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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초지포구 황산도 황산포구 둘러보기

by 한국의산천 2020. 1. 18.

토요일 오후 쌀쌀하면서도 하늘은 쾌청

대명리에서 초지대교를 건너서 초지포구와 황산도 황산포구를 둘러보았다

 

 

 

 

 

 

 

바닷가에서 잃어버린 꿈과 시간 그 흔적들을 만나다

그곳들을 방랑하며 우리들의 잃어버린 꿈을 만나고,

삶의 시간들이 피워내는 가장 따뜻한 형상의 꽃들을 만난다.

 

'가슴아픈 이들은 포구로 가라'

 

태고적부터 변함없는 파도소리는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고,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개펄은 온갖 썩어가는 것들을 되살려냈다.

육지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인 포구마을의 불빛은 살아갈 힘을 선사했다


“정신이 상쾌하고 영혼의 상처가 없는 사람에게는 바다여행이 소용없다.

그러나 쓸쓸하고 혼란스럽고 가슴아픈 사람들은 포구로 가라”고 곽재구 시인(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은 말했다

 

 

 

진정한 축제의 시간이란

온몸으로 자신을 느끼는 시간이다 - 시인 곽재구

 

 

 

 

 

 

 

 

 

 

 

 

▲ 대명항 바로 바다 건너편에 있는 초지포구의 회센타

 

 

 

 

▲ 초지포구에서 바로 앞으로 건너보이는 대명항

 

 

 

[포구기행](3) 강화 초지포구

경향신문 입력 : 2009.05.08 02:00

 

립스틱 짙게 바르고 밤을 준비하는 포구

 

 

바다가 흑백의 모노톤으로 저문다. 포구의 밤, 낮 동안 움츠렸던 사람들은 한 잔 술의 힘을 빌어 저마다 젊은 날의 무용담을 쏟아낸다.

   
5월인데도 알싸하게 콧 끝을 자극하는 찬 바람 탓인가,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군데 군데 시뻘건 흙더미가 쌓여 있는 포구 입구의 모습 때문인가. 강화도 길상면 초지리 초지포구의 첫 인상은 어딘가 성하지 못한 듯 했다. 부서져 상처가 생기고 다시 아무는 과정을 수 차례 반복한 듯 하지만, 초지포구는 변화의 과정에 대해 말이 없었다. 고요한 초지포구의 입구에 멍하니 서 있자니 문득 황지우 시인의 시 첫 구절이 생각났다. ‘슬프다 /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 모두 폐허다…’


현재 사람과 배가 들고나는 초지포구 위치는 30년 전 바닷물이 들던 자리였다. 본래 초지포구 자리는 이보다 500m 쯤 뒤로 물러난 곳에 있었다.

바닷물이 3m 정도 깊게 들어오던 그때 초지포구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린시절 마음 놓고 뛰어들던 바닷물에 쉽사리 다가갈 수 없다. 바닷물을 메워 반듯한 길을 냈고, 시멘트를 발라 평평한 신(新)포구를 만들었다. 포구 뒷편 한 자리에는 일렬로 하나 둘씩 횟집이 생겼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어느새 13개로 늘어난 횟집들은 횟집 타운을 이뤘다. 횟집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깃배를 함께 가지고 있어 가게 이름도 남양호, 황용호 등 배 이름을 그대로 땄다.

 

초지포구는 이제 누군가에겐 바닷내음 물씬 풍기는, 달디단 회를 맛 볼 수 있는 곳이지만 또다른 이들에겐 추억만 덩그러니 남은 자리가 됐다.


흙 먼지가 날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자갈을 깔아놓은 주차장을 뒤로 하고 초지포구가 온전히 드러난 모습을 보기 위해 포구 가까이로 걸어 들어갔다. 현대식 건물로 약 3~4m 높이로 낮게 지은 횟집 끝을 감싸고 돌아서니 군데군데 상채기 난 듯한 좀 전과는 다른 포구의 얼굴이 드러났다.

