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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봄이오는 파란하늘

by 한국의산천 2011. 3. 9.

봄이 오는 파란 하늘

일산을 다녀오다가 하늘빛이 너무 고와서 잠시 행주산성 주변 둘러보기 [2011 · 3 · 9 · 봄바람이 많이 부는 수요일 · 한국의산천]

 

 

 

님과 벗
                 - 김소월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은 사랑에서 좋아라.
딸기꽃 피어서 향기(香氣)로운 때를
고초(苦草)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을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산성 강가 선착장공원에 세워진 추강 남효온 선생 詩碑 ⓒ 2011 한국의산천

 

조선 단종 때 사육신의 충절을 후세에 널리 알린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 선생의 시비(詩碑)는  높이 3.6m의 오석으로 제작됐으며 '강나루 주막에 묵으며' 등 선생이 지은 두 편의 시와 비 뒤편에는 일대기가 적혀있다.

추강은 고양시에 거주하며 강직한 선비의 삶을 살다가 39세에 짧은 생을 마감한 인물로 사육신을 흠모해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세상에 사육신의 충절을 전한 인물이다.

추강의 시신은 480년 동안 고양 대장동 일대에 묻혀있었으나 1987년 신도시 개발로 김포시 하성면 의령 남씨 문중 묘지로 옮겨졌다.

 

남효온(南孝溫)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본관 의령(宜寧). 자 백공(伯恭). 호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 시호 문정(文貞).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數汝昌)·김시습(金時習)·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1478년(성종 9) 세조에 의해 물가에 이장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위를 상소하였으나,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상달되지 못하자 실의에 빠져 유랑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는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 복위를 상소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하였다.

만년에 저술한 《육신전(六臣傳)》은 빛을 못 보다가 숙종 때 비로소 간행되었다. 1513년(중종 8) 소릉이 추복(追復)되면서 신원(伸寃)되어 좌승지에 추증되고 1782년(정조 6)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 생육신의 창절사(彰節祠)에 제향되었다.

 

참고 창절사

 

▲ 영월읍내에 자리한 창절사 ⓒ 2011 한국의산천  

창절사는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다 세조에게 죽은 사육신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6위(位)와 생육신 가운데 김시습, 남효온 2위, 박심문, 엄흥도 충신 2위를 합쳐 10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단종이 승하한 이후, 영월의 사림(士林)은 노산군의 묘 앞에 육신사를 세우려고 했지만 당시 사정에 의해 사당을 지을 수 없었다. 그 이후 숙종 11년(1698)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노산군의 묘는 장릉이란 능호를 받았다. 따라서 그 격식에 맞게 능을 새로 단장하면서 영월 유림의 오랜 숙원인 육신사를 장릉 아래쪽에 세운 뒤,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숙종 31년(1705), 장릉 안에 있던 육신사를 장릉 밖으로 옮기면서 창절사(彰節詞)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창절이란 모든 불의에 항거하며 대의를 따른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절개를 표창한다는 뜻에서 숙종이 사액했던 것. 창절사 앞에 있는 창절서원 원장이 이들 충신들에게 봄과 가을 제사를 올리고 있다.

 

사육신과 생육신

사육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악형에도 굴하지 않고 순사(殉死)한 조선 전기의 6충신. 성삼문(成三問:承旨)·박팽년(朴彭年:刑曹參判)·하위지(河緯地:禮曹參判)·이개(李塏:直提學)·김문기(金文起:工曹判書)·유성원(柳誠源:司藝) 을 말한다.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살해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갔으며, 사육신 외에도 유응부,권자신,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사육신은 1691년(숙종 17) 숙종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묘소 아래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워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생육신
조선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탈취하자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으로 생육신이라 하는데,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聘壽)·남효온(南孝溫)이다. 사육신이 절개로 생명을 바친 데 대하여 이들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또는 방성통곡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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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獨恥干謁 나는 벼슬을 탐하는것을 부끄럽게 여기노라 
畎畝尋要術 시골에 묻혀 밭고랑 일구며

漁舟費日月 뱃전에서 낚시하며 세월을 보낸다네
人生適意耳 한세상 사는 삶이 뜻대로면 그만이지 
何用終歲矹 어찌 한평생을 아등바등 (불평하며) 지낼것인가

 

남효온[南孝溫 : 1454 (단종 2) - 1492 (성종 23)] 자 백공(伯恭) 호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시호 문정(文貞)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의령(宜寧) 

 

남효온(南孝溫)에 대하여
1454년(단종 2)∼1492년(성종 23). 조선 단종 때의 문신으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의령.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영의정 재(在)의 5대손이고, 생원 전(恮)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했다.

