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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아자여 정기 라이딩 오이도 2

by 한국의산천 2012. 2. 19.

아자여 (아자여 : 아마추어 자전거 여행 동호회) 부평/부천방 신년 정기 라이딩 오이도 2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 시화...오이도의 '빨강등대'에 들어서며 ⓒ 2012 한국의산천

등대를 보면 詩 목마와 숙녀가 떠오릅니다  

 

木馬와 淑女

                

                                          - 박인환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매어 우는데

 

▲ 숨어있는 보석 '삼미리'님 ⓒ 2012 한국의산천

 

오이도

오이도는 원래는 육지와 떨어져 있는 서해안 바다 위에 있는 섬지역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일제(日帝)가 조선산(朝鮮産) 소금 착취 등을 목적으로 이 지역의 갯벌에다 염전(鹽田)을 설치하고 토사(土砂)를 메워 육지와 붙어있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오이도의 '오이(烏耳)' 한자로 풀이하면 '까마귀의 귀'라는 뜻인데 섬형태가 그것과 비슷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실제는 옛 이름인 오질이도에서 나온 듯하다.

조선 초기에는 오질애(吾叱哀)였다가 성종 때에 오질이도(吾叱耳島)로 개칭된 후 정조 때부터에 현재의 이름인 오이도가 되었다. 과거에는 인근 옥구도와 함께 옥귀도(玉貴島)로 불여지기도 했다. 

 

또한 과거부터에는 인근의 옥구도와 함께 이 섬을 옥귀섬(玉貴島)이라고도 불리였는데.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옛날 제밀(제물포)에서 어느 임금이 배를 타고 중국으로 향하다가 오이도 서쪽에 있는 팔미도(八尾島) 앞 바다에서 조난하자 이 섬에 표류했다고 한다. 마침 무더운 여름이라 임금님이 목이 말라 물을 찾았더니 이 섬에 사는 어느 어부가 물을 떠 왔는데, 옥(玉)으로 만든 그릇에 물을 바치자 임금님이 깜짝 놀라 귀가 번뜩 띄었다고 한다. 이에 임금이 귀(貴)히 여기고 그후부터 이 섬은 '옥귀도(玉貴島)'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하며, 또는 오끼섬으로 부르게 되었다. 오귀섬,오질애의 이름이 시간이 지나면서 쉽게 발음되는 오이도(烏耳島)라는 이름으로 바뀌였으며, 일제에 의해 육지화가 되었지만 바다 위의 섬을 뜻하는 '도(島)' 라는 명칭은 그대로 이어졌다.

 

 오이도는 현재 바다 위의 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명칭은 바뀌지 않고 지금까지 그대로 불리워지고 있다. 현재는 오이도에서 안산시 대부도까지 이어지는 시화방조제가 건설 되었고, 오이도 지역도 오이도 해양단지로 조성되었다. 그로 인해 주변에는 생선회와 조개구이집 등 각종 민간업소가 들어서 있으며 지금은 바닷가와 갯벌 주변에는 낚시꾼들이나 관광객들이 오가는 곳이 되었다.

 

바닷가 및 갯벌 주변에는 생선회 및 조개구이집들이 밀집해 있으며 바닷가 철책선을 따라 산책로가 갖추어져 있다. 각종 생태계와 철새 서식지로도 각광받아 관광객과 낚시잡이 강태공들이 이 곳을 왕래하고 있다.

 

▲ 삼미리님의 윌리 ⓒ 2012 한국의산천

 

 

 

 

 

 

 

 

 

 

 

 

 

 

 

 

 

 

▲ 옥구공원 뒷길 ⓒ 2012 한국의산천

 

 

 

 

 

 

▲ 소래포구 전경 ⓒ 2012 한국의산천  

 

논현동의 소래포구의 소래(蘇萊)는 원래 신라시대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나당연합군으로 백제를 정벌할 때 이곳에 왔다(萊)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소래포구가 생기게된 유래는 1930년 후반으로 거슬로 올라갑니다.  

이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천일염(天日鹽 )을 일제가 수탈하기위한 수단으로 수인선 철도를 건설하면서 작업하는 인부들과 염부꾼(염전에서 일하는 사람)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나룻배 1척을 최초로 소래포구에 정착하기 시작한 배경이었으며, 그 후 1960년대초 실향민 6가구 17명어업인이 (어촌계구성) 전마선으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면서 돼지그물, 지금의 연안낭장망 어업에 범선(돛단배)을 이용하여 아주 가까운 바다에 나가 새우젖잡이를 하여 머리에 이고, 지고, 인천, 부평, 서울등지로 나가 팔아 오다가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무동력선을 동력선으로 개량하였으며, 그 때부터 어선수도 차츰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수인선을 이용하여 수원, 인천등지에서 상인들이 몰려오고 일반소비자들이 구경삼아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직접거래가 활발이 이 루어지면서 물량장 및 선착장, 공판장을 조성하였으며, 많은 예산이드 나 예산이 없어 돌과 모래, 흙을 섬에서 배에 가득 실어다가 어린이에 서부터 어른까지 총동원되어 포구기반시설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 때 부터 주변에 튀김집, 횟집이 하나 둘씩 생겨 나오며 소래어촌계가 중 심이 되어 관광객 유치에 앞장서 80년대 초반 각종 시설물 확충과 더 불어 각 TV 방송사에서 홍보용 방송은 물론 어촌에 관계된 프로, 연 속극등이 방영되면서 점차로 관광객이 해마다 늘어나 이곳을 찾는 사 람들과 선주 아주머니들의 넉넉한 인심이 외래객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한것입니다.

 

 80년대 대단위 관광어촌으로 발전하게되어 오늘 에는 일일 수천명에서 주말, 공휴일, 사리때(고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시기)면 3만~ 5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입니다. 소래포구는 천연적이 포구입니다. 폭이 100m 남짓한 갯골을 따라 썰 물때면 바닥이 완전히 드러납니다. 서해 간만의 차가 최고 9m로 동해, 남해 에서는 보기드문 현상이며, 밀물때가되면 물따라 배가 들어오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찾아보기 드문 신비한 천연포구입니다.

 

 

 

 

 

 

 

 

 

 

 

 

 

 

 

 

 

 

▲ 안전하고 즐거운 라이딩을 마치고 인천대공원에서 각자 귀가했습니다 ⓒ 2012 한국의산천

 아자여 회원님들 함께 달려서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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