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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봄이 오는 여주 여강에서

by 한국의산천 2012. 2. 22.

봄이 오는 여강에서 [2012 · 2 · 22 · 봄이 오는 수요일]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

그 추운 겨울이 언제까지고 계속될것 같았는데 봄은 어김없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우선 간단히 답사...

그간 틈틈히 다녀왔던 곳이지만 전 구간 55km의 역사의 향기가 가득한 구간을 자전거를 타고 하루에 돌아볼 예정이다.(날씨 상황을 봐서 출발)  

오래전 이곳에서 2년여를 근무하며 주말 부부로 살면서 주중에 시간이 나면 여주를 중심으로 이천부터 원주까지 두루 두루 명승고적지를 섭렵하고 다녔던 곳이기에 더욱 정감이 가는 곳이다   

 

여강(驪江)

 

여주군을 관통해 흐르는 남한강을 여주사람들은 여강(驪江)이라 부르며 수천년을 누대로 애지중지 모셔오고 있다. 여강은 여주를 라말려초(新羅末高麗初) 때부터 부르던 이름이었던 황려(黃驪)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주의 강이라는 자부심과 애착이 오롯이 그 이름에 담겨있다. 
 
이규보는 황려가 여주의 이름이 된 유래를 ‘웅(雄)하고 기특한 쌍마(黃馬, 驪馬)가 물가(마암 馬巖)에서 나오매 현 이름을 이로부터 황려(黃驪)라 하였네. 시인은 옛 것을 좋아하여 번거로이 증거를 캐물으나, 오가는 고기잡이 늙은이는 어이 알리’라고 시로써 이르고 있다.

황려(黃驪)의 여강(驪江)은 섬강과 청미천이 남한강에 몸을 담그는 세 물머리(삼합리)부터 이포대교 아래 전북리에 이르기 까지 100리의 물길을 말한다. 남한강에서도 특히 여강은 고려시대부터 이규보, 이색을 비롯한 많은 시인묵객들이 머물렀고 나루터만도 12군데, 정자만도 10여 곳이나 자리할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곳으로 이름 높았다.

 

▲ 원점회기 코스 3개구간 모두 55km (위의 지도 참고) ⓒ 2012 한국의산천

위의 코스는 모두 다녀본곳이게에 그림이 차분히 그려지는 곳이다.  

 

여강길 답사 코스는 현재 3코스, 총 55킬로미터로 이루어져 있다. 여강길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전국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 생태 탐방로’ 7곳 중 하나로 선정되었던 곳이다.

 

▲ 여강을 따라 가는 원점회기형 55km의 역사 문화 체험길 ⓒ 2012 한국의산천

 

1구간인 옛나루터길은15.4km로 여주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해 영월루, 은모래금모래, 우만리나루터, 흔암리나루터, 흔암리선사유적지, 아홉사리과거길, 도리마을회관 등을 거친다. 현재는 강천보 공사로 연양리 마을로 우회하게 돼 있지만 전 코스 도보 가능하다.

 

2구간은 세물머리 구간이다. 총 17.4km로 3구간 중 가장 짧은 코스로 통한다. 청미천과 중군이봉, 삼합리, 개치나루터, 법천사지, 흥원창 등을 거친다.

 

3구간인 바위늪구비길은 22.2km로 흥원창에서 시작해 해돋이산길, 여성생활사박물관, 남한강 대교 밑, 오감도토리마을, 목아불교박물관, 조포나루, 영월루 등을 거치는 코스다. 현재는 4대강 정비 사업으로 일부 구간은 코스를 재정비하고 있다.

 

▲ 봄이 오는 길에 산책하는 사람들 ⓒ 2012 한국의산천 

 

▲ 여강(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응달의 지류는 아직도 얼어있습니다 ⓒ 2012 한국의산천  

 

▲ 신륵사는 보기드물게 강변에 자리한 천년사찰로 유명한곳이다 ⓒ 2012 한국의산천

 

우리는 배웠다 인류의 모든 문명은 '강'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세계사에서 배운 고대의 4대 문명을 꼽으라면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을 말한다.

4대 문명 발생지들은 모두 큰 강을 끼고 있었으며 또한 대부분이 기후가 온화하고 기름진 토지를 지닌 지역들이었다. 그렇기에 농사가 잘 되었다.

