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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관촌수필 이문구

by 한국의산천 2013. 2. 18.

[문학기행]관촌수필 이문구 [정리: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의 10주기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가 2003년 세상을 떠나고 벌써 10년이 흘렀다.

사라져가는 농촌 공동체의 현실을 토속적 어휘로 그려내 폭넓게 사랑받았던 고인은 별세한 뒤에도 여전히 문단과 독자들에게 그리움의 대상이다.

 

 이문구는 충남 대천 갈머리(관촌마을)에서 1941년 토정과 같은 한산 이씨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나이 열 살이 되던 해 6·25전쟁이 터지자 남로당 간부였던 아버지는 예비검속에 걸려 처형당했고, 끌려간 형들마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조부도 세상을 떠났고, 화병을 앓던 모친도 잃었다. 중학을 겨우 나온 이문구는 15세에 가장이 되고 결국 고향을 등진 채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자신이 겪은 끔찍한 전쟁을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지워버리고자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큰 상처로 덧났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는 글쓰기에 매달렸다. 힘든 고학으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1966년 '현대문학'에 단편 '백결'로 등단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6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고인은 '관촌수필'과 '우리동네' '장한몽'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1974년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인으로 사회참여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고인은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 고인이 어린 시절 뛰놀던 고향마을에 뿌려졌다.

 

출판사 창비에서는 고인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매월당 김시습'을 올해 중 새로 낼 예정이다. 1992년 문이당에서 출간된 '매월당 김시습'은 당시 10만부 가까이 팔려나갔다.

 

▲ 작가 이문구 ⓒ 2013 한국의산천

한잔 올리겠습니다. 흠향(歆饗)하십시요. 

술은 결국 내가 마셨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제가 마시고 취하는것이 더 맞는것 같습니다.  

 

◀ 이문구(李文求, 1941년 4월 12일 ~ 2003년 2월 25일)

 

소설가, 수필가, 시인.

 

'관촌수필'은 소설이면서도 차마 소설로는 쓸 수 없었던 명천(이문구)의 아픔이 녹아 있는 작품이었습니다.(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

 

본관은 (충남서천) 한산(韓山)이며 호는 명천(鳴川)이다. 충청남도 대천(大川)에서 출생하였으며 충청남도 보령 대천중학교 졸업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김동리, 서정주 등에게 수학· 졸업했다.

 

 1963년 단편 소설 《다갈라 불망비》로 소설가로 첫 입문하였고 1966년 《현대문학(現代文學)》에 소설이 추천 완료되면서 문단에 나왔고 《월간문학》,《한국문학》 등의 편집장을 지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원래 명쾌한 문장으로 사회 풍자소설에 능했는데 1970년대 초부터 토속어(土俗語)를 짙게 쓰면서 농촌사회의 현실을 주로 그렸다. 주요 작품에 《우리 동네》,《관촌수필》 등이 있으며, 저서로 창작집 《해벽(海壁)》, 장편소설 《장한몽(長恨夢)》 등이 있다.

 

 1982년 제1회 신동엽창작기금을 수상하여 1990년《산너머 남촌》을 출간하고, 2000년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여러가지 자료를 찾아보고 '관촌수필'을 또다시 읽으며 오늘에야 작가 이문구님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알게되었다. 그분께 면목없는 일이다  

 

[한국문학의 고전]

이문구

관촌수필 

 

 

관촌수필

 

장르 연작소설

발표연도 1972~1977년

 

이 소설은 2010년 수능 기출문제이기도 했다.

줄거리

 

[일락서산]은 주인공 유년기의 가족사이다. 대대로 사대부 집안이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지닌 조부로부터 품격 있는 교육을 받으며 주인공은 성장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들, 그리고 조부의 죽음으로 집안이 일거에 몰락하고 주인공은 서산에 지는 해를 응시한다.

[화무십일]은 주인공네 집으로 피란 왔던 윤영감네 가족의 이야기다. 궁핍했던 시절 며느리의 일탈과 그로 인해 아들의 허무한 죽음 등을 다룬다.

