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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소래습지생태공원 수인선 소래역사관

by 한국의산천 2014. 7. 19.

과거로 떠나는 시간여행 [2014 · 7 · 19 · 무덥고 흐린 토요일 ·  한국의산천 ]

토요일 아침 일찍 잠에서 깨었다. 6시에 자전거를 2시간 정도 타고와서 소래포구로 갔다.

늘 느끼는 생각이지만 가족모두 건강하고 나 역시 건강한 아침을 맞는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한다.  

 

소래습지생태공원과 소래역사관 둘러보기 

 

 

▲ 기억된 것과 기억될 것이 만나는 여기 소래포구 ⓒ 2014 한국의산천

 

 

▲ 중학교 시절 송도역에서 협괘열차를 타고 이곳 소래포구 갯벌에 와서 망둥이를 잡던 추억이 떠오른다 ⓒ 2014 한국의산천 

 

과거를 기억하려는 이 순간 과거는 현재를 기억한다.

 

소래포구룰 보면서 나도 어언 이곳 인천에서만 60년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은 없고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허공에 흩어지는 추억과 상념들로 가득하네.   

 

 

 

 

 

 

 

▲ 소래습지공원은 자전거를 즐기는 동호인들이 자주 찾는곳이기도 합니다 ⓒ 2014 한국의산천

 

 

 

 

▲ 세월 그것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 2014 한국의산천 

 

세월 그것은 바람 -  하남석

봄 꽃이 피는 봄 살랑 바람에 내 마음은 날아 예쁜 꽃을 피우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네
여름 무더운 여름 언덕에 올라 노래 불러보면 님 님은 찾아와 내 마음 속에 춤을 추고 있네
가을 낙엽지던 가을 지난 일들이 자꾸 생각나네 별 별 만큼이나 나를 스쳐간 잊혀진 얼굴
겨울 하얀 눈 송이 소리도 없이 땅에 내려오면 세상 모든 세상이 고운 마음 처럼 하얀 빛깔로

 

아 봄 여름 가을 겨울 가고 꽃이 피는 봄이 다시 오면 아 나는 나는 나는 꽃을 피우리 아름다운 마음 속에
아 봄 여름 가을 겨울 가고 꽃이 피는 봄이 다시 오면 아 나는 나는 나는 꽃을 피우리 아름다운 마음 속에
 

세월 그것은 바람 한 번 가면은 다시 오질 않네 바람 저 부는 바람 우리 손으론 잡을 수가 없네
아 봄 여름 가을 겨울 가고 꽃이 피는 봄이 다시 오면 아 나는 나는 나는 꽃을 피우리 아름다운 마음 속에
아름다운 마음 속에~ 아름다운 마음 속에~

 

 

▲ 폐허가 된 소금창고. 드넓은 이곳의 소금을 실어 나르기 위해 수인선 협궤열차가 생겨났다 ⓒ 2014 한국의산천

 

  현재의 이곳 폐염전은 불과 70여년 전만 해도 갯벌이었다.

소래염전이 1930년대, 군자염전은 그보다 조금 이른 1920년대 초반에 생겼다. 군자·소래염전은 한반도 최대의 염전이었다.

우리나라의 천일염 역사는 1907년 일본인이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 주안에 1정보 규모의 시험용 염전을 만든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규모면에서는 이곳 염전이 가히 압도적이다. 조용하던 이곳의 지역적 정체성과 단일성이 흔들리는 최초의 사건이 염전에서 시작됐다.

 

  그때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들어왔으며, 그 바람에 일본 대신 중국의 천일염 기술이 전파되었다.3·1운동이 났던 해, 중국 산둥성에서 중국노동자들이 몰려와 염전 공사를 도맡았고, 자본은 일본인이 댔다. 재미있는 것은 그 무렵 남한보다 일찍 염전 기술을 익힌 평안도 사람들이 집단으로 남하해 이곳에 '평안도촌'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평안도촌은 군자역 주변 마을로,1922년 군자염전 축조사업 때 평안도 용강 등지의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오면서 취락으로 발전했으며,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피양촌’이라고 불렀다. 군자역 서북쪽 지역은 ‘웃피양촌’, 북쪽 지역은 ‘아래피양촌’으로 불렸다.

또 군자역 뒤는 군자염전 염부들이 이사와 사는 곳이라 하여 염전이민사나 염전사택으로 불리곤 했다. 오늘날 전철 4호선 군자역이 바로 이 지역으로, 평안아파트에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일제는 소금을 실어나르기 위해 이곳에 협궤열차를 부설했다. 민간이 부설한 철도로, 순전히 경제적 목적의 철도였다. 처음에는 경동철도라 불리다가 후대에 수인선으로 바뀌었으며, 소래포구의 철교도 경동철교에서 나중에 소래철교로 바뀌었다. 