농사가 잘 되는 이유는 홍수가 들면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이 내려 오기 때문에 농사가 잘되어 식량이 풍부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조선 초기의 학자인 김수온은 그가 지은 신륵사기에 "여주는 국도(國道)의 상류지역에 있다"라고 썼는데 국도란 바로 충청도 충주에서 부터 서울에 이르는 한강의 뱃길을 말한다. 신작로나 철길이 뚫리기 전까지는 경상도와 강원도, 충청도의 물산들이 한강의 뱃길을 타고 서울에 닿았으므로 한강 뱃길을 '나라의 길'로 불렀던 것이다.

 

정선 아우라지에서 띄운 뗏목이 물이 많은 장마철이면 서울까지 사흘이면 도착했는데 1973년 팔당댐이 생기고 1978년 부터 충주댐 건설에 들어 가면서 '나라의 길'이라고 부르던 뱃길은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다. 

 

▲ 봄 햇살에 맑디 맑은 여강 ⓒ 2012 한국의산천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삼합리부터 이포대교 부근 금사면 전북리까지 지나는 남한강 물길을 ‘여강(驪江)’이라 부른다. 규모로 보자면 총 38.9킬로미터, 약 일백리다.

목은 이색은 그의 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들이 펀펀하고 산이 멀다"라고...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던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은 여주 남한강에 대해 “멀리 동쪽에서 몇백 리 흘러 내려온 강물이 여주에 이르러 강폭이 점점 넓어져 여강이 되었는데, 물결이 맴돌아 세차며 맑고 환하여 사랑할 만하다”고 했다. 또한 " 강의 좌우가로 펼쳐진 숲과 기름진 논밭이 멀리 몇백리에 가득하여 벼가 잘 되고 기장과 수수가 잘 되고 나무하고 풀 베는데 적당하고, 사냥하고 물고기 잡는데 적당하며, 모든것이 다 넉넉하다"고 하였다.

 

 여강이란 이름은 여주의 옛 이름인 황려(黃驪)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려의 문신이자 재상이었던 이규보는 ‘웅(雄)하고 기특한 쌍마(黃馬, 驪馬)가 물가에서 나오매 현 이름이 황려(黃驪)가 되었네’라는 시를 통해 여주 지명의 유래를 밝힌 바 있다.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은 ‘긴 강이 동남방에서 동북방으로 흘러들어 마을 앞에서 띠를 둘렀는데 이곳이 강가 중에 제일가는 마을이다. 주민들은 배로 장사하는 데 힘써 농사에 대신하는데, 그 이익이 농사하는 집보다 낫다’고 여주 지방을 묘사하기도 했다.

 

옛 문헌에서는 여강을 상류부터 단강, 여강, 기류로 나누었다. 여강 위의 단강 부근은 물이 깊어 수려한 경관을 간직하고 있으며, 여강 아래는 금사면 지역으로 넓은 강이 남북으로 흐르고 경치가 좋아 예로부터 사대부뿐만 아니라 시객들이 선호해 온 곳으로 유명하다.

 

▲ 은모래 유원지에서 바라 본 신륵산 전경 ⓒ2012 한국의산천

여주에는 여강(驪江)이 흐른다. 강원도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원주를 지나온 섬강과 충청도 속리산에서 내려와 충주를 거친 달천, 그리고 경기도 용인시 문수봉에서 발원하여 이천시 장호원을 거쳐 여주로 흘러드는 청미천을 품안에 받아들인 남한강은 여주 땅 점동면 삼합리에 들어서면서 여강이라는 이름 하나를 더 갖는다. 여강은 여주를 지나는 남한강 물줄기를 뜻한다. 

 

 

江을 바로 앞에 두고 자리한 신륵사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驪江)을 바로 앞에 두고 나즈막한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깊숙한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 비해 신륵사는 특이하게도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은빛 백사장, 그리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 강 건너로 보이는 강월헌과 전탑 ⓒ 2012 한국의산천

 

강가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누각이 있는데 본래 나옹선사가 입적한 후 그의 당호를 따서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있다.본래의 정자는 1972년의 대홍수로 떠내려가고 이후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운것이다. 

