행을 적발해냈다.
충남 서산시 대산종합시장 건너편 산기슭에도 비석들이 서 있다. 주소는 대산읍 대산리 1365-8번지다. 계단 위 맨 오른쪽 비석은 1826년에 충청우도를 다녀간 암행어사 영세불망비다. 그가 행한 공덕이 적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줄이 ‘永防加歛·영방가렴’, ‘가렴주구가 더함을 영원히 막아줌’이다. 세운 날짜는 1826년 9월이다.
그해 6월 24일 암행어사가 올린 보고서에는 충청우도 수령 59명 이야기가 나온다. 이 가운데 남포현감 대목이 굉장히 길다. 첫 문장만 보면 나머지는 읽을 일이 없다. ‘밤낮으로 오로지 자기 배를 채울 생각만 한다(晝宵一念只在肥已·주소일념지재비이)’(1826년 6월 24일 ‘일성록’)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세금을 과도하게 거둬 원래만큼만 나라에 바친 뒤 나머지는 싹 챙겨먹는, ‘법 무시하기로는 있어서는 아니 될 부류’라는 것이다.
이 남포현감이 주민들이 한 달 뒤 영세불망비를 세워준 그 성달영이다. 암행어사에 의해 비리가 현장 적발되고 조정에 보고서가 올라가고 나서도 부득부득 주민들을 들볶아 기어이 공덕비를 움켜쥐었다. 그 파렴치한 가렴주구 행각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짐작하고 남는다.
그해 5월 암행어사가 그 비리를 적발해내자 충청감사 김학순은 “(포상을 신청했던) 남포현감이 현장에서 봉고파출(封庫罷黜)됐다”고 조정에 급전을 올려야 했다. 물정 모르는 감사가 포상 신청을 올리고 한 달 뒤 어사가 들이닥쳐 현청 금고를 잠가버린 뒤 현감을 파면하고 품계 또한 강등해버렸다는 뜻이다.(1826년 5월 21일 ‘승정원일기’)
왼쪽은 1826년 7월 건립된 남포현감 성달영 영세불망비. 오른쪽은 그해 9월 건립된 어사 김정희 영세불망비. 성달영은 그해 5월 어사 김정희에게 비리가 적발돼 현장에서 파면됐다.
때는 탐학에 질린 농민들이 팔도에서 죽창을 들던 민란의 시대였다. 보고서 다음 날 충청우도 전·현직 수령 12명이 처벌을 받았다. 탐관오리를 소탕해버린 이 암행어사 이름이 김정희, 세한도를 그린 그 추사 김정희다.
김정희 손에 들어간 남연군묘 名茶
김정희는 재주 많은 예술가요 학자였고 유능하고 꼼꼼한 행정가였다. 지난달 소유자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세한도(歲寒圖)’는 1844년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됐을 때 그린 대표작이다.
글씨는 말할 필요도 없다. 북한산 꼭대기에 있는 신라 진흥왕순수비 정체를 밝혀낸 금석학 전문가이기도 했다(김정희는 자기가 이 비석 정체를 밝혔노라고 손수 또박또박 ‘김정희 다녀간다’고 두 번이나 비석에 낙서를 새겨 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김정희가 자기 벗에게 편지를 쓴다. ‘송나라 때 만든 소룡단(小龍團) 한 덩이를 얻었다. 기이한 보물이다. 와서 보고 싶지 않나?’(정민,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 김영사, 2011) 1852년 12월 19일 다반(茶伴)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다. 함경도 북청 유배 생활을 마치고 경기도 과천에 자리를 튼 해다. ‘소룡단’은 송나라 때 명차다. ‘용단승설(龍團勝雪)’이라고도 한다. 700년 전 송나라 때 황실 진상 차가 손에 들어왔다는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흥선대원군이 석탑을 부수고 자기 선친을 모신 남연군묘. 그 석탑에서 나온 차 덩이 네 개 가운데 하나가 김정희에게 흘러갔다.
‘흥선대원군이 덕산현에 묏자리를 보러 갔다가 고려 옛 탑에서 용단승설 네 덩이를 얻었다. 내가 하나를 얻어 간직하였다.’(이상적·李尙迪, ‘기용단승설’, 은송당집 속집, 정민, ‘한국의 다서’, 김영사, 2020, 재인용)
이 글들을 읽어보면 이상적(李尙迪)이라는 사람이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용단승설을 얻었고, 그 차가 김정희 손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위 ‘세한도’ 오른쪽 위를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藕船是賞(우선시상)’. ‘우선, 보시게나.’ 우선(藕船)은 이상적의 호다. 이상적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김정희를 스승으로 모셨던 사람이다. 그 착한 제자에게 김정희가 그려준 그림이 ‘세한도’다. 그리고 그 이상적이 대원군으로부터 기이한 보물 ‘용단승설’을 얻었다는 것이다. 700년 된 송나라 차와 세한도와 김정희. 마치 기차와 고등어처럼 연결될 수 없는 사물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곳이 내포요, 남연군묘다.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했던 제주 대정에 있는 제주추사관. 세한도에 나오는 집과 소나무를 본따 지었다.
