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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천천히 천천히 가거라 지지대

by 한국의산천 2011. 1. 27.

천천히 가거라 아주 천천히 [2011 · 1 · 27 · 쌀쌀한 날씨에 맑음 · 한국의산천]

 

바쁘고 바쁜 요즘 업무중 지나는 길에 검단 백석에 위치한 부모님 묘역 참배. [천주교 인천교구 마전동 묘역]

2011년 1월이 어느덧 하순에 접어들고 월말과 다가오는 설연휴로 인해 바쁜 요즘, 업무상 부모님 묘역 근처를 지나다 그곳에 들렸습니다. 묘역에 오르기전 마전동 천주교 묘역 앞에 위치한 마트에서 아버님께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소주 한병과 간단한 안주를 사가지고 올랐습니다. 그리고 부모님 묘소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정조와 그의 효심이 깃든 지지대를 떠올리면서...

 

정조의 효심이 가득 느껴지는 지지대(遲遲臺) 

정조는 아버지(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모든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으며 왕위에 오르자 정조께서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수원 화산(現 융건릉)에 자주 행차하셨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잠들어 계신 화산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아 행차가 자꾸 늦어지기에 이에 후세의 사람들은 이 고개를 '더디게 더디게 넘어가는 고개'라하여 느리고 더딜지(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

사도세자(思悼世子)


정조께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인 화산 현륭원(現: 융· 건릉)을 전배하고 환궁하는 길에 지지대(遲遲臺) 인근에 이르면 행차를 더디게 하도록 명했다.
이제 이 고개를 넘어가면 선왕(아버지·사도세자)께서 잠들어 계신 화산(花山: 現 융건릉)이  보이지 않는다. 천천이 가거라. 아주 천천히...

 

▲ 부모님께서 永眠해 계시는 인천 검단 백석에 위치한 마전동 천주교 묘역 입구 ⓒ 2011 한국의산천

  

▲ 부모님 묘역 참배를 마치고 저도 종이컵에 소주 한잔을  마신 후 전망좋은 바로 위의 산 언덕에 올랐습니다 ⓒ 2011 한국의산천

아부지와 어무니께 잔을 올리고 저도 한잔 했습니다. 쌀쌀한 날씨에 시원한 소주 한잔이 몸속으로 들어갈때 그 시원함. 기분 좋았습니다. 쓰지도 않고 그 시원한 맛. 그리고 다시 부모님 생전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 남향을 마주하는 천주교 묘역. 멀리 서해쪽으로 막힘이 없이 전망이 좋은 곳입니다 ⓒ 2011 한국의산천

우리 가족 본명(세례명)

아버지 : 요셉

어머니 : 마리아

저 한국의산천: 베드로

제 집사람 : 글라라

아들 : 프란체스코

딸 : 루시아   

  

▲ 부모님 묘소를 돌아보고 잠시 묘역 돌아보기 ⓒ 2011 한국의산천

얼마전 꿈속에서 아버님을 뵈었다. 빙그레 웃으셨다... 아버지의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내가 아버지하고 부르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난 꿈에서 깨어 너무 황망하여 울었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집사람이 자다말고 왜그래 묻기에 응 그냥... 그리운 아버님의 모습을 그렇게 꿈에서라도 환하게 웃음지시는 모습을 보니 너무 좋았다. 눈물이 나도록 반갑고 또 반갑고 기쁘고 또 기쁘고 너무 너무 반가웠다. 불효자는 뒤늦게 울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리운 아버지의 모습이 반가워 한잠을 잠못들고 울기만 했다. 그리고 아침을 맞았다. 그날은 하루종일 아니 그 후 며칠동안 아버지의 웃음지시던 모습을 떠올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보냈다. 지금도 그 환한 웃음 지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네.