 

 

▲ 바닷물을 낮은곳에서 높은곳으로 퍼 올리는 수차 ⓒ 2014 한국의산천 

 

 

 

 

 

 

 

 

 

 

 

 

 

 

▲ 무시로 빈집을 드나드는 바람처럼 여행은 그렇게 떠나는 것이다 ⓒ 2014 한국의산천

 

 

 

 

 

▲ 세월 그것은 바람 한 번 가면은 다시 오질 않네 바람 저 부는 바람 우리 손으론 잡을 수가 없네

 

 

 

 

 

 

 

 

 

 

 

 

 

 

 

▲ 곱게핀 해당화를 보면서 19살 섬색씨 마음을 울린 섬마을의 총각선생님을 떠올렸다 ⓒ 2014 한국의산천

 

 

 

 

 

 

 

 

▲ 협궤철도(狹軌鐵道) 기관차 앞에는 소래역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입장료 성인 500원) ⓒ 2014 한국의산천

협궤란 선로폭이 표준궤보다 좁은 선로를 지칭하며 정확한 수치는 1067밀리미터이다.

우리나라에서 쓰인 협궤는 76.2cm (762밀리미터)이다. 표준궤는 1435밀리미터, 광궤는 1524밀리미터나 1674밀리미터이다. 협궤선로는 수인선(수원~인천), 수려선(수원~여주)선에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모두 폐선되었다.

 

 

▲ 소래포구에 전시되어있는 수인선을 이끌던 꼬마 증기기관차 ⓒ2014 한국의산천 

한국철도의 서막을 연 경인선, 그리고 경기 네트워크의 원조인 수인선과 수여선 (수원~여주)

협궤열차였던 수인선은 일제의 물자수탈 수단으로 탄생했지만 반세기 넘게 인천 ~ 수원간 해안가 서민들의 발노릇을 톡톡히 하며 이들의 애환을 싫어 날랐다.

열차 한량이 마주보고 앉은 승객의 무릎이 서로 닿을 정도로 작았던 기차 . 시내버스보다 작고 불품도 없었지만 교통수단이 부족햇던 수인지역 주민들에겐 더없이 소중했다. 그러다 산업화 도시화 물결에 밀려 운행 58년만인 지난 1995년 12월 31일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수인선(수원 ~ 인천)

수인선은 인천광역시 송도(松島)와 수원을 잇는 협궤철도선으로 총연장 52㎞, 궤도폭 0.762m로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의 사설철도로 개통됐다.

 

일제강점기에 경기만의 소래·남동·군자 염전의 소금을 수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1935년 9월 23일에 착공하여 37년 8월 6일 건설되었으며 미곡을 수송하던 수려선(수원∼여주, 총 연장 73.4㎞)을 인천항까지 연계수송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생산물량의 확대, 지역구조와 기능의 변화, 경제발전, 수원∼인천 간 국도의 개통을 비롯한 도로교통 발달 등으로 산업철도로서의 기능을 상실, 1972년 수려선 폐지에 이어 이듬해에는 남인천역이 폐쇄됐고, 1977년부터는 화물운송이 중단됐다.

 

또 수도권의 급속한 성장에서 제외된 달월·군자·원곡 등지에 사는 주민들이 주로 이용해온 경기 서해안 철도변 주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이던 협궤열차도 도로교통의 발달로 경제성이 낮아 1995년 12월 철거됐다.

 

수려선(수원 ~ 여주)

수원에서 출발하여 신갈,용인,양지,이천을 지나 여주까지 운행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철도가 그렇듯이 수려선 역시 경기도 여주-이천지역의 쌀을 수인선이나 경부선을 이용, 빠르게 수송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930년 5월 1일에 개통된 수려선은 처음 개통할 당시는 수원~이천간 53.1km만 운행하였다.

양지역에는 승객외에 장작, 숯, 벼 등의 수화물을 취급하였는데, 하루 60t정도를 취급하였다.

 

 

 

 

 

 

▲ 수인선 자료사진 ⓒ 2014 한국의산천

 

일제는 1937년 경기도 이천 여주 지역 쌀과(수려선) 소래 남동 등지의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반출하기 위해 수원역~남인천역(수인선 지금의 중구 신흥동)간 수인선 협궤열차를 운행했다.

 

당시 일본은 여주 이천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최고품질의 쌀을 본국으로 보내기 위해 수원~여주간 수려선과 함께 수인선을 이용한 것이다.

 

해방후 60년대 까지만 해도 증기 기관차가 객차 6량과 홤루차 7량을 달고 수인선 15개역을 하루 평균 7차례 운행했다. 그러나 버스 등 대체교통수단이 속속 등장하면서 적자가 눈덩이처럼 늘다 철도청은 79년 송동~남인천간 5.9km의 운행을 중단했다. 이어 92년 7월엔 소래역~송도역 운행이 끊겼고 수인선 복선전철화 계획이 구체화된 지난 94년 9월에는 한양대 안산캠퍼스~ 송도역26.9km구간을 폐쇄, 수원~한양대역까지만 열차를 운행했다.