남연군묘와 송나라 차 ‘용단승설’
이상적은 순조 때 역관이며 시인이다. 그의 문집 ‘은송당집(恩誦堂集)’ 속집에는 ‘기용단승설(記龍團勝雪·용단승설을 기록함)’이라는 글이 들어 있다. 앞서 말했듯, 이 글에 흥선대원군이 남연군 묏자리에 있던 탑에서 용단승설 네 덩이를 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상적에 따르면 탑에서 나온 차는 ‘표면에 용을 만들어 넣었고 옆에는 勝雪(승설) 두 글자가 음각돼 있었다. 사방 한 치에 두께는 절반이었다.’ 지금 우리가 흔히 작설차라 부르는 엽차(葉茶)가 아니라 ‘덩어리’ 차다. 이 덩어리를 떼서 차 맷돌로 곱게 갈아 물에 타서 마시는 농차(濃茶)다. 원나라 때까지 중국에서 흔했던 다도였고, 고려에서도 유행했던 다도였다.
매천 황현 또한 이 에피소드를 ‘매천야록’에 기록해놓았다. 1866년 오페르트 일행이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달아난 이야기 끝부분이다. ‘대원군이 이건창에 장례 치른 이야기를 해주며 이렇게 말했다. “탑을 헐고 보니 그 속에 백자 2개, 덩어리차(團茶·단차) 2병, 사리 3개가 있었다.”’(황현, ‘매천야록’ 1권, ‘보덕사 창건’)
왜 그런 귀한 차가 탑 속에 있었을까. 이상적 글에 이런 부분이 있다. ‘고려승 의천과 지공, 홍경 무리가 앞뒤로 경전을 구하려고 송나라를 계속 왕래했다. 이들이 다투어 이름난 차를 구입해 불사(佛事)에 바쳤고, 심지어는 석탑 안에 넣어두기까지 했다.’ 왕실 원찰이기도 했던 가야사를 창건할 때, 그 창건주들이 그 귀한 차를 탑에 봉양했다는 뜻이다. 탑에서는 작은 동불(銅佛)과 니금경첩(泥金經帖), 사리와 침향단, 진주도 함께 나왔다. 그리고 그 차 한 덩이를 대원군이 자기에게 줬다고 했다.
이상적과 세한도
이상적은 김정희의 제자다. 스승 김정희는 벼슬살이 기간 유배를 세 번 당했다. 고금도에 한 번, 제주도에 한 번, 그리고 함경도 북청에 한 번. 그 가운데 1840년 제주 유배가 9년으로 가장 길었다. 그 세 차례 유배 동안 물심으로 뒤를 돌봐준 사람 가운데 제자 이상적이 있었다.
직업이 역관인지라, 이상적은 북경에 드나들며 귀한 책을 스승에게 보냈다. 1844년 이상적이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이라는 120권짜리 책 전질을 스승에게 선물했다. 그 감동과 고마움에 그려준 그림이 ‘세한도’(1844년)다. 제자는 선물받은 그림을 북경으로 가져가 명사들로부터 감상문을 받아 그림 뒤에 덧붙였다. 위 사진 왼쪽에 그 글들이 그림만큼 길게 붙어 있다.
김정희는 제주에 유배된 김정희는 집 주변을 탱자나무로 에워싼 집에 격리되는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았다.
세한도, 용단승설 그리고 김정희
그런데 인연은 끝이 아니었다. 1848년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김정희는 또 3년 뒤 1851년 철종 2년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당했다. 그때 나이가 예순다섯 살이었다.
늙은 나이에 유배 생활을 하는 스승이, 이 극진한 제자는 몹시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때 스승에게는 호(號)가 여럿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승설(勝雪)’이었다. 스물세 살 때 북경에서 맛본 용단승설차를 잊지 못해 지은 자호다. 유배에 지친 그 승설 스승에게 제자 이상적이 자기가 간직하고 있던 용단승설차를 선물했다. 김정희는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난 뒤 차를 함께 즐기던 초의선사에게 “송나라 때 만든 소룡단(宋製小龍團·송제소룡단)을 얻었다”고 자랑한 것이다.
일본 후지타미술관(藤田美術館) 소장 고이도다완(古井戸茶碗).
조선에 없는, 다완(茶碗)의 비밀
결론을 내리면, 천하의 대원군과 천하의 역관과 천하의 행정가 겸 예인(藝人)이 하나같이 뻐길 정도로 귀한 차가 충청우도 덕산현 산골짜기 사찰 탑에 700년 동안 숨어 있었다. 그 예인은 한때 충청우도를 휩쓸며 탐관오리를 벌벌 떨게 만든 암행어사였고.
그런데 이상하다. 용단승설차 같은 농차(濃茶)를 마시는, 입 넓은 다완(茶碗)은 지금도 보기 드물다. 조선에서는 농차가 아니라 엽차를 마셨다. 청나라 또한 조선과 같은 엽차가 주류였다. 그 다완은 바다 건너 일본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애지중지했던 ‘이도다완(井戶茶碗)'이 그 예다. 왜? 비밀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1391년 내린 칙령에 숨어 있다. “백성을 심하게 노동시키는 용단차 제조를 금지한다(以重勞民力罷造龍團·이중로민력파조룡단).”(1391년 9월 16일 ‘태조고황제실록’) 황제 칙령 하나가 아득한 후세까지 미친 영향에 대하여, 다음 주는 <주원장의 용단차 금지령과 나비효과>다.
박종인 선임기자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역사가 됩니다. 땅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그게 역삽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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