 

▲ 소년을 늙기 쉽고 부모님은 효도할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 2011 한국의산천

▲ 언젠가는 한줌의 부토로 돌아가는 인생. 천주교 묘원을 거닐며 잠시 정비석님의 산정무한을 떠올려 봅니다 ⓒ 2011 한국의산천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七十生涯)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정비석 산정무한 中에서- 

 

 

▲ 경인 운하가 잘보이는 간이 주차장에서 ⓒ 2011 한국의산천  

▲ 돌아오는 길에는 경인 운하 따라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오다가 경인 운하를 건너왔습니다. 서서히 제 모습을 나타내는 경인운하 공사현장 ⓒ 2011 한국의산천

 

▼ 불행하고 불운했던 미완의 개혁군주 학자군주 정조  

조선 왕조사상 가장 뛰어난 왕이 될 수 있었던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 효자 정조에 대해서 잠시 떠올려봅니다

 

▲ 교통방송에 잘 나오는 지지대고개. 경기도 의왕에서 수원으로가는 중간에 야트막한 언덕입니다 ⓒ 2011 한국의산천  

정조께서 현륭원(現:융건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며 이 고개를 넘기전에 한참을 머물렀던 지지대고개. 수원과 의왕시의 경계인 지지대고개(지지대 고갯마루 양쪽으로 지지대와 길건너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제 이 고개를 넘어가면 선왕(아버지·사도세자)께서 잠들어 계신 화산(花山 :現 융건릉)이 보이지 않는다. 천천이 가거라. 아주 천천히...

 

정조대왕의 효심이 느껴지는 지지대(遲遲臺) 고개는 수원과 의왕 경계를 이룬 곳이다. 예전 명칭은 사근현(沙斤峴)이었으며 또는 미륵댕이 또는 미륵당 고개로 불렸으나 지금은 '지지대 고개'로 불린다. 느리고 더딜 '지(遲)자를 쓴 지지대는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지나고 돌아오던 언덕에 위치한다.

정조께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인 화산 현륭원(융릉)을 전배하고 환궁하는 길에 지지대(遲遲臺) 인근에 이르면 행차를 더디게 하도록 명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이 고개에서 어가를 멈추어서게 하고 한참을 머무르며 부친의 묘역이 있는 화산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고개를 넘어서면 아버지 장조가 묻힌 현륭원이 있는 화산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가에 올라서도 화산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아 행차가 자꾸 늦어져 이고개를 느리고 더딜지(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1807(순조 7년)에 세운 지지대비가 있다. 지금은 대로가 돼어 평평하지만 예전에는 수원의 관문으로 수림이 울울창창한 고개였다.

 

▲ 지지대 안내문 ⓒ 2011 한국의산천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이후 영조가 83세로 승하한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정조께서는 1776년 3월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면서 12년 넘게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라고 선포한 뒤 사도세자 추숭작업에 나섰다.

"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는 왕으로서 내 아버님께는 효도 한 번 못하다니..."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늘 가슴 아파했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돌 것만 같았다.  

정조는 즉위하자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열고 다시 염을 한다음 궁중으로 모시고 국장처럼 성대하게 장을 치룬 후 지금의 능자리인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으로 옮겼다.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영구를 파내니 광중(壙中)에 물이 한자 남짓이나 고여 있었다. 부친이 물속에서 신음하는것을 본 정조가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사도세자의 영구는 새로운 안식처인 화성으로 향했는데 임금을 상징히는 황룡기를 비롯하여 사방을 표시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수많은 깃발을 펄럭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화산(現 융건릉)에 도착했다.   

 

정조는 보여(步與)를 타고 산능성이를 한바퀴 빙 돈 다음 하교하여 "이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꽃나무를 많이 심는것이 좋겠다."고 하여 이후 화산은 지극한 정성으로 나무가 울창하고 사시사철 꽃이 수를 놓은 꽃산이 되었다.