 

수인선 열차는 달릴때 심하게 흔들렸다. 객차내 폭도 2m 남짓해 덜컹더거릴 때면 맞은편 승객과 무릎이 닿기도 했다. 그래서 꼬마열차를 탄 승객들은 금세 말문을 트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수인선 역중 유명한 곳으로 단연 소래역이 꼽힌다.

 

수인선 협궤열차의 폭은 표준궤도의 절반인 76cm에 불과했다. 작고 힘이 달려 안산 원곡고개 등지에선 손민이 내려 걷거나 열차를 밀어야 하는 등 웃지 못할 일도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건널목에서 일어난 협궤열차와 버스의 총돌사고로 협궤동차가 넘어졌다는 이야기도 그 당시 수인선을 이용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여주의 농산물(수려선)을 수인선을 통해 인천항까지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70년대 이후 염전지대의 물량확대와 교통의 편리성 요구가 증대되자 이용객과 화물이 줄어들어 경제성이 크게 낮아졌다.

73년 11월 종착역이던 남인천역이 폐쇄되고 77년 화물수송이 중단되었다. 95년에는 여객운송을 중단하고 철거하였다. 

 

수인선의 인천 종점(?)인 용현동, 과거 종합 버스 터미널 옆의 수인역에는 수원과 안산쪽에서 수확한 농작물 특히 잡곡을 가지고 모여들어 장을 이루었다. 지금도 그곳에는 잡곡 시장이 형성되어있다.  

 

1977년 인천병력이 군 입대 할때는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논산으로 갔다. 나 역시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집결 한 후 4열 종대로 어깨동무를 하고 헌병들의 호휘를 받으며 수인역으로 걸어간다음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깜깜한 밤을 달려 논산 훈련소로 이동했다. 

 

 

 

 

 

 

 

 

 

 

 

 

 

 

 

 

 

▲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수인선 소래철교 ⓒ 2014한국의산천

 

  협궤열차의 대명사 수인선은 서민열차와는 거리가 먼 경동철도주식회사(京東鐵道株式會社) 소유의 사설철도이며, 쌀과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수탈의 노선이었다.

강원 내륙의 목재와 여주 및 이천의 쌀을 수송하기 위해 만든 수여선(水驪線)과 인천항을 연결하기 위해서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철도였던 것이다.

수인선은 1926년부터 인천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논의는 무성했지만, 경제성과 실효성에 대한 논란으로 자꾸 미뤄지다가 1936년 5월 16일 인천 화정(花町) 매립지에서 기공식을 갖고 6월 1일부터 공사에 돌입하여 1년 2개월만인 1937년 8월 6일에 개통을 보게 되었다.

 

  수인선은 총연장 52㎞에 궤간 762㎜의 단선 협궤열차로 개통 당시 수원·고색·오목·어천·야목·빈정·일리·성두·원곡·신길·군자·소래·논현·남동·문학·송도·인천항 등 열일곱 개의 역을 한 시간 사십분에 주파하였다.

수인선의 전성기는 1942년까지로 이 기간 동안 준수한 영업 실적을 올리자 일각에서 레일 광궤화같은 노선개량 논의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인선은 1943년 총독부의 정책 기조의 변화로 조선철도주식회사로 흡수되었고, 일제의 패망, 해방공간기의 혼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점차 쇠퇴하여 여객노선으로서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수도권의 급속한 성장에서 제외된 달월·군자·원곡 등지에 사는 주민들이 주로 이용해온 경기 서해안 철도변 주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이던 협궤열차도 도로교통의 발달로 경제성이 낮아 1995년 12월 철거되고 말았다.

 

 

▲ 소래포구 ⓒ 2014 한국의산천

소래포구(蘇萊浦口)는 인천 남동구에 있는 포구로 어민들이 10톤 미만의 어선을 이용해 어업에 종사하는 작은 포구 마을로, 어종은 새우·꽃게·민어·농어·홍어·광어·낙지 등 다양하다.

 

이 지역의 생선은 매일 조업으로 그 선도가 높기로 이름이 났으며, 하루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관광포구로 발전하여 서울·인천을 비롯한 주변 도시의 주민들이 많이 찾고 있다.

 

 

 

오늘 하루도 건강하게 귀가하여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드린다.  

 

수인선 풍경 >>> https://koreasan.tistory.com/11213267

 

수인선과 수려선

흔적만 남아있는 작은 평행선 수인선 선로폭이 좁은 수인선의 추억을 회상하며   흔적만 남은 수인선 구간을 돌아 보았다.( 촬영장소: 안산역과 공단역 사이) [2007. 4. 7일. 토요일 날씨 흐림 ]

koreasan.tistory.com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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