 

1. 성품, 25세에 상소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김종직이 존경하여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 했다. 주계정(朱溪正)·심원(深源)·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78년(성종 9) 성종이 우토(雨土)의 재난으로 군신(群臣)들의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나이로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첫째 남녀의 혼인을 제때에 치르도록 할 것, 둘째 지방수령을 신중히 선택, 임명하여 민폐의 제거에 힘쓸 것, 셋째 국가의 인재등용을 신중히 하고 산림(山林)의 유일(遺逸)도 등용할 것, 넷째 궁중의 모리기관(謀利機關)인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할 것, 다섯째 불교와 무당을 배척하여 사회를 정화할 것, 여섯째 학교교육을 진작시킬 것, 일곱째 왕이 몸소 효제(孝悌)에 돈독하고 절검(節儉)하여 풍속을 바로잡을 것, 여덟째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 등이었다.

소릉복위는 세조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하여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모험적인 것이기 때문에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반발을 사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은 국문할 것을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하여 정부 당로자(當路者)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세상사람들도 그를 미친 선비로 지목하였다.

 

2. 처사(處士)생활
1480년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하여 생원시에 응시, 합격하였으나 그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김시습(金時習)이 세상의 도의를 위해 계획을 세우도록 권하였으나,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러 나갈 것임을 말하였다.

소릉복위 주장은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이 당시 집권하고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았고, 다른 명목으로 박해하려 하였다.

그뒤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흘겨보면서 가끔 바른말과 과격한 의론으로써 당시의 기휘(忌諱)에 저촉함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며 신영희(辛永禧)·홍유손(洪裕孫)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로 맺어 술과 시로써 마음속의 울분을 달래었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편으로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내 옆에 내려다본다.”는 경심재명(敬心齋銘)을 지어 스스로 깨우치기도 하였다. 당시의 기휘에 속하였던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육신전 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명성을 소멸시킬 수 없다 하여 《육신전》을 세상에 펴냈다.

 

3. 사후상황 저술
죽은 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高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하였다고 그 아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에는 윤필상(尹弼商) 등이 김종직을 미워한 나머지 그 문인이라는 이유로 미워하여 시문을 인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소릉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다.

1511년(중종 6) 참찬관(參贊官) 이세인(李世仁)의 건의에 의하여 성현(成俔)·유효인(兪孝仁)·김시습 등의 문집과 함께 비로소 간행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1513년 소릉복위가 실현되자 따라서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1782년(정조 6)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김시습·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의령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추강냉화 秋江冷話》·《사우명행록 師友名行錄》·《귀신론 鬼神論》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출처 : 한국 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남효온의 '육신전' [김태준의 문향 (동국대 명예교수)]  
 

  추강 남효온(秋江南孝温,1454-1492)은 죽음을 무릅쓰고 <육신전(六臣傳)>을 지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평생 사우(師友)로 세속과 짝하지 않은 방외인이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상소를 올려 받아들여지지 않자, 20대에 세상 뜻을 버리고 산천을 두루 찾아 그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했다.

 

  의식(衣食)이 거칠고 술을 그치지 않아 39살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버렸다. 가을 강의 뜻을 담은 '추강'이란 그의 아호는 김시습의 '설잠(雪岑)'처럼 단종과 소릉의 한을 담은 방외인의 차가운 삶의 고뇌를 드러낸다.

스스로 '자만 4장(自輓四章'>이란 긴 만사(輓詞)를 쓴 추강은 '여섯 가지 액'을 읊어 자기의 삶을 반어법으로 희화화했다. 특히 술 때문에 병에 걸린 그가 김시습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주덕송(酒德頌)>'라 할 사연이 지극경에 이르렀다.