 

잠잠한 바닷물이 닿은 포구 입구에 묶여 있는 고깃 배, 생선 회 값을 흥정하는 상인과 손님의 대화. 이제는 포구의 기능을 잃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활기 넘치는 모습에 잠시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눈을 다시 크게 떠 보니 생선을 잡아 널어놓은 모양새나 장화를 신은 채 돌아다니는 상인들 모습이 영락없이 힘찬 포구의 광경이었다.


새로운 초지포구에는 아직도 20여척의 고깃배가 넘실거리며 만선을 꿈을 품고 떠났다 돌아온다. 대부분 1~7t의 비교적 작은 어선이다. 이날 아침 나절 바람이 강하게 불어 몇몇 고깃 배는 출항을 포기했고, 나머지 몇 척은 고기잡이를 강행했다. 그 중 물 때를 맞춰 오전 7시쯤 초지포구를 떠났던 ‘일심호’는 오후 1시가 지나서야 모습을 보였다.

 

 
주말 관광객 평균 2000명…관광명소로 변모한 초지진

 

 

 

조선시대 병인·신미양요 및 일본함 운양호의 침공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치뤘던 격전지. 초지진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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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포구에 뱃머리를 댄 일심호에서는 지난해에 비해 풍년을 맞은 숭어를 잡아 올리느라 분주한 손길이 이어졌다. 얼핏 봐도 50㎝를 훌쩍 넘긴 숭어를 끌어올리는 황보연 선장(55)이 흐뭇한 미소를 띄며 포구 머리에 올라섰다. “우리 횟집에서 쓸 양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이웃 횟집에 팔아넘겨. 그래서 여기서 파는 생선은 그놈이 그놈이야.” 숭어로 가득찬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어보이며 말을 잇는 황 선장의 설명대로 초지포구 횟집들은 직접 잡은 생선을 쓴다.


계절만 맞으면 쭈꾸미나 농어 맛도 볼 수 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꽃게도 심심찮게 초지포구로 들어온다. 그 때문인가. 평일 오전인데도 친구 또는 가족끼리 허기진 배를 채우러 삼삼오오 초지 횟타운을 찾아 들었다. 규모가 작은 초지포구 전체가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중형차 두대가 겨우 오고갈 만한 횟집 입구 도로가에는 포구를 향해 일렬로 주차한 차들로 빼곡했다. 흥정 끝에 만족스런 가격에 산 새우젓을 한 가득 실은 자동차 한대가 주차된 차들 사이로 몸을 꼬며 아슬아슬하게 횟집을 지나갔다. 사람들이 숭덩숭덩 인심 좋게 썰어 놓은 숭어 회를 집어 먹는 횟집 안 풍경도 포구의 운치를 한 껏 돋웠다. 고무 대야에 물을 받아 담궈 놓은 멍게며 해삼도 넘치는 싱싱함으로 빛을 발했다.


추억만 덩그라니 남은 자리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포구의 터줏대감을 찾았다. 포구에 얽힌 이야기를 귀동냥할 셈이었다. 13개 횟집 맨 마지막 집에서 40년 동안 옛 초지포구와 신 초지포구를 지킨 ‘영순호’ 김영묵 대표(67)를 찾아냈다. 눈에 띄게 신선한 횟감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을 그는 단박에 풀어줬다. 그는 초지포구를 출발한 고깃 배들의 이동 경로를 손을 뻗어 설명해줬다. 초지포구를 떠난 배들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이웃한 대명항을 지난 장봉, 외포리를 거쳐 덕적도로 빠져나간다고 귀뜸했다. 

 

 

한가로이 나물을 캐는 가족의 모습이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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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포구를 떠난 배들이 때마다 건져올리는 생선 종류가 다르다. 2~3일에 한번씩 배를 띄워 잡아 들인 생선은 초지포구 횟집 타운에서 다 소비될 정도다. 다만 광어는 장봉도에서 공수해 팔고 있다. 직접 잡아들이는 양이 횟집 타운 소비를 못 쫓아오기 때문이다.