 

정조는 이곳을 현릉원이라 이름짓고(장조로 추존된 뒤에 융륭으로 변경) 틈만나면 이곳을 찾았다.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위해 부근 화산일대 13개 마을에 영을 내려 집집마다 재 한 삼태기씩을 모아 뿌리게 하고 솔밭에 송충이 극성이면 손수 나가 송충이를 잡고 송충이구제를 독려 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신도 부친곁에 묻힌다.

그렇게 정성을 쏟은 탓인지 융·건릉은 조선조 왕릉중 어느 능보다 규모와 조성미, 특히 소나무가 울창하며 주변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 국도변에 위치한 지지대비 입구 ⓒ 2011 한국의산천

정조의 꿈 '노론의 나라가 아닌 왕권이 강화된 제왕의 나라, 백성의 나라 , 못이룬 사도세자의 꿈을 담은 나라를 만들어 가고자 했다."

이 앞을 지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馬)에서 내려야 한다는 하마비(下馬碑)가 서있다.  통행이 잦은 길가에 있었을 듯한 지지대비가 고개의 경사를 완만히 하기위해 높은 고개를 깎아내고 파내려가면서 도로를 만들다보니 이제는 지지대비가 높은 곳에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 지지대비가 있는 비각 ⓒ 2011 한국의산천

 

지지대비(遲遲臺碑)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 24호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 47-2 

지지대비는 조선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인 화성 현륭원의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능이 있는 화산을 볼 수 없었기에 으레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고 능이 있는 방향을 뒤돌아 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지(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 유수 홍명호가 전액을 썼다.   

 

▲ 지지대고개는 광교산에서 수리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가로지르는 고개이다.ⓒ 2011 한국의산천

서울에서 국도를 타고 수원 오산방향으로 가다보면 안양,의왕을 지나서 수원과의 경계인 고개를 넘게 된다. 지금은 넓은 도로에 자동차가 빠르게 지나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넓은 도로가 아니었고 지금보다도 더 높은곳에 굽이 굽이 이어지는 길이 있었을 것이다. 고개의 제일 높은 마루턱 이곳이 사근현이었으며 지금은 지지대고개라고 부른다.   

지지대 고갯마루에서 약 150m 수원방향으로 내려오면 지지대 쉼터를 만난다(주차장 넓음) 이곳에 주차를 하고 고갯마루방향으로 150m~200m 차길을 따라 걷거나 추차장에서 산길을 따라 차길과 나란히 걸으면 나온다. 

 

▲ 지지대비(遲遲臺碑) ⓒ 2011 한국의산천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비. 비의 높이 150㎝, 너비 60㎝.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 비문을 통하여 정조(正祖)의 부왕에 대한 사모의 정을 엿볼 수 있다. 비문 측면에 쓰여있는 '영보' 비의 비문은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지었다

 

비문의 내용 중 "우리 전하께서 능원을 살피시고 해마다 이 대를 지나며 슬퍼하시고 느낌이 있어 마치 선왕을 뵙는 듯 하시어 효심을 나타내시어 여기에 새기게 하시니, 선왕께서 조상의 근본에 보답하고 너그러운 교훈을 내리시는 정성과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뜻과 일을 이어 받으시는 아름다움을 여기에 그 만의 하나로 상고했도다."라는 사실에서 정조의 애틋한 심정이 드러난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전판돈녕부사겸판의금부사(前判敦寧府使兼判義禁府使) 윤사국(尹師國)이 글씨를 쓰고, 수원부유수겸총리사(水原府留守兼總理使) 홍명호(洪明浩)가 비의 상단 전자(篆字)를 썼다.

숭정기원후일백팔십년정묘십이월일입(崇禎紀元後一百八十年丁卯十二月日立)이라는 사실로 1807년(순조 7) 12월에 건립됨을 알 수 있다. 