어머니의 꾸지람을 듣고 '지주부(止酒賦)'를 짓고, 10년 동안 정말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했고, 중풍을 앓아 다시 술을 마시다가 병이 그치자 '부지주부(復止酒賦)'를 짓고 다시 5년 동안 마시지 않았다고 했다.


  추강은 스스로 "36년을 지나는 동안에 언제나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는 실로 죽어서도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허균(許筠)은 '남효온론'을 쓰면서, 추강이 겨우 스무 살부터 항소해서 서둘러 스스로를 곤궁한 몸으로 내쳤다고 애석해 하면서도, 벼슬에 연연한 그의 스승 김종직을 혹평하여 추강의 기개와 강개한 인품을 높이 기렸다.

 

  추강이 남긴 <육신전(六臣傳)>과 <허후전(許詡傳)>이 모두 충신전이다. 특히 <육신전>은 각각이 독립된 전을 이루는 통일된 주제의 집전(集傳)으로 지은이의 인물관과 역사의식을 대변한다(박희병;<한국고전인물전연구> 참조).

'박팽년전'은 <육신전>의 머리를 이루면서 '성삼문전'으로 이어지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농담을 즐기고 앉고 눕는 것이 절도가 없는 성삼문에 비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의관을 풀지 않는 박팽년의 지사적 성격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성삼문은 달군 쇠창에 다리가 뚫리고 팔이 잘리는 형벌 속에도 '안색불변'하는 의연한 지조로 높이 평가 되었다.

 

  <육신전>의 후반은 남은 네 명의 전으로 간략하나, 몸이 쇠약한 이개가 곤장 밑에서도 '안색불변'의 지사로 장하게 그려지고, 유성원은 사건이 나자 부인과 술을 나누어 영결하고 사당에 올라 자결한 사실로 현창했다.

하위지는 세종 이후 인재를 논할 때 첫째로 꼽혔다는 세간의 평가로, 유응부는 무인으로 선비와는 더불어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한 기개를 높이 샀다. 특히 그는 달군 쇠를 가져다 배 아래에 놓아 기름과 불이 함께 일어났는데도 '안색 불변'으로 끝내 불복하고 죽었다 하여, 이 <육신전>의 대미로 삼았다. 이야말로 '선비전'의 교과서일 터이다.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南孝溫)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아름다운 반역

오늘날 누구라도 사육신을 기억하지만, 이들을 충의의 열사로 되살린 사람이 남효온인 줄은 아스라하다. 관서지방을 오래 돌다가 고향 의령에 머물던 성종 20년(1489) 겨울이었다. 깊은 시름, 병마로 몸도 가누기 힘든 터에 붓을 들었다. "내가 한 번 죽는 것이 두려워 어찌 충신의 이름을 없어지게 할 수 있으랴!"

일찍이「귀신론」에서 '충신과 현자의 죽음은 사사로운 욕망이 아니라 의리를 간직하기 때문에 원한을 남기지 않는 법'이라고 하였던 터라, 우선 이들의 혼백이나마 원통하게 천지의 기운을 타지 못하게 할 수는 없고 그러자면 이들을 충의열사로 기리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하였을 것이다.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의 삶과 죽음을 극적으로 재구성한 『육신전(六臣傳)』의 탄생이었다.

남효온은 육신의 충성과 청렴과 경륜을 드러냈다. 계유정난 직후에 수양대군이 의정부에서 큰 잔치를 베풀자 박팽년이 처연하여,

 

묘당 깊은 곳 풍악소리 구슬프니 廟堂深處動哀絲/ 오늘 같은 세상만사가 어찌될지 도통 모를레라 萬事如今摠不知 하였다.

 

하위지는 세조가 즉위하자마자 모든 국사는 의정부의 의결을 거쳐 시행하도록 하는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가 직접 임금에게 보고하여 처결하도록 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자, 이를 반대하였다가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도저히 조정에 머물 수 없어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갔다. 이때 박팽년이 도롱이를 주었던 모양인데 하위지가 「박팽년이 도롱이를 빌려주자 화답하다」에 속마음을 건넸다.

