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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저 절터에서 늙은 이성계는 칼을 갈았다

by 한국의산천 2017. 4. 2.


[박종인의 땅의 歷史] 저 절터에서 늙은 이성계는 칼을 갈았다 입력 : 2017.03.29 03:03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75] 의정부 '함흥차사'의 진실과 불우한 철학자 박세당


조선 초기 갈등 흔적 남은 의정부… 양주… 구리
골육상잔 아들 이방원 증오해 이성계는 고향 함흥으로 떠나
'돌아오시라' 찾아간 사신들 족족 죽였다고 '함흥차사'… 기록에는 죽은 사람 없어
의정부 호원동 길거리에는 '이성계-방원 부자 상봉' 표석, 실록 "황해도 금교역에서 마중"
'의정부里' 이름 1912년 등장… '의정부 관할 토지'가 어원
실학 북학파 선구자 박세당, 두 아내 요절… 두 아들 요절…
당쟁에 진저리… 양주 서계계곡에 은둔하며 실용주의 세계관 구축



 틀린 곳을 찾아보자. '아들 이방원이 벌인 행태에 신물이 난 이성계는 함흥으로 떠났다. 아들이 보낸 사신들을 족족 죽였다.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이 나왔다. 결국 아들 태종과 만나 궁으로 돌아왔는데, 그 만난 곳이 지금 의정부(議政府)시다. 일제강점기 의정부 사패산 석굴암에 백범 김구가 경찰을 피해 은신하다가 상해로 떠났다. 광복 후 석굴암을 찾은 김구가 동료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지역 유지들이 그의 친필을 석굴암에 새기다가 완성되던 날 김구가 암살됐다.'


〈정답: ①함흥에 갔다가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②이성계가 태종과 재회한 곳은 의정부가 아니라 황해도 금교역이다. ③김구는 상해로 가기 전 석굴암을 찾은 적이 없다.〉


박세당의 삶
 

불운했으되 강직한 철학자 박세당. 
 

  서계 박세당(朴世堂·1629∼1703)은 이렇게 살았다.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아버지 박정을 따라 전라도 남원 관아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죽었다. 3년 뒤 열여섯 살 위인 큰형 세규(世圭)가 죽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터졌다.

 

  박세당은 할머니, 어머니, 두 형과 함께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를 떠돌며 피란을 다녔다. 가난했다. 열 살이 돼서야 글을 배웠다. 글 가르치던 할아버지가 이듬해 죽었다. 1660년 서른한 살에 과거에 붙었다. 장원급제였다. 각종 요직을 섭렵하며 잘나가는가 싶었다. 1666년 아내 의령 남씨가 죽었다.


  1668년 나이 서른아홉에 경기도 양주로 내려가 버렸다. 양주에는 아버지 박정이 받은 사패지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박세당을 이조좌랑(정승으로 가는 요직이다)으로 발령 냈다.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의금부에서 곤장을 때렸지만 사직해버렸다(현종실록 9년 8월 11일).'


  이유는 강하고 단순했다. 당쟁 혐오. 세상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후 정부에서 그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자리를 내줬지만 응하지 않았다.


  1678년 두 번째 아내 광주 정씨가 죽었다. 1686년 집권당인 서인파의 잔혹상을 비난하다 함경도로 좌천된 큰아들 태유가 죽었다. 서른여덟 살이었다. 3년 뒤 둘째 아들 태보가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가 고문 끝에 죽었다. 서른다섯 살이었다.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인생이 이쯤 되면 체념하는 법이다.


  박세당도 그랬다. 운명을 받아들였다. 당쟁에 신물이 났었고, 사라진 나라 명을 떠받드는 명분론에도 질려 있었다. 세상은 공맹(孔孟)을 외운다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생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여 농사를 짓고 남는 시간에 책을 읽고 책을 썼다. 고급공무원 시험 수석 합격생이었으니 영민하였고, 고비를 틀 때마다 닥친 풍파에 세상을 보는 혜안(慧眼)도 뜨게 되었다. 강직함도.


