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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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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공세리 성당 공세곶고지

by 한국의산천 2020. 5. 21.

아산 공세리 성당 [2020 · 5 · 21 · 목요일 맑음]

 

공세리 가는 길

공세리>라는 마을이름은 조선시대 충청도 서남부의 조세를 보관하던 공세창(貢稅倉)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평택에서 아산만방조제를 건너면서 사거리 고가도로 인터체인지 너머로 숲이 우거진 얕은 산이 보이고 그 산위에 뾰족한 첨탑이 어렴풋이 보인다

 

공세리 마을에서 도로를 벋어나 조금 들어가면 성당주차장이 나오고 언덕을 오르면서 숲 속에 조금씩 자태를 보여주는 공세리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손꼽힌다.

 

아산 공세리 성당은 한국 카톨릭교의 3대 요람지의 하나로 손꼽히는 내포지역에 위치해 있다.

 

 

 

▲ 공세리 마을 언덕에 우뚝 서있는 성당

 

공세리성당 貢稅里聖堂] 설립일시 : 1895년 6월  설립자 : 드비즈(Devise, 成一論)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천주교 대전교구 소속 성당으로 1895년 6월양촌성당(陽村本堂, 구합덕성당의 전신)에서 분리 창설되었으며,

공세리란 명칭은 조선시대 충청도 서남부의 조세를 보관하던 공세창(貢稅倉)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충청도 내포(內浦) 지역에 위치한 공세리 일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에 이미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다.

 

이 후 박해기를 거치면서도 신앙을 보존하던 이 지역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에는 양촌본당의 관할 아래 있다가 1895년 6월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가 공세리로 부임하면서 본당이 설립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이미 매입한 10칸 정도의 기와집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꾸몄고, 1897년 6월에는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공세창이 있던 일대를 매입한 다음, 1899년 그 자리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또 1905년에는 조성학당(1927년 폐쇄)을 세워 교육 사업에도 앞장서 공세리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편 1920년대 들어 신자수가 증가하자 기존의 성당으로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지휘 감독하여 1922년 9월에 현재의 고딕 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이 후 9대 주임 이인하(李寅夏) 신부는 1958년 초에 강당을 신축하였고, 1971년 1월에는 13대 주임 김동욱(金東旭) 신부가 성당을 증축하고 별관을 완공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건축된지 120년이라는 긴 역사를 지닌 공세리 성당은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성당과 오래된 노거수가 숲을 이르고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하여 언제나 아름다운 곳이다.

풍경이 아름답기에 영화촬영과 드라마 촬영지로도 자주 나오는곳이다

 

공세리 성당은 천주교 초기 순교성당이라는 종교적 가치도 훌륭하지만 소박한 정신과 우아한 건축적 미감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단정한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내포지역은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의 못자리'라 불릴 만큼 한국천주교역사에 중요한 중심지이다.

공세리 성당에는 1801-1873년 신유·병인박해 때 이 지역에서 순교한 32위의 순교자들을 모시고 있는 순교성지로서 더욱 경건하고 의미 있는 곳이다.

 

 

 

 

 

 

 

 

 

 

 

 

 

▲ 성당 언덕에서 내려보이는 공세리 마을

 

 

 

공세리 성당의 가을 그리고 겨울 풍경

 

 

 

아산 공세곶고지

 

 

공세곶고지 (공진창)

성격 : 창고터, 조창터 

건립시기·연도 : 1478년(성종 9)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조선시대 공세곶창[공진창] 유적.

아산 공세곶고지는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일대가 조선시대 해운의 요충지였으며, 조선시대의 조운 제도와 주요 조창의 하나였던 공세곶창 [공진창]의 번성과 축소, 폐지의 변화 과정을 잘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다.

 

아산 공세곶고지는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193-1번지에 있다.

국도 39호선[아산로]의 공세교차로에서 서쪽으로 600m 정도의 지점이다.

공세곶(貢稅串)은 영인산 북서쪽 산줄기의 입암산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신풍산 북쪽에 거북 목처럼 작은 봉우리로 형성된 곶이다.

내륙 깊숙이 형성된 아산만의 가장 안쪽에 바다로 돌출되어 있는 수로 교통의 요지로, 서해의 바닷물이 그 좌우까지 들어왔다. 공세리 북쪽은 안성천 하구이고, 서쪽 약 4㎞ 지점은 삽교천 하구여서 조선시대에는 흔히 두 하천이 만나는 곳으로 표현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에 의하면, 공세곶은 1425년(세종 7)부터는 아산현의 세곡(稅穀)을 운송하는 조창(漕倉) 기능을 갖기 시작했다.

그 뒤 1478년(성종 9)에 삽교천 하류에 있던 면천 범근내포의 조창 기능이 공세곶창으로 통합되고 수납 지역이 확대되어 금산을 제외한 지금의 충청남도 전 지역과 경기도 평택, 충청북도 옥천, 청주 등을 포함하여 충청 지역 40개 군현의 세곡을 모아 조운하는 주요 조창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창사(倉舍)가 없어 연해안 포구에 노적하였는데, 1523년(중종 18)에 이르러 80여 칸의 창고를 짓고 ‘공진창’이라 일컫게 되었다.

1631년(인조 9)에는 창고를 둘러싸는 창성(倉城)을 축조하였는데 둘레가 380척[115.14m], 높이가 5척 5촌[약 1.7m]쯤이었다.