 

남아의 득실이 예나 지금이 같구나 男兒得失古猶今/ 머리 위에 밝은 달이 밝게 비추는데 頭上分明白日臨/ 도롱이를 건네주는 뜻이 있을 것이라 持贈?衣應有意/ 강호에 비 내리면 즐겁게 서로 찾자는 것이로군 五湖煙雨好相尋

 

하위지는 도롱이를 빌려준 뜻을 다시 돌아와 상왕을 다시 모시자, 그렇게 들었다. 실제로 다시 출사한 하위지는 거사에 기꺼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울적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바른 뜻을 새겼으니, 다음은 이개가 지었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 변할 줄이 있으랴

 

남효온은 유응부가 함경도 북병사로 있을 때 지었던 시까지 수습하여 실었다. 그의 기상은 우렁찼다.

 

장수가 도끼를 휘둘러 변방의 오랑캐를 진압하니 將軍持節鎭夷邊/ 자줏빛 요새에 흙먼지 가라앉고 군사는 졸고 있네 紫塞無塵士卒眠/ 오천 필 준마들은 버드나무 아래에서 울고 駿馬五千嘶柳下/ 삼백 마리 날쌘 송골매가 누대에 앉아 있구나 良鷹三百坐樓前

 

『육신전』은 국문 현장을 상세히 담았다. 이들은 세조를 '나으리[進賜]'로 부르며, '평일에 주공(周公)을 끌어댔는데, 주공도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빼앗았는가?' 하였다.

계유정난 직후 수양대군이 전권을 잡고서 옛날 주나라 시절 어린 조카 임금 성왕(成王)을 도와 성세를 열었던 주공이 되겠다고 한 약속을 배반한 잘못을 들춘 것이다. 그럼에도 세조는 박팽년과 하위지를 회유하였다. "네가 항복하고 역모를 하지 않았다고 숨기면 살 수 있다." 세조에게 명분이 없음을 들춘 것이리라.

집현전의 동지로 사육신과 무척 절친하였던 신숙주나 강희안의 처신도 적었다. 성삼문이 '그대의 악함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는가'하며 질타하자 신숙주는 부끄러워 자리를 피하였으며, 또한 거사 계획을 알았기에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던 강희안은 '정말 현사이니, 많은 사람이 죽게 된 마당에 이 사람만은 남겨 두고 쓰시오' 라고 하였던 성삼문의 절규 덕분에 겨우 풀려났다. 죽음 앞이라도 우정과 의리를 변치 않는 육신의 장렬함을 극명하게 들추었던 것이다.

 

『육신전』의 백미는 의연한 죽음이었다. 불로 살을 지지는 낙형(烙刑)이 계속되자, 성삼문은 '나으리의 형벌이 참으로 독하다' 하고, 이개는 '이것이 무슨 형벌인가?' 하였으며, 하위지는 '반역의 죄명은 마땅히 베는 것인데 무엇을 다시 묻는가?' 하였다. 유응부도 '한 칼로 족하(足下)를 폐하고 상왕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간인(奸人)이 고발하였으니 다시 어찌하겠는가. 빨리 나를 죽이시오' 하였다. 족하는 그대, 자네와 같은 호칭이다.

또한 재상 반열의 무반이었지만 거적으로 바람을 가릴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던 유응부가 '사람들이 서생과는 일을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더니만, 과연 그렇다' 하며 성삼문 등을 질타하였음도 빠뜨리지 않았다. 한명회 등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에 운검(雲劒)을 세우지 않기로 하자, 성삼문 등이 쉽게 거사계획을 포기하며 물러선 사실이 죽음 앞에서도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남효온의 서사는 장렬하고 애절하였다. 절명시(絶命詩)와 가족의 절규를 실었으니, 성삼문은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알았다' 하고, 이개는 '죽음도 가벼이 보아야 한다면 이 죽음이 영화로세' 하였다. 나아가 유응부의 늙은 아내는 '편히 살아본 적 없다가 죽을 때에는 큰 화를 얻었다' 하며 애통함을 숨겼다.

 

『육신전』은 다음과 같은 사찬(史贊)으로 마감하는데 줄여 싣는다.