[행운유수]는 어린 시절 집안의 식모였던 옹점이의 이야기다. 그녀는 속이 깊고 정이 많으면서도 정의롭고 나름의 품격을 지키려고 애쓴 기층 여성이다.

[녹수청산]은 어린 시절 주인공과 놀아주었던 나이 많은 대복이 이야기이다. 난세의 부침에 따라 흔들리면서도 인정을 잃지 않는 대복이의 모습을 되살려낸다.

[공산토월]은 고난 속에서도 가장 진실한 삶의 궤적을 살다가 백혈병으로 일찍 타계한 석공의 이야기다. 유복산 부자의 이야기인

[관산추정], 신용모라는 고향 친구의 이야기를 담은

[여요주서], 귀농한 친구 김희찬을 통해 동네 젊은이들의 변화된 풍속을 다룬

[월곡후야] 등은 대개 근대화 바람에 변화된 고향의 풍경과 흔들리는 고향사람들의 마음 풍경을 다룬 이야기들이다.

 


 

 

▲ 관산추정에서 ⓒ 2013 한국의산천

바다는 밤으로 더 가까이 오면서 길잡이 바람만 되돌아가 구름으로 솔면의례건 선잠에 들며 늘 그렇게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달빛이 뚫어지고 별이 새어나오면 어둠을 얼비추며 너울춤이 칠칠하던 바다가, 갈잎에 이슬이 자디 열리는 밤이면 깬 꿈을 한결같이 다시 잇던 것이다. - 하략 

 

토속어에서 상고어까지, 그 말들의 향연


이문구의 연작소설 [관촌수필]은 장르, 문체, 세계관 등 여러 면에서 논란이 되어왔던 텍스트이다. 그 논란은 텍스트 자체가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수입한 근대적 소설 장르의 특성만으로 논의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전통적 판소리 어법만으로 해명하기도 쉽지 않다. 실제로 [관촌수필]은 무엇보다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말들의 향연이다.

 

사대부 의식 혹은 선비 정신에 입각해 평생을 일관되게 살았던 할아버지의 언어는 “삭거한처(索居閒處)요 산려소요(散慮逍遙)라고 배웠으면 배운 만침 알 만두 허련마는……” 같은 부분에서 명료하듯 경세적이고 교훈적이다. 상고적이고 의고적이다. 이 소설의 언어적 특성의 일부를 형성하는 상고적 의고투는 모두 할아버지의 언어이거나 그의 영향 아래 집적된 말들이다. 이에 반해 옹점이, 대복이 등 민중들은 생기발랄하고 때로는 구수하면서도 때로는 야성적인 호서지방 사투리를 질박하게 구사한다. 예컨대 [행운유수]에서 옹점이는 “멧 살” 먹었냐며 나이를 묻는 순경의 말에 “멥쌀두 먹구 찹쌀두 먹구, 열두 가지 곡석 다 먹었슈”라며 받아친다. 이런 역동적 말놀음[語戱]은 [행운유수]의 옹점이를 비롯해 [녹수청산]의 대복이나 대복 어메, [여요주서]의 신용모 등의 말들에서 다채롭게 빚어진다.

  

포괄의 언어와 복합성의 수사학


그러나 이 연작의 수사학적 묘미는 상고어와 토속어가 물리적으로 결합된 것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융합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포괄하면서 수사학적 효과를 빚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관산추정]에서 복산이를 묘사하는 한 대목을 보자. “그는 이틀 품을 하루에 쪄낼 만큼 근신골강(筋信骨强)하였고, 동냥 나온 걸인이 울안에서 쉬어가도록 결곡하고 겸용스러운, 정자나무 폭의 붙박이 그늘이 되어 있었다.” 수평적인 한 문장 안에 “이틀 품을 하루에 쪄낼 만큼”이나 “동냥 나온 걸인이 울안에서 쉬어가도록” 같은 토박이 표현과, “근신골강(筋信骨强)”이나 “결곡하고 겸용스러운” 같은 상고적 표현이 복합적으로 얽히며 독특한 효과를 자아낸다. 상고어에 토속어를 포괄하고, 토속어에 상고어를 포괄하여 언어 표현을 보다 웅숭깊게 한다.

