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물머리 라이딩 2
정약용 생가
가끔 들리는 곳이지만 언제가도 좋은 강마을 마재
신도로를 벗어나 구도로 팔당수원지를 따라 양수대교 방향으로 강변을 끼고 달리다 보면 중앙선의 능내역이 보이고, 조금 더 지나쳐 가다 철길 밑을 지나칠 무렵 ‘정약용 묘소’라는 안내판이 나붙은 삼거리를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1.6㎞ 남짓 가면 강변 마을이 나오는데, 여기가 실학의 집대성자인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마재(馬峴)다.
우리나라 위인중 존경하는 분 정약용(丁若鏞, 1762~1836)님. 방대한 저술 한가지만으로도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 당시 주 학문이던 성리학, 주자학, 유학등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학설에 정면 대응하고 나서서 정치, 경제등 실제 생활에 필요한 학설을 주장하신 실학의 대가.
이 당시 실학을 주장한다는 것은 목숨을 포기하는 행위와 다름 없었지만 극진한 정조의 사랑으로 잠시 자리보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끝없는 귀향살이로 이어지게 된다.
정약용(나주 정씨, 자는 송보, 호는 다산 당호 여유당)
영조 38년(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정재원과 윤씨 사이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남
4형제
정약현(첫째 아들) : 첫째 부인 의령 남씨 소생
정약전(둘째 아들) : 둘째 부인 해남 윤씨 소생(신유사옥으로 귀양 간 후 흑산도에서 사망)
정약종(셋째 아들) : 둘째 부인 해남 윤씨 소생(신유사옥 때 아들 철상과 함께 순교)
정약용(넷째 아들) : 둘째 부인 해남 윤씨 소생(신유사옥으로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저술활동을 하다가 마재로 돌아와서 만년을 지내다가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성세를 받고 복권되지 않은 상태로 7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남)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선생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남양주의 상징이다.
팔당호반을 끼고 있는 조안면 마현마을엔 조선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사상의 선구자인 다산의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내 다산문화관과 다산기념관에선 선생의 일생과 업적을 살펴볼 수 있으며 다산의 수많은 저서와 수원 화성(華城)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 모형도 전시돼 있다.
다산의 생가 뒤편에는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생가 건너편에는 2009년 말 새로 문을 연 실학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오늘에 계승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집대성한 곳이다. 실학의 형성과 전개과정, 천문과 지리 등 실학사상 전반을 체계있게 보여주고 있다.
유배의 고통을 달랜 저술작업
정약용 선생은 학문적 수양과 저술에 전념하며 세계 정세와 서구 과학에 관한 서적들을 구해 연구하며 철학 지리 역사 법률 정치 문학 군사 등 광범한 영역에 걸쳐 역사상 유래가 없는 5백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가 있다.
"여유당전서"에는 2천여편의 詩歌가 들어 있고 또한 정치·경제에 대한 개혁구상을 밝힌 이른바 이서일표 (二書一表 : 목민심서(牧民心書:48권), 흠흠신서(欽欽新書:30권), 경세유표(經世遺表:48권 미완)가 있다. 주요한 철학 저서로는 "대학강의" "중용강의보"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주역사전" "역학서언 등이 있다.
그가 죽은지 74년 후인 1910년 조선 정부는 당시 사회 신진인사들의 여론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정약용에게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을 증직하고 시호를 내렸다.
흔히 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 탄압사건은 신유사옥 또는 신유교옥이라고 호칭되고 있으나 다산의 입장에서는 신유사화라고 명명하였다. 그 이유에 대하여 다산은 상세하고 명백한 논리의 기록을 남겼다.신유년의 천주교 탄압은 그 발생동기나 사건의 계기가 반드시 천주교 때문만은 아니었다. 벽파가 집권하여 시파를 억누르는 데서 벌어진 정치적 이유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공서파 일당이 말하기를 ...
"천명을 죽이더라도 정약용 한명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도 죽이지 않은것과 같다."
▲ 지난해 겨울에 이곳을 찾았을 때의 사진 ⓒ 2011 한국의산천
누리령의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 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쪄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정약용-
※ 정말로 월출산의 암릉이나 도봉산의 암릉 너무도 흡사합니다.