누가 신하가 아닐까마는 지극하다 육신의 신하됨이여! 누군들 죽지 않을까마는 장하다 육신의 죽음이여! 살아서는 임금 사랑의 신하 도리를 다하고, 죽어서는 임금 충성의 신하 절개를 세웠도다. 충분(忠奮)은 백일을 꿰뚫고 의기는 추상보다 늠름하다. 슬프다. 육신으로 하여금 금석 같은 단심을 지키고 강호에 물러나게 하였더라면 상왕의 수명도 연장할 수 있었고 세조의 치세는 더욱 빛났을 것인데 불행히도 분격한 마음으로 큰 화에 빠지고 말았구나.

'사육신은 충신이다'라는 선언이며 내일을 향한 희망통신이었다. 노산군의 복위, 육신의 복권을 주장한 것이다. 현덕왕후의 복위와 함께 추진하여야 할 또 하나의 진실 과제를 제시한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마냥 현실을 부정할 수만은 없었다. 앞으로도 나라는 세조를 계승한 사왕(嗣王)이 다스려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조가 육신을 죽이지 않고, 상왕도 폐위하지 않고 오래 살게 하였다면, 그의 치세가 더욱 빛났을 것이라는 소망으로 매듭지었다.

남효온은 언제 지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허후전(許?傳)」도 지었다. 세종의 명상 허조(許稠)의 아들로 계유정난 당시에 좌참찬이었는데, 지나친 살육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가서 목이 졸려 죽었다. 세조의 왕위는 잔인한 전취물(戰取物)임을 밝힌 셈이다.

그러나 남효온의 소망과 정치현실의 괴리는 너무나 요원하였다. 언제 현재를 살아가는 가해자나 피해자가 짊어진 어두운 과거의 짐을 벗게 할 수 있을는지? 아득하였다.

 

부르지 못한 노래: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중종 8년(1513) 현덕왕후가 복위되면서 남효온도 신원되고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소릉복위상소'의 뜻을 죽어서 이룬 셈이다. 그러나 천상에서 반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노산군과 사육신은 여전히 종묘사직의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조광조·권벌(權?)·김안국(金安國)·김정(金淨) 등 기묘사림이 혁신정치를 주도하면서 사정은 호전되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라 노산군에게 봉사손을 정하여 나라에서 제관과 제물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입후치제(立後致祭)가 단행되었다.

 

또한 "성삼문 등은 노산군에 대한 지조를 잃지 않았으니 만약 세조에 바쳤다면 또한 세조의 충신이 되었을 것이다" 혹은 "성삼문 등은 국가가 위태롭게 되자 목숨을 바쳤다"는 의견이 임금께 올라갔다. 이른바 '사육신충신론'이었다. 『육신전』이 빛을 본 것이다. 놀라운 진전이었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흔히 기묘정국은 신진사림의 현량과의 실시, 반정의 거짓 공훈 삭출 등에 따른 훈구파의 반격, 즉 수구와 개혁, 기득권을 둘러싼 이해갈등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인가 은폐인가, 나아가 기억인가 망각인가를 둘러싼 역 투쟁의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기묘사화 이후 진실은폐, 역사망각의 정국이 반세기 계속되면서 '사육신충신론'은 잠복하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육신전』은 널리 읽히고, 감동은 깊게 퍼졌다. '전(傳)'의 형식을 취한 소설적 구성도 한 몫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금서조치가 내려질 뻔했으니, 외척권신체제가 마감된 선조 치세 초반, 사림이 정국을 주도하던 때였다.

 

『육신전』을 읽은 선조가 "실로 놀랍다. 망령되게 선조(先朝)를 욕하였으니 모두 찾아내 거두어들여 불에 태우고, 이 책을 읽고 말하는 사람을 죄 주겠다"고 하며 무척 분개하였다. 이 책을 보고 누가 왕실을 따르겠는가, 두려웠을지 모른다. 영의정 홍섬(洪暹)이 극진히 만류하여 그만두기는 하였지만, 우리나라 금서 1호가 나올 뻔하였다. 『석담일기』선조 9년(1576) 6월조에 나온다. 이렇듯 『육신전』은 임금도 읽을 만큼 당대를 풍미하였고, 임금까지 전율시킬 정도로 왕실의 어두운 과거를 적나라하게 펼쳐놓았던 것이다.

