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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영종도 한바퀴 라이딩

by 한국의산천 2015. 9. 29.

추석 다음날

영종도 한바퀴 돌아서 배타고 월미도로 나와서 아라뱃길 라이딩

 

라이딩 코스 :

운서역 ~ 삼목도 선착장 입구 ~ 영종북로 ~ 을왕리해수욕장~선녀바위해변~ 영종남로 ~ 구읍뱃터~(배타고 월미도 이동) ~ 차이나타운 점심 ~ 동화마을~ 청라 호수공원 ~ 아라뱃길 접속 ~ 계양역 ~ 부평 (86km) 

 

 

우선 전철역사에 붙어있는 포스터도 촬영해보고 ㅎ

 

 

 

▲ 운서역 앞에서 단체 촬영후 09시 출발  ⓒ 2015 한국의산천  

 UN이 정한 라이딩에 관한 협약에 의하면 배를 탈때는 승선 명부를 작성하듯, 항상 출발전에 준비운동과 장비점검 그리고 단체사진을 촬영하기를 권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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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뱃길 검단 즈음을 지나칠때 백석교라는 다리가 있다 ⓒ 한국의산천

위의 지명과 동명의 백석시인이 떠오른다.

그럼 시 한수 읇어야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 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여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1948년>

 

 

◀ 시인은 역시 눈빛이 맑고 깊다는것을 알수있다.

 

 평북 정주하면 소월이 있고 백석(白石·1912~1995)이 있다.

1988년의 월북시인 해금 조치 이후 '백석 붐'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백석 시인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현대시에서 드물었던 북방 정서와 언어의 한 정점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그의 절친한 친구가 소장하고 있다가 1948년에 발표했다. 해방 공간에 발표된 백석의 마지막 작품이다.

 

  '남신의주 유동에 있는 박시봉 집에'라는 제목의 뜻에 주목해볼 때 친구에게(혹은 스스로에게) 편지 형식으로 보낸 고백시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래서일까. 소리 내어 읽노라면 그가 나직이 말을 건네는 듯 '가슴이 꽉 메여 오'고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이곤 한다.

 

  '나'라는 맨 얼굴의 시어나 '-이며' '-해서' '-인데'와 같은 나열 혹은 연결어미나 '것이었다'라는 종결어미 등의 반복이 내뿜고 있는 독특한 산문적 리듬이야말로 이 시의 백미다.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한다는 직유며,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직설이며,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다는 역설 등 사무치지 않는 구절이 없다.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기까지의 의연한 회복 과정이 유장한 리듬과 어우러져 한 편의 인생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1942년 일본 시인 노리다케 가즈오는 기자와 교사생활을 작파하고 만주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히 살고 있던 그를 찾아간다. 그는 가즈오에게 '나 취했노라'라는 시를 헌정했다. 20년 후 가즈오는 "파를 드리운 백석./ 백이라는 성에, 석이라고 불리는 이름의 시인./ 나도 쉰세살이 되어서 파를 드리워 보았네."('파')라는 시를 그에게 헌정했다. 파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을 그를 생각한다. 쌀랑쌀랑 소리를 내며 싸락눈을 맞는다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뻐근한 갈매나무를 생각한다. [정끝별·시인]

 

  1912년 7월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백석은 1995년 1월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부인 이윤희씨의 편지). 1930년 19세의 나이로 등단, 1936년 시집 ‘사슴’을 출간하며 혜성처럼 문단에 나온 백석은 북한 당국에 의해 1959년 1월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추방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양치기로 살았다고 전한다.

 

 

▲ 계양역에서 라이딩을 종료하고 집앞에서 마무리 딱 한잔하기 ⓒ 2015 한국의산천

 

▲ 계양역에서 라이딩을 종료하고 집앞에서 마무리 딱 한잔하고 또는 전철로 이동하기 ⓒ 2015 한국의산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