▲ 의정부 장암동에 있는 박세당의 묘소. 오른쪽은 백범 김구 친필이 새겨진 사패산 석굴암.
 

  일흔넷 된 1703년 서울 잠실 삼전도 비문을 지은 이경석의 신도비 비문을 박세당이 썼다. 이렇게 썼다. "국왕이 굴욕을 당했는데 신하가 군주의 명을 거역하면 이가 곧 패륜이다." 이경석의 글을 맹비난한 노론계 거물 송시열을 비난한 글이었다. 집권 여당의 정신적 지주를 비난해? 이어 둘째 형의 죽음에 "제사는 검소하게 하라"고 한 그의 말을 핑계 삼아 노론은 임금을 구슬려 박세당에게 전라도 옥과로 유배형을 내렸다. 죄명은 주자가례 예법을 무시한 사문난적(斯文亂賊)이지만, 실질은 '눈꼴사나운 놈'이었다. 그리고 그해 죽었다. 여기까지가 불우한, 하지만 위대한 사내 박세당이 살아온 행적이다.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석림사 계곡 입구에는 박태보를 기리는 노강서원이 서 있다.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 제외된 47개 서원 중 하나다. 그 앞에 박태보의 아버지 박세당이 살던 고택이 있다. 안채는 불타 사라지고 사랑채는 남았다. 고택 안쪽에는 유택이 있다. 요절한 두 아들 무덤 뒤편에 아비가 잠들어 있다. 아내와 두 아들의 죽음, 미치광이처럼 돌아가는 세상 꼬라지 다 보고 죽은 철학자를 만나는 곳이 거기다.


늙은 이성계와 이방원

조선을 개국한 늙은 이성계도 기구하게 살았다. 아들 방원이 문제였다. 개혁과 혁명을 두고 노선 논쟁을 벌이던 친구 정몽주를 멋대로 때려죽인, 야망으로 뭉친 아들이었다. 1392년 7월 12일 공양왕이 폐위되고 닷새 뒤 이성계가 왕위를 계승했다. 한 달 뒤 아들의 야심을 경계하던 이성계는 막내 방석을 세자로 임명했다. 개국공신 명단에도 방원은 빼버렸다. 분기탱천한 이방원은 두 차례에 걸쳐 형제들을 싸그리 죽여버렸다.


▲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이성계의 무덤 건원릉. 고향 함흥에서 가져온 억새로 떼를 입혔다.
 

  이방원은 1400년 1월 수도 개경(2대 왕 정종이 한양에서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에서 넷째 형 이방간과 시가전을 벌인 끝에 왕이 되었다. 늙은 아비는 충격을 받고 고향 함흥으로 떠나버렸다. 양주 회암사와 함경도 안변 석왕사를 맴돌며 분을 삭였다. 태종은 사람을 보내 환궁을 청했다. 그때마다 "이성계는 화살을 날려 죽여버렸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고 그 이야기를 '함흥차사(咸興差使)'라 믿고 있다. 기록 어디에도 그 누구 하나 이성계의 손에 죽은 사람은 없으니, 낭설이요 전설이다.


  1402년 11월 5일 안변 부사 조사의(趙思義)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성계가 사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반역자는 삼족을 멸해야 마땅하거늘, 진압 후 벌은 관대했다. 실록에는 적혀 있다. "상이 말했다. '태상(이성계)의 명을 어길 수 없었을 것이니 어찌 법대로만 처리하겠는가'라고(세종실록)." 반란이 확산되자 태종이 직접 참전했다. 아들의 참전 소식에 이성계가 환궁을 결정했다. 12월 8일 이성계가 수도로 돌아왔다. 예순일곱 살. 이빨도 발톱도 없는 늙은 호랑이가 꼬리를 내렸다.



의정부, 회암사와 이성계

개국 작업을 도운 사람 가운데 무학대사가 있다. 한양으로 도읍지를 결정하는 데에도 그가 있었고 함흥에서 환궁을 유도한 사람도 그였다.

