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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이매창 못다 이룬 사랑을 찾아

by 한국의산천 2008. 7. 24.


 

지금으로 부터 2년전의 일이다.

2005년 7월 비가 억수로 퍼붓던 날 전북 부안을 향해 달렸다. 매창이뜸을 둘러보기 위해서.

답사코스 

서울 - 서해안고속도로 - 줄포IC - 반계 유형원 유적지 - 우동리 선계폭포 - 개암사 - 서림공원 - 매창공원 - 부안IC - 서울 ( 서천경유 620km)

 

이매창 (李梅窓)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의 여류시인으로 쌍벽을 이루던 이매창.

그 이름을 알게 된것은 1998년도 변산반도 산행일주 때였다. 산행대장으로서 변산의 모든것을 수집하고 자료를 정리하던중에 부안의 이매창이라는 이름이 눈에 띠었다.

산행은 무리없이 변산의 모든산은 다 연결지어 매주마다 이어져 나갔다. 그러나 변산까지의 교통왕복시간만 거의 8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거리로 인하여 변산의 관문인 부안 읍내를 7~8회(답사와 정기산행)에 걸쳐 매번 지나치기만 하였다. 그 관문인 부안에 매창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변산의 정점이 월명암이라면 내변산의 정점은 이매창이라고 서슴치 않고 말하고 싶다. 그곳을 찾아 나섰다.

 

※ 아래 자료는 2005년의 자료를 재편집 한것입니다

  

▲ 우산을 받쳐들어도 폭우속에 빗방울은 카메라 렌즈속으로 파고 들었다.

서울방향에서 부안으로 갈때는 부안IC에서 나와야 매창공원이 가깝습니다. 앞이 안보일정도의 폭우속에 이정표를 지나쳐서 그 아래 줄포IC까지 간 후 빠져나왔다.

▲ 2005년 7월 3일 시간당 20mm. 하루 100mm의 집중폭우가 퍼부었다.ⓒ 2008 한국의산천 

▲ 부안 군청뒤 성황산 서림공원에 있는 매창시비 ⓒ 2008 한국의산천

 

성황산에 올라 서쪽의 변산과 김제평야를 보려했으나 빗속에 가려서 볼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이매창이라는 이름석자는 뚜렸이 떠오르고 있었다. 

부안의 진산 상소산 기슭의 서림공원에 오르면 매창의 시심과 문학정신을 기리는 시비 (詩碑)가 있다. 서림공원은 본래 부안현감의 관사인 선화당의 후원 일부라고 하며 매창이 관아에 들어오면 자주 거닐던 곳이라고 전한다. 또 매창시비 오른쪽에는 ‘금대(琴臺)’ 라고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있으니 매창이 자주 앉아 거문고를 뜯던 곳이고, 매창시비 왼 쪽에는 혜천(惠泉)이라는 샘터가 있으니 또한 매창이 즐겨 마시던 샘이라고 한다. (참고: 매창공원은 읍내 한가운데에 있다)

 

이매창 그는 누구인가

매창의 출생과 관련하여 다양한 기록들이 있으나 매창집의 발문에 따르면 매창은 1573년에 출생해서 38세를 살고 1610년에 세상을 떠난것으로 나와있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 매창공원. 이곳 주민들은 이곳을 매창뜸이라고 부른다 ⓒ 2008 한국의산천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시집 매창집은 매창이 직접 편찬한 것이 아니고 매창이 죽은 이후 아전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오던 것을 매창이 죽은 후 60여년 후에 매창이 생전에 자주 찾아 마음을 다스리곤했던 개암사에서 목판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원하는 이가 너무 많아 절의 재정이 바닥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목판을 불살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만큼, 부안 사람들은 그녀의 시를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지은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 2008 한국의산천

1610년 여름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균은 이를 슬퍼하며 두 편의 시를 지었다. 다음은 그 중 하나이다.


哀桂娘(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 (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 (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 누가 설도의 무덤 곁을 지나려나)

 

▲ 유희경이 매창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 ⓒ 2008 한국의산천

 

매창이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다바쳐 사랑한 남자는 촌은 유희경 한사람뿐이었다. 매창이 촌은을 처음 만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0년 또는 1591년으로 추정된다.  당시 매창은 18~ 19세, 촌은은 28세 연상인 46~ 47세였다. 비록 빼어난 미색은 아니지만 다재다능하며 심지가 굳은 매창으로 하여금 첫눈에 반하게 만든 촌은은 어떤 사내였던가. 

