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기행](3) 강화 초지포구
글 박석진·사진 김순철기자 입력 : 2009.05.08 02:00
립스틱 짙게 바르고 밤을 준비하는 포구
바다가 흑백의 모노톤으로 저문다. 포구의 밤, 낮 동안 움츠렸던 사람들은 한 잔 술의 힘을 빌어 저마다 젊은 날의 무용담을 쏟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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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인데도 알싸하게 콧 끝을 자극하는 찬 바람 탓인가,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군데 군데 시뻘건 흙더미가 쌓여 있는 포구 입구의 모습 때문인가. 강화도 길상면 초지리 초지포구의 첫 인상은 어딘가 성하지 못한 듯 했다. 부서져 상처가 생기고 다시 아무는 과정을 수 차례 반복한 듯 하지만, 초지포구는 변화의 과정에 대해 말이 없었다. 고요한 초지포구의 입구에 멍하니 서 있자니 문득 황지우 시인의 시 첫 구절이 생각났다. ‘슬프다 /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 모두 폐허다…’
현재 사람과 배가 들고나는 초지포구 위치는 30년 전 바닷물이 들던 자리였다. 본래 초지포구 자리는 이보다 500m 쯤 뒤로 물러난 곳에 있었다. 바닷물이 3m 정도 깊게 들어오던 그때 초지포구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린시절 마음 놓고 뛰어들던 바닷물에 쉽사리 다가갈 수 없다. 바닷물을 메워 반듯한 길을 냈고, 시멘트를 발라 평평한 신(新)포구를 만들었다. 포구 뒷편 한 자리에는 일렬로 하나 둘씩 횟집이 생겼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어느새 13개로 늘어난 횟집들은 횟집 타운을 이뤘다. 횟집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깃배를 함께 가지고 있어 가게 이름도 남양호, 황용호 등 배 이름을 그대로 땄다. 초지포구는 이제 누군가에겐 바닷내음 물씬 풍기는, 달디단 회를 맛 볼 수 있는 곳이지만 또다른 이들에겐 추억만 덩그러니 남은 자리가 됐다.
흙 먼지가 날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자갈을 깔아놓은 주차장을 뒤로 하고 초지포구가 온전히 드러난 모습을 보기 위해 포구 가까이로 걸어 들어갔다. 현대식 건물로 약 3~4m 높이로 낮게 지은 횟집 끝을 감싸고 돌아서니 군데군데 상채기 난 듯한 좀 전과는 다른 포구의 얼굴이 드러났다. 잠잠한 바닷물이 닿은 포구 입구에 묶여 있는 고깃 배, 생선 회 값을 흥정하는 상인과 손님의 대화. 이제는 포구의 기능을 잃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활기 넘치는 모습에 잠시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눈을 다시 크게 떠 보니 생선을 잡아 널어놓은 모양새나 장화를 신은 채 돌아다니는 상인들 모습이 영락없이 힘찬 포구의 광경이었다.
새로운 초지포구에는 아직도 20여척의 고깃배가 넘실거리며 만선을 꿈을 품고 떠났다 돌아온다. 대부분 1~7t의 비교적 작은 어선이다. 이날 아침 나절 바람이 강하게 불어 몇몇 고깃 배는 출항을 포기했고, 나머지 몇 척은 고기잡이를 강행했다. 그 중 물 때를 맞춰 오전 7시쯤 초지포구를 떠났던 ‘일심호’는 오후 1시가 지나서야 모습을 보였다.
주말 관광객 평균 2000명…관광명소로 변모한 초지진
조선시대 병인·신미양요 및 일본함 운양호의 침공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치뤘던 격전지. 초지진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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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포구에 뱃머리를 댄 일심호에서는 지난해에 비해 풍년을 맞은 숭어를 잡아 올리느라 분주한 손길이 이어졌다. 얼핏 봐도 50㎝를 훌쩍 넘긴 숭어를 끌어올리는 황보연 선장(55)이 흐뭇한 미소를 띄며 포구 머리에 올라섰다. “우리 횟집에서 쓸 양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이웃 횟집에 팔아넘겨. 그래서 여기서 파는 생선은 그놈이 그놈이야.” 숭어로 가득찬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어보이며 말을 잇는 황 선장의 설명대로 초지포구 횟집들은 직접 잡은 생선을 쓴다.