 

2002년 8월 초지대교가 개통된 뒤로는 회 타운 손님도 제법 늘었다. 10여개 횟집이 들어선 이곳에만 하루 평균 100~120팀은 다녀간다고 상인들은 전했다. 초지포구에서 차로 5분도 걸리지 않는 초지진(草芝鎭)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곧장 이곳 포구 횟집으로 이어져 하루 사이 매출이 2배로 뛰기도 한다. “장사하는 사람인데 손님 늘어 좋은 건 말할 필요도 없지. 아쉬움도 물론 있지. 강화에 포구가 너무 많아서 큰 지원을 못받아. 그냥 이대로 사는거야.” 추억 속 공간이었던 초지포구가 어느새 생계의 터전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끝을 모르게 펼쳐진 바다에 홀려 초지포구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먹잇감을 찾아 요란스럽게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이 사람 머리에 닿을 듯 낮게 날아들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영악해질대로 영악해진 갈매기들이 유난히 포구 끝으로 몰려들었다. 배에서 고기를 내리는 동안 실수로라도 생선 한점 떨어뜨려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무서운 기세로 날아드는 갈매기 사이를 뚫고 용기를 내 발끝에 힘을 주고 포구 끝자락에 섰다. 초지포구 오른쪽으로 강화와 다른 도시를 잇는 초지대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황색으로 지붕을 칠한 대명항 횟타운도 눈에 띈다.

 

35년 동안 초지포구 근처에 살았다는 강화 토박이 김명호씨(46)의 기억에는 초지포구와 대명항 사이에 나룻배가 오갔다. 실제 30년 전까지만해도 이곳 사람들의 이동 수단은 나룻배가 유일했다. 그 시절 모습이 지금보다 운치가 있을 법하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초지포구 끝자락에 걸려있는 초지진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강화도와 강화해협의 수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초지진이지만 비바람에 무뎌진 탓인지 단 한곳의 헛점도 용납치 않는 요쇄의 모습은 없었다. 다만 초지진 뒤로 길게 뻗은 초지대교가 그림처럼 다가왔다. 초지포구를 찾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때 가장 많이 배경으로 삼는 장소란 말이 거짓말은 아닌 듯 했다.

 

 

 

포구 한 켠의 진흙밭을 차지한 어린 동심들이 뻘 조개를 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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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에 도착했을 때 거무스름한 뻘을 드러냈던 바닥이 어느새 들어찬 바닷물 속에 가려 사라졌다. 썰물 때가 끝나고 밀물 때가 온 모양이다.

 

자연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들고 나는 시점을 알아채고 있었다. 갑작스레 날이 흐려지면서 포구 위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가득하더니 어느 순간 어스름이 몰려들었다. 초지대교를 떠받친 12개 교각 그림자가 바다 위에 번졌다. 2년 전 초지포구를 드나드는 배를 위해 만들었다는 초록색 등대도 순간 흐릿해졌다.


다시 만선의 꿈을 품고 떠날 채비를 하는 배들은 넘실거리는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넉넉하진 않지만 비교적 수확이 좋았던 숭어 잡이를 끝낸 영산호도 부산한 모습이었다.

 

내일은 물 때가 더 일러져 출항 준비도 재촉해야 한다고 했다. 40년 뱃 일에 주름이 깊게 패인 만흥호 황수연 선장(50)의 그물 걷는 손길도 덩달아 바빠졌다. 거친 바닷 일에 뭉툭해진 그의 손마디에는 자신과 가족의 삶을 이어진 포구를 지키려는 절실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숭어 풍년에 횟집타운 북적


초지포구로 가기 위해 초지대교를 건너면 포구보다 초지진(草芝鎭)이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초지진은 조선조 고종 8년(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함 모노카시호 등의 포격으로 군기고와 화약고를 모두 잃었고, 고종 12년 때 일본 군함 운요호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하지만 현재는 주말 평균 관광객 2000명이 찾아드는 관광명소로 변모해 초지진 관광안내소와 공영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초지진 관광안내소에는 초지진 뿐만 아니라 강화도 전체 관광지에 대한 정보를 책자로 담아 배포하고 있다.