 

▲ 한국전쟁 당시 격전으로 비신에 탄흔이 남아있는 지지대비석 ⓒ 2011 한국의산천 

 

▲ 아름다운 화성의 야경 ⓒ 2011 한국의산천

정조가 화성 신도시 건설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1794년(정조18년) 정월이다. 현륭원 이장 이후 무려 5년 동안 준비를 해왔다. 한양 정도 4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600여칸에 달하는 대규모 행궁과 6km 에 이르는 성곽을 쌓아야 하는 대역사였다. 이를 위해 정조는 영의정 채제공에게 총괄책임을 맡겼고 현장책임은 조심태가 맡았다. 그리고 정약용 등의 기술적 지원들이 어우러져서 원래 계획은 10년 이었지만 34개월만에 웅장한 모습으로 그 위용을 드러냈다. 그때가 1796년 (정조 28년) 10월 16일 성대한 낙성연을 갖고 신도시의 탄생을 만천하에 알렸다.   

 

▲ 수원 화성의  야경 ⓒ 2011 한국의산천 

새로운 도시 화성과 규장각을 지으며 정조의 꿈은 무르익어갔다. 화성을 중심으로 노론의 나라가 아닌 왕권이 강화된 제왕의 나라, 백성의 나라 , 못이룬 사도세자의 꿈을 담은 나라를 만들어 갔다. 그러나 기대와 좌절의 시간이 흐르며 몸은 불편해지고 병세가 악화되었다. 언제나 몸을 단정히 하며 학문수련과 삶은 수도자를 연상시킬 만큼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잘하였으나 그의 뜻대로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의 큰 뜻은 이루지는 못했다.

정조의 개혁 실패는 조선의 개혁 실패였고, 정조의 죽음은 조선의 죽음이었다. 정조의 죽음으로 조선의 방황은 멈추고 국망(國亡)의 길로 치달았다. 1800년 6월 49세가 되던 해에 24년 3개월간의 재위기간을 마치고 미완(未完)의 군주는 승하하셨다. 정조가 죽고 조선이 망하는데 걸린 시간은 100년이었다. 

 

▲ 아름다운 화홍문과 낮은 능선에 자리잡은 방화수류정 ⓒ 2011 한국의산천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있는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히 묻힌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조지프 에디슨. 웨스트 민스트 대성당에서 쓴 글-  

 

▲ 화성행궁 정문 신풍루 ⓒ 2011 한국의산천 

정조는 현륭원이 있는 수원에 행궁을 설치하고 재위 17년에는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시키며 화성행궁을 건립했다. 수원 유수부를 겸했던 화성행궁은 정전 21칸 외에 모두 555칸이 있는 최대규모의 행궁이었다. 이것은 정조의 행궁이자 사도세자의 행궁이었다. 정조는 재위 18년 2월부터 20년 9월 상순까지 현륭원과 행궁을 보호하기 위해 화성을 축성했다.

 

▲ 청계천에서 촬영한 반차도 ⓒ 2011 한국의산천

 

세종에 버금갈 만큼 수신(修身)과 제가(濟家)에 완벽했던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서 희생되었듯이 항상 죽음의 위협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며 고립무원의 길에서 살얼음을 밟듯 조심 조심 두렵게, 위태 위태하게 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왔던 정조

  정조13년 7월 정조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양주 배봉산에 있던 장헌세자, 즉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기로 한것이다. 사위(부마)이고 정조의 고모부였던 박명원의 제안에 따라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길 것을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이미 27년이나 지난 묘소를 옮기는 데 대해 신하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어떤 경우이건 사도세자가 거론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정조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나갔다.

정조가 선왕의 대를 이어 왕이되고 비운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릉을 화성으로 이장하게 된 이유중의 하나는 아버지를 죽인 노론과 강화된 왕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사도세자의 뜻을 계승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또한 새로운 도시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794년 (정조 18년)정조는 현륭원 이장 이후 5년 만에 화성 신도시건설에 착수한다. 노론의 서울이 아닌 국왕의 서울 그리고 백성의 서울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는 규장각 설치 장용영 강화와 함께 정조가 추진했던 왕권강화 작업의 핵심 사업이었다. 이어 '지극히 吉하고 모든것이 완전한 묏자리'라는 수원 용복면에 있는 화산으로 이장지를 정하고 화산에 살던 백성들에게 후한 배상금을 주고 '국세가 크게 트여 큰 고을을 조성하기 좋다는 팔달산 아래로 옮기는 대역사가 벌어진다. 