계절만 맞으면 쭈꾸미나 농어 맛도 볼 수 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꽃게도 심심찮게 초지포구로 들어온다. 그 때문인가. 평일 오전인데도 친구 또는 가족끼리 허기진 배를 채우러 삼삼오오 초지 횟타운을 찾아 들었다. 규모가 작은 초지포구 전체가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중형차 두대가 겨우 오고갈 만한 횟집 입구 도로가에는 포구를 향해 일렬로 주차한 차들로 빼곡했다. 흥정 끝에 만족스런 가격에 산 새우젓을 한 가득 실은 자동차 한대가 주차된 차들 사이로 몸을 꼬며 아슬아슬하게 횟집을 지나갔다. 사람들이 숭덩숭덩 인심 좋게 썰어 놓은 숭어 회를 집어 먹는 횟집 안 풍경도 포구의 운치를 한 껏 돋웠다. 고무 대야에 물을 받아 담궈 놓은 멍게며 해삼도 넘치는 싱싱함으로 빛을 발했다.
추억만 덩그라니 남은 자리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포구의 터줏대감을 찾았다. 포구에 얽힌 이야기를 귀동냥할 셈이었다. 13개 횟집 맨 마지막 집에서 40년 동안 옛 초지포구와 신 초지포구를 지킨 ‘영순호’ 김영묵 대표(67)를 찾아냈다. 눈에 띄게 신선한 횟감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을 그는 단박에 풀어줬다. 그는 초지포구를 출발한 고깃 배들의 이동 경로를 손을 뻗어 설명해줬다. 초지포구를 떠난 배들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이웃한 대명항을 지난 장봉, 외포리를 거쳐 덕적도로 빠져나간다고 귀뜸했다.
한가로이 나물을 캐는 가족의 모습이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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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포구를 떠난 배들이 때마다 건져올리는 생선 종류가 다르다. 2~3일에 한번씩 배를 띄워 잡아 들인 생선은 초지포구 횟집 타운에서 다 소비될 정도다. 다만 광어는 장봉도에서 공수해 팔고 있다. 직접 잡아들이는 양이 횟집 타운 소비를 못 쫓아오기 때문이다.
2002년 8월 초지대교가 개통된 뒤로는 회 타운 손님도 제법 늘었다. 10여개 횟집이 들어선 이곳에만 하루 평균 100~120팀은 다녀간다고 상인들은 전했다. 초지포구에서 차로 5분도 걸리지 않는 초지진(草芝鎭)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곧장 이곳 포구 횟집으로 이어져 하루 사이 매출이 2배로 뛰기도 한다. “장사하는 사람인데 손님 늘어 좋은 건 말할 필요도 없지. 아쉬움도 물론 있지. 강화에 포구가 너무 많아서 큰 지원을 못받아. 그냥 이대로 사는거야.” 추억 속 공간이었던 초지포구가 어느새 생계의 터전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끝을 모르게 펼쳐진 바다에 홀려 초지포구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먹잇감을 찾아 요란스럽게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이 사람 머리에 닿을 듯 낮게 날아들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영악해질대로 영악해진 갈매기들이 유난히 포구 끝으로 몰려들었다.
배에서 고기를 내리는 동안 실수로라도 생선 한점 떨어뜨려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무서운 기세로 날아드는 갈매기 사이를 뚫고 용기를 내 발끝에 힘을 주고 포구 끝자락에 섰다. 초지포구 오른쪽으로 강화와 다른 도시를 잇는 초지대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황색으로 지붕을 칠한 대명항 횟타운도 눈에 띈다.