초지진 관광안내소를 지나 건너편에 마련된 계단식 전망대에 오르면 초지대교는 물론 초지포구까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겨우 15개 계단 위에 돌을 쌓아 만들어진 초지진은 노송이 우거진 성곽을 따라 초지포구 쪽으로 돌아가면 입구를 찾을 수 있다. 5월에 찾은 초지진 내부에는 철 맞은 철쭉이 피어 활기를 더하고 있다. 또 4m 높이, 원형으로 만들어진 초지돈대에서는 초지리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외 초지진 내부에는 조선시대 대포 1점이 전시돼 있고, 3개의 포좌가 있다.


초지진과 강화의 역사를 더 깊이 알고 싶은 이들은 문화관광해설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강화 전역에서 활동하는 50명의 문화관광해설사 중 일부는 초지진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주로 단체손님이 초지진을 찾았을 때 문화 해설에 나서지만, 가족 단위로 찾은 관광객을 위해서도 해설을 해준다. 또 일본, 프랑스, 독일 등에서 이곳을 찾는 방문객이 늘어 외국인 전문 해설사도 있다.

     
<글 박석진·사진 김순철기자 /경향신문>

 

 

 

 

 

 

 

 

 

 

 

 

 

 

 

 

 

 

 

 

 

 

 

 

호주머니

 

  - 윤 동 주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 대명항에서 바다건너 10시 방향에 보이는 황산도에 자리한 회센타

 

 

 

 

 

 

 

[포구기행](4)강화 황산포구

경향신문 입력 : 2009.05.15 02:00

 

밤 새 닻을 내린 포구는 ‘어머니의 자궁’

 

 

포구에 서면 어머니가 그립다. 닻을 내리고 밤을 샌 선외기 몇 척에게 포구는 어머니의 자궁과 같다.

   
진달래와 철쭉의 차이는 ‘잎’에서 시작한다. 진달래는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진 자리에서 잎이 돋는다. 철쭉은 꽃과 잎이 동시에 나거나 잎이 먼저 나고 꽃이 핀다. 진달래는 겨우내 바싹 말랐던 가지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꽃부터 피우고 본다. 앙상한 가지 끝에는 군더더기 없이 꽃들만 드문드문 핀다.


반면 철쭉은 푸릇푸릇한 잎이 깡마른 가지를 덮을 즈음 꽃을 펼쳐보인다. 잎과 꽃, 청과 홍이 어우러져 화려함을 자랑한다.


김포에서 강화도로 들어가는 초지대교를 기준으로 왼쪽이 황산포구, 오른쪽이 초지포구다. 두 포구는 거리 상 불과 2㎞ 남짓 떨어져 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진달래와 철쭉 만큼이나 다르다. 2002년 8월 초지대교가 생기면서 평일 대낮에도 관광객이 끊이지 않아 왁자지껄한 초지포구에 비해 황산포구는 여전히 조용하고 애닯다.

 

초지대교를 건너 방향을 왼쪽으로 틀었다. 길을 따라 1㎞ 가량 달리니 황산 어판장 입구를 알리는 팻말이 보였다.

네모 반듯한 팻말 앞쪽으로 낡디 낡은 나무배 한 척이 어판장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밝은 색 페인트를 새로 칠하긴 했지만 나무 판 마다 깊게 패인 상처는 세월을 짐작케 했다. 배는 마치 행인들에게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한다’고 외치고 있는 듯 했다.

 

입구를 따라 들어가니 황산도와 육지를 잊는 연륙교가 나타났다. 황산도는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딸린, 이름 그대로 섬이다.

초지리 간척지와 초지대교 맞은편인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 사이 수로 상에 있으며 육지와는 500여m 떨어져있다. 이 500m를 두 개의 연륙교가 이어주고 있다. 연륙교는 승용차가 두 대는 지날 수 없을 만큼 폭이 좁아 500m 사이를 두고 섬에 들어오려는 차와 나가려는 차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구름에 숨어있던 햇살이 황산포구 남단 갯벌에 은빛으로 내려앉고 있다.