촌은 유희경도 매창과 마찬가지로 천민이었다. 비록 신분은 같은 천민이지만 상대는 중앙문단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시인 유희경이 아닌가. 감격에 겨운 매창도 이에 화답하여 두 사람의 정은 갈수록 깊어져 갔다. 하지만 촌은은 서울에 집도 있고 처자식도 있는 몸. 비록 알아주는 남자를 위해 치마끈은 풀었지만 유부남과 독신녀의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힘겹고 괴로운 법이다.

 

매창은 그렇게 깊은 정을 주고 떠난 촌은을 천리보다도 더 먼 꿈길에서나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다. 

유명한 시조 ‘이화우 흩날릴 제’도 한 번 간 뒤 돌아올 줄 모르는 야속한 님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읊은 것이다. 이렇게 천리를 두고 그리운 마음만 오거니가거니 하는 중에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왜란이 일어나자 유희경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기에 바빠 매창에게 소식을 전할 겨를이 없었다. 

 

▲ 가람 이병기 선생님이 지은 매창 추모시 ⓒ 2008 한국의산천

▲ 매창공원 가운데에 매창의 묘가있고 그 주변은 시비와 꽃나무로 둘러싸여있다. 매창묘는 2001년에 새단장을 하였다. ⓒ 2008 한국의산천

 

부안읍 봉덕리에 있는 매창의 묘(지방기념물 제65호)

매창공원의 규모는 그리 크지않다. 주택단지의 놀이터정도의 규모 약 1,000 여평정도 크기로 세월이 지나 그의 비석의 글들이 이지러졌으므로 1917년에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겼다. 

부풍시사에서 매창의 무덤을 돌보기 전까지는 마을의 나뭇꾼들이 서로 벌초를 해오며 무덤을 돌보았다고 한다.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 읍내에 들어와 공연을 할 때에도 그들은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고 한바탕 굿을 벌이며 시인을 기렸다. 

바로 곁 입구에는 명창 이중선의 묘가 있다. 지금도 음력 4월이면 부안 사람들은 그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의 묘는 1983년 8월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규장각본 가곡원류에 실려있는 "이화우" 

 

梨花雨 흣날릴 제 울며 잡고 離別한 님 

秋風落葉에 져도 나를 생각는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쾌라.  

 

 

40대 중반의 대시인 유희경과의 사랑은 18세의 매창으로 하여금 그의 시세계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그들이 사랑을 주고받은 많은 시들이 전한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쁜 틈에 매창을 다시 만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정 마음이 통했던 연인을 떠나보낸 매창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후 쓰인 그의 시들은 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서러움과 한(恨)을 드러내고 있다.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 自恨, 허경진 역'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懷癸娘,  허경진 역'

    

1607년 유희경을 다시 만난 기록이 있지만 매창은 그와 헤어진 뒤 10여년을 마음의 정을 주는 사람이 없이 유희경을 그리며 살았다. 그가 마음을 준 두 번째 남자는 이웃 고을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李貴)였다. 그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글재주까지 뛰어났는데 매창이 그에게 마음이 끌렸음을 보여주는 허균(1569~1618)의 기록이 있다.
     

 

허균은 1601년 6월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해운판관이 되어 호남에 내려와 부안에 들렀다. 매창이 허균을 만났을 때 이귀는 이미 파직되어 김제를 떠난 지 서너 달 뒤였다.

 

신축년(1601) 7월 임자(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고홍달이 와서 뵈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서, 함께 얘기를 나눌만 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었다.
    --- 허균의 <조관기행> 가운데

  

허균은 여자 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굴레를 벗어 던진 사람이었다. 허균은 일찍이 '남녀의 정욕은 본능이고, 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좇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고, 여행할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들의 이름을 그의 기행문에 버젓이 적어놓기도 하였다. 부안에 오기 전인 1599년 황해도사(종5품)로 있을 때만 해도 서울에서 창기들을 데려다 놀면서 물의를 일으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매창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정신적인 교감만 가진 것은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똑같은 인간으로서 대우를 하였고 더구나 매창의 시를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허균은 다음과 같이 매창을 보았다.
 