 

이와 같이 전근대적 사대부 선비 담론과 언어를 대변하는 조부의 상고어나 의고투는, 기층 민중들의 토속어와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호응하면서 독특한 수사학적 효과를 빚어낸다. 공식어와 비공식어의 대립과 포괄,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과 포괄은 상충하면서도 서로 포괄하면서 융합한다는 역동적 과정을 보이면서 복합성의 수사학을 형성한다. 그런데 이문구가 펼쳐 보인 복합성의 수사학에서 각별한 주목을 요하는 것은 생태언어학적 관심의 맥락에서이다. 이 연작에서 다채롭게 구사하고 재현한 상고어나 토속어, 선비 담론이나 민중 담론은 공식화되고 표준화되고 과학화되고 이성화되는 근대적 언어 공간에서 점차로 사라져가는 언어와 담론들이다. 말하자면 멸종 위기에 있는 오래된 생태 언어들을 되살려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재현한 포괄의 생태 언어들을 통해 오래된 생태학적 무의식을 자극하고 생태 윤리를 환기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이문구의 [관촌수필]이 펼치는 포괄의 언어와 복합성의 수사학의 핵심적 특징에 속한다.

 

실향 시대의 고향지향


작가는 이 연작에서 변화하는 현실에서 변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인다. 현실적으로 근대화 과정을 통해 ‘변한 것’들이 많다. 이 변한 것들은 그로 하여금 실향 감각에 빠지게 한다. 그가 더욱 중시한다는 ‘변하지 않은 것’은 그의 고향 지향의식이 가 닿은 자리이다. 물론 유년기적 동경의 대상으로서의 고향 말이다. 그러면 왜 그는 그토록 실향 감각을 넘어서 고향 지향 의식을 보이는가. 고향적인 사람살이, 그 살림의 생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고향 지향 의식의 그윽한 심연에 감동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인물은 [공산토월]의 석공이다. “자기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이웃과 남을 위해 몸을 버릴 수 있었던, 진실로 어질고 갸륵한 하나의 구원한 인간상이 내 정신 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다는 석공은 누구인가. 무수한 고난 속에서도 가장 진실한 삶의 궤적을 살다가 백혈병으로 일찍 타계한 안타까운 인물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와 가족에게 헌신했고, 또 마을 공동체에 헌신했던, 평생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았던 그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는 이 연작 전편을 통해 가장 감동적으로 다가오거니와, 이는 실향 감각과 고향 지향 의식의 융합을 통해 빚어진 중핵적인 이야기이다. 고향적인 것의 알맹이다.

 

경계선의 교감과 융섭

 

◀ 이문구

공식언어와 민중언어를 넘나들며 한국 소설 언어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작가 이문구. 그는 고향보다 더 그윽한 고향의 풍경을 재현해냈다.


  이 연작의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경계선의 존재자로 보인다. 그는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자유롭게 섞여 놀 수 없었다. “그 상것들 자식허구 워치기 한자리에 앉혀놓고 읽힌단 말이냐”는 할아버지의 말 때문에 처음에는 천자문도 혼자 배우는 처지였다. “할아버지가 범백사에 문벌을 찾아 간격과 층하를 두어 행세했던 영향”으로 “근본적인 고립”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런 유년 시절의 고립은 상처처럼 오래도록 해소되지 않는다. 반상의 구분이 사라지고, 전형적인 이조인이었던 할아버지가 타계한 지도 오래되었건만, 주인공은 좀처럼 경계선의 존재자를 벗어나 영토화된 의식 지평을 마련하지 못한다. 혹은 그러지 않는다.