‘배 안의 횟집’ 독특한 어판장


25년 전만해도 황산도에서 뭍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노를 저어야만 했다.

황산도에서 나고 자라 이곳 어촌계장이 된 금강호 선주 고현수씨(44)의 어린시절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소설같다.


섬 전체를 통틀어 고작 대여섯 가구가 살고 있었던 황산도에 학교가 있을리 없었고 고씨는 섬에서 강화도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했다. “장난인줄 아는가 보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나무 배 타고 학교에 다녔다니까. 옛날 일이 아니여.” 고씨는 연륙교가 생기기 전 배가 닿던 선착장 자리를 알려줬다.

 

연륙교가 생기기 전 배들은 지금의 연륙교 바로 앞 갯벌에 되는 대로 배를 대고 생선을 풀었다.

썰물 때가 되면 바닷물이 수 ㎞까지 빠져나가 갯벌이 천연 선착장을 만들어줬다.


배가 횟감을 쏟아낼 때 즈음이면 양 겨드랑이에 팔뚝만한 소주병을 낀 ‘주태공’들이 노를 저어 황산도로 들어와 질펀하게 먹고 마신 뒤 다시 제 갈길로 흩어졌다.

사는 사람이라고는 배를 부리는 대여섯 가구가 전부였고, 구멍가게나 술을 파는 주점도 없었기에 ‘술은 셀프’였단다. “와서 암만 마시고 놀아도 돌아갈 때 사람 빈 손으로 보내는 법은 없었지. 남기려고 파나, 있으니까 팔고 그래도 남으니까 더 퍼주는 거지.

”어린 시절 고씨의 눈에 비친 황산도는 부족함이 부족함을 채워 모자란 듯 풍족한 섬이었다. 고씨는 별 볼 것 없는 섬을 아직까지도 찾아주는 이들이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어촌계장 고현수씨가 운영하는 횟집앞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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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륙교를 건너자마자 왼쪽 도로로 들어서 모퉁이를 도니 황산도 어판장이 나왔다.

어판장 바로 옆으로 물이 빠져 민낯을 드러낸 선착장이 숨을 돌리고 있었다.

현재의 황산도 어판장은 초지대교 건너편에서도 눈에 띌 만큼 외관이 독특하다.

황산도 어민들은 지난해 12월 어판장을 새롭게 단장했다.


김포와 마주보이는 쪽 갯벌을 매립하고 그 위에 어선을 수 백배 확대시킨 듯한 모양으로 건물을 지었다. 그 건물 안에 횟집 14호가 들어 앉았다.

 

멀리서 보면 잘 만든 배 한 척이 갯벌 위에 떠있는 형상이다.

곳곳에 태극기를 달아 놓은 모습도 인상적이다.어민들은 초지대교가 생긴 이후 강화도를 찾는 관광객이 많아지자 눈길을 끌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비슷비슷한 포구, 특히 물 건너 김포 대명포구와 옆 동네 초지포구와의 차별화가 필요했다.

그 방법이 ‘배 안의 횟집’이었던 것이다.

초지대교를 건너는 운전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데는 확실히 성공했지만 너무도 반듯하고 깨끗해진 외관은 어쩐지 낯설었다.
 

 

 

초지대교 위에서 바라본 황산포구의 밤. 오른쪽으로 거대한 배모양의 황산어판장이 불을 밝히고 있다.

그 낯선 감정은 황산도가 걸어온 역사에서 비롯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황산도는 주목받는 섬이 아니었다. 1232년 고려는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지금의 강화군 강화읍에 강화산성을 짓고 천도했다. 이때 강화성을 보호하기 위해 내성, 중성, 그리고 동쪽 해협을 따라 외성을 쌓았다. 외성은 강화 동쪽의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적북돈대에서 부터 초지진까지 쌓은 성이다.