35년 동안 초지포구 근처에 살았다는 강화 토박이 김명호씨(46)의 기억에는 초지포구와 대명항 사이에 나룻배가 오갔다. 실제 30년 전까지만해도 이곳 사람들의 이동 수단은 나룻배가 유일했다. 그 시절 모습이 지금보다 운치가 있을 법하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초지포구 끝자락에 걸려있는 초지진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강화도와 강화해협의 수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초지진이지만 비바람에 무뎌진 탓인지 단 한곳의 헛점도 용납치 않는 요쇄의 모습은 없었다. 다만 초지진 뒤로 길게 뻗은 초지대교가 그림처럼 다가왔다. 초지포구를 찾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때 가장 많이 배경으로 삼는 장소란 말이 거짓말은 아닌 듯 했다.
포구 한 켠의 진흙밭을 차지한 어린 동심들이 뻘 조개를 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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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에 도착했을 때 거무스름한 뻘을 드러냈던 바닥이 어느새 들어찬 바닷물 속에 가려 사라졌다. 썰물 때가 끝나고 밀물 때가 온 모양이다. 자연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들고 나는 시점을 알아채고 있었다.
갑작스레 날이 흐려지면서 포구 위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가득하더니 어느 순간 어스름이 몰려들었다. 초지대교를 떠받친 12개 교각 그림자가 바다 위에 번졌다. 2년 전 초지포구를 드나드는 배를 위해 만들었다는 초록색 등대도 순간 흐릿해졌다.
다시 만선의 꿈을 품고 떠날 채비를 하는 배들은 넘실거리는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넉넉하진 않지만 비교적 수확이 좋았던 숭어 잡이를 끝낸 영산호도 부산한 모습이었다. 내일은 물 때가 더 일러져 출항 준비도 재촉해야 한다고 했다. 40년 뱃 일에 주름이 깊게 패인 만흥호 황수연 선장(50)의 그물 걷는 손길도 덩달아 바빠졌다. 거친 바닷 일에 뭉툭해진 그의 손마디에는 자신과 가족의 삶을 이어진 포구를 지키려는 절실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숭어 풍년에 횟집타운 북적
초지포구로 가기 위해 초지대교를 건너면 포구보다 초지진(草芝鎭)이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초지진은 조선조 고종 8년(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함 모노카시호 등의 포격으로 군기고와 화약고를 모두 잃었고, 고종 12년 때 일본 군함 운요호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하지만 현재는 주말 평균 관광객 2000명이 찾아드는 관광명소로 변모해 초지진 관광안내소와 공영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초지진 관광안내소에는 초지진 뿐만 아니라 강화도 전체 관광지에 대한 정보를 책자로 담아 배포하고 있다.
초지진 관광안내소를 지나 건너편에 마련된 계단식 전망대에 오르면 초지대교는 물론 초지포구까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겨우 15개 계단 위에 돌을 쌓아 만들어진 초지진은 노송이 우거진 성곽을 따라 초지포구 쪽으로 돌아가면 입구를 찾을 수 있다. 5월에 찾은 초지진 내부에는 철 맞은 철쭉이 피어 활기를 더하고 있다. 또 4m 높이, 원형으로 만들어진 초지돈대에서는 초지리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외 초지진 내부에는 조선시대 대포 1점이 전시돼 있고, 3개의 포좌가 있다.
초지진과 강화의 역사를 더 깊이 알고 싶은 이들은 문화관광해설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강화 전역에서 활동하는 50명의 문화관광해설사 중 일부는 초지진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주로 단체손님이 초지진을 찾았을 때 문화 해설에 나서지만, 가족 단위로 찾은 관광객을 위해서도 해설을 해준다. 또 일본, 프랑스, 독일 등에서 이곳을 찾는 방문객이 늘어 외국인 전문 해설사도 있다.
<글 박석진·사진 김순철기자>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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