 

신륵사는 창건 이래로 보제존자 나옹화상과 같은 고승대덕이 지냈던 곳이며 더불어 그 경관이 뛰어난 사찰로 이름이 높다. 

조선 후기 문인 김병익은 <신륵사중수기(神勒寺重修記)>에서 신륵사의 명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절을 세우고 폐하는 것이 세상의 가르침이 될 수 없거니와 유학자로서도 이를 위하여 노력할 일은 아니지만, 절을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적이 명승지로 이름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륵사라는 절은 고려시대의 나옹이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높은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것이 예스러워 목은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시로써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여주는 산수가 청수하고 그윽하며 또한 평원하고 조망이 좋으며, 이와 더불어 신륵사는 높고 서늘한 것이 겸하여 있으니 그 경치가 절승한 지경과 같다.오직 이 두가지 이유로 온 나라에서 일컬어 온지가 이미 천년이나 되었으니 비록 내가 절을 세우지 못할망정 폐할 수 있겠는가.' 신륵사 중수기는 세종의 능인 영릉 英陵 을 여주로 옮기면서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를 다시 중건하자는 내용이 담긴 글이다. 

 

이와 같이 신륵사와 여주의 뛰어난 경관이 전국에 알려진지 천 년이나 되었다는 기록으로보아 여주와 신륵사의 아름다움은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수 있다. 여주의 아름다운 경치 여덟가지를 들어 여주팔경으로 일컬으며, 그 첫 번째가 바로 신륵사이니, 신륵사는 수승한 경관과 오랜 역사로 인하여 여주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온 곳임을 알 수 있다.

 

▲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신륵사 전경 ⓒ 2012 한국의산천  

 

이중환의 택리지 '경기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온다.

물길은 충주에서 강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오는데 원주 여주 양근을 지나 광주 북쪽 회룡진에 이르러 한양의 면수(面水)가 된다. 여주읍은 강 남쪽에 위치하여 한양과의 거리는 물길이나 육로로 200리가 안된다.

 

읍과 백애촌은 한들로 통하여 동남쪽이 넓게 트이고 기후가 맑고 서늘하며 여러대를 이어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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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북쪽에는 신륵사가 있으며 절 곁에는 강월헌(江月軒)이 있는데, 강을 임한 바윗돌이 기이하다. (을유문화사 택리지 참고)

 

▲ 남한강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는 신륵사 다층전탑 ⓒ 2005 한국의산천 촬영

 

고려시대의 벽돌 탑. 보물 제226호. 높이 약 9.4m. 아래로 남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 맑게 그리고 고요히 흐르는 여강 ⓒ 2012 한국의산천

여강을 보니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에서의 대사가 떠오른다.

그를 이해 할 수 는 없어도 사랑 할 수 는 있다.

 

▲ 3층 석탑 2005년 촬영 ⓒ 2012 한국의산천

 

▲ 강월헌(江月軒) ⓒ 2005 촬영 한국의산천.

 

삼층석탑 옆의 강월헌(江月軒)은 작년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추노’ 속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정자에 올라 흐르는 물을 보면 강물이 흐르는것이 아니라 내가 흘러감을 느끼게 된다.

 

 

 

▲ Queen of my heart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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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륵사와 강가에 자리한 강월헌(江月軒) ⓒ 2012 한국의산천

 

신륵사가 자리한 경기도 여주는 조선시대 4대 나루(광나루·마포·조포·이포) 중 조포(潮浦)와 이포(梨浦), 이렇게 두개를 가지고 있을 만큼 사람과 물자가 수시로 드나들던 수운 요지였다. 강월헌 아래가 바로 조포가 있던 곳이다. 사람을 실어나르던 황포돛배와 영월과 정선에서 뗏목을 만들어 서울로 가던 떼꾼, 소금을 싣고 강원도로 가던 소금배가 조포와 이포를 이용했다. 번성하던 나루는 사라졌지만, 여주는 여전히 경기도와 충북, 강원도가 만나는 접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 신륵사 입구의 조포나루터 옆 강변유원지 ⓒ 2005년 촬영 한국의산천

여주에는 이호나루, 조포나루, 새나루, 흔암나루, 찬우물나루, 상자포나루 등 수많은 나루터가 있었다. 그중에서 조포나루는 고려 시대 이후 남한강 5대 강항의 하나로서 세곡운반과 물자수송의 물류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다.