주목받지 못했던 ‘성 밖의 섬’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도 초지진은 강화 외성의 최남단으로의 사명을 수행했다. 바꿔 말하면 황산도는 성 ‘밖’의 섬으로 수 백년을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강화를 지키고 염하의 물결을 따라 한양으로 향하는 외적들을 소탕하는 최남단은 초지진이었고 황산도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초지대교가 초지진과 황산도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 역시 성 안과 밖을 구분짓는 역사를 재확인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마저 들었다.


선착장에 서서 섬을 한참이나 둘러보다 시선이 한 만물상에 꽂혔다. 하얀색 네모판에 굵은 매직으로 덫칠해 쓴 간판을 보니 ‘선창가 슈퍼’였다. 바다에서 먹고 바다 밖에 모르는 어민들 틈에서, 그것도 몇 가구 되지도 않는 황산도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을 것 같은 어수선한 슈퍼 안에서 고추 모종을 심고 있는 정차랑씨(66)를 만났다.


정씨는 강화 사람이 아니지만 강화 사람, 정확히 말하면 ‘황산도가 고향이고 싶은’ 사람이었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세 살 되던 해 해방이 되면서 우리나라로 건너왔던 정씨는 서울에서 자녀 넷을 모두 먹이고 가르쳤다.


우연한 기회에 황산도를 알게 됐고 삶이 고달플 때마다 발걸음을 하게 됐단다. 1997년 넷째가 대학을 졸업 하자마자 집과 직장을 정리하고 황산도에 내려와 슈퍼를 차렸다. “다른 바다도 있지만 여기 오면 마음도 편해지고 그래서 왔지. 바닷일은 안해봤으니 슈퍼 밖에 더 있나. 이제 애들도 여기가 고향이겠거니 하고 내려오고 그래.” 정씨가 심던 모종은 고현수씨가 밭에 심어 손님상에 내야 한다며 사갔다.


섬을 한바퀴 돌 요량으로 선착장 반대편 섬 남단으로 향했다. 섬 남단의 갯벌에서는 섬이 만들어낸 어줍잖은 숲과 깊게 주름이 패인 드넓은 갯벌, 달아날 만큼 달아난 바다가 또 하나의 얘깃거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선을 끌기 위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비어있는 듯 꽉찬, 조용하지만 살아있는 듯한 느낌은 포구의 뒷뜰에서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섬 사람들 삶의 체취 물씬황산도 어촌전시관 개장
황산도 어촌전시관은 2008년 겨울 새롭게 단장한 어판장이 개장하면서 함께 문을 열었다. 어촌전시관은 황산도를 찾은 관광객들이 잠시 들러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전시하고 있는 것은 초지·황산 어촌계 어민들의 기념사진과 어로에 필요한 용품, 강화에서 주로 잡히는 어종에 관한 정보 등이다. 전시관 입구에는 황산도의 예전 모습을 담은 사진과 어민들의 사진을 전시했다. 사진 가운데는 강화도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사진도 끼어 있다.


전시관 중앙으로는 어로 용품을 전시했다. 60~70년대 집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지게, 어망 등을 비롯해 현재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용품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꾸몄다.


어민들이 각자 집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을 모은 이 용품들 가운데는 포구를 찾은 손님들이 마시던 소주병까지도 포함돼 있어 새삼 섬사람들의 삶의 체취를 전해준다.


황산도 앞바다에서는 젓새우와 실뱀장어, 주꾸미 등이 잡히는데 전시관에서는 이 같은 다양한 어종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강화군과 황산 어촌계 주민들은 해안산책로, 갯벌체험장, 포구체험장 등을 만들어 섬을 찾는 관광객들이 보고, 먹고, 즐길 수 있는 코스를 개발해 나갈 계획이다.

  
<글 최보경·사진 김순철기자/ 경향신문>

 

강화도 초지진 초지돈대 >>> https://koreasan.tistory.com/15606837

 

강화 초지진 초지돈대

강화 초지진 초지돈대강화 해양관방유적 5진 7보 53돈대​​ 둘러보기 출발!   강화도 53개 돈대 둘러보기 클릭 >>> 강화돈대 둘러보기 강화도는 겹겹이 항쟁의 역사로 점철된 땅이다. 바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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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