공진창에는 세곡미 800석을 적재할수 있는 15척의 조운선과 720여 명의 조군[조졸]이 있었으며, 이를 관리하는 해운판관[종5품]이 상주하는 관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로 민간 운송업이 점차 활발해져 수납 지역이 점차 축소되고, 1762년(영조 38) 해운창 제도가 폐지되어 해운판관 대신 충청도사가 조운을 담당하게 되었다.

 

공진창은 인근 여섯 개 고을, 이후 세 개 고을의 조운만 이루어지게 되자 마침내 아산현감이 관리하게 되었다.

1865년(고종 2)에는 그나마 조창제가 폐지되어 공진창도 기능을 잃게 되었다. 방치되고 있던 공진창 터 일부는 1897년에 공세리성당의 주임신부였던 에밀 피에르 드비즈가 매입하여 성당을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산 공세곶고지의 일부는 공세리성당, 일부는 인주농협 창고와 사무실로 이용되고 일부는 민가가 들어서 있다.

창성의 흔적으로 남벽 쪽의 길이 10m, 높이 4m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으며, 남문거리에 여섯 기의 삼도해운판관비가 남아 있다.

 

주변에는 아산만방조제[1974년]와 삽교천방조제[1979년]가 축조되었고, 공세곶 바로 북쪽은 국도 39호선과 국도 24호선이 교차하는 교차로가 조성되어 있다.

한편, 아산 공세곶고지 북쪽 일대는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공세곶창은 영광의 법성포창, 익산의 덕성포창, 강음의 조읍포창과 더불어 4대 해군창의 하나였다

1478년(성종 9)면천(沔川) 범근내포(犯斤乃浦)의 공세곶창을 폐지하고 이곳에 새롭게 조창을 세웠다.

처음에는 창고가 없이 노적하다가 1523년(중종 18)에 비로소 창고 80칸을 건축하였다. 현재 창고지(倉庫址) 주변에 축조한 성벽이 약 680m 정도 남아 있다.

 

이곳에 공주목 이하 임천ㆍ한산ㆍ정산ㆍ회덕ㆍ진잠ㆍ연산ㆍ이산(노성)ㆍ부여ㆍ석성ㆍ연기 등 12군현의 세미와 홍주목 이하 서천ㆍ서산ㆍ태안ㆍ면천ㆍ온양ㆍ평택ㆍ홍산ㆍ덕산ㆍ청양ㆍ대흥ㆍ비인ㆍ남포ㆍ결성ㆍ보령ㆍ아산ㆍ신창ㆍ예산ㆍ해미ㆍ당진 등 19군현의 세미를, 그 외 청주목 이하 천안ㆍ옥천ㆍ문의ㆍ직산ㆍ회인 등 6개 현의 공세미 등 합계 39개 목ㆍ군ㆍ현의 세미를 보관하게 하였다.

이 세미들은 다시 수로를 따라 선박으로 한양까지 운반되었다. 해운 판관을 두어 이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곳에는 1672년(현종 13)에 세운 ‘삼도해운판관비(三道海運判官碑)’와 1708년(숙종 34) 해운판관 이의만(李宜晩)의 불망비(不忘碑), 1653년(효종 4) 판관 한진의(韓鎭倚)의 선정비를 비롯해 해운 판관과 관련한 8기의 비가 전하고 있다.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언덕은 100여 년 전 터를 잡은 고딕양식의 가톨릭 성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조선 중기에 공세리 언덕은 충남의 40여개 군현에서 보낸 조세미를 보관하던 조창 ‘공세곶창’이 있었다. 기록으로 남은 공세곶창의 실체를 밝히는 발굴이 첫 삽을 떴다.

 

아산시는 11일 아산시 인주면 공세곶창터(충청남도 기념물 제21호)에서 금강문화유산연구원에 의뢰해 고고학적 발굴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발굴지는 공세리 성당 아래 언덕 5000㎡(사진 원안)로, 지난해 시굴에서 주춧돌 등 건물지와 기와가마 등이 확인된 곳이다.

 

아산시 문화유산과 학예연구사는 “공세곶창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주변에 성곽이 축조된 조창으로 그 중요성이 남다르다”며 “전남 영광의 법성진 조창도 성안에 있으나 진성을 창성으로 활용한 것일 뿐 조창을 위해 성을 축조한 곳은 공세곶창 뿐”이라고 전했다.

아산시는 2018년 조창이 있던 창성 안 1만8435㎡ 가운데 5000㎡를 매입한 데 이어 지난해 공세곶창지 종합정비계획을 마련했다.

 

시는 발굴을 통해 공세곶창지의 시대와 구조, 성격 등을 규명해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을 추진할 계획이다. 지원구 학예연구사는 “발굴 조사를 진행하면서 토지 매입, 성곽 복원을 해 공세곶창이 원형을 회복한다면 공세리 성당과 함께 역사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세리 성당 >>> https://koreasan.tistory.com/15607885

 

아산 공세리 성당

명화처럼 아름다운 아산 공세리 성당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의 공세리(貢稅里)는 바다와 접해있기에 조선시대 수로교통의 요충지여서 조세미를 모아두는 공세곶창(공진창)이 있었으며,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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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리 성당 >>> https://koreasan.tistory.com/15607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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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리 성당 가을풍경 >>> https://koreasan.tistory.com/4998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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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