 

정조는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열고 다시 염을 한다음 궁중으로 모시고 국장처럼 성대하게 장을 치룬 후 양주에서 화산까지 이 나라의 중심부를 지나 지금의 능자리인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으로 옮겼다.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영구를 파내니 광중(壙中)에 물이 한자 남짓이나 고여 있었다. 부친이 물속에서 신음하는것을 본 정조가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사도세자의 영구는 열번 죽어도 씻을 수 없는 한을 지닌 시신이 27년만에 임금이된 자신의 아들 정조와 함께 새로운 안식처로 떠나는 것이었다.

 

어가와 잉여가 함께 새로운 안식처인 화성으로 향했는데 떠나는 행렬은 웅장했다. 경기 관찰사가 선도하고 담당 신하들은 예법에 따라 좌우로 늘어섰다. 취타수 18명과 붉은 군복을 입은 4백여명의 군사들이 세줄로 늘어섰으며, 사도세자와 잉여 곁에는 호위군사 200여명이 겹줄로 늘어섰고 가가각 50여개의 만장이 앞뒤로 하늘을 수놓았다. 노제 장소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했으며, 수백리 밖에서 어가와 영가의 행렬을 보기위해 몰려 들었다. 이 행렬을 호위한 인물은 병조판서 윤숙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날 정승들에게 세자를 구하라고 명한죄로 홍봉한에게 탄핵당해 해남으로 귀향길에 올랐던 한림 윤숙이었다.다시 사도세자를 구하려던 자의 호위를 받으며 안식처로 길을 떠나고 있다. 

(젊은 사관이었던 윤숙은 해남으로, 영조의 명에도 물러가지 않고 세자를 지키고 세손 정조를 업고 들어와 할아버지에게 죄를 빌게 했던 사관(한림) 임덕제-'나의 손은 사필(史筆)을 잡는 손이다. 내 손이 짤릴 지언정 나를 끌어낼수는 없다'고 외쳤다-는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부주(父主)여 살려주소서!' 했던 아버지와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시옵소서!'라고 호소했던 세손이 왕이되어 함께 떠나는 길이었다.

각영마다 늘어선 깃발, 그리고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북소리와 취타소리는 사도세자의 혼이 펄럭이고 울부짓는 소리였다.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기를 비롯하여 사방을 표시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수많은 깃발을 펄럭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화산(現 융건릉)에 도착했다.   

 

정조는 새 묏자리에 나가 재실에 들러 시복을 갗추어입고 정자각까지 걸어나가 재궁(사도세자의 관)을 본 다음 곡을 했다. 그리고 걸어서 주산까지 오른다음, 보여(步與)를 타고 산능성이를 한바퀴 빙 돈 다음 하교하여 "이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꽃나무를 많이 심는것이 좋겠다."고 하여 이후 화산은 지극한 정성으로 나무가 울창하고 사시사철 꽃이 수를 놓은 꽃산이 되었다.

 

정조는 이곳을 현릉원이라 이름짓고(장조로 추존된 뒤에 융륭으로 변경) 틈만나면 이곳을 찾았다.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위해 부근 화산일대 13개 마을에 영을 내려 집집마다 재 한 삼태기씩을 모아 뿌리게 하고 솔밭에 송충이 극성이면 손수 나가 송충이를 잡고 송충이구제를 독려 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신도 부친곁에 묻힌다.