계생은 부안의 기생이라. 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 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허균은 이 해 12월 형조정랑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고, 이듬해에 병조정랑, 사복시정 등을 지냈으며, 1604년 수안 군수로 있던 중 파직당했다. 당시 수안의 악명 높은 토호 이방헌이란 자를 치죄하자 그의 아들이 황해 감사에 뇌물을 써서 감사가 허균을 추궁토록 했던 것이다. 1606년에 의홍위대호군(종3품 임시벼슬)이 되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이듬해 삼척부사에 부임하였으나 부처를 섬긴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또다시 파직당했다. 허균은 불경을 읽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떳떳하게 내세웠다. 다음은 파직의 소식을 듣고 쓴 시이다.

 

  오랫동안 불경을 읽어 온 것은
  내 마음 머물 곳 없었음이어라.
  여지껏 아내를 내버리지 못했거든
  고기를 금하기는 더욱 어려웠어라.
  내 분수 벼슬과는 이미 멀어졌으니
  파면장이 왔다고 내 어찌 근심할 건가.
  인생은 또한 천명에 따라 사는 것
  돌아가 부처 섬길 꿈이나 꾸리라.
               <문파관작(聞破官作)>

  

파직에 이어 허균은 홍문관 월과(月課)에서 아홉 번을 연이어 장원을 하였는데 이 덕으로 12월에 정3품 공주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를 아끼던 선조가 죽고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충청도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8월에 다시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었다. 성품이 경박하고 무절제하다는 죄였다. 파직당한 허균은 부안 우반동에 있는 정사암에 와서 쉬었다.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이 있고, 산 남쪽에 우반(愚磻)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그곳 출신인 부사 김청(金淸)이 그 중 아름다운 곳을 골라 암자를 짓고는 정사암(靜思菴)이라고 이름지었다. 늘그막에 즐기며 쉴 곳을 마련해 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왕명을 받고 호남을 다니며 정사암의 아름다운 경치는 실컷 들었지만, 여지껏 구경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평소부터 영화와 이욕을 즐기지 않았는지라 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올해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어 남쪽으로 돌아갈 뜻을 정하고, 장차 우반이란 곳에 묻혀 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사에 급제한 김공의 아들이 나에게 말했다. "저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정사암이 너무 외따로 있어, 제가 지키기 어렵습니다. 공께서 다시 수리하시고 지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기뻤다. 즉시 고달부와 이재영 등을 데리고, 말고삐를 가즈런히 하여 그곳에 가보았다. 포구에서 비스듬히 나있는 작은 길을 따라서 골짜기에 들어가자 시냇물이 구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풀덤불 속으로 쏟아졌다. 시내를 따라 몇 리 들어갔더니 산이 열리고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가파른 봉우리들이 마치 학이 나는 것처럼 치솟았고, 동쪽 등성이론 수많은 소나무와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었다.
              --중략--

시냇물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늙은 당나무를 지나서 정사암에 이르렀다. 암자는 겨우 네 칸 남짓 되었는데, 낭떠러지 바위 위에 지어졌다. 앞으로는 맑은 연못이 내려다 보였고, 세 봉우리가 우뚝 마주 서 있었다. 폭포가 푸른 바위벽 아래로 깊숙하게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가 뻗은 것 같았다.
             --하략--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

 

매창은 허균을 다시 만나 함께 노닐며 그의 영향을 받아 참선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12월에 정3품 승문원 판교의 교지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이 무렵 매창과 가깝게 지낸 사또가 있었는데 그가 떠난 후 고을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매창이 그를 그리며 비석 옆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山  )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두고 '매창이 눈물을 흘리며 허균을 원망했다'는 소문이 났다. 다음은 이 소식을 접한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이다. 

 

계랑에게
계랑이 달을 보면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새'의 노래를 불렀다니, 

어찌 그윽하고 한적한 곳에서 부르지 않고 

부윤의 비석 앞에서 불러 남들의 놀림거리가 되셨소. 

석 자 비석 앞에서 시를 더럽혔다니, 이는 낭의 잘못이오. 