이즈음 임제(林悌)가 『원생몽유록』을 지었다. '원자허(元子虛)'란 선비가 꿈에 호남아(好男兒)를 만나서 단종과 사육신을 상봉한다는 꿈 이야기로 『육신전』의 가공이며 각색이었다.

여기에서 남효온은 '훤칠하고 이목이 수려한 호남아'로 형상화되었는데, 들옷을 입고 두건을 썼다. 압도에서 농사짓고 한때 소요건을 쓰고 청담파를 자처하였다는 사실을 옮긴 것이다. 호남아는 단종과 사육신 앞에서도 절망하고 분노하였는데, 이렇게 말하였다.

요·순과 탕·무는 만고의 죄인입니다. 후세에 여우처럼 아첨을 떨어 선위를 얻은 자 이들을 빙자하고, 신하로서 임금을 친 자 이들에게 명분을 붙여서 천 년이 흘러 마침내 구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원생몽유록』

고대 성군의 선양과 혁명을 빌미로 정치적 명분과 질서를 파괴하는 역사 현실에 대한 극렬한 반감으로 요·순과 탕·무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들은 듯하다. 김종직의 「도연명의 술주시에 화답한다」와 김시습의 「역사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에 나오는데 후자에 더 가깝다. 물론 남효온의 실제 발언이 아니었다. 남효온의 정서와 의식을 임제가 그렇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원생몽유록』은 사육신이 단종 앞에서 주고받은 가상의 시구를 통하여 복위운동의 좌절에 따른 감회와 상흔을 고스란히 재현하였다. 특히 세조가 즉위하였을 때 벼슬에 머물렀던 속셈, 처음의 계획을 실행할 수 없자 쉽게 포기하는 성삼문 등을 질타하였던 유응부의 분노와 용서를 절절히 드러냈다.

호남아 즉 남효온도 따라 지었다. 백이숙제와 굴원과 도연명의 아름다워 차라리 서러운 절의를 노래하며 이렇게 마감하였다.

한 편의 야사를 감히 후세에 전하니 一編野史堪傳後/ 앞으로 천 년 동안 선악의 가르침 되리라 千載應爲善惡師

생명이 천세토록 이어질 진실기록의 작품을 남기겠다는 각오를 피력한 것이다. 임제가 그려낸 『육신전』저술의 의도였다.

 

『원생몽유록』은 남효온의 기록 정신을 새삼 일깨우며, 기억운동이 역사의 진보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기억하지 못하면 역사가 없고 나아가 다시 거친 모멸의 시대가 온다 한들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다는 임제의 당대 통신이었다. 비록 꿈의 공간에 의탁하였지만, 어두운 과거를 결코 잊지 않아야 한다는 '참여문학'이며, 정치를 소재로 삼아서가 아니라 정치적 의도가 분명하다는 의미에서 '정치소설'이었다.

그런데 흥미롭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꿈에서 깨어난 원생이 친구인 해월거사(海月居士)를 만난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해월거사는 누구를 형상화한 것일까? "요와 순은 아득하기만 하고, 탕과 무는 어찌 이리 많다는 말이뇨?" 하였음으로 미루어보면 분명 매월당 김시습이다. 그렇다면 '원자허'는 누구일까? 바로 원주에 숨어살았던 원호(元昊)였다.

 

  임제는 사림의 시대를 이룩한 정신계보를 '김시습-남효온'으로 그렸던 것일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여도 이런 관점은 이어지기 힘들었다. 선조의 분노에서 보았듯이 자칫 잘못하면 세조의 왕위계승을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효온과 김시습이 '꿈의 공간'의 주인공으로 남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이 기학이 아니라 리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도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조선후기 숙종 치세에 단종과 함께 온전히 복권되지만, 이미 신화가 되고 전설로 굳어진 한참 후였다.

 

▶필자 소개

이종범(李鍾範)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마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조선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학의 박물관장을 겸임하고 있다.