 

  성인이 된 현재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한 길임에도 고향에 남아 있는 이웃들을 만나기가 꺼려져 결국 만나지 않기로 하는 장면이,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경계인의 시선이 포괄의 언어를 낳고, 서로 끌어당기고 포섭하면서 융화하는 융섭(融攝)의 상상력을 빚고, 융섭의 생태 윤리를 형성하는 데 기본적인 정황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경계선의 존재는 애당초 자기 영토를 주장하려 하지 않는다. 영토화보다는 탈주와 탈영토화가 기본이다. 만약 그가 한쪽 영토화에 안주하는 기질이었다면 그토록 선비의 상고어와 민중의 토속어 사이에서, 공식어와 비공식어 사이에서, 전근대와 근대, 근대와 반근대 사이에서 복합적인 포괄의 언어로 ‘낯선’ 문체를 형성하느라 애쓰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 이야기 문학사에서 어떤 자리는 텅 비어 있었을 것이다. 
 
 또 자연과 인간 사이의 융섭, 양반의 살림과 민중의 살림 사이의 융섭도 마찬가지다. 특히 자연과 인간의 문제를 투쟁 관계에서 파악하지 않고, 계급 문제를 대결 구도로 이끌지 않은 것은, 이문구가 경계선에서 사려 깊게 숙고하며 생태학적 무의식에 침잠하면서 오래된 복잡계의 지혜와 교감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을 터이다. 그 결과 실향의 감각으로 고향보다 더 그윽한 고향의 풍경 및 고향 사람들의 구원한 심성을 실감 있게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문구(李文求, 1941~2003)

“한국 문단은 가장 이채로운 스타일리스트”를 얻게 되었다는 김동리의 격찬을 받으며 등단한 이문구는 충남 보령 관촌 마을에서 한산 이씨 토정 이지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6·25전쟁의 와중에 아버지와 형들을 잃고, 이어 어머니마저 여의어 15세 때 가장이 되었다. 1959년 중학교 졸업 후 상경해 막노동과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김동리, 서정주 등에게 수학했다.

 

등단작품 [다갈라 불망비](1963)와 [백결](1966) 시절부터 독특한 문장과 문체로 주목받아, 북으로 간 홍명희에 자주 견주어졌다. 전형적인 사대부 의식을 지녔던 조부에 의해 훈육 받은 유년 시절과 상경 이후 궁핍한 막노동으로 생활해야 했던 생애의 양면성이 그의 문학에 역동적인 긴장감을 부여한다. 자신의 고향과 고향 사람들의 성정을 다룬 [관촌수필] 연작은 전쟁 전후의 가족사 및 유년 시절의 풍경 및 근대화 산업화의 와중인 1970년대에 변화된 고향의 모습을 웅숭깊게 다루었다.

 

[관촌수필]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마을 농촌 풍경에 대한 점묘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산문시대의 작가로서 계속 시적이고 유년기적인 고향으로의 회귀 욕망만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에 이문구는 나중에 [우리 동네](1981)로 묶여 출간된 [우리 동네 김씨](1977), [우리 동네 리씨](1978), [우리 동네 최씨](1978), [우리 동네 정씨](1978) 등의 ‘우리 동네’ 연작에서는 산업화로 인하여 변질 일로에 있는 농촌 현실을 직접 문제 삼는다. 독특한 해학적 문체로 유적 본질을 지닌 인간에 대한 기본적 신뢰를 잃지 않으려고 애쓴 점이 눈에 띈다. [우리동네]는 1970년대 농촌 사회의 실상을 가장 잘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장곡리 고욤나무]를 비롯한 일련의 ‘나무’ 연작을 중심으로 한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1990년대 이후 더욱 삭막해진 농촌 세태와 일그러진 농민들의 정경을 고향 마을의 나무에 비유해 정감 있는 토속어로 그려낸 작품집이다. 한국어 특유의 리듬을 잘 살려 생기 있는 기층 언어를 활성화하는 동시에 전통적 한학 담론도 유장하게 풀어내는 이문구의 소설 언어는, 만약 서구의 소설이라는 장르가 한국에 수입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한국적 이야기법과 더불어 매우 이채로운 빛을 발한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한국소설가협회, 국제펜클럽 등의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한국일보문학상(1972), 한국문학작가상(1978), 요산문학상(1990), 펜문학상(1991), 서라벌문학상(1992), 만해문학상(1993), 동인문학상(2000) 등을 수상했다.