 

▲ 여강길 자전거 도로 ⓒ 2012 한국의산천 

 

태백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 내리며 만든 물굽이 중에 푸근하며 너르게 강폭을 유지하며 가장 아름다운 곳 가운데 한군데라면 이곳 신륵사 부근일것이다. 한강의 상류인 이곳을 이곳 주민들은 여강(驪江)이라고 불렀다. 또한 주변 풍광이 빼어나 예로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 섬강교를 향하여 2005년 촬영 ⓒ 2012 한국의산천

 

산을 끼고 흐르는 섬강은 앞에서 남한강과 합류됩니다. 섬강(蟾江)은 홍천군 둔내면과 정일면 일대에서 발원하여 강원도 남서부 횡성과 원주시, 문막 등을 거치며 계천과 원주천, 서곡천, 삼산천, 이리천, 일리천, 옥산청 등이 합수되어 남한강에 합류됩니다.

 

 

주요문화재  

1)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    
2)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3)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4)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  
5)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6)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7)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보물 제231호)

8) 신륵사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 어느 해 강천리에서 ⓒ 2012 한국의산천  

배가 쉬어 가기 좋은 곳이라 하여 강천리(康:편안할 강. 川 내천)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전한다.

 

▲ 2005년 흥원창趾에서 나의 애마 '바람의 자유'와 함께 ⓒ 2012 한국의산천

 

▲ 2005년 촬영 흥원창지 남한강 뚝바위 (예솔암) ⓒ 2012 한국의산천

 

흥원창 팔각정에서 바라 본 강 건너편 

남한강은 강원도 태백의 금대산 북쪽 기슭 검용소에서 발원하여 정선을 지나 영월에서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류한 뒤 충청북도 단양을 거쳐 충주로 흐른다. 충주의 충주댐을 지나 달천과 제천천 등을 만나 북쪽으로 흐르며, 강원도 남서부를 흐른 섬강줄기를 만나 여주군 관내에 들어서며 여강이라 불린다. 이후 여강은 여주와 양평을 지나 팔당댐 상류인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거대한 한강(큰강)을 이루게 된다.

  

멀수록 가까운 산

다가가면 더욱 멀어져 가는 산.

 

하냥 다짐하듯 그리워라

더듬듯 기어들면,

 

우리가 어머니라 부르는 조국의 품 안

그 갈매빛 속고갱이.

 

산은 그래서

발로만 오르는 것이 아니다.

머리로 아니 가슴으로 헤쳐 올라야 한다. 

 

남한강과 섬강 합수머리에 솟구친 암벽 뚝바위   

남한강과 섬강이 합쳐지는 뚝바위 일원은 고려 때부터 강원도와 충청도, 경기도 일원의 조곡(租穀)을 모아 한양으로 운송하는 거점이었다. 뚝바위 건너편 강둑 아래 있는 흥원창(興原倉) 빗돌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운송거점이자 6·25 이전까지 장이 서고, 나루터로 이용되기도 했던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유적지를 마주하며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하는 절경을 뽐내며 솟아오른 뚝바위에 바윗길이 탄생한 것은 90년대 초. 당시 전문등반을 추구하던 여주 FM산악회 회원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중암에 5개, 소암에 1개 루트를 개척한 후 개척등반을 주도해오던 회원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서 뚝바위는 또다시 단지 강변의 자연경관으로 남게 됐다. 그러다 2006년 말 원주에서 활동 중인 전양표(원주클라이머스) 회원을 통해 뚝바위에 대해 알게 된 클럽8848팀에 의해 하드프리 대상지인 예솔암으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남한강 뚝바위 (예솔암)

남한강과 섬강의 합수목을 이루는 강변을 따라 약 1km 폭으로 암벽이 형성돼 있는 뚝바위는 단일 암장으로서는 드물다 싶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클럽8848팀은 현재 3개 지역으로 나뉜 예솔암 중 맨 좌측 소암(小岩)에 쉐펠(5.10a)을 비롯해 11개 루트를 내고, 중앙 하단부가 오버행을 이룬 중암(中岩)에 8848(5.10c)과 하이라이트(5.12b)를 비롯해 12개, 그리고 표고 120m 높이의 대암(大岩)에 ‘FM의 전설’(5.9~5.11b)과 예솔(5.9~5.10b) 등 6개 루트를 냈다. 이에 따라 예솔암에는 90년대 초 여주 FM산악회가 개척한 6개 루트 등 총 35개 등반로가 새롭게 선을 보였다. 