누릿재: 영암에서 강진으로 넘어가는 지금의 양호한 도로 풀치재(草嶺)
북쪽 바람 눈 휘몰듯이 나를 몰아붙여
머니먼 남쪽 강진의 밥 파는 집에 던졌구료 - 정약용 -
1801년 음력 11월 22,3일쯤 유배지 강진에 도착하여 쓴 첫 시이다. 당시 그곳의 주민들은 유배온 사람 보기를 대독(大毒)으로 보고 상대를 안하였으니....
그러니 강진읍 동문 밖 밥파는 집이자 주가(酒家)의 노파가 가련히 여기고 방을 내 주었다.
다산은 그 술과 밥을 파는 오두막을 사의재(四宜齋)라 명명하고 1805년 겨울까지 만 4년을 거주하는데 ,이제사 겨를을 얻었다고 기뻐하며 학문과 저술활동을 시작하며 전념하게 된다.
※ 사의재(四宜齋)
1.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맑게 해야한다.
2.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한다.
3.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도록 해야한다.
4. 동작은 마땅히 후중해야하니 후중하지 못한다면 곧바로 더디게 하도록 해야 한다.
이 때문에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바르게 해야하는 방으로서 " 四宜之齊"라고 하였다.
마땅함이라 함은 義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義로 규제함이다. 나이만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 둔 사업은 퇴폐됨을 서글프게 여기므로 자신을 성찰하려는 까닭에서 지은 이름이다. 때는 가경(嘉慶)8년(1803) 11월 10일 동짓날...... -정약용-
▲ 지난해 겨울 정약용 생가를 찾았을때 ⓒ 2011 한국의산천
두 강물이 만나는 양평의 두물머리(兩水里).
두물거리·두머리·두거리·양수두·양수 등으로 불렸던 양평의 두물머리는 적어도 남한에선 규모가 가장 큰 합수점이다. 한반도의 중심을 적시고 흐르는 큰 물줄기인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평 두물머리 둘러보기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때 우리 이젠 새벽강을 보러 떠나요
과거로 되돌아 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거요
한강을 옆구리에 끼고 거슬러 오른다. 양평 나들이 길에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언제나 한강 줄기다. 한강을 이루는 두 개의 큰 물줄기, 곧 남한강과 북한강을 모두 끌어안고 있는 양평은 한강을 빼놓고는 결코 한 마디도 이야기할 수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 ‘왼쪽은 용문을 의지하고 오른쪽으로는 호수를 베고 누워있다(左據龍文右枕湖)’는 기록으로 양평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사족을 붙이자면 호수란 바로 남한강과 북한강을 일컫는다. 거기에 용문산은 백두대간의 오대산에서 뻗어 내려오며 두 강을 가르는 한강기맥의 맹주니, 양평은 한강기맥을 중심으로 양쪽 날개에 남한강과 북한강을 거느린 형국이 된다. 그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 바로 두물머리다.
우리 땅이름에서 물줄기가 합수하는 곳을 일컫는 명칭은 다양하다. 정선 아라리로 잘 알려진 아우라지는 송천과 골지천이 하나로 모이는 곳이다. 또 3·1만세운동의 기개가 살아있는 천안 아오내(아우내)는 광기천·서원천·병천천이 하나가 되는 곳인데, 병천(竝川)은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임진강이 흘러드는 한강 하류의 교하(交河)는 옛 이름이 어을매(於乙買)로서 ‘물(매)이 서로 어울리는 고을’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지도를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물줄기가 하나로 만나는 곳임을 알려주는 땅이름을 적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민병준의 향토기행 참고]
두 강물이 만나는 양평의 두물머리(兩水里).
두물거리·두머리·두거리·양수두·양수 등으로 불렸던 양평의 두물머리는 적어도 남한에선 규모가 가장 큰 합수점이다. 한반도의 중심을 적시고 흐르는 큰 물줄기인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평 두물머리는 좀 특별한 감이 있다.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려와 남한강과 북한강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한강기맥의 끝자락이기도 한 두물머리엔 늙은 느티나무가 전설처럼 서있다. 400년쯤 전부터 이곳에 뿌리박고서 남한강이나 북한강 물길을 따라 한양으로 오가던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고 쉼터 역할을 하던 나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를 ‘도당 할아버지’라 부르며, 지금도 매년 가을 젯상을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당제를 지낸다. 하지만 ‘도당 할아버지’는 자신의 배필이었던 ‘도당 할머니’가 1974년 팔당호가 생기며 물에 잠겨버린 바람에 아직까지 울적하다.
두물머리의 지금 풍경은 한가한 수채화지만, 팔당호라는 인공호수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한강에서 제법 번잡한 편에 속하는 나루터였을 것이다.