 

주요작품
우리 동네(1977~1981년)
매월당 김시습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다(2000년/문학동네 사람들) 
인간 사회에 대한 꿈 

 

우찬제 / 문학비평가, 서강대 국문학과 교수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평론집으로 [욕망의 시학], [상처와 상징], [타자의 목소리], [고독한 공생], [프로테우스의 탈주] 등이 있음. 팔봉비평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소천비평문학상 등 수상.

 

 이문구의 '관촌수필'은 최근에 이르러 문학적 전통성의 복원과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이문구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연작형식이나 만연체 문장, 사투리의 활용과 같은 창작기법은 다수 발견되는 형식이지만, 전(傳) 형식과 같은 우리 고유의 창작형식과 의고체 문장의 활용은 '관촌수필'만이 가지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또한 이문구가 '관촌수필'에서 제시한 주요 인물상에는 인간미가 짙게 배어 있으며, 이것은 각박해진 현대 사회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으로, '관촌수필'이 인간성 회복을 위한 문학이라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받는 이유이다. 

 

 '관촌수필'은 이문구의 자전적 성격이 짙은 작품으로, 전반부에서는 주로 작가가 어린 시절에 체험한 옛 고향의 정겨운 모습과 순박한 고향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여기서 이문구는 고향의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하고 풍속의 재현, 인물의 기질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향토적 정서가 풍부한 토속어를 적극 활용하였다. 또한 실제 고향인물들의 사실적 사건들과 인간성을 서술하는 방식에서는 우리 고전소설의 창작형식인 전(傳) 형식을 차용하였는데, 이러한 전 형식의 차용과 토속어의 활용은 서구화된 창작방식에 치우친 우리 문학계에 주체적인 문학풍토를 형성하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 김경희 논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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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민의 그때 그곳] 10주기 맞은 이문구의 보령 생가터-집필실 [donga.com 기사입력 2013-02-18]

‘관촌수필’ 태어난 문학성소엔 스산함과 적막감만 감돌아

 

▲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계곡에 있는 이문구의 집필실을 찾은 권영민 교수. 10년 전 주인을 잃은 집필실은 찾는 이 없이 을씨년스럽게 남아있었다. 보령=황인찬 기자

 

《 ‘관촌수필’의 작가인 이문구(1941∼2003)가 글쓰기를 위해 기거했던 오두막은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그가 10년 전 세상을 떠난 후 이 집은 그대로 비어 있다. 이제는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다. 나는 동향의 문단 후배가 되어 몇 차례 이곳에서 이문구와 만났었다. 집필실이라는 말에 그는 크게 웃었다. 이 조그만 오두막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 진당산 아래 골짜기는 조선 후기 유학자 토정 이지함을 배향하던 화암서원(花巖書院)이 가깝다. 나지막한 산자락 끝으로는 청천저수지가 널따랗게 펼쳐있다. 이문구는 1989년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온몸으로 가담했던 민주화운동 대신에 온몸으로 글다운 글을 쓰겠노라고 했다. 방 한 칸에 마루 하나 그리고 작은 부엌을 갖춘 이 집에서 그는 십년이 넘게 글을 썼다. 》

 

  이문구는 충남 대천 갈머리(관촌마을)에서 1941년 토정과 같은 한산 이씨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나이 열 살이 되던 해 6·25전쟁이 터지자 남로당 간부였던 아버지는 예비검속에 걸려 처형당했고, 끌려간 형들마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조부도 세상을 떠났고, 화병을 앓던 모친도 잃었다. 중학을 겨우 나온 이문구는 결국 고향을 등진 채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자신이 겪은 끔찍한 전쟁을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지워버리고자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큰 상처로 덧났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는 글쓰기에 매달렸다. 힘든 고학으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1966년 ‘현대문학’에 단편 ‘백결’로 등단했다.