[개척보고] 예솔암. 남한강변에 간현암급 새 암장 탄생
클럽8848팀, 여주 뚝바위 예솔암에 35개 루트 선보여 남한강변에 원주 간현암에 견줄 만한 새 암장이 탄생했다. 예솔스포츠 필드테스트팀인 클럽8848(회장 김상호)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강천2리 자산(紫山·248.5m) 남쪽 자락에 위치한 뚝바위에서 1년 9개월간의 개척등반을 마치고 2008년 9월28일 예솔암 개척보고회를 가졌다.

 

남한강과 섬강의 합수목을 이루는 강변을 따라 약 1km 폭으로 암벽이 형성돼 있는 뚝바위는 단일 암장으로서는 드물다 싶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클럽8848팀은 현재 3개 지역으로 나뉜 예솔암 중 맨 좌측 소암(小岩)에 쉐펠(5.10a)을 비롯해 11개 루트를 내고, 중앙 하단부가 오버행을 이룬 중암(中岩)에 8848(5.10c)과 하이라이트(5.12b)를 비롯해 12개, 그리고 표고 120m 높이의 대암(大岩)에 ‘FM의 전설’(5.9~5.11b)과 예솔(5.9~5.10b) 등 6개 루트를 냈다. 이에 따라 예솔암에는 90년대 초 여주 FM산악회가 개척한 6개 루트 등 총 35개 등반로가 새롭게 선을 보였다. (월간山 참고)

 

▲ 흥원창지에 서있는 표석 ⓒ 2012 한국의산천

남한강이 섬강을 만나는 지점이 바로 흥호리 흥원창 창말 지역이다. 행정지명으로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며, 건너편에는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삼합리, 인근지역에는 충청북도가 있다.

 

흥원창지(興原倉址) - 고려시대

흥원창지(興原倉址)는 부론면 흥호2리 71번지 일대에 소재하고 있다. 흥원창은 조세미(租稅米)의 수송을 위하여 수로 연변에 설치하였던 창고로 강상수송을 맡았던 수운창이다.

조창 제도가 완비된 것은 고려 성종 11년(992)경 이었다. 세금으로 바치던 쌀의 수송은 국가재정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그 운영에 관하여 매우 철저하였다. 정종 때에는 12창의 수송선 수를 정하였는데, 이 당시 흥원창에는 2백섬씩을 운송하는 배를 21척 배치하였다고 전한다. 아울러 이러한 조창에는 횡령 등 각종 부정한 행위를 막기 위하여 조창을 감독하는 관리 즉, 창감(倉監)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때 흥원창에는 원주를 비롯하여 평창·영월·정선·횡성·강릉·삼척·울진·평해군의 세미(稅米)가 운송, 보관되었는데, 이들 지역에서 흥원창까지는 주로 육로로 운송되었고, 흥원창에서 뱃길로 한양으로 운반되었다.
이후 고려말에는 몽고 등의 침략으로 인해 조창제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다시 정비가 이루어졌지만 이전처럼 활발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원주의 주요 관창(官倉)은 읍내에 있는 사창(司倉)과 별창(別倉)을 제외하고 북창(北倉)[안창(安倉)], 서창(西倉)[흥원(興原)], 동창(東倉)[주천(酒泉)]등 3개의 창고가 있었다.이 중에 서창(西倉)의 경우 흥원(興原)에 있었기 때문에 흔히 흥원창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12조창(租倉)의 하나로 문막쪽으로 흘러나오는 섬강이 남한강 주류와 합류되는 곳으로 '은담포'라고도 하였다.