그 옛날 삼남대로의 갈림길인 천안삼거리가 유명했다면, 물길에선 양평의 두물머리도 제법 큰 삼거리였다. 서울과 강원·충청지방 간의 수송물자 나르는 배가 휴식하던 곳이며, 예전엔 술을 파는 객주집도 넘칠 정도였다. 양평엔 남한강의 양근나루·앙덕나루, 북한강의 내미연나루·수입나루 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상징성에 있어서 두물머리나루에 떨어진다.
북한가에서 - 정태춘 박은옥
어두운 밤 하늘에 가득 덮힌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빈 거릴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개속으로 새벽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릴 들으려 했소
강물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때 우리 이젠 새벽강을 보러 떠나요
과거로 되돌아 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거요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거요
사진 동호인들이 손꼽는 최고의 출사지 ‘두물머리’. 서울에서 6번 국도를 타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곳에 최고의 절경이 숨어 있다. 최근에 개통된 중앙선-양수역은 두물머리를 더욱 가까운 곳으로 만들었다.
물이 만나고 사람이 만난다
예부터 ‘두머리’(옛날엔 두물머리를 두머리라 불렀다)는 서울로 들어가기 전 하루 머물러 가는 쉼터였다. 강원도 산골에서 물길을 따라 온 뗏목과 나무들이 이곳에서 쉬어 가고 사람도 같이 쉬었다. 주막집이 늘어서고 50가구가 넘게 살면서 서울로 오가는 길손들로 북적거리는 마을이 되었다. 두물머리가 포구 역할을 마감한 것은 1973년 팔당댐이 생기면서부터다. 서울로 드나들던 뱃길은 자동차가 대신했다. 이곳 강가는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배가 다니지 않게 됐다. 지금은 다섯 가구 남짓 남아 있다. ‘두물머리 포구’ 바로 앞 널찍한 가게도 지금은 문을 닫았다. 문 닫은 가게에선 낮부터 동네 주민 몇이 모여 막걸리를 들이켠다. 두물머리는 양수리가 확대되면서 행정구역상 양수5리로 편입됐다. 나루터 마을의 흔적이라고는 ‘두물머리 포구’라는 이름뿐이지만 물이 만나는 곳에 사람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두물머리의 절경을 담기 위해 이곳을 찾는 것이다.
드라마 명장면 모두‘두물머리’에서 두물머리를 찾아오면 땅 위에 놓여 있는 돛단배를 볼 수 있다. 바로 드라마 <허준>에 나왔던 그 배다. 두물머리에서 한 평생을 산 이귀현씨(63)는 이곳의 산 증인이다. “1965년까지 마지막 뱃사공 조수 역할을 했어요. 어르신들 배 끌고 가면 물도 퍼 주고, 앞에 서서 삿대질도 하고 그랬죠.”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배를 통해 일을 하고 배를 통해 돈을 벌었다. 최근 드라마에서 고뇌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물 위에 비쳤다면 배경은 대부분 두물머리다. 드라마 <첫사랑> 마지막 회에서 주인공 남녀가 재회하는 곳도 이곳의 느티나무 아래다. 수령 400년이 넘는 느티나무는 신령한 기운 때문에 전국 무속인들이 굿판을 벌이기도 한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서울에서 차로 불과 30분 거리에 있는 두물머리는 사진을 찍는 이들에게 큰 인기다. 물안개 낀 풍광을 담기 위해 새벽부터 카메라를 들고 찾는다. 취재를 위해 찾아간 날도 사진 찍는 이들, 소풍 온 아이들, 그림을 그리는 노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서울과 양평을 잇는 다리
서울에서 양평을 지나 강원도를 가려면 양수대교를 지난다. 두물머리는 양수대교 바로 아래 있다.
가는 길
승용차로 서울에서 강변북로를 타고 구리를 지나 양수대교 지난 지점에서 ‘두물머리’ 이정표를 따라 내려오면 된다. 청량리에서 167번 버스를 타면 양수리가 종점이다. 종점에서 도보로 10분이면 두물머리에 도착한다. 혹은 청량리역에서 양수역까지 전철을 타면 40분 걸린다.
기와집순두부
양수리에서 차로 5분쯤 떨어진 조안면에 있다. / 031-576-9009
송촌식당
동치미국수가 별미, 양수리 연세중학교 앞에 있다. / 031-576-4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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