의정부 옆 양주 땅에는 회암사라는 절이 있었다. 이성계는 고향 함흥을 제외하고는 말년에 주로 회암사에서 무학과 함께 머물렀다. 자신이 묵을 궁실도 짓고 살았다.


양주 회암사는 조선 중기 유생들이 불질러 사라졌다. 절터는 깜짝 놀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수시로 개경을 떠나 회암사에서 무학대사와 함께 머무르곤 했다. /박종인 기자
 

  고려 말 학자 목은 이색이 "아름답고 화려하기가 동국 제일"이라고 놀라워했던 그 절이 지금은 터만 남았다. 불교를 비난하는 유학자들이 1566~1595년 불태워 폐사됐다는 기록이 있다. 터만 남았지만, 그 규모는 입이 벌어질 정도다. 규모에 관한 한 '유적'이라고 세계에 보여줄 만한 대표적인 흔적이다. 절터 위 계곡 끝에 있는 새로운 회암사 언덕에는 무학대사 부도가 서 있다. 몸통에 새겨진 용은 발톱이 네 개가 아니라 다섯 개다. 황제라는 뜻이다. 장식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으니, 킹메이커의 유택으로 딱 맞다.


  카리스마 가득했던 무장(武將) 이성계는 구리시 동구릉에 묻혀 있다. 건원릉이다. 흔한 잔디 대신 무성한 억새풀로 뗏장을 입혀놓았다. 다음 달 5일 이 억새를 벌초하고 고유제를 지낸다.



역사의 진실과 의정부

의정부시 호원동 회룡골 입구 길거리에는 작은 표석이 서 있다. 내용은 이렇다. '이성계가 마침내 한양 환궁 길에 올랐다. 이때 태종이 이곳까지 친히 나와서 맞이했는데 그 상봉지가 전좌마을이 되었고 이곳에서 대신들과 정사를 논했다고 하여 의정부라는 지명을 얻었다.'

일단 한양이 틀렸다. 1402년 당시 조선 수도는 한양에서 개경으로 환도된 상태였다. 함흥에서 개경으로 가려면, 노망에 걸리지 않은 한 양주 땅까지 남하했다가 북상할 이유가 없다. 실록에는 '12월 8일 금교역(金郊驛)에 나가서 태상왕을 맞이했다(태종실록 1402년 12월 8일)'고 기록돼 있다. 금교역은 황해도 금천에 있다. '대신들과 정사를 논했다 하여 의정부라는 지명을 얻었다'는 말도 따라서 틀렸다. 3년 뒤인 1405년 10월 20일 태종이 창덕궁에 들어가면서 한양 환도(還都)가 공식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니, 다 틀렸다.



의정부, 구리 지도
 

  의정부라는 지명은 1912년 총독부가 만든 '구한국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에 양주군 둔야면 의정부리(里)로 처음 등장했다.


  조선 후기 전국에는 중앙 관청 경비를 조달하는 토지 둔토(屯土)가 있었다. 양주에는 의정부 관할 둔토가 있었고 이름이 의정부둔(議政府屯)이었다. 의정부의 근원은 기록상 이 지명이 유일하다.


  하나 더. 의정부 사패산에는 백범 김구가 상해 임시정부로 떠나기 전 피신했다는 석굴암이 있다.

백범일기에 따르면 김구는 1919년 3월 말 고향 황해도 안악을 떠나 사리원~평양~신의주~단동을 거쳐 배를 타고 4월 초 상해로 들어갔다. 사패산은 동선(動線) 밖이고 기록도 없다.


  백범김구기념관에는 '1946년 6월' 석굴암에서 지역 유지와 촬영한 기념사진이 있다.

석굴암 암각은 그때 지역 유지가 받아서 훗날 새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金九'라 적힌 글자 옆에는 '戊子仲秋遊此(무자년 가을 이곳에 나들이하다)'라 새겨져 있다.

무자년은 1948년이다. 이 정유년 봄날, 철학자의 집을 떠나 여행을 했다. 눈은 즐거웠으되 마음은 기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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