그렇게 정성을 쏟은 탓인지 융·건릉은 조선조 왕릉중 어느 능보다 규모와 조성미, 특히 소나무가 울창하며 주변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정조의 능행은 단순히 사도세자의 능에 참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능행자체가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는 수단이었다.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를 할때 따르는 인원이 약 6000명이 넘으며 동원된 말도 1천4백여필이었다. 이나라 곳곳을 장악하고 잇는 노론이라도 국왕의 이란 위용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정조의 능행은 백성과 직접 만나는 수단이기도 했다. 정조가 행차 할때면 백성들이 앞다투어 격쟁을 했다. 격쟁이란 백성들이 임금에게 직접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융건릉으로 사도세자를 모신 후 정조는 소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런데 어느해인가 송충이가 극성을 부리자 정조는 한마리를 잡아 이로 깨물어 버렸더니 나머지 송충이 들이 다 떨어져 죽었다고 전한다. 또 기근에 허덕이던 백성들이 융건릉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자  정조는 그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콩주머니를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그후 백성들은 정조가 심은 소나무의 껍질만은 벗겨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조의 효심과 애민의식이 엿보이는 일화들이다.   

 

▲ 융·건릉 안에 있는 융릉 ⓒ 2011 한국의산천

 

노론이 지배하는 시대의 희생양이 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당시 나이가 어렸던 정조는 아버지(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께서 묻힌 수원 화산에 자주 행차하셨던 것이다.


오죽하면 당시 능을 지키며 관리하는 관리인 능참봉이 '어렵게 능참봉 자리 하나 얻으니 임금님 행차가 한달에 스물 아홉번'이라고 한탄아닌 한탄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느날 40대의 정조는 능행차 길에 70대의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아버지가 계시는 현륭원 근처 언덕에 묻어 주시오."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세상에서 하지 못한 효도를 죽어서라도 해야 겠다는 비장한 유언이었던 것이다.    

 

융릉(隆陵)은 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의 합장릉이다. 
1789년 7월 영조의  그는 경기도 이천에 있는 세종대왕의 묘소 ‘영릉’과 더불어 국내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는 수원 화산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새로운 묘소를 만들어 ‘현륭원’이라 이름 지었다. 정조는 이 묘소에 정성을 다해서 국왕의 지위에 준하는 정도로 화려하게 단장했다. 그때까지는 사도세자를 국왕의 지위에까지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묘를 지키는 돌로 만든 동물의 숫자를 줄이는 등 간소화하기도 했지만 묘를 둘러싼 병풍석을 설치하는 등 기존의 왕세자 묘소와는 현격하게 다른 격식을 갖추고 당대 최고의 예술가를 동원해서 아름다운 조각을 하도록 했다.


첫째로 봉분이 장릉(長陵)에서와 같이 목단·연화문을 새긴 병풍석을 두르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인석(引石)이 특이하게 꽃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며, 셋째는 장명등이 전기(前期)의 팔각장명등과 숙·영조 연간의 사각장명 등의 양식을 합하여 구름무늬를 다리에 새겨 넣었고 대석(臺石)에는 꽃을 새겨 넣어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고 있다는 점이며, 넷째는 난간석을 생략하면서 방위 표시를 위해 꽃봉오리 모양의 인석에 문자를 새겨 넣었다는 점이다. 다섯째는 추존왕릉임에도 무인석을 만들어 세웠다는 점이다. 석마가 무인석 곁에만 한 마리씩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금천교를 지나면 홍살문과 정자각, 능선이 차례로 올려다 보인다. 홍살문을 넘어서면 참도가 다른 능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함께 걸을 폭의 참도는 물론이고 그 아랫단 왼편에도 정자각까지 넓게 박석을 깔아놓고 있다. 참도 왼쪽에는 수복방이 위치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비각 안에 비는 두 개인데, 하나는 '朝鮮國思悼莊獻世子顯隆園'이라고 씌어져 있고 다른 하나는 '大韓莊祖懿皇帝隆陵獻敬懿皇后附左'라고 씌여져 있다. 정자각을 지나 계좌정향(癸坐正向: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의 능 위로 올라가면 매우 특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첫째로 봉분이 장릉(長陵)에서와 같이 목단·연화문을 새긴 병풍석을 두르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인석(引石)이 특이하게 꽃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며, 셋째는 장명등이 전기(前期)의 팔각장명등과 숙·영조 연간의 사각장명 등의 양식을 합하여 구름무늬를 다리에 새겨 넣었고 대석(臺石)에는 꽃을 새겨 넣어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고 있다는 점이며, 넷째는 난간석을 생략하면서 방위 표시를 위해 꽃봉오리 모양의 인석에 문자를 새겨 넣었다는 점이다. 다섯째는 추존왕릉임에도 무인석을 만들어 세웠다는 점이다. 문, 무인석은 크기가 장대하지는 않으나 가슴에 파묻었던 목이 위로 나와 답답하지 않고 사실적이다.