조창이 주로 이용되었을 때에는 문막이 중간 포구(浦口)역할을 하였다. 이 때문에 문막이 원주보다도 경제활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흥원창지는 지역적으로 섬강과 충주 쪽에서 흘러오는 남한강이 만나 여주쪽으로 흘러가는 합류(合流) 지점이다. 조선시대에도 흥원창은 그대로 이어졌지만 관선조운이 쇠퇴하기 시작한 조선 후기, 사선업자에 의한 임운이 행해지면서 조창의 기능을 점차 상실했으며 이곳에는 한국전쟁 직전까지 뱃터가 남아있어 장터가 있었는데, 한국전쟁 이후에는 모두 사라졌다.

 

▲ 남한강 뚝바위/ 오른쪽에서 섬강이 흘러들며 남한강 본류와 합류합니다 ⓒ 2012 한국의산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 스스로 물을 나누는 고개가 된다. 그렇기에 산의 능선은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市·道의 경계지점이 되기도 한다.

산은 물을 가르지 않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이곳은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 이루어진 합수물로 '은담포'라고도 한다. 그 당시 이곳에는 2백섬씩을 운송하는 배 21척이나 배치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고 한다.

 

흥원창지 강둑에 설치한 조그마한 정자 안에는 부론면 인근에 있는 문화유적지를 소개한 그림과 안내문구가 있었다. 이 안내판에는 조선중기 문신이자 영의정을 지닌 노수신의 '흥원 배 가운데서 이달에게 주다'라는 한시가 적혀 있다.

 

먼산에는 아름다운 기운 감도는데/긴 물굽이에 해빛이 걷히는 구나/친한 벗이 눈속에 오직 하나 보이는데/향기로운 풀은 주변에 충만하구나/글모임에 그(이달)의 시를 당할 자가 없고/맑은 이야기속에는 술이 멀지 않도다/어찌 벼슬을 근심하겠는가/종일 흥원창 풍파와 함께 있으니.

허균의 스승인 노수신이 흥원창을 소재로 지은 한시다.

 

우리나라는 평야보다 산지가 많으므로 옛날에는 도로교통보다는 하천과 바다를 이용하는 수운교통이 발달하였다. 고려 초기부터 조세를 징수하였으며 조세로서는 미곡을 징수하였다. 이것이 세미(稅米)이다.
각 지방의 세미는 주로 하천을 이용하여 운반하고 하구에는 창고를 설치하여 집하하였다. 고려시대는 남도에 12창(倉)을 설치하여 각 창에는 판관(判官)을 두어 그 지방의 세미를 징수하였다. 12창에 모인 세미는 주로 서해안을 따라서 주운으로 중앙의 경창(京倉: 고려의 수도, 송악에 있는 창고)으로 수송하였다. 당시 설치하였던 남도의 12창은 다음과 같다.

․충주의 덕흥창, 아주의 하양창(아산), 보안의 안흥창(부안), 영광의 부용창, 성주의 해룡창, 나주의 해능창, 원주의 흥원창, 부성의 영풍창(서산), 임파의 진성창, 영암의 장흥창, 사주의 통양창(사천), 합포의 석두창(창원)

이 이외에 서해도(황해도) 장연현에 안활창이 있었다. 각 지방의 창고에 모인 세미는 선박으로 서해안과 예성강을 거쳐서 수도인 송악의 경창으로 수송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조운선(漕運船)은 북한강의 소양강창(춘천)과 남한강변의 가흥창(충주) 그리고 흥원창(원주)에 집하한 세미를 한강을 따라서 서울의 경창으로 수송하였다. 특히 한강, 대동강, 낙동강 등의 대하천은 물자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 하천의 주운은 한일합방 후, 도로와 철도의 발달로 급격히 쇠퇴하였다.

 

▲ 흑룡의 해를 맞아 자징거를 타고 다시 한번 찾아가볼까? ⓒ 2012 한국의산천

 

 

▲ 휴일이면 새벽 3시에 일어나 답사를 떠나던 열정이 있었던 시절이다 ⓒ 2012 한국의산천   

 

▲ 국내 부도탑비 중 가장 아름답다는 11세기의 고승 지광국사 현묘탑비(국보 59호) ⓒ 2012 한국의산천  

임금 왕(王)자가 새겨진 귀갑문(龜甲紋). 국보 59호 높이 4m 55cm의 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가까이 다가 설수록 정말 커다란 비입니다.