그 놀림이 곧 나에게 돌아왔으니 정말 억울하외다.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지. 그리움이 몹시 사무칩니다. - 기유년(1609) 정월 허균


매창을 잊지 못하는 허균은 또 편지를 보냈다. 다음 편지에서 매창에 대해 연인이 아닌 진정한 친구로서의 우정을 간직한 허균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계랑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젠 진회해(秦淮海)를 아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언제라야 이 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으리까.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기유년(1609) 9월 허균

 

▲ 월명암에 올라서(登月明庵) ⓒ 2008 한국의산천 

 

築蘭若倚半空  하늘에 기대어 절간을 지었기에
一聲淸磬徹蒼穹  풍경소리 맑게 울려 하늘을 꿰뚫네
客心 若登도率  나그네 마음도 도솔천에나 올라온 듯
讀罷黃庭禮赤松「황정경」을 읽고나서 적송자를 뵈오리다.

 

 '월명암에 올라서(登月明庵)' 적송자는 신선의 이름으로 신농 때의 우사(雨師)다.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면 그곳에 서방정토가있다 하였는데 통일 신라 시대의 고승들도 이곳에 와서 더 이상 서쪽으로 갈 생각을 접어두고 이 곳에 서천법계를 열었던 것이다.

월명암
월명암은 변산면소재지(지서리)에서 5km정도 떨어진 변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쌍선봉(雙仙峰:498m)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주변경관이 수려하다. 월명암 뜰에 서면 변산의 수많은 봉우리를 발아래 깔고 있는 듯이 느껴지고, 암자 뒤 낙조대(落照臺)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점점이 늘어선 고군산군도의 뭍섬들이 아름답다. 


월명암은 본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호남의 명승(名僧)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가 중건하였다.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암자에선 허다한 고승들이 배출됐다. 한말 의병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1908년에 다시 불타고 말았다. 이후 학명선사에 의해 1914년 다시 세워졌으나 1950년 6.25사변 직전 여순반란군이 이곳에 잠입하여 싸우던 중 또 다시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 후 1954년 원경(圓鏡) 스님이 군내 각 기관의 협조를 얻어 다시 지었고, 1996년 중수를 하여 오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선가(禪家)에선 대둔산 태고암, 백양산 운문암과 함께 도인을 많이 키워낸 3대 성지로 손꼽힌다. 

 

지서리에서 출발하여 남여치 매표소쪽으로 들어간 다음에 관음약수터, 쌍선봉을 지나 낙조대에서 내변산의 경치를 구경한 후 들를 수 있다. 남여치매표소에서 약 1 시간 거리이다. (내소사 입구 전나무숲길에서 등산길로 접어들어 3시간정도 거리에 있다.)

변산8경에 있는 월명무애(月明霧靄)가 있는곳, 산정상에서 일출과 바다안개 그리고 밝은 달을 볼 수 있는게 특징이다. 이 절의 이름이 월명(月明)인 것도 그 일대에서 목격되는 달 뜨는 정경 또한 기막히기 때문이다. 

 

▲ 우등제와 선계폭포 ⓒ 2008 한국의산천

이매창과 허균의 애뜻한 사랑이 꽃폈던 선계폭포. 선계폭포는 평상시에는 물이 없다.비가 온뒤에 폭포가 나타나는곳이다. 

 

▲ 선계폭포. 우렁찬 폭포의 물소리와 물보라로 인하여 더이상 다가 갈수없었다  ⓒ 2008 한국의산천

 

변산반도의 시작은 부안이다. 그러나 변산여행마감은 월명암에 오르지 않고 변산을 말하지 말라. 변산반도에 가거들랑 성황산에 올라 변산주변을 둘러보고 찾기 쉽지않은 매창공원에 들러 막걸리 한잔이라도 부으며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짧은 생을 살다간 천재 시인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 부안. 선계폭포 내소사 반계 유형원선생 유적지 지도 ⓒ 2008 한국의산천 

▲ 부안 이매창 묘 주변지도 ⓒ 2008 한국의산천 

나는 또 다시 변산으로의 답사를 준비한다.  나그네는 그저 못다 이룬 사랑의 기억만을 가지고 가라.