 

정조는 융릉 조성에 많은 애를 썼다. 세자의 묘인데로 병풍석을 설치하고 무인석까지 세웠다. 그만큼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사후에도 효도를 다하겠다는 정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다.

 

▲ 용주사 ⓒ 2011 한국의산천

신라 문성왕 16년 (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호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하였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렸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 

 

정조는 능에서 1.5km인 용주사를 증축할 때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목판에 새겨 보존하도록 명을 내리고 당대 제일의 화가 김홍도에게 맡겨 아름답게 꾸미도록 했다. 

50여 목판과함께 대웅전 옆 잔디밭에는 10개 항에 이르는 부모은중경을 새긴 탑비가 우뚝 서 있다.  대웅 전 후불탱화는 김홍도의 지휘로  그려진 걸작이고 정조대왕이 심었다는 대웅전앞 회양목은 수령이 무려 200여년이 넘었으나 얼마전 고사하여 천연기념물 제264호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 한없는 사랑으로 저를 키워주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 닮아가는것에 깜짝 놀랐다. ⓒ 2011 한국의산천

아버님의 꾸지람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식을 키우기 위해 당신이 살아오신 그 힘든길 그 인고의 세월을 생각하며 눈물이 납니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으나 이제 부모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고. 겨울 산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따라 흐르는것은 깊은 후회 뿐.

이제 내가 할일은 부모님께 하지 못했던 효도를 자식에게 사랑으로 되돌려 주는 일이다. 아버지와 어머님께서 내게 늘 그렇게 하셨듯이..그렇기에 한 세상 살면서 이 세상의 모든이들과 즐겁게 격절(擊節)하며 살아야 하는게 아니겠는가? 

 

수신제가에 완벽했던 성공한 인간 그러나 미완의 개혁군주 정조.
올바른 정치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행하게 죽은 사도세자, 그리고 비참한 죽음을 맞은 아버지를 기리는 정조의 여러 행적의 효는 광휘(光揮)할것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본 받아야 할 교범이다. -한국의산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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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어도 사랑할래요

                                  - 임지훈

         

그대가 그리워 서러운 날은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대와 나누지 못한 미련들을 가슴에서 쓸어 내리며
그대가 보고파 그리운 날엔 한없이 걸었습니다. 그대와 함께 걷던 그 길을 당신 아닌 다른 사람과
시간이 오래 지나가서 내 모습도 바뀌었지만 그대와 함께했던 마음 지금도 한결 같아요
사랑했던 옛시간속으로 하루라도 갈수 있다면 당신과 못다 이룬 사랑 꿈이어도 사랑할래요

그대가 보고파 그리운 날엔 한없이 걸었습니다 그대와 함께 걷던 그 길은 당신 아닌 다른 사람과
시간이 오래지나가서 내 모습도 바뀌었지만 그대와 함께했던 마음 지금도 한결같아요
사랑했던 옛시간속으로 하루라도 갈수 있다면 당신과 못다 이룬 사랑 꿈이어도 사랑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