 

◀ 올해는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의 10주기를 맞는 해다. 그는 유언대로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 갈머리의 솔밭 길 사이에 뿌려졌다. 동아일보DB

 

  작가가 된 후 그는 1970년대의 살벌했던 시대상황에 맞서 가슴 속 깊이 숨겨두었던 한 맺힌 고향 이야기를 마치 아름다운 화폭을 펼치듯 써내려갔다. 그것이 그의 대표작 ‘관촌수필’(1977년)로 완성되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지워나갔던 고향 갈머리를 서사의 공간으로 살려내고는, 그 속에 온전하지는 않지만 빼앗긴 아버지와 형의 존재를 기억의 끝자락에 매달았다. 그는 1974년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이사, 부이사장, 이사장을 차례로 맡았다.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민주화투쟁에도 적극 가담했지만, 한편으로는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기 위해 힘썼다.

 

  그의 작품 ‘관촌수필’을 통해 갈머리가 문학적 명소(名所)로 살아났다고 하자, 생전 그는 웃으면서 자신의 아호인 명천(鳴川)을 한자로 내게 써보였다. 나는 ‘울음내’라는 대천 인근의 옛 지명을 댔다. 그러자 그는 “알고 있네” 하면서 반겼다. 관촌수필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아예 울음내를 아호로 쓰기로 했다는 거였다. 이제는 좀더 깊이가 있고 듬직하게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자 서울을 떠났다고 그는 말했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귀향한 그는 소설 ‘매월당 김시습’(1992년)을 썼다. 상당한 부수가 팔렸다. 자신의 뜻을 독자들이 알아주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고 그는 말했다. ‘장곡리 고욤나무’(1995년) ‘만고강산’(1998년) 등 후기 작품도 잇달아 나왔다.

 

  문학적 성과들은 나왔지만 그는 “글쓰기가 자꾸 더 힘들어진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매월당 김시습’을 쓰면서 몇 번이나 충남 부여군의 무량사(無量寺)라는 옛 절간을 찾아갔었다고 했다. 현실 정치를 뒤로 하고 김시습이 숨어 지냈던 무량사는 대천에서 성주산을 넘으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 그 절간을 가보면 그래도 옛날 모습이 남아 있어. 매월당이 어떻게 그 구석까지 숨어들어 왔었는지….” 상념에 젖은 이문구는 이야기 끝에 “한잔 할까? 그래도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가야지” 하면서 나를 이끌곤 했다.

 

  지난해 말 보령에 내려가 이문구의 생가 터와 집필실을 둘러봤지만 뒤늦게 글을 쓴다. 25일 이문구의 10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다. 그가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갈머리 생가 터는 휑하고, 집필실은 찾는 이 없이 쓸쓸히 서 있었다. 흐릿한 날씨 때문인지 더 처연하게 느껴졌다.

 

  그간 고인을 기리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문구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삶과 그 문학을 기리기 위한 이런저런 모임들이 생겼다. 그리고 ‘이문구 문학관’을 만들자는 계획도 세워졌다. 보령에서도 뜻있는 이들이 상당히 적극성을 보였다. 그런데 갈머리 생가 터에 문학관을 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보령시의 계획이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두막 집필실에 남겨져 있던 유품의 보관에 대해서도 유족들과 갈등이 생겼다. 갈머리 생가 터에 문학관을 짓고 오두막 집필실을 기념관으로 보존하고, 보령시의 축제와 연계해 이문구 문학제를 개최하자고 했던 계획이 모두 중단되었다. 그가 떠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살아남은 이들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니 부끄럽다.

 

  이문구는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위암으로 투병 중일 때에도 글 쓰는 일만을 생각했다. “좁은 땅덩어리에 내 봉분까지 만들 필요가 없다. 내가 태어난 고향 뒷산에 재 한 줌을 뿌리면 되지”라던 그의 말은 그대로 유언이 되었다. 그는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 갈머리의 솔밭 길 사이에 뿌려졌다. 허망한 이름자를 새기는 비석도 필요 없다고 했다.

 

  문학관을 세우고 문학제를 열고 하는 일들도 이문구가 살아있다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라고 나무랐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의 고향 갈머리의 뒷동산 솔밭 길이 너무도 허전하다. 그나마 그가 남긴 소설들은 스물여섯 권의 전집으로 묶였지만, 그의 체취가 남아있는 마지막 집필실이 이렇게 날로 퇴락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마음 아프다. [donga.com 황인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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