 

 

 

 

 

▲ 일찍 귀가하여 하늘이 너무 파랗기에 잔차를 타고 달렸습니다 ⓒ 2011 한국의산천

부평에서 김포 구도로를 따라 발산동 화곡동까지 다녀왔습니다. 한참을 가는데 차가운 봄바람에 손끝이 시려서 죽는줄 알았습니다 ~ㅋ

되돌아 가기에는 너무 먼길을 왔기에 쉬면서 손을 비비고 녹이면서 조금 고생스런 라이딩 하고 왔습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아이쿠 봄은 왔다지만 아직 봄은 아니에요. 복장 잘 챙겨입으시고 보온 준비 잘하시고 라이딩 하세요 ~~~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은 왔지만 봄같지 않다 

 

중국의 역대 4대 美人이라면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를 칭하는데, 이중 왕소군(王昭君)에 대한 당나라 시인 동백규의 詩에서 유래한다고 하는데, 절세미인 왕소군에 얽힌 얘기는 이러하다.

 

漢나라 元帝 때

서북방 흉노족의 선우에게 볼모로 후궁을 한 명을 간택하여 보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元帝는 후궁 중에서 제일 못생긴 사람을 보내기로 하고 궁중화가인 모연수(毛延壽)에게 후궁들의 초상화을 그리도록 하였는바, 뭇 후궁들은 서로 오랑케 왕의 첩으로 간택될까 두려워 궁중화가인 모연수에게 서로 이쁘게 그려달라 請하며 금은보화를 뇌물로 바쳤으나 王昭君은 美人으로서의 自信感때문인지, 청렴 때문인지, 황제에 대한 신뢰 때문인지, 가난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손을 쓰지 않아 모연수에 의해 제일 추녀로 그려지고 결국에는 王昭君이 간택되어 볼모로 가게 되었다.

 

왕소군이 떠나던 날 元帝가 王昭君을 보니 絶世美人바, 이미 결정된 일을 어찌할 수 없어 보내고 난 뒤 궁중화가 모연수를 참형에 처했다.

그녀의 본명은 명확치 않은데, 황제가 안타깝고 가련한 마음에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벼슬 칭호를 내려, 그 이후로 왕소군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그녀의 별명은 낙안(落雁)인데, 그녀의 악기 타는 솜씨가 하도 뛰어나 흉노로 갈 때 자신의 처지를 악기로 타자 날아가던 기러기떼들이 노랫가락에 빠져서 그만 날개짓하는 것을 잊고서는 떨어졌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녀의 애칭을 낙안이라 불렀다고 한다.

 

후세 당나라의 시인 동백규가 왕소군의 처지를 읊은 시 한 구절을 소개하면,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 오랑캐 땅엔 봄이 와도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이 아니로구나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자연의대완 비시위요신) 자연히 허리띠가 느슨해지는 것은, 이를 날씬하게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네.(한 원제를 사모하고 그리워하여 병이 되어 야위워졌다는)

 

춘래불사춘에는 이런 가슴 아프고도 애틋한 사연이 숨어 있다고 한다.

 
昭君拂玉鞍 上馬涕紅頰
今日漢宮人  明朝胡地妾  

 

소군이 옥 안장을 떨치며 말을 타니 붉은 뺨에 눈물이 흘러
오늘날 한나라 궁녀가 내일 아침 오랑캐의 첩이 되는도다.


漢宮豈不死   異域傷獨沒 
萬里馱黃金   娥眉爲枯骨
廻車夜黜塞   立馬皆不發
共恨丹靑人   墳上哭明月

 

어찌하여 한나라 궁궐에서 죽지 못하고
다른 나라 땅에서 홀로 죽음을 슬퍼하노라.

만리 길에 황금을 실어 보냈지만
고운 모습은 바른 뼈가 되었네

밤에 수레를 돌려 변방을 나오려 하지만,

모두 말을 세우고 떠나지 못하며,

그림 그린이를 원망하며
밝은 달 아래에서 무덤에 곡을 하노라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자연히 옷 띠가 느슨해지니  이는 허리 몸매 위함이 아니었도다

 

※ 따스한 바람에 봄꽃이 가득해야하는데 구제역은 잡히지 않아 축산 농가의 시름은 깊어만 가고 

중동의 내란으로 유류값은 오르고 물가도 따라 치솟으니 이 역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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