 

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국보 59호

소재지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74-2 
시대 고려시대

 

▲ 국보 59호 높이 4m 55cm의 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 2007 촬영 한국의산천 

 

▲ 지광국사 현묘탑비(국보 59호) 앞에서 ⓒ 2012 한국의산천  

 

여주 팔경

1. 신륵모종(神勒暮鍾) : 신륵사에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

2. 마암어등(馬巖漁燈) : 마암 앞 강가에 고기잡이배의 등불 밝히는 풍경

3. 학동모연(鶴洞暮煙) : 강 건너 학동에 저녁밥 짓는 연기

4. 연탄귀범(燕灘歸帆) : 여울에 돛단배 귀가하는 모습

5. 양도낙안(洋島落雁) : 양섬에 기러기떼 내리는 모습

6. 팔수장림(八藪長林) : 오학리 강변의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치는 전경

7. 이릉두견(二陵杜鵑) :영릉과 녕릉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

8. 파사과우(婆娑過雨) : 파사성에 여름철 소나기 스치는 광경.

 

 

◀ 2005년 촬영 명성황후 생가에 있는 하마비 ⓒ 2012 한국의산천

 

이 비석이 서있는 곳부터는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던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

 

1413(태종13년)에 최초로 종묘와 궐문앞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표목을 세워놓았는데 이것이 후일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또는 하마비(下馬碑)라고 새긴 비석을 새우게 된것이다.

 

하마비는 왕궁,향교 또는  명사 고관의 출생지나 분묘앞에 세워져있는데 이것은 민유중선생의 묘와 명성황후의 생가가 있어서 그 분들에 대한 경의 표시로 말에서 내렸음을 알수있다.

(비석 표면이 훼손된것은 6.25때 북한군의 총탄 흔적이다)

 

 

명성황후 생가 (위치 : 여주 IC입구에 있음 )

 

명성황후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황후로 본관은 여흥이며, 증영의정 민치록의 외동딸. 고종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국정을 치르기엔 나이가 어려서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되고 정치 실권을 잡게 되었다.
 

1866년(고종 3년)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는데 이때 고종은 15세였다.

1882년 (고종 17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청의 힘을 빌어 대원군을 밀어내고 민씨정권을 수립하였으나 1894년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경장이 시작되어 친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의 추방을 기도하였다. 

 

 이듬해인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부임했으나 계속 이들을 견제하며 친러정책을 강화하자 일본인 낭인들이 8월 20일 궁궐을 침범하였고, 그 가운데 아다찌가 거느린 선봉부대의 흉인들에게 건청궁에서 살해당한 후 뒷산에 묻혔다. . 

 

 죽은 뒤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가 10월 복호되고 1897년 (광무 1년) 명성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이 해 11월국장이 거행되었다.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에 이장되어 홍릉이라 하였고, 1919년 고종이 붕어하자 2월에 미금시로 이장되었다.

명성황후는 1874년 (고종 11년)에 왕자를 낳아 2년 후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그가 바로 순종이다.

 

명성황후 생가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여주 톨게이트에서 나오면서 여주방면으로 우회전하면 200m 거리에 우측으로 명성황후 생가가 있음.   

▲ 2005년 촬영 명성황후 생가 ⓒ 2012 한국의산천

 

▲ 당신은 지금 여주를 떠나고 있습니다 ⓒ 2012 한국의산천 

 

주변유적지와 관광지 

도자기의 마을인 만큼 주변이 온통 도자기 관련 관광지이다. 영월루, 세종대왕릉, 명성황후생가, 고달사지, 목아불교박물관, 파사성 또한 충주, 원주, 여주를 잇는 수운의 흐름은 수운을 따라 많은 절과 창의 흔적을 남긴다. 충주쪽으로 청룡사지, 정토사, 억정사 등과 가흥창이 있고 하류로 가면 신륵사, 고달사지가 있다.  

수운교통이 발달했던 부론면에는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59호),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78호), 거돈사지 3층석탑(보물 750호), 서돈사지(사적 168호), 흥원창, 법천사지 당간지주, 원성법천리 고분 등 유물유적이 널리 있어 당대에 번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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